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란 원론적으로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1 1 관계다. 이 것은 양쪽 체제가 국가로서 주권을 확립한 상태를 전제로 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전시작전권 문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남한의 주권에는 제한이 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이 남북관계에 작용하는 것이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 대북관계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독일의 경우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전제조건은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유지였다. 당시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절대 불가능했다는 점을 명심하자. 최근 우리나라에서 풍비하는 자주외교는, 현실적으로는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이탈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한에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많으며 미국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벗어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불가능하다. 북한과의 정상적인 관계도 미국의 방위체제에서 남한의 안보를 보장받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친미주의 등의 멸시적 표현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이성적인 판단이다. (박성조 <한반도 붕괴>(랜덤하우스 펴냄) 34-35)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절대 불가능했다는 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가정적 명제이므로 입증도 반증도 완벽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절대라는 말은 절대붙을 수 없는 이야기다. 통일의 시점과 방법에는 미국의 태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독일 통일이 전적으로 미국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미국을 숭배하는 유사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근거로 한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벗어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따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 통일에는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벗어나는 통일도 있을 수 있고 벗어나지 않는 통일도 있을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는 통일만을 박성조가 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미국과의 관계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민족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러한 [60년간의 경험] 차이를 고려하면,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을 동일한 민족이란 틀로 묶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다. 남북한 사이에는 가치관, 문화, 사상의 휴전선이 존재한다. 이념과 철학이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사회화되었으며,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채 같은 민족이라는 명분에 묶였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민족 개념이 퇴색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이산가족을 제외하고는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사이에 동족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 오늘날 통일정책에 깔린 민족은 동태적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정태적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에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절대적 가치관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통합을 꾀한다. 이것이 바로 유럽 통합 과정이다. 바꿔서 말하자면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공유가 통일과 통합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정책 역시 민족주의적 접근보다 서로 다른 문화 화합의 접근이 더욱 바람직하다. (같은 책 31)

 

동태적이 아니고 정태적이므로 허구에 불과하다? 뜻을 알아볼 수 없도록 애매한 표현을 늘어놓으면 비판하기 어려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세상에 난삽한 글이 넘쳐난다. 그런 글로는 수준이 낮은 편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란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까.

박성조는 유럽 통합을 가치관의 공유에 입각한 것으로 보고 이를 근거로 탈 민족의 추세를 주장한다. 나는 그의 민족관이 너무 편협하고 고루한 것이어서 유럽 통합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유럽 통합은 탈 민족이 아니라 탈 국민의 현상이다. 근대에 들어설 때 생겨난 국민국가가 해체 내지 약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통합의 범위가 왜 유럽에 한정되는가? 기독교문명의 전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전통의 공유라는 점에서는 유럽인을 넓은 의미의 민족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은 냉전시대의 블록이 해체되면서 전통을 공유하는 문명권의 의미가 부각되는 추세를 가리킨 것이다. 냉전체제 해소로 가치관의 공유를 통한 결속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전통의 공유가 뒷받침하는 얼마간의 응집력이 상대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의 양극체제가 미국 중심의 1극체제로 가든, 미국의 패권이 무너져 무극체제로 가든, 유럽인에게는 기독교문명권의 결속력을 회복하는 것이 유리한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이것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시대에서 근교원공(近交遠攻)’의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라고 본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263 산업혁명 이후의 대량생산체제에는 소모적 전쟁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원교근공 양상의 제국주의체제와 냉전체제를 불러왔다. 냉전 해소는 이런 경향의 한계를 드러낸 일이었고, 이제 세계는 가까운 사회끼리의 협력을 중시하는 근교원공의 양상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럽 통합은 이 관점에 부합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도 이 변화를 톡톡히 겪어왔다. 20여 년간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서다. 남한 정부가 대 중국 정책에서 근교원공의 원리를 의식한 일은 없었다. 세계정세의 변화 속에서 경쟁을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중국과의 관계가 커지고 가까워진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관계발전을 꾀했다면 더 많은 이점을 얻고 더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다.

지금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일 군사 공조체제에는 그런 점에서 국익에 역행하는 측면이 크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국에 의해 제한받는 상황이 일으키는 손해는 냉전시대에 비해 훨씬 더 커졌다.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주권의 완성을 장기적-거시적 과제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박성조처럼 미국과의 동맹 체제 안에서만 통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 사회의 이익보다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태도다.

중국과의 경험에 비추어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중국에 대해 중공오랑캐라 부르던 냉전시대의 대결 자세를 거두지 않았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큰 손해를 봤겠는가? 물류와 인적 교류가 쉬운 이웃 경제권 사이의 경제관계에는 멀리 떨어진 경제권과의 교류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물론 북한은 중국보다 훨씬 작은 경제권이다. 그러나 공간 속의 힘의 전파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제곱반비례 법칙을 생각하면 남북관계의 경제적 의미는 중국과의 관계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북한이 중국보다 3분의 1 거리에 있다고 보면 덩치에 비해 9배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면에서 대한민국의 국운이 걸렸다고 할 만큼 중요한 것이 되었는데, 북한과의 관계도 그 못지않은 잠재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재미동포 오인동의 글 중에 이 점을 부각시킨 것들이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336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4639

이종석의 <통일을 보는 눈>(개마고원 펴냄)에는 남북관계에 걸린 경제적 득실이 차분하게 설명되어 있다.

제곱반비례 법칙을 경제권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킬 때 거리의 의미는 킬로미터로 표시되는 물리적 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물리적 거리라도 문화적, 제도적 조건에 따라 멀어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상당한 신축성이 있다. 미국은 물리적 거리가 멀지만 제도적 조건 때문에 비교적 가깝게 지내왔다. 반면 중국은 제도적 조건의 뒷받침이 덜하지만 물리적 거리가 워낙 작고 문화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에 미치는 힘이 큰 것이다.

남북한 사이의 제도적 조건은 개성공단 정도 외에는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엄청나게 먼 거리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언제든 제도적 단절 상태가 해소된다면 문화적 친연성 때문에 중국에 비해서도 훨씬 더 거리가 단축될 것이다.

박성조 같은 이들은 오랜 대결상태로 인해 민족 간의 친연성이 희석된 점을 강조하지만, 이 점에도 중국과의 경험이 참고가 된다. ‘중공오랑캐40년간 적대시한 과거가 지금의 한중관계에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단 말인가. 남한 사회의 반공교육은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깊이 스며들지 못하고 표면에만 묻어 있다가 여건이 바뀌기만 하면 쉽게 씻겨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경험이 가르쳐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경제협력의 새 출발점으로 개성공단이 만들어졌다. 경제협력이 어떤 이득을 양측에 가져오는지 보여줄 파일럿프로젝트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박성조는 이 시도를 폄훼하기 위해서도 꽤 애를 쓴다.

 

노동비용에서 남한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북한의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한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그리고 국제경제이론에서 타당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통일정책 차원에서는 노동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권 차원에서도 한반도에서 이러한 처참한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끌려가 노예노동을 했던 민족이다. 통일정책을 민족주의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이 같은 민족을 이렇게 착취해도 괜찮을 것인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당면한 우리의 현실은 개선할 수 있고 또 개선해야 한다. 미래에 열릴 과거 청산위원회에서 같은 민족을 착취하거나 그런 상태를 알면서도 무언의 동조를 한 사람이란 죄목을 언도받을지도 모른다. (<한반도 붕괴> 33)

 

개성공단에 관한 협약에는 임금상승율의 제한 규정이 있다. 입주 기업에 안정성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규정이지만, 제한치고는 꽤 관대한 제한이다. 상당히 빠른 임금상승에 대비한 것이다. 시작 단계의 임금 수준은 같은 민족끼리라는 전제 아래 보면 착취라 할 수 있을 만큼 낮다. 그러나 봉쇄되어 있는 북한경제의 상황으로는 그나마 반가운 것이고, 경제협력의 활성화에 따라 그 수준은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착취를 하지 말라는 박성조 같은 사람들은 그러면 당면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건가? <한반도 붕괴>의 말미에서 그의 주장이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통일을 생각해보았을 때에도 우리는 자유에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 자유냐 동족이냐는 것을 선별해서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로지 자유만을 선택해야 한다. 자유는 분리될 수 없으며, 적당히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화할 수 없는 개념이다. 자유는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가치관이며,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가치관은 아니다. (...) 자유는 조금이라도 양보하여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동족이라는 명분 때문에 이러한 양보가 가능하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 더욱이 북한의 인권문제에 함구하는 남한 정부의 정책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196-197)

 

나도 자유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원리주의적인 자유 숭상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자유가 어떻게 절대적 가치일 수 있는가? 계몽주의시대 이래 자유주의는 지배자에게 침해받지 않는 평등한 자유를 추구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절대적 자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17세기 중엽에 홉스가 갈파했다. 지금의 자유주의는 자유의 본질에 대한 아무 고민 없이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는 책략일 뿐이다.

박성조의 <한반도 붕괴>200610월에 나온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몇 달 뒤다. 8년째 계속되고 있던 대결 완화정책 앞에서 좌절감에 빠진 대결주의자의 모습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벗어나서는 남북관계의 발전을 바라볼 수 없다느니, 한민족이 동족이라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반민족적 주장과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같은 민족에 대한 착취라는 정반대쪽 주장이 여과 없이 뒤섞여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 좌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대결주의 주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회피하려는 대결주의자들은 이 사회 안에 하나의 엄연한 세력으로 존재해 왔다. 이 사회에 불리한 대결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 세력의 의지가 상당 수준 관철되어 온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2008<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이래 이 세력의 주장을 유심히 살펴왔는데, 그 주장에는 너무나 허점이 많다. 그들의 의지가 관철된 것은 주장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논리고 나발이고밀어붙이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헌법재판소의 추태를 보며 나는 친일파 속성 그대로인 사이비 엘리트집단의 존재를 다시 느꼈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683.html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자기 사회의 공익(公益)을 등지고 사익(私益)만을 추구하는 친일파 집단을 육성하고 힘을 쥐어주었다. 해방과 건국을 거치면서도 같은 속성의 집단이 칼자루를 지켰다. 이 사회의 민주화도 이 집단의 힘을 줄이지 못했다. 이 집단을 견제하는 길을 찾는 것이 많은 문제의 해결과 극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

 

아직도 남한사회에는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져 있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감추려 드는 문제도 있겠지만, 더 앞서는 문제는 남한정부의 정보 차단 정책이다. ‘재미동포 아줌마가 나름대로 북한 실상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을 종북 콘서트로 몰아붙이는 데서 이 정책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은미 씨가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것이라면 사실과 대조해서 그 거짓을 밝혀야 할 것 아닌가. 사실 여부는 제쳐놓고 의도만 문제 삼는 것은 북한 관계 정보를 정부가 독점하던 시절로 돌아간 꼴이다.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교류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분야,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남한사회의 실질적인 이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류가 막히기 시작해, 7년이 지난 지금은 15년 전으로 되돌아간 감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은 1953년 정전상태에 들어간 이래 가장 중대한 남북 간 접촉이었고 1945년 분단 이래 관계 전환을 위한 가장 획기적인 계기였다. 이 접촉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55년간의 대결 상태 동안 쌓인 앙금을 정리해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정리할 앙금 중에 상징성이 가장 큰 문제 하나가 김일성에 대한 남한 측 태도였다. 김일성은 1946년에서 1994년까지 북한체제를 대표한 인물이었고 북한에 대한 남한의 적개심이 집중된 초점이었다. 죽은 후에도 영원한 수령으로 상징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김일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북한체제를 대하는 태도를 비쳐 보여주는 문제였다.

김일성 생전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모두 그와의 정상회담을 원했다. 김일성을 대화상대로 인정한 것이고, 그렇다면 북한을 북한 주민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속마음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남북정상회담이 국내정치에 가져올 이득을 생각해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을 원하는 또 하나의 대통령 김대중을 놓고도 북한 측에서는 비슷한 의심을 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묘소인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여부가 민감한 문제였다. 남한 대통령이 금수산궁전을 방문한다면 북한 지도부는 남한 측의 북한에 대한 존중이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에게는 부담이 큰 일이다.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 표하더라도 분단의 죄인과 한국전쟁의 원흉에 대한 참배라며 목청을 높일 세력이 있었다.

63일 김대중의 특사로 김정일을 만난 임동원이 이 문제를 타진해봤다.

 

김정일 위원장의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태도에 적이 안도한 나는 마침내 예민한 문제인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 위원장의 진의를 탐색하고자 했다.

북측이 요구하는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다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사인 저는 이 문제를 이미 김용순 비서를 통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존중하여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방문 일정을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금수산궁전은 반드시 정상회담 전에 방문해주셔야 합니다. 왜 남쪽 국민의 정서만 생각합니까? 우리 북쪽 인민들의 정서는 왜 안 중요합니까? 인민을 위해서나 상주인 나를 위해서도 상가에 와서 예의를 표하는 것쯤은 조선의 오랜 풍습이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남과 북이 모두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안 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되는 방안을 좀 강구해봅시다. 아예 오시기 전에 금수산궁전을 방문한다고 공개하여 야당도 설득하고 국민도 납득시키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평양 방문을 연기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피스메이커> 63)

 

김정일의 말이 이치에 맞다. 제한된 범위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관리들끼리 만나 업무를 처리하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원수들이 만나 총체적 관계발전을 의논하는 자리라면 상대방의 국가적 상징에 대한 예의를 서로 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 기초예의도 차릴 형편이 못 된다면 회담을 늦출 수도 있는 일이다.

이치에는 맞지만 현실의 요구가 달랐다. 남북관계 진전이 너무 늦춰져 있었다.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근본 과제는 제쳐놓고, 냉전 해소에 따른 세계정세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남북 양쪽에 엄청난 손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존립의 위험을 겪어온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도 막대한 국방비부터 시작해 대륙 방면의 물류 문제, 북한과의 경제권 단절로 인한 기회비용의 상실 등 경제적 손해만 해도 국운이 걸린 문제였다. 냉전의 벽을 허물어버린 전 세계 다른 지역과의 경쟁에서 큰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국론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정상회담의 실현은 그 자체로 국론 정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정상회담 계획 발표 후 환영이 우세한 남한 여론도 그런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묘소 참배라면 극한적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고, 그럴 경우 여론의 풍향까지도 불안할 수 있었다.

금수산궁전 방문 문제는 1주일 전인 527일 임동원이 특사로서 첫 번째 평양에 갔을 때도 거론된 것이었다. 그때는 상호 의견 접근이 전혀 되지 않았다. 북측에서는 상주인 김정일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면 형식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두 번째 갈 때는 정상회담이 끝난 뒤 금수산궁전을 방문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받아 갔다. 정상회담 전의 방문은 북한 측에 대한 지나친 굴복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도저히 할 수 없고, 정상회담 후라면 자발적인 개인적 방문으로 보일 수 있으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도 63일에 임동원이 만난 김정일은 금수산궁정 방문에 대한 뜻을 바꿔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613일 두 정상이 같은 차에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일 때도 임동원은 그 차가 금수산궁전으로 방향을 돌리지나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튿날 아침까지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 임동원이 김정일에게 한 장의 건의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남한 국가정보원장이 북한 지도자에게 건의서를 보내다니,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장면이다.

 

북측의 정서와 주장은 이해합니다.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남과 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미래를 개척해나가야 하며, 바로 그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상회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북협력사업을 위한 예산은 국회를 통과해야 하나 국회는 야당이 장악하고 있고, 언론의 협조를 얻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확고한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데 국민의 70% 이상이 금수상궁전 참배를 반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좋게 해주어야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측이 원하는 경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금수산궁전에 참배하면 김 대통령의 지도력이 상처를 받게 되고, 정상회담의 의미는 퇴색되어 합의사항의 이행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쌍방이 모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상주인 김 위원장에게는 적절한 조의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금수산궁전 방문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기를 건의합니다.”(<피스메이커> 82)

 

614일 아침에 이 건의서를 보내고 오후에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에 이은 만찬장에서 두 정상이 남북공동선언 합의를 선포했는데, 그 후 김정일이 임동원을 자기 테이블로 불러 이렇게 귓속말을 했다고 한다. 정상회담 내용에 충분히 만족했다는 제스처로 이해된다.

 

오늘 아침 임 원장의 건의를 보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대통령께 금수산궁전에는 안 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임 원장이 이겼습니다.” (<피스메이커> 125)

 

남측이 정상회담에 매달리는 반면 북측이 튕기는 모습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이런 추세의 원인 두 가지를 앞서 짚어놓았다. 하나는 경제상황으로 나타난 체제경쟁에서 북측이 불리하기 때문에 급격한 접촉 확대를 꺼린 것이고 또 하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는 정권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성사의 공로를 다투는 상황이다.

2000년에 앞서 정상회담 성사의 전망이 떠올랐던 것은 1994년의 일이다. 카터 전 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 김일성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언질을 받아 남한에 전하자 김영삼은 그 동안 북한을 적대시하던 입장을 덮어놓고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김일성의 죽음으로 회담이 불발되자 또 다시 표변, ‘조문 파동을 일으켰다. 며칠 전까지 대화상대로 인정하던 사람에게 조문조차 못하게 하다니, 그의 냄비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의 하나다.

1994년에 김일성이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남북관계 자체에 기대감을 가진 것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전두환 이래 정상회담을 간절히 바라는 남한 대통령을 보아 왔다. 그에게 정상회담은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와일드카드였다. 한편 남한 대통령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진지한 태도로 회담에 임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곤경을 벗어날 열쇠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2000년 김정일의 관점에는 1994년 김일성의 관점과 얼마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첫째로, 미국과의 관계에 정면 돌파가 어렵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도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궁극적 열쇠를 미국이 갖고 있다는 인식은 그대로라 하더라도 남한과의 관계 변화를 앞세우는 우회적 노력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둘째로, 6년 동안 북한의 사정이 더 절박해졌다. 기근 사태를 극복하는 데 국제사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다수의 서방 요원을 받아들여야 한 것은 건국 이래 없던 사태였다. 최악의 상황을 겨우 벗어나기는 했지만, 경제를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도움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의 중국은 ‘G-2’를 칭하는 지금의 중국이 아니었다. 유리한 무역조건을 지키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위치를 스스로 주장하던 시절이었다.

셋째로, 종래의 남한 대통령과 달리 김대중 대통령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실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김대중이라 해서 대북관계 전개와 관련해 정략적 동기를 전혀 안 가진 성인군자는 아니라 해도, 30년간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제창해 온, 남한 정치인으로서는 희귀한 존재였다. 대통령 취임 후 2년 동안에도 그 일관성이 지켜지고 있었다.

또 하나 북한 측 입장에 변화를 가져왔음직한 요인은 한국 재계와의 접촉 경험이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상당 부분 실현되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우그룹 역시 현대 못지않게 적극적인 자세로 대북사업에 임한 것이 분명하다. 1999년 여름의 도산으로 인해 실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내용도 밝혀지지 못한 것이다. 당시 남한의 3대 재벌 중 두 곳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며 남북관계 발전이 북한에 가져올 실익을 구체적으로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요인을 확실히 논할 수 있을 만큼 실상이 밝혀져 있지 못하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김정일은 김대중과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인다. 금수산궁전 방문 요구도 교조적 집착이 아니라 남한 측 태도를 떠보거나, 김대중의 입장을 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이슈로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김대중은 정상회담 후 방문의 입장으로 유연성을 보였고, 김정일은 그마저 면제시켜 줌으로써 신뢰를 과시했다. 2000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남북공동선언의 문면만이 아니라 두 지도자 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수준의 깊고 두터운 신뢰를 확인한 데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

 

정상회담을 열흘 앞두고 회담 준비의 마무리를 위해 임동원이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을 찾아갔을 때 김정일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토로했다고 한다.

 

우리 조선반도는 주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지역이며 주변국들은 사실 조선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조선반도 문제는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자주의 원칙이 중요합니다. 물론 역사적 경험으로나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나 미국과의 관계유지는 매우 중요하지요. 김 대통령께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통일 후에도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사실 제 생각에도 미군주둔이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미군의 지위와 역할이 변경돼야 한다는 겁니다.

주한미군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미 1992년 초에 우리는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보내 이러한 뜻을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전달한 바 있어요. 너무 반미로만 나가 민족이익을 침해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역시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이루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미국과 관계정상화가 된다면 미국이 우려하는 모둔 안보문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겁니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62-63)

 

1992121일 김용순 국제부장과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 사이의 뉴욕회담을 언급한 것이다. 당시 김용순의 발언 중 위와 같은 취지의 내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한미군에 대한 북한의 포용적 입장이 일찍부터 북한 개방정책의 기본 요소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셀리그 해리슨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한 미군은 연방제 수립 이후에도 제한적인 기간 동안 존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북한도 그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9857일 김병홍 북한 외교부 정책기획국장은 나에게 한반도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미군 철수가 지역 차원의 세력 균형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면 일본이 즉각 재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루 전날 김영남 외교부장은 좀더 완곡하게 얘기했다. “미국이 연방제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가 통일되면 지역의 안정성이 증대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통일 과업을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미국에도 이익이 될 겁니다. 우리가 연방제로 통일되면 미국은 남북한 모두에서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겁니다.” 1997510일 저녁 식사 때 만난 한성렬 당시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정무참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미군이 주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엔드게임> 192-193)

 

냉전기에 남북한이 서로를 괴뢰로 몰아붙인 것은 민족주의 기준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괴뢰로서의 종속성은 남한 쪽이 훨씬 더 심했다. 소련군과 중국군은 꼭 필요한 때 외에는 북한에 주둔하지 않았다. 반면 남한에는 19459월 이래(1949~1950년간 군사고문단이름으로 축소되었던 잠깐을 제외하고) 미군이 계속 주둔해 왔다.

대규모 외국군의 지속적 주둔은 독립국자격에 실질적으로 저촉되는 조건이다. 한민족의 반도국가 1천년 역사를 통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도 전쟁 상황 외에는 중국 군대가 반도에 주둔한 예가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위엔스카이 부대의 주둔은 그래서 청나라가 종주국 노릇을 포기한 징표라고 나는 해석한다.

주한미군의 존재로 인한 남한의 독립국 자격 결함은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이래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 북한이 미군 철수를 꾸준히 요구한 것은 단순히 전술적 공세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남한 정권이 미국의 국익을 도외시하고 민족의 복리만을 추구하는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은 주한미군의 존재 위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91년에 북한의 개방노선이 얼마나 절박하고 확고한 것이었는지는 무엇보다 유엔 동반가입에서 확인된다. 민족주의 정통성에 집착해 온 김일성이 남한을 대등한 국가로 인정한 것은 획기적 노선 변화였다. 그 변화의 일환으로 남한의 괴뢰성을 뒷받침해 온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그 성격을 바꾸기만 한다면 용인하겠다는 유연한 자세로 바꾼 것이었다.

남북관계의 주체는 남한과 북한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미국이 제3의 주체로 엄연히 존재해 왔다. ‘북괴의 종주국으로 지목되던 소련과 중국은 어느 때에도 남괴의 종주국 미국처럼 지배적 역할을 맡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소련은 해체되고 중국도 제 몸 추스르기가 벅찬 상황이었다.

1990년대를 통해 미국은 압도적 외부세력으로 한반도에 군림했다. 1992년 후반기 이후 남한의 대결주의 세력이 고위급회담 등 남북관계를 파탄에 빠트린 것은 네오콘 등 미국 대결주의 세력의 앞잡이 노릇이었다. 클린턴 정권(1993-2000)이 그 앞의 부시(아비) 정권과 그 뒤의 부시(자식) 정권에 비해 북한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상대적 차이일 뿐이었다. 공화당의 대결주의 세력이 의회와 언론을 통해 압박을 가했을 뿐 아니라 클린턴 정부 자체의 포용성에도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말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는 클린턴 정부의 대외정책을 선량한 무능으로 규정했다.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악역을 맡지는 않았지만 정책추진의 주도권이 약했다는 것이다. 의회와 언론, 재계 등의 압력에 취약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두드러졌던 것은, 운용 방식(modus operandi)에 있어서 나타난 부시 시대와의 차이점이었다. 외교 문제에 있어서 부시의 관리 방식은 대통령이 확고하게 지휘자의 위치에 서고, 국가안보 보좌관이 대통령의 분별력 있는 분신 역할을 하는 가운데, 하향식으로 운용되었다. 그리고 운용 범위는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협소한 범위에 국한되었다. 클린턴의 방식은 부시의 방식과 매우 달랐다. 그는 질서 있는 과정에 속하는 대부분의 규칙을 파괴했고 손쉬운 특성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클린턴의 백악관에서 이루어진 외교정책 심의는 고위 정책 입안에 대한 어떤 통념보다도 카페에서의 비공식 대담과 유사했다. 그것은 엄격한 의제 없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회의를 수반했고, 시간 계획도 거의 시작이나 끝이 분명치 않았고, 다양한 백악관 관료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 대통령은 지배적인 발언자이기보다 한 사람의 참가자였으며, 회의가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어떤 결정들이 내려졌는지가 종종 불명확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의 마지막 기회>(김명섭-김석원 옮김, 삼인 펴냄) 109)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책의 유연성에 분명한 한계를 지어주는 요소의 하나가 주한미군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미군 주둔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미국에 앞선 패권국가 대영제국의 해외주둔군은 미국의 10분의 1 규모였다. 미군의 해외주둔은 클린턴 정부와 공화당 정권의 차이로 좌우될 문제가 아니었다.

냉전 이후의 미국에게 해외 군사 활동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는 주장이 주목을 끈다. 아리기는 미국이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란 자본주의체제를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뜻한다. 20세기 중엽 진정한 헤게모니를 갖고 있을 때 축적한 힘으로 체제를 억지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활동의 필요가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헤게모니 없는 지배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대적 쇠퇴 단계의 영국 경우처럼, 미국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는 국내외에서 미국 기업의 경쟁적 지위 악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처럼, 비록 덜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자본은 이러한 악화에 대해 세계적 금융 중개업으로 특화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맞섰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상황은 런던이 해외 제국을 포기하고 불만스럽지만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의 하위 파트너에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세계의 주도적인 채권국으로서 예전의 지위를 상실하는 데는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 소요되었다. 두 차례 전쟁으로 영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재정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대로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일찍 그리고 더 심각하게 채무국이 되었는데, 미국의 소비주의적 경향만이 아니라, 영국이 자국의 헤게모니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세계 남측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군대를 공짜로 끌어 쓸 수 있는 인도가 미국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은 이들 군대와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무기에 돈을 치러야 했다. 그 위에 해외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수탈하기는커녕, 미국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의 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자본을 위해 기를 쓰고 경쟁해야만 했다. (죠반니 아리기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 271-272)

 

중국의 국력 강화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지역의 군사력 유지가 미국에게 필요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 점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전 세계 차원에서 군사력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사실만 유념해 둔다. 북한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태도였던 클린턴 정부로서도 주한미군 철수는 지역 사정과 관계없이 고려하기 어려운 문제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북한도 이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개방노선에 착수하면서 바로 주한미군 용인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용인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고, 명분으로 남북 간의 상호 도발 억지와 함께 주변 강대국에 대한 견제의 역할을 내세운 것이다.

한반도의 대결 해소로 인한 새로운 상황에서 주변국의 입지에 변화가 예상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우선권을 북한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미국의 국익이 침해받지 않고 오히려 증진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인데, 그렇다면 다른 주변국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1차적 문제가 되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미-중 두 나라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의 계속 주둔을 통해 미국의 우선권을 보장한다는 방침은 중국의 양해를 받지 않은 것일 수 없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우선권 보장이 그 자체로는 자기네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라도, 북한의 고립 상태를 방치하는 위험보다는 감수할 만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1989년 말에서 1992년 초까지 북한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 고위급 상호 방문만 하더라도 198911, 19909, 199111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이 있었고, 중국 쪽에서도 19903월 장쩌민 총서기, 19915월 리펑 총리, 19924월 양상쿤 국가주석의 북한 방문이 있었다. 이 시기에 북한의 개방노선을 권하는 중국 지도부에서 주한미군 용인 방침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정상회담을 통해 획기적 발전의 계기를 맞는 남북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론 당사자 간의 합의다. 그러나 어떤 합의든 그 실천을 위해서는 미국의 양해와 협조가 꼭 필요했다. 미군의 한반도 계속 주둔은 이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남북한 지도부는 합의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 측의 큰 양보였고, 북한의 개방정책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