지난 연말에서 연초에 걸쳐 자본주의 이후를 아홉 차례 연재했습니다. 문명사 공부를 통해 얻은 생각 중 현실정치에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을 정리해 달라는 새정치민주연합 홍익표 의원실의 부탁과 지원에 의해 진행한 작업의 성과였습니다. 몇 가지 새로운 시각의 도입을 반겨주는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내놓은 생각을 더욱 넓히고 다지는 작업을 금년 중 <프레시안북스>를 통해 진행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제 공부는 범위의 확장에만 치중해 왔기 때문에 치밀한 담론을 완성하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에 관한 생각도 목적의식을 갖고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덤불을 헤치며 생각 넓히는 길을 찾다 보니 우연히 마주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막상 한 차례 정리해 놓고 보니 비슷한 생각을 국내외에서 발표해 온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저와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런 생각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가지 길을 통해 비슷한 생각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생각이 사회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을 만한 잠재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생각에 이른 여러 경로를 두루 점검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하나의 비전을 위한 발판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든 것입니다.

생각의 초점은 자본주의체제의 한계대안으로서 동아시아 전통의 가치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명제에 관한 주장을 담은 책들을 소개하는 형태로 작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저 자신 생각의 근거를 확충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이 미래를 향한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원서 When China Rules the World 2009년에 나왔다. 서론 격인 제1다시 헤게모니가 이동한다3개 절 제목 흔들리는 미국의 위상”, “서구의 근대 독점은 끝났다”, “중국의 부상은 다르다에서부터 저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서양의 세계 지배를 최근 수십 년간 대표해 온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으며, 앞으로 중국의 역할이 크리라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그리 치밀하지 않은 책이다. 참고문헌 목록에 5백여 건 문헌이 실려 있는데, 주석은 책 전체에 40여 개뿐이다. 주석 형태가 아닌 인용도 본문 중에 꽤 있지만, 각 참고문헌의 중요성을 알아보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영문 외의 참고문헌이 거의 없고, 그 때문이겠지만 중국문명에 관한 서술에서 피상적인 느낌이 드는 곳이 많다.

그래도 소개할 가치가 크다고 본 것은 미국의 몰락과 중국의 굴기란 명제를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2년 앞서(2007) 죠바니 아리기(1937-2009)<베이징의 애덤 스미스>(Adam Smith in Beijing, 강진아 옮김, 길 펴냄, 2009)에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명제다. 아리기는 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개발하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 전망을 밝혀온 사회학자로, 미국 헤게모니 이후 중국의 역할에 대한 전망을 내놓은 이 책은 앞서 낸 <장기 20세기>(The Long 20th Century(1994), 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 2014)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Chaos and Governance in the Modern World System(1999), 최흥주 옮김, 모티브북 펴냄, 2008)와 함께 그의 3부작으로 꼽힌다.

공교롭게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가 나온 이듬해에 뉴욕 발 금융공황이 터지고 중국이 확보해 놓은 탄탄한 경제력이 부각되면서 이 책이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강진아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옮긴이 해제”(569)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과 서구는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 예견되는 국제 역관계의 재편, 근대 문명이 맞닥뜨린 생태적 위기에 적절한 해답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구하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리기의 주장은 과격하지만 개연성 있는 돌파구를 제시한 듯하다. 더구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가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신호가 바로 과도한 금융화로 인한 금융위기라는 아리기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미국 출판시장을 폭격했다. 아리기가 위기를 단언하며 이 책을 출간한 것은 금융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아직은 미국 경제가 거품으로 호황을 구가하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유사한 주장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096월 출간되어 영어권 출판계를 강타한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날>은 마치 이 책의 읽기 쉬운 보급판 같다. (...) 모두가 중국의 패권은 이루어져도 세계 평화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새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문명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당당히 주장했던 아리기. 너무 어렵게 썼기 때문에 이 책은 지식인들 위주로 읽혔지만 결국 출판계의 흐름마저 바꾸었다.

 

중국에 대한 아리기의 관심은 만년에 이르러서야 심화되었다. “너무 어렵게 썼다고 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태도 때문이다. 아리기의 연구 본령은 세계체제론이고, 중국에 대한 관심은 곁가지였다. 미국 헤게모니 이후 중국의 역할에 대해 아리기는 가능성 차원에서 조심스럽게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 것이다.

그에 비해 마틴 자크는 2008년의 금융공황이 많은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는 전제 아래 중국의 미래 역할에 대해 훨씬 강한 믿음을 갖고 서술에 임했다. 중국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에서 아리기가 최소주의(minimalism)라면 자크는 최대주의(maximalism)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리기의 책에 앞서 자크의 책을 훑어보는 것이 주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리기처럼 좌고우면하지 않는 자크의 책은 주제를 명쾌하게 내놓고 지금의 상황을 세밀히 설명하는 저널리즘 측면에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세 가지 기본 명제

 

1장에서 제기한 세 가지 명제부터 검토해본다. 저자는 제일 먼저 흔들리는 미국의 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군사력과 정치력은 경제력에 달려 있다.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지적했듯이, 국가가 세계적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유지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는 생산 능력에 달려 있다. (...) 결국 경제력은 냉혹한 척도가 된다. 하지만 점점 쇠퇴해 가는 제국주의 권력은 항상 이러한 사실을 부정한다. 1918년 이후 영국이 그랬다. 상황을 잘못 읽고 미국이 새로운 세기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부시 행정부의 행동으로 보건대 미국 역시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사실 쇠퇴하고 있으며 그 위상도 추락하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던 많은 이들에게 뒤늦게나마 미국이 결국 쇠락의 길을 가게 될 것임을 보여 주었다. (17-18)

 

세계체제론에서는 기존 헤게모니 국가가 쇠퇴할 때 일반적인 대응책으로 군사력과 금융 부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꼽는다. 이 견해의 의미와 타당성에 대해서는 아리기와 월러스틴 등의 책을 소개할 때 면밀히 살펴보겠다. ‘헤게모니역시 세계체제의 핵심 요소로서 흔히 말하는 패권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 역시 나중으로 미룬다. 저자도 세계체제론에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개략적인 인용에 그치고 있다. 그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 전체의 30%가 넘던 미국 GDP20% 전후까지 떨어질 만큼 생산력이 떨어졌는데도 군사비는 다른 모든 국가를 합친 것과 비슷한 거액을 계속해서 지출하고 있는 상황을 놓고 미국의 어두운 미래를 읽는다.

저자는 이어 서구의 근대 독점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클 때는 선진국이 절대적 모델로 인식되었지만, 격차가 줄어드는 데 따라 각 지역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따른 차이가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쟁 원리와 시장 원리, 기술 개발을 받아들여 높은 빌딩을 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휴대 전화를 사용하고 있다. 이제 세계는 점점 동질성을 갖추는 모습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발도상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기반한 가계, 정부, 기업의 제도는 이와 같은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개발도상국들이 경제 성장을 달성할수록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서구 사회를 모방하려는 경향도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세계화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미국이 독주 체제를 구축하면서 국제 무역 회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나 최후의 승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많은 수혜를 입었다. 결국 세계화의 과정은 서구의 주도로 전 세계가 동질화하는 수렴 작용과 각 지역을 기반으로 토착화하는 발산 작용 간의 끝없는 긴장 상황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21)

 

유럽식 근대화 외의 다른 방식 근대화의 가능성은 여러 연구자들이 제기한 것인데, 자크의 시각은 이 가능성의 의미를 강화시켜 준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는 데 따라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거니와, 문화적 자산이 풍성한 동아시아 사회들, 특히 중국이 독자적 원리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이 유럽 모델에 만족할 수 없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유럽 모델을 추구하는 사회들은 선진국 따라잡기(catch-up)’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점하는 중국이 선진국의 에너지 소비 수준에 접근해 간다면? 기존 모델로는 자원과 환경 문제의 파국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다. 중국은 강대국이 되더라도 강대국 노릇을 오래 하려면 새로운 형태의 강대국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명제 중국의 부상(浮上)은 다르다에서 저자는 유럽중심주의가 무너진 후 중국이 세계 질서의 중심적 역할을 맡을 전망의 기초를 세운다. 네 가지 지표를 내세운다. (1) 국민국가 아닌 문명국가로서의 오랜 전통. (2) 문명의 화합력에 근거한 포용적 민족정체성. (3) 독특한 국제질서로서의 조공 제도. (4) 국가의 단일성. (27-29)

18세기 말 서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는 19세기를 통해 중부유럽을 거쳐 동부유럽으로,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과 일본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 여러 사회에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공하는 나라들의 부상이 이어졌고 중국의 부상도 그 뒤를 잇는 것으로 통상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들의 부상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중국 전통의 새로운 음미

 

유럽중심주의의 한계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에 관해서는 세계체제론을 다룬 여러 책에서 살펴볼 것이고, 이 책에서는 중국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본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경제 측면에 중점을 둔다. 우선, 18세기 이전 유럽의 경제력이 중국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우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재닛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Before European Hegemony(1989), 이은정 옮김, 까치글방 펴냄, 2006)과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Reorient(1998), 이희재 옮김, 이산 펴냄, 2003) 등의 책으로 국내의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주장이다.

 

여러모로 볼 때, 1800년의 중국 경제는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활력이 넘쳤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 사회는 경쟁력이 있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혁신을 추진하는 능력이 있었고 상인들도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었다. 이러한 장점은 중국의 역사적 시련기에는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있다가 1978년 이후에 다시 전면에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과도 관련이 있다. 1800년 세계 경제의 중심은 유럽에만 있지 않았고, 오히려 유럽과 아시아, 북미와 중남미가 세계 경제의 축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과 인도가 가장 큰 경제대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 경제는 과거처럼 다시 다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47)

 

중국의 국가체제와 경제체제가 일찍부터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중국은 예수가 탄생할 때 이미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104) 농산물의 장거리 무역 비중에서 중국 시장이 일찍 발달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40) 중국은 중세 유럽과 같은 긴 봉건 시대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농민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과 상업의 이른 발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경제권력이 확대되지 않은 것이 근대화의 과제 앞에서 유럽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차이점이었다.

 

중국은 시장과 교역의 발달에 제약을 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농수산물 시장 경제가 발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지원했지만, 소금과 해외 무역 독점권을 가진 상인들이 출현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산업의 출현 가능성에 열띤 반응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지역 간의 경쟁이 불안정을 낳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유럽에서는 국민국가들 간에 경쟁이 벌어졌다. 중국과 서유럽 국가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게 있게 된 것은, 서유럽에서는 떠오르는 상인 계급이 실질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단체를 구성한 반면, 중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상태로 지금까지 흘러왔기 때문이다. 중국 상인들은 독립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정부의 후원 하에 대규모 상행위를 보장받는 데 만족했다. (45-46)

 

중국에서는 경제권력만이 아니라 일체의 민간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중앙집권적 전통이 진 시황 때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근대 유럽의 국민국가가 경쟁의 주체였던 것과 달리 중국의 국가는 질서의 주체였기 때문에 국가와 인민 사이 중간권력의 발전을 억제했던 것이다. 국가 성격의 이 차이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엘리트 집단이 국가와 직접 경쟁을 벌인 일이 없었다는 점도 중국과 유럽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10세기 중반 봉건 귀족 집단이 해체된 이후 중국에서는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을 누리는 집단이 등장하지 못했다. 뒤이어 등장한 중국의 관료 집단은 강력한 권력과 특권을 누렸으며, 그러한 권력과 특권의 범위는 국가가 임명하는 지위에 따라 정해졌다. (...) 유럽의 지배 엘리트가 전쟁과 같은 천재지변이 없는 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중국의 관료 집단은 국가에 의해 충원되어 국가의 일부가 되었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받았다. (115-116)

 

유교사상으로 체계화된 중국의 국가론이 1949년 이후의 공산중국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맹자는 국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백성은 반란을 일으킬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이러한 원칙을 천명으로 이해했으며, 공산당 치하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명분하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인식되었다. (...) 중국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권위주의 혹은 위계질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정치권력과 공식적인 대의기구에 바탕을 둔 서구의 전통과 비교할 때 매우 이질적이다. (...) 이러한 통치를 위해 유교 사회에서는 과거 시험으로써 유능한 관료를 선발했지만 공산당은 필요한 인재를 당이 모집했다. 마지막으로 유교 전통이 유지되었던 사회와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독립적인 권력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부속물로 생각했다. (132-133)

 

중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서방의 비판은 투철한 대의민주제도가 아니라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비서방국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도입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 앞에서 중국의 성공적 국가 운영이 계속된다면 중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여지가 있다. 유럽중심주의의 퇴조에 따라 근대적가치관에서 배제되었던 각 지역의 문명전통이 부각되는 가운데 중국의 풍부한 전통이 새로 음미될 요점의 하나다.

중국의 전통에서 또 하나 저자가 중시하는 것은 조공제도다. 서방 헤게모니 쇠퇴 후의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에 조공제도가 어느 정도 모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조공제도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제도라기보다는 문화적, 도덕적 제도였다. 황제는 주변 국가에 강제력을 동원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상징적인 지배권은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이처럼 강제성이 떨어지는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양하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인구를 지배할 수 있었다. (360)

 

무엇보다도 조공제도는 중국의 지배적 지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불평등관계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 국가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중국이 힘을 잃게 되자 유럽 중심의 베스트팔렌 체제가 식민지 제도를 앞세워 동아시아로 들어왔다. (361)

 

중국의 경제 규모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크고 강력하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 국가들과도 현저한 불평등관계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밖의 국가들도 중국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 주로 자연 자원을 생산하는 개발도상국들이 (...) 중국과 이러한 국가들 사이에 새로 정립될 관계를 기존의 서구와 이러한 국가들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중국과 서구의 차이점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 상황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규모부터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관계는 식민지주의나 신식민지주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조공제도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496-497)

 

불평등관계가 국가의 내부관계와 외부관계를 관통하는 유교적 원리였던 것이다. 효과적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국가 구성원들의 권리와 책임을 세밀히 규정하는 신분체계가 필요했다. 주변 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위해서도 강약과 대소에 따라 각자의 위상을 규정하는 조공체제가 효과적이었다.

만인평등의 민주주의와 만국평등의 만국공법 체제(베스트팔렌 체제)는 명목상의 평등을 내세워 약자 보호의 필요를 부정하고 강자의 전횡을 정당화함으로써 현실의 불평등을 오히려 심화시키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부분적 일탈로 볼 수 있을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평등의 원리가 일찍부터 강자에게 이용되어 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사람들에게 평등주장이 낯설게 들린 것처럼 지금은 불평등주장이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중국이 11표의 대의민주주의 없이도 국민을 대충 만족시키면서 발전을 계속하고 약소국을 상대로 종래의 강대국보다 만족스러운 관계를 넓혀나가는 데 따라 평등이 밥 먹여주나?” 하는 생각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수렴 끝, 발산 시작!

 

마틴 자크는 세계화의 과정을 전 세계가 동질화하는 수렴 작용과 각 지역을 기반으로 토착화하는 발산 작용 간의 끝없는 긴장 상황으로 본다. 중국이 1860년대 양무(洋務)운동 이래 20세기 말까지 서양을 모델로 산업화-근대화에 매진해 온 것은 수렴작용이고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발산단계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는 본다.

 

지금까지 중국은 인내심을 가진 아웃사이더로서 인사이더가 되기 위해 충실히 노력해 왔다. 중국은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으로서 기존의 국제적 규범을 따라야 했으며 특히 현재 초강대국인 미국의 입장을 존중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 선진국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며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주식 시장과 자본 시장의 원리를 이해하며 최신 기술을 받아들이는 등 근대를 향한 발걸음에도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앞에서 설명한 정치적인 요구와 마찬가지로 세계화를 향한 경제적, 기술적 요구에 따라 기존 국제 기준에 맞추고 규범을 따르기 위해 끊임없이 모방하고 수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수렴 현상은 전체 그림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해, 수렴하는 힘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발산하는 힘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중국은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선진국과 국제 사회가 준수하는 관습에 순응하지 않고 있다. 국민국가의 옷을 입은 문명국가 중국은 내재된 본성과 정체성을 점점 더 드러낼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에서는 과거의 조공 제도가 현대적인 형태로 부활된 체제가 현재의 베스트팔렌 체제를 서서히 대체할 것이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은 이미 세계 경제의 움직임과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567-568)

 

중국이 수렴에서 발산으로 돌아서는 자세를 대표하는 말이 굴기(崛起)’. 200310월 원로학자 정비젠화평굴기란 말을 쓰고 두 달 후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주석이 공식석상에서 이 말을 씀에 따라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중국 지도부는 화평굴기란 말을 더 쓰지 않고 화평발전이란 말을 대신 쓰기 시작했다. ‘굴기’(rising)는 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국제적 권력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개념인 데 반해 발전’(development)은 단순히 중국의 위치가 상승한다는 뜻이다. 당과 정부에서 굳이 굴기란 말을 삼가는 것은 외부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한 뜻으로 이해된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중국의 인상은 중후장대(重厚長大)’. 큰 중력을 가진 사회이기 때문에 외부에 대한 흡인력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천하체제를 이끌어온 긴 역사가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이 이끌어온 세계체제에 비해 더 안정성 있는 체제가 중국을 중심으로 서서히 형성되어 갈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보인다.

위 인용문 중에 동아시아 지역의 조공제도 부활의 전망이 들어 있다. 중력의 작용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물리학의 제곱 반비례 법칙(inverse square law)’으로 본다면 중국의 영향력이 가까운 지역에 특히 크게 미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중국이 이끌 세계체제는 만국평등의 베스트팔렌 체제가 아니라 과거의 천하체제 같은 불평등 관계가 동아시아 지역에서부터 퍼져나갈 것으로 내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말하는 동아시아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일본, 타이완 등 미국의 입김이 강하고 중국에 대한 경쟁심을 가진 동북아시아보다 동남아시아의 아세안(ASEAN) 국가들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변화에 앞장서고 있는 사실을 저자는 중시한다.

 

아세안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개편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 바람직한 행동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동북아시아 국가에 비해 훨씬 가난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분열된 모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세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1990년대 중반에 미국은 APEC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먼 추억이 되었다. 중국의 제안으로 2000년 합의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조성할 때도 미국이 배제되는 현상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

동아시아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 아세안이 도화지를 제공했다고 한다면, 실제 그림을 그린 것은 중국의 외교력이었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리더로 부상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중국의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변화를 이끌고 질서를 재편하는 진짜 원동력이었다. 정치 논리에 따라 경제 통합이 진행되는 유럽 연합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경제가 변화를 이끌어 내고 정치는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368-369)

 

2002년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신뢰가 크게 늘어났다. 1997-1998년과 같은 경제위기가 닥칠 때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물론이고, 중국의 산업-경제 정책에 주변국에 대한 배려가 있을 것을 믿게 되었다. 조약의 규정을 넘어서는 신뢰 덕분에 호혜적 협력관계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366-367)

한국은 일본에 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잘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는 바로 수긍되지 않는 점도 있지만,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부터의 시각이 장기적 추세를 더 잘 보여주는 면도 있다고 생각되어 옮겨놓는다.

 

한국이 북한과 중국에 대해 가지는 입장과 미국에 대해 가지는 입장은 한국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다. 한국은 과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화해를 강조하고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는 완고한 입장을 취하고 미국과 가까워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 그러나 장기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더욱 가까워지고 미국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어쩌면 한미 동맹이 사라질 정도로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향후 10년 이내에 일어나기 어려우며, 아마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380)

 

저자는 중국의 헤게모니 획득을 필연의 일로 보지만, 그것이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될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전망이 적중할지는 짧은 시간 내에 확인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진행되고 있는 변화는 그가 가리킨 방향에 부합하고, 이 책이 나온 후 5년 동안 그 추세는 더욱 분명해졌다. 당장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새로운 전망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 전망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조건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지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근대적가치관에 길들어 있고, 학문 연구방법도 그런 가치관에 얽매여 있다. 저자는 우리가 미국과 유럽 역사의 중요한 사실을 상식으로 갖고 있으면서 더 중요한 중국사의 사건들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역사가 유럽이 제공한 설명과 개념으로 서술되었다면 다음 세기에는 중국이 비슷한 역할을 할 것이다. 즉 세계사는 중국이 제공하는 완전히 다른 설명과 개념에 의해 서술될 것이다. 분열이 아닌 통합, 국민국가가 아닌 문명국가, 베스트팔렌 체제가 아닌 조공 제도, 중국인들의 독특한 인종관, 진보와 보수 간이 아니라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 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 등의 개념이 담길 것이다. 진이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며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기원전 221년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이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연도가 될 것이다. (489)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 전망의 타당성을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고, 좋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성과는 전 세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증대라는 이 전망이 함축하는 의미를 넓고 깊게 밝혀낸 데 있다. 이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의(예컨대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헤게모니 이동과 차원이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아리기도 지적했지만, 저자는 변화의 의미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을 예시했다.

끝으로 안세민의 훌륭한 번역을 치하한다. 넓은 범위의 전문성을 담은 책의 번역에서 용어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인데 아주 잘 해냈다. 두어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이 기억에 남아있지만(‘유럽서구라고 한 곳이나 식민지배라 하면 좋을 것을 식민지주의로 옮긴 정도) 읽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역자가 옮긴 다른 책도 구해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어떤 책이지?

 

 

Posted by 문천

 

광복은 아직도 우리의 과제

 

 

한반도 남반부에 국가가 존재하는가?

 

아무리 훌륭한 국가도 완벽할 수는 없다.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모자라는 점도 있고 지나치는 점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20144월 이후 대한민국이 보여준 국가 기능의 총체적 실종 앞에서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014416일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을 위한 노력이라도 기울인다면 변변찮은 대로 국가가 존재는 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는 진상규명 등 국가의 역할 수행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적으로 대했다. 대통령은 면담을 거부했고, 여당 인사들이 유가족을 모욕하는 언사를 내뱉었고, 경찰 등 행정기관은 유가족의 단식을 조롱하는 극우세력을 방치하거나 감쌌다. 반년 넘어 지나 겨우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는 정부-여당의 사보타주로 작동이 어렵다.

상징적인 문제가 당일 박근혜의 행방이다. 국가의 역할이 절박하게 요청되던 7시간(근무시간 포함) 동안 행정부의 수장이요 국가원수라는 자가 어디서 뭘 하고 자빠졌는지 깜깜하니 온갖 기괴한 소문이 나돌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 소문의 존재를 보도한 일본인 기자에게 죄를 묻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청와대 안에 있었다는 주장 외에 아무것도 밝히지를 않고 있으니, 뭔가 밝히지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달라는 이야기 아닌가.

현대세계의 국가 중에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국가가 없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피해를 더 늘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해주고 싶어도 후속조치라는 것을 보면 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걱정을 억누를 수 없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국가 자격을 의심할 만한 일 또 하나를 국가기관이 터뜨렸다. 이건 우연한 사고로 볼 여지도 없이 그냥 저지른 짓이다. ‘통진당 해산까지는 따지지 않겠다. 설령 해산 판결이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통진당 소속 의원들 배지를 떼겠다고 어떻게 사법부가 나설 수 있나? 의원 자격 박탈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소속 의회에 권유를 할 일이지, 어떻게 헌법재판소가 손수 배지를 떼러 나설 수가 있나? 8인의 재판관은 ‘3권 분립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란 말인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들고 나왔을 때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는가?” 따진 일이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7701 지금 생각하면 이완용에게 미안하다. 이완용은 고종이 맡겨놓은 총리대신으로서의 권한을 팔아먹은 것이지만 8인의 헌법재판관은 누가 맡겨주지도 않은 권한을 팔아먹었으니 훨씬 더 질 나쁜 범죄자들이다. 이완용이 국가절도범이라면 이것들은 국가파괴범이다.

국가의 파괴란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 일인가? 권력의 사유화가 문제다. 국가권력이 공변된 성격을 지키더라도 현실조건 때문에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공변된 성격을 아예 포기한다면?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말기 권력의 사유화 현상이 국가 기능의 저하를 불러온 끝에 망국 중에도 아주 추잡한 꼴의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어봤다. 1910년의 한일합방 설명으로 그 작업을 끝낼 때, 망국 이야기를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35년 후의 광복(光復)’을 맞고도 한국인은 국가를 되찾지 못했다. 3년 후 건국(建國)’을 했지만 온전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19458월부터 19488월까지 이른바 해방공간을 세밀히 살펴보는 해방일기작업을 했다. 그 성과가 이제 책으로 완간되는 시점에 이르러, 한국인이 지금 이 시점까지도 온전한 국가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확인한다.

 

 

국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국가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아무리 국가주의가 싫더라도 내 국가를 아끼는 생각은 버려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족의 전통이 빈약한 유럽인들은 민족과 국가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둘 다 ‘nation’이란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반면 한국처럼 민족 전통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그 차이가 분명하다. 20세기 전반기의 참극을 겪은 유럽에서는 ‘nationalism’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치열한데, 그 대상은 엄밀히 따져볼 때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다.

선진국의 사조라 하여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거름통 지고 장에 가는 격이다. 번역을 잘못해서 국가주의의 잘못을 애꿎은 민족주의에 덮어씌우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거니와, 국가주의의 반성도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국가의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원래의 임무를 등지는 짓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이 원래 나쁜 것이니까 국가의 역할을 무조건 축소해야 한다는 것은 국제자본의 전횡을 도와주는 매판세력의 상투적 주장이다.

문명세계에는 제도화된 질서가 필요하다. 문명 발생 이전, 지구상에 인류의 개체수가 5백만이 되지 않을 때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문제라도 개별적으로 처리하면 됐지, 굳이 제도적 질서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다.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제도적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제도적 질서를 공유하는 사회의 규모가 커져 어느 단계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제도적 질서를 통해서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관계를 가지는 상태에 이른다. 이것을 국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규모는 계속 커지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구성원을 품고 있으면서 외부적으로는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가지는 기본 구조는 지금까지 그대로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의 외부 관계가 몇 개 인접국에 제한되어 있고 교류의 분량이 적었기 때문에 내부적 기능이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내부적 기능의 핵심이 질서 유지에 있었고 폭력의 억제가 국가의 기본 역할이었다. 국가제도가 일찍 발달한 중국에서 왕토(王土)’의 이념으로 토지소유권을 제한한 것은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 것과 같은 뜻이었다. 무력(武力)과 함께 재력(財力)이 또한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국가의 질서 유지 기능은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세워주는(抑强扶弱)” 원리에 따른다. 도덕적으로 고매한 원리라서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질서가 유지된다. 강자의 전횡을 방치하고 정글의 법칙에 맡기면 약자가 설 땅을 잃고 극한적 저항으로 나오기 때문에 질서 유지가 불가능하게 된다.

강자의 입장에서도 거시적-장기적으로 질서 유지가 필요하다. 사회가 지속가능성을 가져야 자신의 유리한 입장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의 욕심을 참고 국가질서에 순응할 동기를 가진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관료제는 강자에게 제한된 범위의 특권을 국가가 부여하는 대신 독자적 권력 행사를 가로막는 제도였다.

그러나 국가질서에 신뢰를 가질 수 없을 때는 자신의 힘밖에 믿을 데가 없다는 전제 아래 생존을 위한 각개약진으로 나서게 된다. 강자들이 절제 없는 경쟁을 벌이면 약자들이 견딜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사회구조가 붕괴되면 강자들도 피해를 면할 수 없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국가에 대한 구성원들의 믿음이 매우 약하다. 전에는 정치인의 선의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국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있었다. 독재정치에 시달리면서도 국가의 운영권을 원래의 주인인 국민이 되찾기만 하면 국가가 국가 역할을 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87년의 민주화이후에도 다수 국민이 집권세력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국가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 정치혐오증 확산의 이유다.

어느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솔직한 말씀이긴 한데,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시장이 아니라 재벌에게 넘어간 것이다. ‘재벌로 지칭되는 자들이 그 이름을 몹시 싫어하지만,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다. 무력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 권력이 되는 것을 군벌이라 하는 것처럼, 재력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바로 재벌아닌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기능이 온전치 못하다. 안으로는 국민을 재벌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하고(법인세를 놓고 성역운운 하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가!), 밖으로는 미국에 종속되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족문제에 관한 정책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나는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작업으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밖으로는 외세의존성, 안으로는 무정부상태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의 지나친 힘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 1948년 정부 수립부터 1987년까지 경찰-군사독재 기간에 집권세력은 독점한 폭력을 절제 없이 휘둘렀고, 그 폭력의 형태는 물리적 폭력, 즉 무력(武力)이었다. 그 폭력에는 재력(財力)의 주체인 재벌조차 대항하지 못했다. 정권의 미움을 받아 무너진 재벌도 있고 재산을 빼앗긴 재벌도 있다.

사회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1987년까지 민주화에 쏠린 것은 그런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민주화의 의미는 물리적 폭력의 통제, 문민의 원리에 집중되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억울한 죽음이 상상 밖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서 물리적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987년에 한국사회는 문민의 원리를 확보했다. 국가의 물리적 폭력이 정상적인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의 의식이 물리적 폭력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덜 물리적인 폭력, 즉 재력에 대한 통제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총칼의 힘을 대신해 돈의 힘이 정부에 대한 장악력을 지금까지 키워왔고, 이제 그 장악력을 발판으로 물리적 폭력까지 다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단계에 와 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정권은 새누리당(민정당 이래)과 민주당을 두 축으로 운용되어 왔다. 비교적 민권을 중시한다는 민주당이 10년간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을 때도 재벌의 경제권력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두 당이 경쟁적으로 경제 민주화를 외친 것은 그 폐단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구호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고, 민주당의 진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제권력의 통제를 진심으로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정권에 접근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내놓고 대변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1년 되었을 때 일어난 용산 참사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이 정상적 수준을 다시 벗어나는 신호탄이었다. 유시민이 <국가란 무엇인가>를 쓴 것은 이 사태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는데, 그는 바람직한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로 생각한다고 서문에 썼다.

2011년 봄 이 책이 나왔을 때는 이런 말을 대단히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해방일기> 작업을 진행하면서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좋은 국가를 생각하기 전에 최소한의 국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1910년에 한반도에서 국가가 사라졌다. 통치기구로서 정부는 총독부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통치의 목적이 주민 아닌 외세의 이익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국가가 회복될 조건 일부가 이뤄졌지만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1948년 만들어진 두 개의 정부가 모두 국가의 회복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1948년 이후 두 개 정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국가 비슷한 조직 두 개가 한반도에 존재하게 되었다. 북한 사정은 내가 잘 모르거니와, 내가 살아온 남한은 정부 수립 당시부터 갖고 있던 국가로서의 결함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함이 밖으로는 외세의존성으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무정부상태로 나타난다. 두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며 식민지 시절에 빚어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미국이나 (한국 출신을 포함한) 국제자본의 총독부 역할에 그치게 하려는 세력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뒤얽혀 맞서는 상태에 있다.

정의를 세우는 국가, 시민을 보호하는 국가,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쉽지, 꾸준한 노력과 많은 의논이 필요한 일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분명한, 더 기본적인 응급조치다. 우리 정부가 총독부 아닌 주권국가 정부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론에 맞춰 본다면 국가의 성격을 정량적으로 조절하는 정상상태가 아니라 국가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패러다임전환기에 우리가 서있다고 나는 본다.

 

 

내 탓이오!” 외치기 전에 생각할 것들

 

어렸을 때(1950-60년대) 많이 듣던 엽전은 안 돼!”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식민지시대 일본인이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과 조선인을 비하한 관념이 내면화되어 해방 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은 일본인이 물러간 뒤에도 분단과 전쟁, 독재의 참혹한 상황이 이어진 때문이었다.

고통과 치욕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놓고 내인(內因)론과 외인(外因)론이 엇갈린다. 개인이든 사회든 어떤 일에나 내인과 외인은 어울려 작용한다. 개인의 일을 놓고는 내 잘못을 중시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태도일 뿐 아니라 문제 극복에도 효과적인 길이 되기 쉽다. 그러나 한 사회를 놓고는 도덕성보다 현실 조건의 정확한 파악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의 행태를 내부 원인으로 보아 엽전은 안 돼!” 하는 생각에 보태서는 안 된다. 을사5적이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의 전형도 아니었다. 고종의 권력 독점욕과 일본의 압력이 어울려 빚어낸 괴물 내각이었다. 그런 소인배는 어느 사회에나 상당수 있게 마련인데, 그런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한 상황이 문제지, 5인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내부 원인을 따지자면 임금 노릇이 뭔지도 모르는 고종 같은 자가 임금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건데, 그것은 문제가 된 장면에 국한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을사5적이 아니라도 조선의 식민지화는 진행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서세동점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을사5적의 행태를 권장해서 친일파를 크게 육성했고, 그 세력이 해방 후에도 외세를 받들어 민족국가 수립을 가로막고 나섰다. 국가권력을 그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그 역할이 커 보이지만, 그들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서세동점 상황 속에 식민지체제가 냉전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외세에 붙어먹은 기생충이었다. 그들의 잘못을 놓고 일반 한국인이 내 탓이오!” 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반성을 한다면 보통사람들의 행적을 되돌아봐야 한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을 거부한 김구의 오류는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좌우합작을 통해 10년의 신탁통치를 감수하고 온전한 독립에 이른 것을 보면 신탁통치 반대를 빌미로 좌우합작을 거부한 것은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김구의 오류로 인해 민족주의세력이 제 몫을 못한 것은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있었다. 해방공간의 민족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 수준의 좌우합작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민족국가 건설의 길이 오스트리아처럼 순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에는 갈등의 확대에 대한 주변의 억지력이 있었던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국공내전이 주변의 갈등을 부추기는 형세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초래한 제국주의체제와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냉전체제의 공통분모는 서세동점 현상이다. 일본의 침략정책도 서세동점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미국의 패권정책도 서세동점의 세계체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해석이 근년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남한의 경제 발전도 이 세계체제 전개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굴기 앞에서 서세동점의 형세가 끝나고 있다는 시각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발전만이 아니라 서세동점의 동력이었던 자본주의체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견해도 1970년대부터 세계체제론의 형태로 확장되어 왔다. 이 시각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가 근 2세기 만에 큰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며, 한민족의 주권에 대한 외부의 억압이 백여 년 만에 크게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망국과 분단의 조건이 해소되고 있다.

 

<해방일기> 집필을 끝낼 무렵 나는 이 전환기의 인식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재 완료 기념 대담에서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란 제목으로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한 내 관점을 발표했던 것이다.(10권에 수록되었다.) 19세기 중엽 이래의 서세동점 현상이 끝나고 있으며, 근대적 관념들로부터 풀려난 새로운 생각의 방향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 그 발표의 골자였다.

최근 자본주의 이후란 제목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에 대비할 필요를 논하고 있는 것은 이 문명사 관점의 연장선 위에서 이 사회의 당면 과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이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가치관의 혼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보의 이름이다. 근대사상의 진보주의와 관계없이, 이 사회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에 진보의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바꾸는 것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이 보수를 표방하기 때문에 그에 대칭되는 이름을 내걸게 된 것인데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하는 사람 중에 진짜 진보주의자는 많지 않다. 내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진보의 믿음이 인간의 근대적 오만에서 나온 것으로 보며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7년간 그런 입장을 꾸준히 밝혀 왔는데도 나를 진보진영으로 보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이름이 발라야 말이 통하고 말이 통해야 일이 이뤄진다(名不正 言不順 言不順 事不成)”는 공자 말씀을 생각한다. 청와대를 놓고 불통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름을 거짓되게 하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결과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슷한 문제가 진보 진영에도 있다. 진보 진영의 집권 10년 동안 일어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진보의 바르지 못한 이름에 얽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잘못된 문제가 많이 있다. 그 문제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사람들이 진보진영으로 지칭되어 왔다. 그런데 그 문제들이 정상적 국가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수준의 문제들이고 그 문제들을 극복함으로써 더 나은 체제를 새로 만들자는 입장이면 진보가 맞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정상적 국가의 기준을 형편없이 벗어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나라를 일단 만들고 봐야겠다는 보수주의자들도 진보진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개혁적 보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우선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어놓아야 더 좋은 세상을 빚어 갈 발판이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의 조선 사회의 과제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고, ‘최소한의 민족국가를 추구한 중간파의 입장이 이 과제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파의 노력은 외세를 등에 업은 매판세력의 무력과 재력 앞에 좌절되고 말았다.

지금 이 사회에서 전환기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간파 선인들이 좋은 뜻을 갖고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절대적 이유가 불리한 국제정세에 있었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 외에는 망국을 겪던 시절의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정세를 무릅쓰고 민족국가를 성취한 예로 베트남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민이 겪은 30년 전쟁의 고통을 생각하면 꼭 부러워할 일만도 아니다.

국제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나 냉전 종식과도 차원이 다른 심대한 변화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형세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망국과 분단을 강요한 국제정세가 근 2백 년 만에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에도 근대적 가치관의 안경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안경 때문에 우리가 본질적 의미가 없는 가치에 얽매여 불필요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정작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기도 한다. 이 안경에 현혹되지 않고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절대화하는 관점을 우선 억제해야 할 것이다.

국가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대상이다. 한민족이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생존과 번영의 틀로 삼아온 경험은 서양인들과 다른 것이다. 서양인들에 비해 우리에게는 민족과 국가가 정체성의 발판으로, 사회 운용의 기본 제도로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민족과 국가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 세계화라야 진정한 세계화가 될 것으로 나는 본다. 그래서 국가의 회복이 아직도 이 사회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

 

2000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미국도 한국도 민주당 정권이었다. 한국의 한나라당과 미국의 공화당에 비해 양쪽 다 북한에 대해 포용적 정책기조를 가진 정권이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한 것이었고,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의 대북정책도 빠른 변화를 일으켰다. 몇 달 사이에 조명록 특사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데 이어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까지 추진되었다.

200012월 선거에서 앨 고어가 당선되었다면 클린턴의 8년 임기는 김정일과의 회담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조지 부시가 당선되고 클린턴의 북한 방문에 반대했기 때문에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첫 해에는 북한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차츰 적대적인 태도를 노골화했다. 급기야 9-11 뉴욕테러 후에는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한 적이 있지만, ‘악의 축은 더 심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극도의 적개심을 담아 적국들을 부른 이름이 추축국(axis)’이었다. ‘악의 축은 당장 전쟁을 걸 대상이라는 뜻이고, 그 이름으로 불린 이라크는 그 직후 미국의 침공을 당해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시는 북한도 형편만 되면 쳐부수고 싶은 나라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도 끝내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북한이 이라크와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한을 대상으로 한 북한의 보복능력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존재다.

중국의 존재는 미국 네오콘이 북한을 공격하고 싶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아직 ‘G-2’ 같은 말이 나올 단계는 아니었지만 중국의 굴기(崛起)’는 이미 중국 위협론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이 제창하는 세계체제론에서는 쇠퇴기에 접어든 헤게모니국가가 군사력을 통해 패권에 집착하는 경향을 얘기하는데, 미국의 대 중국 정책에는 이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해 왔다.

이라크전쟁의 성과가 훨씬 더 좋았다면 부시 정권이 중국에 대해 더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 일환으로 북한을 공격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북한 공격에는 중국에 대한 도발이라는 의미가 겹쳐져 있기 때문에 이라크 공격보다 훨씬 부담이 큰 일이었다.

북한의 보복공격 능력은 남한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대포동미사일 사정권에 들기는 하지만, 수량에 한정이 있어서 재래식 폭탄으로는 타격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남한은 인구의 절반가량이 북한 장사정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북한 공격에 동의해준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명박 같으면 동의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집권했을 때는 이라크전쟁의 실패로 미국 네오콘이 꼬리를 내린 후였다.

200610월 핵실험에 이르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이 강요한 것이었다. 북한은 김대중의 남한 정부와 클린턴의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개방의 의지를 최대한 표명했다. 9-11 뉴욕테러 때 이례적으로 서둘러 테러 규탄 성명을 발표한 것은 부시 정부의 적의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시는 아무 빌미도 없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북한은 미국의 공격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었겠는가?

미국의 창끝이 이라크를 먼저 향하고 그곳에서 발목이 잡힌 것은 북한에게 행운이었다. 그 행운은 중국의 존재가 크게 작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행운에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이 어떻게든 이라크에서 빠져나오고 중국의 견제력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억지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핵무기 개발이었다.

남북관계 개선을 포함한 북한의 진로에 남한보다 미국이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이 과정에서 확인된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의 개방을 돕는 데 노력을 집중했고, 그를 이은 노무현 정부도 북한에게 포용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미국에 네오콘의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 남북관계는 더 발전할 길이 막히고 말았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48-249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미관계는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북한 핵문제는 본질적으로 북미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해서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반도 분쟁과 평화의 직접 당사자이면서도 전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 때문에 5년 내내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 체제 위협을 느끼는 북한이 핵무기를 지렛대로 삼아 그 위협을 항구적으로 해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지만, 나도 이것을 직시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환경이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5년 동안 미국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이나 일정 수준을 넘는 압박과 제재를 한국 정부가 순순히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부시 정권의 대 북한 적대정책은 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압박을 완화시키려고 애썼지만, 남한 내에도 포용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안팎의 협공에 몰리는 형세였다.

 

미국 행정부는 매번 강력한 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을 얕잡아 보면서 고립시키고 압박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런 현실성 없는 제재와 압박보다는 대화를 통한 해결이 효과적이니 채찍보다는 당근을 사용하자고 미국 행정부를 설득했다. 핵 폐기와 북한체제의 안전보장, 북미수교, 경제지원,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현안을 하나로 묶어 타결하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었다. 그런데 북한이나 미국보다 더 버거운 상대가 국내 여론이었다. 한국의 보수신문들은 미국 네오콘보다 더 강경했다. 한나라당은 한술 더 떴다. 야당이 국회에서 더 강한 압박과 실질적인 제재를 요구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하면 보수언론들은 그것을 머리기사로 다루어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했다. (같은 책 252-253)

 

노무현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지켰다. 김대중 정부가 쌓아놓은 북한과의 신뢰관계를 해친 일로 취임 초의 대북송금 특검이 있었는데, 노무현 측에서는 이것이 국내정치 관계로 부득이한 일이었다는 인식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 불법송금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국민의 합의를 모아서 해 나가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다. 대북송금이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수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 주셔야 했다. (...)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필요한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같은 책231)

 

이 자서전이 나온 몇 달 후 나온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2528-529쪽에서 이 문제에 관한 회고를 옮겨놓는다.

 

315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송금 사건 특별법안을 공포했다. (...) 충격이었다. 나는 퇴임을 10여 일 앞두고 이 문제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한반도 평화와 국가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수용했고,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지겠다고 했다. (...)

현대가 4억 불을 북에 송금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화를 냈지만 4억 불의 대가로 돌아오는 일곱 가지 사업 내용을 보니 수긍이 갔다. 나는 수에즈 운하 주식을 몰래 사들여 동방 항로를 확보한 디즈레일리 영국 총리가 생각났다. (...) 나 역시 진정한 국익이 무엇인가를 따져 결심했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노 대통령이 우리 민족 문제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북 관계는 정쟁의 대상이 아님을 그도 잘 알 것이다. 국가 책임자가 최고의 기밀을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 정부를 신뢰하고 대화하겠다고 나설 것인가. 노 대통령은 나와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이 옳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취임 초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국민의 뜻도 묻지 않았다.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국론은 분열될 것이었다. 부작용이 불 보듯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22일 노무현 대통령과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노 대통령이 현대 대북 송금은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몹시 당황하고 불쾌했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현대의 대북 송금이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에 변함이 없습니다.”

노 대통령은 나와 국민의 정부 대북 일꾼들을 의심했다. 그런 노 대통령을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또 민주당 지도부의 특검 방침에 대한 침묵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문단의 밑줄 친 대목에 노무현 측이 보는 문제의 초점이 있다. 김대중은 현대의 4억 달러 송금 방침에 수긍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송금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하는 것이다. 노무현 측은 김대중이 송금 방법에까지 책임을 짊어질 경우 국가원수의 통치행위로서 면책을 주장하려 했다는 것인데, 김대중이 이에 호응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전 해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민주당 내의 갈등이 양측 사이의 소통에 지장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 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북관계는 정쟁의 대상이 아님을 그도 잘 알 것이라고 한 말에서는 현실 인식의 문제점을 느낀다. 정쟁의 대상으로 들고 나온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고, 들고 나온 시점은 노무현의 당선을 내다보기 힘들던 20029월이었다. 노무현이 김대중 자신의 정책을 옳다고 하면서도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이 대목에서 단언하고 나와 국민의 정부 대북 일꾼들을 의심했다고 서운해 하는 것은 노무현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 기대를 저버린 데는 노무현 자신의 잘못도 얼마간 있겠지만, 국내외의 불리한 여건을 뚫고 다분히 요행으로 당선된 후계자의 짐을 줄여주기 위한 노력이 아쉽다.

남북관계가 정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김대중의 희망사항이었다. 남한의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큰 희망이었는지, 지난 대통령선거 때의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사태에서 최근의 이명박 회고록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은 대한민국 역사상 이례적으로 주권국가의 역할에 접근한 경험이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권이 북한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였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 드라이브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부시 정권이 들어선 후로는 7년간 남한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을 견지했지만 상황 악화를 막는 정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반대로 2008년 이후 남한 정권은 북한 압박을 위해 별 짓을 다했지만 네오콘이 퇴진한 부시 정권이나 온건한 오바마 정권 앞에서는 압박에도 한계가 있었다. 부시 정권 초기에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집권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어느 상황에서나 남한의 역할은 미국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미국에게 북한은 그 자체의 중요성이 없는 나라다. 주변의 나라들(남한,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위해 이용할 대상일 뿐이다. 반면 남한에게는 민족통일의 이념은 접어놓고라도, 경제와 안보의 사활이 걸려있는 대상이다. 그런데도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에게 열쇠를 맡겨온 것은 미국에 대한 남한의 종속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북한도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안다. 우리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고 불평하지만, 열쇠를 가진 상대를 먼저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남한도 의지를 갖고 나선다면 북한과의 관계를 스스로 열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제일 가까이 접근한 것이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노무현 자서전에 술회한 것처럼, 미국에서 네오콘의 위세보다 한국에서 네오콘 동조세력의 위세가 더 컸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만남으로부터 15년이 지났다. 또 한 차례 정상회담이 2007년에 있었지만 2000년의 전망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다. 북한은 세 차례 핵실험을 했지만 국제사회에서 그 처지는 2000년 이전과 다를 것이 없다. 김정일이 죽었지만 김정은이 그 위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미국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민주당 정권이 7년차에 들어서고 있지만 대결주의적인 남한 정권이 원하지 않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지금 남한에서는...

냉전 이후를 처음 구상할 때는 최근까지 남북관계의 궤적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야기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2000년 이후 15년간은 남북관계에서 잃어버린 세월일 뿐이다. 1998년까지 북한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이 되풀이되었을 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1998년에서 2000년까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보여준 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의 가능성이 한반도의 냉전 이후에 대한 최대한의 희망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자본주의 이후에 생각을 모으려 한다. 1990년대 10년간 남북관계의 전개를 살펴보며, 한반도의 분단 상태를 끝내지 못하는 이유가 북한보다 남한 쪽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한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이뤄지지 않는 많은 문제들과 별도로 분단 문제만이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북한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남한이 국가다운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로 민족국가를 잃어버리는 과정을 훑어본 다음 <해방일기>로 민족국가 재건에 실패하는 장면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된 상황에서도 민족문제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더듬어봤다. 조선 망국 후 백 하고도 5년이 지난 지금도 민족 자결의 전망이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민족사회의 상황은 암울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진다. 19세기 말 조선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았던 세계정세의 변화가 방향을 바꾸는 조짐이 이제야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다. 긴 밤 지새운 뒤의 새벽을 맑고 환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많다. 한반도에 밤을 가져왔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물러선 뒤 우리에게 닥칠 세계정세를 내다보는 일을 나는 내 몫으로 삼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