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에는 국경이 있다!

 

3년째 해방공간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면서 나 자신 생각을 바꾸게 된 일이 많다. 40년간 역사를 공부해 오면서도 전공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속한 사회의 성격에 직접 관련된 영역의 이해를 너무 소홀히 해왔음을 반성한다. ‘나와바리라고까지 불리는 전공의 벽의 폐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을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흔히 말하지 않는가? 과거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세워져 있어야 한다. 내가 위치해 있는 이 사회가 어떤 성격의 사회인지 확실한 인식 없이 대화에 나선다면 누구와 어떤 말을 나눌 수 있겠는가. 대화를 나누는 시늉을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동양의 선현들은 인간사회의 원리를 가까운 데서부터 멀리로 미루어나가는 데서 찾았다. 공자는 ()’을 그렇게 설명했고, 주희가 <근사록(近思錄)>을 쓴 것도 그런 의미였다. 가까운 사람을 아낄 줄 모르면서 먼 사람을 아낀다고 나서겠는가? 가까운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먼 일을 알겠다고 나서겠는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의 범주로 대개들 생각하지만 그 작업방법에서는 인문학다운 특성을 잘 살리는 일이 드물다. 인문학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놓고 여러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세기 중엽 사회과학이 발생할 때 배경이 되었던 자연과학의 환원주의(reductionism)’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환원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분석적 탐구를 통해 모든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나는 이것이 근대인의 오만이라고 본다. 근대 이전의 학자들은 그런 오만한 믿음을 갖지 않고도 학문을 보람 있는 활동으로 여겼다.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가다듬는 노력에서 가치를 찾았던 것이다.

나 자신 중년을 지날 때까지 그런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위논문 작성을 위해 마테오 리치(1552-1610)의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4백 년 동안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면 리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동인(動因)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처했던 불확실성 못지않은 불확실성에 지금의 우리 자신도 처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환갑 가까운 나이에 한국현대사를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3년에 걸친 <해방일기> 작업을 펼치게 된 것이 이 깨달음 때문이었다. 19세기의 어느 자연과학자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는 국경만이 아니라 겹겹의 울타리에 갇힌 존재로서 나 자신을 본다. 그 울타리는 질곡이기도 하면서 또한 역사학도로서 내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내가 속한 현재를 바라볼 줄 모르면서 어떤 과거와 대화를 하러 나선단 말인가?

우리 사회의 현대사 인식에 부족함이 많은 이유로 식민통치와 독재정치의 억압만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끝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뉴라이트가 활개 치는 것을 보며 다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이민족의 식민통치와 폭압적 독재정치를 미화하는, 상식과 직관에 어긋나는 기이한 주장을 이 사회의 꽤 많은 사람들이 솔깃해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역사의 종말까지 외칠 수 있는 근대인의 오만한 믿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

 

한국현대사에 대한 내 인식의 변화에서 중심축은 민족주의에 있다. 전에는 민족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균질(均質)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해방을 맞아 민족주의 표출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민족주의가 여러 정치세력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용당하는 가운데 어느 민족주의자가 순정(純正) 민족주의를 외치는 것을 보며, 민족주의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으로 빚어지는 하나의 이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큰 거울 하나가 김구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김구는 당시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김구가 민족주의의 지상과제인 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 맡은 부정적 역할을 살펴보며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가 1945년 연말부터 주도한 반탁운동은 민족국가 수립을 어렵게 만든 일이었다. 수십 년 시간이 지난 지금 와서 결과만 놓고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다. 조선과 비슷한 상황에서 해방된 오스트리아와 비교하면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이 당시에도 분명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를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에서 분리 독립시킬 연합국의 방침은 1943년 가을에 확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독일과 일본이 항복할 때 연합국의 눈에는 조선인과 오스트리아인의 독립 노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일본과 독일을 도와준 죄가 컸다. 그래서 일정기간의 신탁통치 결정에는 벌칙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조선인에게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10년보다 가벼운 5년의 신탁통치가 부과된 셈이다.

오스트리아인은 10년 신탁통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국가와 공산주의국가의 분할점령에 놓였지만 오스트리아의 좌우익은 온전한 독립을 위해 단합해서 좌우합작정부를 세웠다. 그래서 어느 쪽 점령군에게도 분규의 빌미를 주지 않고 10년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반탁운동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 독립 노력이 부족했다 해서 부과된 신탁통치에 대해 우리의 독립 노력이 그렇게 미미한 것이 아니었다고 당사자로서 항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이끈 반탁운동은 순수한 반탁이 아니었다. ‘반공-반소운동을 위한 간판이었다.

나는 이것을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으로 본다. 식민지시대의 좌익운동에는 민족운동의 측면이 강했다. 물론 좌익인사 중에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시를 민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우익인사 중에 자기 이익을 민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에 비해 더 많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일반 인민은 좌익의 도덕성에 큰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좌익의 민족주의 측면을 무시하는 맹목적 반공은 민족주의진영에 대한 자해행위였다. 독일과의 합방 전 오스트리아의 좌우익 항쟁은 조선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전쟁 후 국가의 위기극복을 위해 누구도 나무랄 데 없는 합작을 이뤄내지 않았는가.

이승만의 맹목적 반공노선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다. 하지만 김구는 속된 말로 민족주의 아니면 쓰러지는사람 아니었나.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의 반탁운동에 그가 말려든 이유가 무엇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한민당의 임정 봉대(奉戴)’ 주장에 현혹되었다면 그의 지혜를 의심할 일이고, 민족주의진영의 헤게모니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일이다. 확실한 것은, 김구를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다. 역사학자를 자칭하는 KBS 이사장 이인호가 김구의 건국 유공자 자격까지 왈가왈부하는 망동을 냉정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도 우리 시야에서 거품을 거둘 필요가 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의 진면목을 찾았으나...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김구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던 비장한 모습이다. 이 모습을 김구는 19482월에야 보여주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이승만의 조직 민족대표대회(민대)를 자기 기반조직 국민의회(국의)에 통합시키기 위해 이승만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1947122일의 장덕수 암살에는 김구의 뜻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날 김구는 이승만을 만난 뒤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곧이어 민대와 국의의 통합 협상서가 발표된 것으로 볼 때 김구가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해주는 대신 이승만은 조직 통합을 양해하는 빅딜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한민당-이승만 진영에서 자신을 반대해온 책사 장덕수를 제거할 뜻을 가졌을 것이다.

장덕수 암살의 주모자 김석황은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116일 김석황이 체포될 때 김구에게 보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 편지 한 장이 그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김구의 뜻에 따라 암살에 나섰다는 뜻을 풍기는 내용이었다. 김석황이 정말 부칠 뜻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체포될 경우 김구를 연루시키기 위해 보험용으로 써둔 것 같다.

이 편지가 김구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군정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는 수모를 겪었을 뿐 아니라 조직의 통합에까지 제동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쪽으로 노선을 돌렸으니, 이 노선 전환의 정략적 동기도 의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경위야 어찌됐든 민족주의자로 다시 선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나는 이 전환으로 김구가 득실에 연연하던 방황을 끝내고 진면목을 찾은 것으로 본다. 1948210일에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이 그의 진심을 담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글 중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란 대목은 자신의 방황을 반성하는 것처럼 들린다.

분단건국 반대진영은 김구의 가세로 기세를 올릴 수 있었다. 원래 좌우익 중도파가 좌우합작을 통해 이 진영을 형성해 왔으나 19477월 중도 좌익의 구심점 여운형의 타계로 인해 혼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가 분단건국 반대에 나서자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 우익의 민족자주연맹(민련)은 좌우합작 대신 우익연합으로 방향을 잡았다.

민련과 한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익연합이 4월 중-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분단건국 저지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좌우합작 없는 우익연합은 남조선의 절반밖에 대표할 수 없었다. 북조선 지도부는 남로당에 대한 배려 때문에 우익연합의 대표성을 백퍼센트 인정할 수 없었다. 유엔위원단에는 남북한 총선거를 위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위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성과가 남북협상에서 나오지 못했다.

당시 이북 지도부가 단독건국을 원하는 속셈 때문에 남북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혁명 목표 지역의 일부를 먼저 확보한 다음 단계적으로 넓혀 나간다는 민주기지론이 이 무렵 고개를 들고 있던 상황이 지적된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단정할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이남 일부 세력의 단독건국 의지가 분명해지는 데 따라 대응책으로 민주기지론이 제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이북 지도부가 단독건국의 방안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남북협상에 한계를 지워주는 조건이었다.

 

 

분단건국을 도와준 소련의 보이콧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의 권위로 분단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작을 폈다.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역할이 회자되어 오거니와 그것은 선정성 때문에 주목을 더 받는 것일 뿐이지, 위원단에 대한 전방위 로비활동의 일환일 뿐이다. 치안 책임자인 미군정도 로비활동을 단속하기는커녕 도와주기 바빴다.

당시의 유엔에는 미국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조선위원단을 보낸 것도 그 힘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총회에서도 대다수 회원국이 미국이 고집하는 정책에 정면 반대는 피하면서도 은근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 많았다. 조선위원단에도 미국이 속으로 바라는 분단건국 노선에 승복하지 않는 위원들이 많았다.

원래 위원단을 구성하려던 9개국 중 우크라이나가 빠진 8개국 가운데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셋은 미국을 무조건 지지하는 나라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셋은 미국의 독단을 견제하는 경향을 가진 나라였다. 시리아는 이스라엘 때문에 미국에 강한 반감을 가진 나라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도. 영국 식민지로부터 막 독립해서 약소국 민족주의에 동정심이 큰 입장인 인도가 미국의 조선민족 분단정책에 쉽게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예상을 벗어난 인도의 태도가 많은 의혹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19471114일 유엔총회의 한국위원단 설치 결정은 남북한 총선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8226일 소총회는 이와 다른 내용의 새로운 결의를 채택했다.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이것이 남조선 단독건국에 유엔이 나서는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이 결의안에 찬성이 31, 반대가 2, 기권이 11표였다. 반대한 나라는 조선위원단에 참여하고 있던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소총회의 의결에는 참석회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필요한 30표를 넘겼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소련의 보이콧이 가진 의미를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애초에 소총회를 1년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든 것은 소련의 거부권이 있는 안보리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다. 대다수 회원국이 이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총회의 결의 조건을 참석국의 3분의 2 찬성으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다. 압도적 찬성이 아니면 통과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5개국이 226일 소총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찬성 30표가 필요했다. 6국이 참석했다면 34표가 필요했을 것이고, 조선 관계 새 결의안은 통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단독건국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조선위원단이 추천했던 다른 방안, 즉 남조선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일단 만들고 최종적 건국을 뒤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조선위원단의 312일 회의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일부 대표는 별도의 결정 없이 소총회 결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지만 자체 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과반수 찬성을 결의 요건으로 정했는데, 표결 결과는 찬성 4, 반대 2(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시리아와 프랑스)였다.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에 참석했다면 그런 엉터리 결정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에서 소련이 주도한 공산권의 보이콧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도와준 셈이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 뿐이었을까? 소련도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하고 있었다는 확정적 증거는 아니라도 강한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