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결국 굴복하기까지

 

19485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건국과정이 본궤도에 들어섰다. 19471114일 유엔총회 의결은 남북 총선거를 규정했는데, 이북 지역에는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1948226일 유엔소총회에서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것을 결의했다. 상급기구인 총회의 결정 일부를 바꾸는 이 결의에는 재석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뒤이어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소총회 결의에 따를 것을 결정한 후 510일 총선거가 계획, 추진되었다.

이 선거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가 헌법과 정부조직법 등 기본 법령을 제정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건국과정이 진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총선거 다음의 수순은 국회 개원이었다. 미군정 기구인 국회선거위원회가 “510일에 선거된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를 단기 4281531일 상오 10시에 국회의사당에서행할 것을 525일에 공고했다.

미군정은 군정기간이 3년을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가을의 유엔총회에서 새 정부의 인준을 받기 위해 815일까지 정권 이양을 끝낼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국회 개원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에 유엔위원단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위원단은 선거 직후 상하이로 가서 총선거에 대한 평가를 한 다음 66일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동의하지 않는 건국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엔의 권위를 빌리고 있었다. 유엔위원단은 선거가 제대로 시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의견을 총회에 제출할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위원단이 보고서를 아직 작성하지 않은 시점에서 서둘러 국회를 개원한 데는 국회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위원단의 부정적 평가를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원단이 67일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선거 평가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625일에야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보름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 의견이 우세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이 621일 미국인 심복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위원단의 부정적 분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 필리핀과 엘살바도르에 대한 신뢰는 이 편지에서도 확고했다. 미국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따를 나라들이었다. 시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의 네 나라는 미국의 대 조선 정책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일이 있었다. 이승만이 가장 걱정한 것은 인도였다. 분단건국 방침을 지지해주던 인도가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로비 약발이 다했던 것일까, 아니면 5-10선거 분위기가 정말 너무 심했던 것일까?

위원단 대표들은 자기네가 서울에 없는 동안 미군정이 일방적으로 국회를 개원한 것이 불쾌했을 것이다. 선거 분위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막상 부결 판결을 내리는 데는 큰 부담이 따랐다. 5-10선거의 정당성을 부결하고 나면 그 뒤에 어떤 조치를 위원단이 취할 수 있는가? 상황을 바꿀 만한 뾰족한 대책 없이 이미 치른 선거를 무효로 돌린다면, 만족할 만한 재선거를 치를 방도가 무엇이 있는가?

5-10선거에 불만을 가진 대표들에게 대안으로 생각할 만한 길은 남북협상뿐이었다. 협상을 통해 남북총선거를 시행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바라볼 수 있었다. 5-10선거에 대한 판결을 몇 주일 동안 늦춘 것은 남북협상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포기하자 주어진 현실조건 위에서는 5-10선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이남 단독선거에 완강하게 반대해 온 오스트레일리아대표 잭슨은 공식발표 며칠 전 기자에게 이렇게 심경을 밝혔다.

 

본인이 조선에 와서 제2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각계의 조선인과 협의한 결과 소총회에서의 제1대안 즉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조선인을 위하여 현명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호주는 제2대안 즉 협의체를 위한 대안을 제출하여 이 제1대안에 반대하였으며 캐나다 역시 반대하였고 시리아는 기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1대안이 소총회에서 채택이 되고 또한 이것을 위원단도 채택하였던 것이다.

본인도 그간 선거준비의 경위를 관찰한 결과 선거를 감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전의 상태를 고려치 않고 단지 5·10선거 그것만을 볼 때 그 선거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엔위원단의 승인이 떨어지자 국회의 건국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헌법 제정이 우선 가장 큰 일이었다. 의원 30명으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63일의 일이었는데 보름 남짓 짧은 기간에 초안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준비작업이 많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유진오를 중심으로 준비되어 있던 헌법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초안이 기초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한민당을 야당으로 만든 이승만의 권력독점욕

 

기초위원회의 초안 심의과정에서 세력 간 역학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회에는 세 개의 큰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는 독촉 계열. 충성경쟁에 나선 인물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또 하나는 한민당. 이 두 세력이 남한 단독건국 내지 분단건국 추진에 힘을 합쳐 왔다.

또 하나의 세력이 무소속구락부를 이룬다. 200명 의원 중 80여 명이 무소속출마자였고 그중 60명가량이 무소속구락부에 참여하게 된다. 한독당과 중도우익 정당들이 5-10선거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이승만 반대세력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지 못했는데, 무소속구락부 의원들은 이승만에게 동조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협력이 계속되는 한 국회 내에서는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따돌리고 나자 두 세력 사이에 지분싸움이 시작되었다. 헌법초안 심의과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고집으로 인해 본격적인 첫 갈등이 드러났다.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던 유진오의 초안에 대해 기초위원회에서도 이론이 없었다. 그런데 심의가 끝나가는 615일 이승만이 참가 자격 없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해서 대통령책임제를 역설했다. 그런데도 기초위원회가 초안 수정을 거부한 것은 한민당의 당론 때문이었다. 이승만과의 권력 분점을 제도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었던 한민당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승만과 충돌한 것이니, 이것이 대한민국 제1야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위원회는 본회의에 제출할 헌법 초안을 619일에 완성했다. 21일 본회의에 제출할 예정이었으나 이승만이 의장 직권을 이용해 제출을 이틀 늦췄다. 23일 제출된 헌법초안은 대통령책임제로 수정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이승만이 한민당을 회유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북에서도 헌법 제정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남에 비해 훨씬 차분한 진행이었다. 194711월 유엔총회의 조선 결의안 채택 직후 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31인의 헌법제정위원회를 설치했다. 제정위원회가 준비한 초안에 19482월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 제출되자 초안 형태로 공표되고, ‘전 인민 토의를 통해 수정한 헌법안이 429일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710일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825일 이 헌법에 의거한 총선거를 치른 다음 이 선거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가 9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다시 공포하기에 이른다.

이남의 헌법 제정과정에서 아쉬운 대목의 하나가 626일 국회 본회의에서 33인 의원이 헌법 채택에 3분의 2 찬성을 요건으로 하도록 내놓은 동의안이 부결된 일이다. 대통령-부통령 선출은 3분의 2 찬성을 요건으로 하면서 헌법 채택을 단순과반수로 한 것은 헌법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더구나 정원 3백 석의 국회에 2백 명만 채워놓고 단순과반수로 통과시켰다는 데는 법리적으로도 의문이 남는다. 이북의 경우 429일 인민회의에서 헌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은 준비과정이 충실했기 때문이다. 아직 훗날과 같은 공포분위기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한 것은 두 달 간의 전 인민 토의를 통해 수렴된 인민의 총의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헌법안의 빠른 통과를 위해 의장 직권을 마구 휘둘렀다. 대통령책임제 하나를 확보해놓은 이상 다른 조항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치밀한 심의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건국 작업을 방해하는 비애국자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북에 비해 이남의 헌법이 잦은 개정을 보게 되는 일차적 원인은 정치의 불안정에 있는 것이거니와, 제정과정의 졸속성에도 얼마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결될 국무총리 후보를 이승만이 내놓은 까닭

 

717일 헌법이 공포된 후 정부 조직에 들어가 첫 번째 일은 720일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출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독촉은 물론이고 한민당도 이승만 대통령을 원했으니 국회의 3분의 2를 확보한 이승만에게 경쟁자가 있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서재필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

헌법과 함께 준비된 정부조직법에는 부통령의 권한이 아주 작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부통령으로 임시정부 원로 이시영을 밀었다. 대한제국 고관을 지내고 형제들과 함께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키워낸 이시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큰 공로자였다. 그런 인물의 참여는 새 정부의 위신에 큰 보탬인데, 담백한 성품과 고령(80) 때문에 이승만의 권력에 도전할 위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통령 선거는 1차 투표에서 3분의 2 득표에 미달했기 때문에 2차 투표까지 갔다. 정부 불참여의 뜻을 밝힌 김구가 1차에서 65, 2차에서 62표를 받았다. 무소속 의원들이 김구에게 투표한 것은 이시영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승만을 견제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민당은 대통령-부통령까지는 이승만의 구상에 따랐다. 그 대신 한민당이 바란 것은 국무총리 자리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한민당은 국회를 자기네 권력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헌법 심의과정에서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초안을 수정하는 데 한민당이 힘을 쏟은 것은 국무총리 자리를 통해 자기네 입지를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사이의 갈등은 대통령중심제로의 초안 수정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그때는 한민당이 물러섰는데,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는 갈등이 고착되고 한민당이 야당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을 처리하기로 예정된 727일까지 이승만은 후보를 밝히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국회의 3개 정파가 미는 3명의 인물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중 독촉의 신익희는 이승만이 비운 국회의장 자리를 물려받을 참이었으므로 무소속이 미는 조소앙과 한민당이 미는 김성수 사이의 선택으로 보였다. 어느 쪽을 지명하든 3개 정파 중 2개의 지지를 받을 것이므로 국회 동의가 무난할 것이었다. 김성수를 택한다면 한민당과 이승만의 합작이 계속되고 조소앙을 택한다면 새 정부가 민족주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갈림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엉뚱한 인물을 지명했고, 화가 난 의원들은 토론도 생략하고 바로 표결에 부쳐 간단히 부결시켜버렸다. 이승만이 지명한 이윤영은 평안도에서 월남한 기독교 목사로 조선민주당 부당수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뿐,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5-10선거에서 김성수가 월남민에 대한 상징적 배려로 지역구를 양보하고 한민당의 힘으로 지원해서 당선시켜준 사람인데, 이제 김성수를 앉히기를 한민당이 바라는 국무총리 자리에 그를 지명한다니 완전히 한민당을 약 올리는 선택이었다.

이승만의 두 번째 지명은 이범석이었고, 그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된다. 만약 이범석이 첫째 지명자였다면 국회 동의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군 간부였던 이범석은 귀국 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을 키워왔다. 정치권 밖에서 독자세력을 만들어온 그에 대해 한민당도 무소속 의원들도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두 번째 지명까지 부결시킨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한민당이 적극적 반대에 나서지 못했고, 초대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의 족청세력은 이승만의 초기 독재체제 구축을 도와주게 된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지명할 때 독촉 계열에도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일부러 부결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런 무리수를 뒀을까? 그 뒤의 일을 보면 국무총리직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통령과 협력하는 국무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을 받드는 국무총리를 그는 원한 것이다. 이승만 독재체제를 완성한 195411월의 ‘45입 개헌에서 이승만은 국무총리 자리를 없애버린다.

 

경찰국가의 내무부장관 자리를 향한 각축전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가 결정된 이제 남은 것은 내각 구성을 위한 장관 임명이었다. 여기서 초점이 된 문제는 누가 경찰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권력의 근거로서 경찰의 역할이 엄청나게 커졌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남조선에서 총을 휘두른 가장 큰 조직이 경찰이었고, 이승만의 정권도 경찰에 의지할 것이 분명했다.

정부조직법 제정 과정에서 경찰을 독립된 정부 부서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내무부 밑의 치안국이 경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무부장관 자리가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군정 하의 경찰 총수는 조병옥이었는데, 그에 버금가는 장악력을 확보한 인물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있었다. 미군정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충성을 보인 두 사람 중 하나를 이승만이 확보할 수 있다면 경찰력 활용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었다.

단독건국 작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조병옥과 장택상 사이에 암투가 시작된다. 6월 중순 장택상의 고위 심복 두 사람이 비리 혐의로 조병옥 휘하 경무부 수사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택상은 기자회견에서 조병옥에 대한 인신공격성비판을 포함한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수사국 부국장이 장택상의 회견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조병옥의 장택상에 대한 진짜 공격은 한 달 후에 터져 나왔다. 장택상의 핵심 심복들이 반년 전 피의자를 고문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 일을 726일에 수사국에서 공표한 것이다.

사건 당시에는 일 저지른 수도청 간부들이 경무부 간부들에게까지 이 일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을 것 같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조-장 두 사람이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조병옥이 장택상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터뜨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폭로의 시점이 조각 인선이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82일 이범석이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은 직후 조각 내용이 발표되었다. 내무부장관에는 윤치영이 기용되었고 장택상은 외무부장관으로 낙점 받았다.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지목바던 윤치영이 원래 바란 자리는 외무부였는데, 고문치사 사건 때문에 장택상을 도저히 내무부에 앉힐 수가 없어서 맞바꾼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보다 장택상을 선택한 이승만의 뜻은 분명히 나타났다. 한민당을 배경으로 가진 조병옥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장택상이 이승만에게는 편리했던 것이다.

84일자 <경향신문>만약 이 대통령이 부통령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어코 장모 씨로 내무장관을 임명하게 될 때는 이 부통령은 사임이라도 할 강경한 태도로 나아갈 것으로 관측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관측은 바로 그 날 저녁에 현실로 나타났다. 저녁 무렵 이승만이 이시영 저택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시영은 그때 수원에 가 있었다.

이시영은 89일 서울로 돌아와 기자들에게 휴식을 위해 시골에 갔을 뿐, “내 언동으로 돕지는 못하나마 파괴 같은 것은 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사임을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수원에 있는 동안 대법원장 김병로, 체신부장관 윤석구, 국회의장 신익희가 그를 찾아갔고 국무총리 이범석도 비서를 보내 이시영 곁에서 자고 오게 했다.

정부조직법에 장관 선임은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의논하게 되어 있다. 부통령의 역할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정부를 함께 이끄는 부통령이 이 사람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는 경우는 대통령이 존중해줘야 할 것 아닌가. 84일 이승만의 이시영 저택 방문 시도는 함께 당선된 후 처음이었다. 이시영의 결의가 굳은 것을 알고야 황급히 쫓아간 것이다.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윤치영이 경찰 지휘권 이양을 둘러싸고 조병옥과 갈등을 빚고 국무회의에서 민족반역자로 지탄해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한 데는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적대적 태도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타협했다. 812일 신문에 조병옥이 구미 방면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사실과 경무부 수사국 국장과 부국장의 사표를 수리한 사실이 나란히 보도된 것이다.

지휘권 이양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최고위 간부들의 사표를 받고 새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한 데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사(陳謝)’까지 했다니 특사자리가 얼마나 큰 떡이었기에? 미군정을 지내는 동안 조병옥은 미국의 힘을 누구보다 깊이 실감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의 특사 자격 미국 방문이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을 것이고, 그 전망은 적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여론도 대한민국 첫 조각 내용을 놓고 비서내각이니 비서정치니 조롱이 들끓었다.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였던 권력의 사유화’.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권력 사유화 의지에 떠밀리면서 세상에 나서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20006139시반경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서울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한 시간 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영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진 최고지도자를 일반 국가원수와 다른 특별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받들어 왔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는 형식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북측 대표로 내세우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대등한 국가원수 사이에서도 공항 영접은 특별한 호의다. 긴장관계에 있는 남한의 대통령에 대한 김정일의 공항 영접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이튿날 오후 정상회담을 위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한다.

 

(김대중) “김 위원장께서 공항에 나와 영접해주시고 우리가 악수하는 것을 보고 서울에서 1,0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했다고 합니다.”

(김정일) “공항 영접이요? 대통령께서 오시는데 그건 기본적인 예의 아닙니까,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임동원 <피스메이커> 89)

 

이 회담 중 김정일은 스스로 즐겨 쓰는 표현대로 통 큰인상을 많이 풍겼다. 공항 영접부터 김대중에 대한 통 큰 대접이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대로 예법을 벗어나는 지나친 공손함에는 문제가 따른다. 남한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공손함은 북한 인민의 자존심에 거슬릴 수 있다. 김정일은 이 문제를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무마했다. “기본적인 예의라고 했는데, 남한 대통령이 누구라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20여 세의 나이 차이뿐 아니라 김대중이 오랜 경력을 통해 북한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켜온 남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인민의 자존심을 거스를 염려가 적었던 것이다.

공항 영접이라는 파격적인 예의에는 두 가지 실제적 효용이 있었다. 하나는 북한의 개방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남한 여론이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장자에 대한 예의라는 전통적 덕목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주의 정서에 영합한 것은 부수적 효과였다. 사고의 유연성이 돋보인다.

사고의 유연성은 임기응변의 능력을 뒷받침해 준다. 임동원이 회담 열흘 전 특사 방문에서 돌아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김정일이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좋은 대화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임기응변을 잘하고 좋아하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특사로서 임동원의 임무 중에는 공동선언의 초안을 마련하는 것이 들어있었다. 정상적 관계를 가진 국가 간에도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미리 모든 준비를 해뒀다가 회담에서는 공식 발표만 하는 것이 관례다. 하물며 정상적 관계가 없다시피 하던 남북 간의 정상회담에 앞서서는 변수 발생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임동원은 남한 정부의 입장을 소상히 밝힌 대통령 친서를 갖고 가서 김정일을 만났을 때 한 시간에 걸쳐 설명하고, 그에 대한 김정일의 응답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정면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김대중을 매우 존경하며 평양에 오시면 존경하는 어른으로, 전혀 불편이 없도록 품위를 높여 잘 모시겠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어떤 외국 정상의 평양 방문 때보다 더 성대하게 최고로모시겠다고 했다. 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간절하니, 회담 내용 같은 데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김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요. 격식 없이, 허심탄회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 격식 갖춘 이야기야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시면 되겠지요. (...) 과거의 좋은 남북합의 문건이 세 개나 있지 않습니까(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을 말하는 것이다). 근데 제대로 실천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본질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비슷한 내용의 합의 문건만 자꾸 만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미 합의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번 만남에서는 희망적인 선언 수준의 간단한 합의 문건을 내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건 미리 작성해둘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그런 건 정상회담 마치고 작성하면 돼요. 그리고 단계적으로 하나씩 합의하고 이행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정상회담 소식을 들은 중국 지도자들도 어떻게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느냐며 엄청 놀랍디다. 주변국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고 차분히 하나씩 하나씩 해나갑시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60-61)

 

이 접견에 임동원이 녹음기를 들고 들어가지는 않았을 테니 김정일의 표현 그대로는 아니리라고 생각되지만,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리는 없다. (이 책이 나온 것은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였고, 최고지도자의 발언 내용을 조작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뜻이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덧붙인 것은 없겠지만, 잘라낸 것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책임이 남쪽에 있다는 김정일의 관점이 행간에 비쳐 보인다. 그러니까 풍성한 합의문을 새로 만들어내자는 남측의 의욕에 제동을 걸며 기존 합의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욕심을 너무 내지 말자는 이유의 하나로 주변국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것을 농담처럼 말하며 중국의 예를 들었는데, 중국보다 미국 놀라지 말게 할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에는 바로 몇 주일 전에 김정일 자신이 다녀왔다. 그 방문의 주된 목적이 정상회담에 관한 의논이었으리라는 것은 시점으로 보아 분명하다. 자기네 후견인의 양해는 확실히 받아놓았는데, 댁의 후견인 사정은 어떤가 묻고 있는 것이다.

김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다고 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존경하는 연장자의 말씀을 듣겠다는 겸손한 자세처럼 보이지만, 그 동안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이 남측에 많이 있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를 요구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가벼운 농담이나 겸손처럼 보이는 말에 심각한 뜻을 담아내는 화법이다.

김정일은 온 임동원에게 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합의되는 내용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을 적으면 합의문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대범한 태도였다. 회담 상대에 대한 신뢰를 더 중시한다는 자세이기도 하지만, 가시적 성과를 간절히 바라는 남측을 상대로 튕기는 입장으로도 볼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진 임기응변을 통해 회담 과정에서 최대한을 얻어내려는 욕심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때문에 임동원은 613일 평양 도착 후에도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피스메이커> 84-85) 그 혼자만의 걱정이었겠는가. 이 회담에서 번듯한 성과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국내정치에서도 정권의 입장이 크게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정상회담은 2중구조로 이뤄졌다. 614일 오전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은 공식적 성격의 간단한것이었다. 북한 측도 8명이나 배석하고 남한 측도 공식 수행원이 모두 배석했으니 자리는 컸지만 내용은 간단했다는 것이다. 반면 오후 3시부터 열린 김정일과의 회담에는 3명씩으로 배석자를 제한한 자리였는데, 북측은 김용순 대남 담당 비서 한 사람만이 배석했다. 남측은 황원탁 외교안보수석과 이기호 경제수석이 임동원과 함께 배석했다.

회담의 이 2중구조는 북한 측의 자존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은 남한 대통령을 자기네 최고지도자와 동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외적 국가원수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있다. 그래서 김영남과의 회담이 공식회담이고 김정일과의 회담은 접견의 성격인 것처럼 내부 선전이 가능한 것이다.

남한 입장에서 보면 모욕적인 오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체제의 차이를 전제로 하고 보면 불합리한 관점만도 아니다. 항구적이고 전면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5년마다 선출되어 행정부만을 이끄는 남한의 대통령과 격이 다른 면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세워진 대북정책이 김영삼 정권에서 뒤집힌 경험을 되돌아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차이다. 김정일이 약속할 수 있는 범위에 비해 김대중이 약속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좁은 것이 현실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점을 인정해서 2중구조의 회담을 받아들였다. 한편 김정일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빙자한 극진한 환대로 김대중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공항 영접에서 백화원 안내까지 여러 시간에 걸친 그의 밀착 환대는 결코 접견의 자세가 아니었다. 내부 선전을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의 존엄을 지키되 회담 상대가 굴욕감을 느끼거나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회담 성공을 위해 상대방의 체면을 서로 살려주는 암묵적 협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회담이 시작될 때 김정일이 공격적인 화제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어젯밤에 남쪽 텔레비를 보면서 기분이 좀 상한 게 하나 있어요. 남조선 대학가에 인공기가 나부낀 데 대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 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대단히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공항에서 봤는데, 남측 비행기에 태극기를 달고 왔고 남쪽 수행원들이 가슴에 모두 태극기를 달고 있었지만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생각해봤어요. 어제 김 대통령께서 김영남 위원장과 회담하고 만찬 대접도 했으니 그만 헤어져도 되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오늘 제가 여기 나온 겁니다.” (<피스메이커> 90-91)

 

임동원이 서울에 돌아와 알아보니 10여개 대학에서 한반도기 양쪽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걸어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표시를 한 데 대해 검찰에서 주동자를 색출해 엄벌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고 한다. 요즘 검찰은 너무 알아서 기는게 문제인데, 당시 검찰에는 몰라서 튀는문제가 있었을까? 대통령이 평양에 가 있는 상황에서 단 이틀을 못 참아 국가보안법 적용 방침을 발표하다니, 참 심했다. 남한 대통령의 위상과 북한 최고지도자의 위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김 대통령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 첫 번째 도전에 점잖게 간단히 응수했다고 임동원은 적었지만, 체면을 구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선 제압에 성공해 놓고는 자기가 꺼내놓은 문제를 적당히 눙치는 김정일의 솜씨가 돋보인다.

 

, 남쪽 정치풍토가 우리와 다르다는 건 나도 인정합니다. 어제 공항에서 의장대 사열뿐 아니라 남조선 국기도 휘날리고 애국가 연주도 하고 했어야 내가 오늘 인공기 문제를 가지고 더 해볼 수 있는 건데... 그건 그렇다 쳐도 적어도 정상회담 기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야 합니다.(...)”(같은 책 91)

 

2000년 정상회담의 주도권은 남측보다 북측이 쥐고 있었다는 느낌이 여러 모로 든다. 평양으로 찾아갔다는 사실부터 그렇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극심한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북측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흔히 말하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을 생각해 본다. <시사상식사전>에는 북미 협상과정에서 북한이 취한 협상전술로, 협상을 막다른 상황으로 몰고 가 초강수를 두는 일종의 배수진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협으로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는 전술이다. 서방 언론에서 이 전술을 들먹일 때는 나쁜 짓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데 대응을 위해서는 도덕적인 평가보다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왜 북한은 이 전술을 쓸 수 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인가?

인민의 저항을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독재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독재체제가 가능한 것은 대다수 인민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국가라도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에 임해서는 민주적 원칙을 유보하지 않는가. 비상사태를 인민이 인식하고, 또 그 사태를 지도자들이 불러온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독재체제의 지속이 가능한 것이다.

북한 인민의 불만이 팽배해 있다고 많은 탈북자들이 증언한다. 그런데 재미교포 아줌마신은미는 그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전하다가 남한에서 추방당했다. 북한 사정에 관해서는 남한 사회의 언론의 자유에 심한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탈북자들이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을까?

북한에 대해 좋은 말 한 마디만 하면 종북으로 매도하는 세력이 위세를 떨치는 이 사회에서, 낯선 곳에 와 살며 따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말할 수 있을까? 입국 직후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상황도 밝혀지고 있고 심지어 간첩으로 조작당한 사례까지 드러났다. “나는 내 특별한 사정 때문에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지만 저쪽에도 인민 대다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탈북자가 있다면 많은 것을 잃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대다수 북한 주민이 어려운 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것이 분명한데도 지도부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강경한 대외정책이 어려운 사정을 더 연장시킬 것으로 보이더라도 주민의 반발이 크지 않기 때문에 북한 지도부는 전술적 필요가 있을 때 얼마든지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남한 주민은 고통에 민감하다. 국민의 고통을 늘리거나 위험에 빠트리는 강경한 정책을 정부가 택하기 어렵다. 북한에게는 잃을 것이 없고 남한에게는 많은 것이다. 함께 하는 일에서 북한보다 남한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하는 엄연한 이유다.

대북 강경론자들은 상호주의를 말한다. 더 많은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한의 이익, 따라서 남한 주민의 이익을 지키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정말일까?

북한에서는 벼랑 끝 전술맞받아치기라 한다. 상대방이 악의적으로 나온다면 굴복하지 않고 결연히 맞받아친다는 말이다. 더 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상대방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남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상호주의는 북한의 맞받아치기와 같은 원리다. 포용적 정책으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북한이 더 큰 이득을 얻는 길이라면 포기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같은 전술이라도 구사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타당성에 차이가 있다. 잃을 것 없는 입장이라면 효과적인 전술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입장은 그와 다르다.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퍼주기를 비판하지만, 작은 이익을 퍼줌으로써 평화를 비롯한 큰 가치를 얻으려는 햇볕정책은 지킬 것 많은 남한이 잃을 것 없는 북한을 상대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다. 신자유주의의 공평성이 현실의 불평등을 증폭시켜 공정성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처럼 상호주의의 상호성도 현실의 불균형을 증폭시켜 평화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이다. 상호주의가 남한에 늘려주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위험뿐이다.

 

Posted by 문천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199111월의 일이었고 김정일이 권력승계 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20005월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불편한 상태를 많이 겪었다. 북한은 19928월의 한-중 수교와 1995년 장쩌민 주석의 남한 방문에 분노했고, 아시안게임의 타이완 개최를 지지하는 등 타이완에 접근하는 움직임으로 중국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1998년까지 김정일 후계체제가 안정된 후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시작했다. 1999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에 이어 20003월에는 김정일이 방중을 두 달 앞두고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정일은 이듬해 1월에도 중국을 거듭 방문, 상하이의 푸둥 지구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 해 9월 장쩌민의 평양 방문으로 양국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겉보기로는 예전의 밀접한 관계가 회복된 것이지만, 관계의 실질적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1992년까지는 두 나라 모두 새로운 세계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국 주도의 봉쇄정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도 톈안먼 사태(1989)의 타격 아래 전망이 밝지 못했다.

1998년 여름 클린턴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미국 정계의 논란에서 중국의 장래 전망이 불확실하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이 방문에 반대했다. 우파의 주장은 미국에 대한 잠재적 도전자인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인권 기준이 열악한 중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양쪽 주장 모두 약소국에 대한 강압정책의 틀에 따른 것으로 그 시점까지 중국을 깔보던 미국인의 시각이 비쳐 보인다. 그런데 이를 물리치고 방문을 강행한 클린턴의 입장은 향후 중국의 위상 변화를 내다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좌파에 대해서는 방문하는 편이 안 하는 편보다 중국의 인권 수준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수하고, 우파에 대해서는 중국을 미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끌어들이는 것이 미국 국익에 유리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1997년 여름 홍콩을 무난하게 영국으로부터 반환받고 그 후 관리도 무난했던 데서 중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급속히 높아졌다. 개혁개방 정책의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이 무렵 후계체제 정비를 마무리한 북한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후견자(patron)’ 역할을 맡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국제관계에서 후견자는 곧 종주국이라고 볼 수 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개념이고 중국 입장에서도 대외적으로 그런 책임을 떠맡을 뜻이 없었다. 따라서 두 나라 관계는 일시적 필요에 따라 보호-지원과 주도권 존중을 교환하는 잠정적 주객관계로 상정할 수 있다. 국제적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중국의 주도권을 존중하겠다는 북한 측의 승복을 바탕으로 1998년 이후의 북-중 관계가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명백한 조약의 형태로 나타나는 관계는 아니다. 두 나라가 각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데 따라 협력의 범위가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20011월 김정일의 푸둥 지구 시찰은 개혁개방노선의 모델로 중국의 경험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것이 중국의 경제지원을 원활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런 막연한 협력관계는 쉽게 교란될 수 있다. 신의주 경제특구나 핵실험을 둘러싸고는 만만치 않은 갈등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8년경 궤도에 오른 이래 중국의 경제발전이 힘차게 계속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어 온 상황에 비추어보면 중국의 후견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는 꾸준히 확대되어 왔을 것 같다.

2000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남한과의 관계에 획기적 변화를 맞는 단계에서도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대외관계의 기본 축으로 보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정상회담 한 달 전과 반년 후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남북관계라는 변수를 북-중 관계라는 상수에 맞춰 조율하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 후 남북관계가 큰 굴곡을 겪어온 데 반해 북-중 관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 흔적이 없다. ‘후견의 성격을 띤 북-중 관계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진입하여 적응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의 향후 진로에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큰 작용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래의 남북관계를 내다보기 위해서도 중국의 역할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연재 초기에(13) 중국 굴기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중국이 일어선다면 (1) 과거 미-소 양극체제를 복원하며 소련의 위치를 대신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2) 1990년대 이래 미국이 맡아 온 위치를 빼앗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3) 전통시대 천하체제를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게는 (3)이 가장 그럴싸한데, 내가 생각해도 동의할 이들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이쪽으로 끌리는 것은 40여 년 전부터 중국사를 공부하고 20여 년 전부터 문명의 성격을 궁리해 온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이 생각은 관계된 조사를 더 해서 나중에 정리할 것으로 남겨두고, 우선 여기서는 (1)(2)를 그럴싸하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밝혀둔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을 위시한 역사사회학계에서 제시한 세계체제론이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왔다. 최근에 이 방면에서 나온 책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Does Capitalism Have a Future)>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371 제목에서 보듯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나는 이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프레시안>자본주의 이후를 연재했고, 중국에서도 이 주제의 고찰이 확산되고 있다.

역사사회학계의 세계체제론 가운데 중국의 위상과 관련, 주목을 끄는 것이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007년에 나온 이 책은(번역판은 2009) 이듬해 미국 금융공황의 예언처럼 받아들여졌다. 강진아는 이 책의 역자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과 서구는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 예견되는 국제 역관계의 재편, 근대 문명이 맞닥뜨린 생태적 위기에 적절한 해답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구하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리기의 주장은 과격하지만 개연성 있는 돌파구를 제시한 듯하다. 더구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가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신호가 바로 과도한 금융화로 인한 금융위기라는 아리기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미국 출판시장을 폭격했다. 아리기가 위기를 단언하며 이 책을 출간한 것은 금융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아직은 미국 경제가 거품으로 호황을 구가하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569)

 

아리기 학설의 중심은 자본주의 위기론에 있고 중국 대안론은 부차적 요소다. 그러나 그의 자본주의 위기론이 1994년에 낸 <장기 20세기>(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2007년 책의 큰 의미는 중국 대안론에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치중한 제4부의 내용을 아리기는 서론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4부는 구체적으로 중국 부상의 동학(dynamics)을 다룬다. 먼저 미국이 중국의 경제 팽창이라는 지니[genie]를 미국 지배라는 병 속에 다시 집어넣으려는 시도에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그런 뒤에 나는 서구적 국가 체계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중국이 미래에 미국, 그 이웃들과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그 하나로, 서구적 체계는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작동 방식이 변환되어버려, 과거의 경험 중 많은 것이 현재의 여러 변환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서구적 국가 체계라는 역사적 유산이 덜 중요하게 된 대신에, 예전의 중국 중심 체계가 더욱 적합하게 되었다. (25)

 

중국의 부상이 미국이나 소련의 위치를 본받는 방향이 아닐 것이라는, 위에 적은 내 생각과 같은 것이다. 같은 생각이지만 그 생각에 이른 경로는 다르다. 나는 아리기의 이 책을 최근에야 읽었고 아래 글도 그 전에 쓴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근대는 중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멋진 신세계를 찾았다. 근대의 모순을 심화시킨 하나의 큰 요인이 역사의 단절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를 진행해 온 이제 중세 농업사회로 돌아갈 길은 없다. 하지만 중세, 특히 그 말기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중세 이후를 모색하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 중 중요한 의미들을 근대의 풍요와 격변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 의미들이 근대 이후의 길을 찾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세 이후의 모색에 가장 많은 노력이 쌓여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2천여 년 전 전국시대부터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났고, 1천여 년 전 당나라 말기부터 자본의 권력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체제가 말기적 증세를 일으키는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굴기(崛起)’의 바닥에는 이 지적 자산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을 동세서점(東勢西漸)’ 현상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1930

 

아리기의 중국 대안론은 서구적 체계의 유효성 상실을 지적할 뿐, 독자적 발전을 위한 중국 고유의 조건에 대해서는 비서구적이란 애매한 표현에 그친다. 중국의 전통문명에 관한 연구 성과가 서양어로 정리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생각한 중국 대안론의 핵심은 유기론적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유기론적 질서 원리에 있다. 유럽 발 근대문명의 구조적 문제가 원자론적 세계관과 원자론적 질서 원리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농업문명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러 상공업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농업 중심의 중세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기론적 세계관과 질서 원리를 버리지 않고 점진적 변화를 모색했다. 유럽식 근대문명의 모순이 원자론적 세계관에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보기 때문에 유기론적 세계관을 가장 높은 수준까지 발전시켰던 중국 전통문명에 대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명에 대한 이해가 제한되어 있는 서양 학자들까지 중국 대안론을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부상이 기존 세계체계 내에서의 위치 상승에 그치지 않고 세계체계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는 중국의 진로 선택이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물며 가까운 거리의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은 특히 클 것이다. (앞 회에서 말한 제곱반비례의 법칙을 잊지 말자.) 무엇보다 남북관계의 전개와 관련해 종래 미국의 역할보다 더 큰 역할을 중국이 맡게 될 것이 예상된다.

그리고 2000년 이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중국 대외정책의 특성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중국은 화평발전이니 책임대국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워 중국의 성장-발전이 대결을 지양하고 협력을 추구함으로써 세계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펴 왔다. 그런 구호가 외부의 견제를 완화하려는 선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원리를 국제관계에 도입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중국에게 의존도가 높은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제일 먼저 판별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