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의 글을 묶은 책은 그 자체가 ‘소개’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 책을 다시 소개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다. 책에 소개된 여러 관점을 짧은 글에 두루 담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명료하게 내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책은 꼭 짚어보고 싶다. 2009년에(번역본은 2012년에) 나온 책이니까 2008년 금융위기 전에 기획되어 위기 후에 정리된 책이다. 앞서 소개한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도 2009년에 나온 책인데, 금융위기를 현실로 인식하면서 세계체제론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책이다. 반면 이 책에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포함되어 있고 금융위기를 아직 인식하지 않은 글이 많다. 중국의 진로와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금융위기 시점 학계의 전망을 폭넓게 살펴보기에 합당한 책이다. (‘world-system’을 ‘세계체제’로 옮기기도 하고 ‘세계체계’로 옮기기도 하는데 이론적 정확성으로는 ‘체계’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맥락에서는 ‘체제’가 더 효과적 표현이다. 내 글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세계체제’로 옮긴다.)
각 장의 제목에 간단한 내용 설명을 붙인다.
(1) 서론: 지구적 자본주의의 세 전환과 중국의 부상(훙호펑): 미국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기존의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는 20세기 후반에 전환의 과정을 겪어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함께 동아시아의 역할 증대가 중요한 변화였다. 20세기 말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 역할 증대의 연장선 위에서 출발했으나 21세기로 넘어온 후 다른 차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의미를 폭넓게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 중국의 시장경제(조반니 아리기): 유럽이 산업혁명으로 노동절약적-자본집약적 시장 발전의 길로 나설 때 중국은 노동집약적-자본절약적 노선을 지킴으로써 엇갈리게 되었다. 유럽의 선택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유리한 조건을 누렸으나 1970년대 이후 조건이 바뀌기 시작해 중국의 선택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정세의 변화는 중국 발전 경로의 장기적 우위가 확인되는 과정이다.
(3) 중국의 경제 기적과 그 궤적(앨빈 소): 고립상태에서 모택동주의를 지키고 있던 30년 동안 중국은 이후 발전의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이 시기에 확립된 당-국가는 빠른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체제의 기반이 되었고, 그 덕분에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달리 신자유주의 시장 개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당-국가가 뒷받침한 민족 해방 이데올로기도 자본 동원 등 해외의 우호적 네트워크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4) 대중화권의 거대 하청업체(리처드 애플봄):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는 유통업자가 제조업자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 대규모 소매업체들이 영세한 하청업자들을 무자비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을 중심으로 거대 초국적 하청업체가 형성되면서 힘의 균형을 바꾸고 있다. 이 하청업체의 조직이 새로운 세계체제의 주축이 될 수 있다.
(5) 중국의 부상과 지구적 부의 재분배(요제프 뵈뢰치): 세계적 힘의 균형에 큰 변화가 생길 때 많은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20세기 초 독일의 부상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런 상황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동유럽 공산권의 희생 덕분인데, 이제 그 희생도 한계에 이르러 앞으로 지정학적 갈등의 격화가 예상된다. 미국-유럽-일본에서 ‘중국의 위협’에 예민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그 조짐이다.
(6) 중국 경제의 상승과 일본의 원자재 주변부(폴 시캔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의 발전이 천연자원 공급 면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사이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자원 주변부를 순조롭게 넘겨받던 상황에 비해 중국의 자원 주변부 확보는 일본과 이해관계의 첨예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7) 중국과 러시아의 지경학적 통합(존 굴릭): 소련 시절의 위세를 잃어버린 후 다극적 세계질서를 추구해 온 러시아는 중국의 성장에 협조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군사기술과 우주기술 등 중국에게 요긴한 여러 분야의 기술이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온 것이다. 석유 등 주요 자원에 대해서도 미국의 영향권을 거치지 않는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 나라의 협력관계가 유지될 것이며, 반(半)주변부 권력 블록의 기반이 될 것이다.
(8) 중국과 미국의 노동 운동(스테파니 루스 & 에드나 보나시치): 20세기 말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운동 쇠퇴 현상이 중국의 산업 발전에 따라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급격히 커지고 있는 중국의 노동자 집단이 행동주의로 나서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자라나 해외 노동자 집단과 연대를 맺게 된다면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협상력이 세계적으로 크게 늘어날 것이다.
(9) 세계 노동 소요의 진원지로 떠오르는 중국(비벌리 실버 & 장루): 중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노동 소요의 양상은 중국이 노동 소요의 세계적 중심지가 될 전망을 떠올려주고 있다. 폴라니식과 마르크스식 노동 소요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생활양식과 사회적 결속에 대한 위협에 저항하는 폴라니식은 중국 북부 지역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동적 행동주의 성격을 가진 마르크스식은 남부의 신흥 산업도시에서 활발하다.
(10) 경고: 중국의 부상은 지속 가능한가?(훙호펑): 엮은이는 이 질문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려 애쓰지만, 속마음은 긍정으로 기울어진 느낌이다. 마지막 문단을 옮겨놓는다.
단기적, 중기적으로 볼 때 과잉 측적 경향과 환경 위기로 인해 중국에서 경기 둔화나 불황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무게 중심이 일반적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될 것이며, 21세기의 새로운 국제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결국 중국이 자신의 발전 모델을 더 평등하고 더 조화로우며 덜 환경 파괴적인 모델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 여부이다.
간단히 넘어가는 제6~제9장
관심이 적게 가는 주제에 대한 의견부터 간단히 적어놓은 다음 내 흥미를 많이 끄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마음 놓고 길게 하겠다. 제8장과 제9장에서 노동운동 이야기가 나오는데, 재미있는 시각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크게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 이래 세상이 움직이는 제1원리처럼 중시되어 왔는데, 어떤 상황에서나 그 중요성이 똑같이 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닌 다른 체제를 상정함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게 될 것으로 나는 예상한다.
제6장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 제7장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는데, 당장 상황의 진행을 잘 보여주는 주제다. 중국의 성장에 대한 일본의 경계심을 미-일 군사동맹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를 미국과 나토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을 넘어 ‘자원 획득’의 시각으로 내다봄으로써 훨씬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중국의 발전에 따라 ‘자원’의 실제적 의미가 겪을 변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계적 산업화가 덜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원 획득의 경쟁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원 가격도 낮은 수준에서 형성되었다. 20세기를 통해 산업 확대에 따라 경쟁이 심화되었지만 군사력에 의한 저유가(低油價) 체제가 유지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극한적 저유가 체제는 버티지 못하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은 가능한 한 낮은 수준에 유가를 묶어놓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 지금까지 석유를 비롯한 산업자원의 주요 수입국은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런데 그 밖에 있는 거대한 수입국이 새로 나타남으로써 자원 저가 체제가 버티기 어렵게 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을 차후에 소개하겠다.
중국의 성장은 지정학적 구조 변화를 불러온다.
제5장에는 세계경제의 지정학적 구조 변화와 그 속에서 중국의 역할이 설명되어 있다. 10여 년의 기간(1989-2001) 동안 구 공산권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구 공산권은 (1) 사회주의를 포기한 동유럽 및 구 소련 국가들, (2) 고립 상태를 지킨 북한과 쿠바. (3) 사회주의를 지키며 개방에 나선 중국과 베트남,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2)그룹은 특수한 조건 아래 있으니 비교의 의미가 없고, (1)과 (3)그룹의 성패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중국과 베트남은 소득수준의 향상은 크지 않아도 전체 국력에서 큰 발전을 보았는데, 동유럽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력도 쇠퇴하면서 소득수준도 폭락했다.
이 설명은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온 (1990년경의) 냉전 종식의 의미와 부합한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원만한 지속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극약 처방처럼 나온(소수 행위자의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파국을 오히려 재촉한다는 의미에서) 반동노선이며 소위 냉전 종식도 자원 약탈의 범위를 넓히려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필요에서 빚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왔다. 동유럽 국가들의 몰락은 이 관점에 맞는 현상이다. 이 방향의 설명을 내놓은 연구나 논설이 있는지 더 찾아봐야겠다.
19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그리 크지 않은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그 성장이 세계경제의 지정학적 구조 변화를 급격하게 일으키지 않았다. 반면 중국 같은 거대한 경제권의 급격한 성장은 구조 변화를 크게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 변화의 방향으로 필자는 (1) 중국과 그에 버금가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는 인도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협력관계를 맺을 가능성, (2) 두 나라를 포함하는 ‘아시아연합’의 형성 가능성, (3) 전 세계 차원에서 ‘수평적’ 구조의 도입 가능성 등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들 가능성은 서로 배타적인 것도 아니므로 두 가지 이상이 나란히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초국적 유통업체의 ‘갑질’이 끝난다.
제4장에서 설명하는 제조업과 유통업 사이의 관계 변화 전망도 함축하는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신자유주의 노선이 관철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의 하나가 유통업체의 주도권 강화다. 초국적 대형 유통업체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여러 나라의 수많은 소규모 제조업자를 하청관계로 이끄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그런데 공급생산의 비중이 중국에 쏠리면서 구매자의 일방적 주도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여러 나라의 소규모 제조업자들은 업체 간의 경쟁에 겹쳐진 국가 간의 경쟁 때문에 연대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국의 제조업자들은 하나의 국가에 속한다는 점에서 연대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위에 거대한 국내시장이 자라나고 있어서 초국적 유통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덜하다. 그래서 구매자와 생산자의 갑을관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큰 무역상품의 하나인 의류 분야에서 이 변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1975년 이래 30년간 시행된 다자간 섬유 협정(Multi-Fiber Arrangement)이 섬유 생산을 여러 나라로 분산시키고 있었는데 2005년 이 협정이 종료되면서 소수 공급국으로 생산 통합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중국과 그 주변국들이 비중을 크게 키우고 있다. 이에 따라 구매자에 대한 종속성을 벗어나 협상력을 키우는 생산업체들이 속출하고 있고, 제조업계의 상대적 위상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 예상된다.
생산업체 위상 상승의 예로 와이셔츠 제조업자인 홍콩의 TAL그룹의 경우가 흥미롭다. 큰 구매자 중 하나인 JC페니와의 관계에서 생산계획과 재고관리를 포함한 많은 기능을 넘겨받았다. “TAL은 JC페니의 북아메리카 매장에서 직접 판매 시점 자료를 수집하여 자체 고안한 컴퓨터 모델을 통해 제조 수량을 관리하고, 스타일, 색상, 크기에 따라 얼마나 많은 셔츠를 생산할지를 결정한다. 제조업체인 TAL이 소매업체인 JC페니의 창고와 의사 결정자들을 거치지 않고 JC페니의 각 매장에 직접 와이셔츠를 보낸다.”(115쪽)
국가 차원이 아니라 현장의 업체 차원에서 시장조성자(market maker)의 역할이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제조업은 하청업체의 입장으로 성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덩치가 커짐에 따라 하청업체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종속성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청업체의 입장을 벗어나는 추세도 이 위에 겹쳐져 종래의 갑을관계가 해소되고 있다.
경제정책을 자유자재로 선택하는 국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중국의 경제정책을 개관한 제3장이다. 개혁-개방 초기의 중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으나 2000년을 전후해서 국가 발전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관점이 이 장의 중심 내용이다.
필자는 중국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2000년대 초까지 충실히 수행했다고 본다.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 시장 확대, 중앙정부의 약화, 지역 격차 심화, 사유화-법인화 정책, 사회서비스의 상품화, 시장 자유화의 심화 등이 19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를 벗어나는 정책 변화가 시작되어 2000년대 들어서는 국가 발전주의로 돌아섰다고 필자는 본다. 정부의 관리 능력과 재정 능력이 다시 강화되고 정부의 경제 개입이 심화된 점, 복지국가의 성격도 복원되기 시작하고 민족주의의 장벽이 강화된 점, 그리고 자본가 계급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꼽았다.
그리고 필자는 2000년대 중국의 경제정책이 다른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포함) 발전국가들과 유사한 점들을 열거한다. 강력한 국가 기구를 가진 점, 국가가 경제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점,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점, 원활한 외국인 투자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억압한 점, 산업화의 초기 국면에 자본 유입을 촉진한 점 등.
그러면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중요한 차이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국가 자체가 기업가 정신을 내면화한다는 점. 둘째, 지방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유도하여 지방화된 상향식 전략을 구사한 점. 셋째, 평등주의에 비교적 많은 비중을 둔다는 점.
개혁-개방 초기에 중국에게 신자유주의 정책은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사실은 필자가 정확하게 밝혔는데, 다음 단계를 ‘국가 발전주의’로 규정한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른 발전국가들과의 유사점보다 차이점에 더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필요한 단계에서는 이를 취하고 국가 발전주의가 유용한 측면은 이를 취하지만, 정책의 기본 원리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21세기 중국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국가의 힘’이다. 단순히 강하다는 것뿐이 아니라 경제를 포함한 사회 운영에서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국가와 다른 계급들 간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라고 말하며, 이것이 수십 년간 “다양한 발전 정책을 자유자재로 추진할 수 있었”던 근거라고 한다. 정책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중국이 일반적 근대국가의 개념을 벗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근대국가의 정책은 국내의 강한 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집권 세력이 바뀌지 않으면 정책 노선이 바뀌지 않고, 집권 세력이 바뀔 때는 정책의 변화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어떤 국내 세력과도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가진다면 초월적 위치에서 정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국가 원리보다 ‘천명(天命)’ 사상을 떠올려주는 특징이다.
‘권위주의’ 국가의 의미를 새로 생각한다.
아리기가 쓴 제2장을 옮긴이들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의 축약본”과 같다고 했다. 원본을 머잖아 따로 다룰 것이므로 제2장 내용은 간략하게 넘어간다. 아리기는 중국의 발전에서 ‘전통의 회복’ 측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데, 발전 초기의 자본 유치에 화교 자본이 선도적 역할을 맡은 사실도 그런 의미에서 중시한다.
1990년대 이후 향진(鄕鎭)기업이 맡은 역할을 그는 특히 주목한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산업에 대거 투입하는 과정을 순조롭게 했을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 기술 발전을 추구한 중국의 전통이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통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적 성취와 결합되어 “교육받은 값싼 노동력이 비싼 기계와 관리자를 대치하고 있는 도시 산업의 관행”을 이뤄낸 것이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엮은이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제10장에서 훙호펑은 중국의 지속적 발전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부정적 전망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려고 애쓴다. 우선, 지금까지 중국의 경이적 실적에 대한 경탄에서 나오는 섣부른 낙관론에 대한 반증을 제시한다.
중국의 발전 모델에서 가장 큰 모순으로 훙호펑이 지적하는 것은 ‘과잉 투자’와 ‘과소 소비’다. 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생산력 과잉 현상이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주요 국유 은행들로 구성된 금융계의 자원 재분배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잉 투자가 억제되기는커녕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 사회주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불평등 해소를 경제 발전과 함께 추진한 것과 달리 중국의 권위주의 국가는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켰기 때문에 국내 소비시장의 성장이 더디다고 한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원인의 큰 부분이 중국의 특수한 국가 성격에 있다는 사실을 훙호펑도 파악하고 있다.(281쪽)
중국의 기적을 가능케 한 첫 번째 정치 사회적 특징은 외곬으로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한 지방의 발전 국가 혹은 조합주의 국가적 특성이다. 두 번째 특징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와 시민 사회의 성장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당-국가의 지속성이다.
이 책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지금은 훙호펑이 지적한 ‘과잉 투자’와 ‘과소 소비’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훙호펑이 이 문제들에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은 중국의 특수한 국가 성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중국 사회는 ‘불평등’을 견뎌내는 수준이 서방사회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2002년 가을 베이징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확연히 느꼈다. (“중국, 덩치 큰 나라에서 느끼는 힘” 2002-10-19)
중국에서 며칠 지내보며 절감한 것은 유럽의 크기와 중국의 덩치는 함께 비교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를 합친 유럽의 크기라는 것은 산술적 합계일 뿐이다. 비슷한 크기의 영토와 인구지만 하나의 역사배경을 가지고 하나의 언어를 쓰며 하나의 정부에 통제받는 하나의 나라를 이룰 때 그 크기는 각 지방의 산술적 합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중국의 물가구조에서 이 특이한 덩치의 존재를 느낀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엄청나게 싸다. 싼 물가수준은 싼 임금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급기술과 고급재료가 필요한 고급상품일수록 국제수준과 가격의 차이가 적다. 자동차는 우리나라보다 더 비싸다. 재래식 주거는 매우 싸지만 고급 아파트는 우리 수준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중국의 덩치를 어떤 식으로 느끼는가. 최저생활 개념에 가까우면서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안정된 생활조건을 누리는 10억 안팎의 인구가 하나의 정부를 쳐다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물가구조의 배경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임금과 물가의 국제수준과의 격차를 매우 천천히 줄여나가고 있고, 대다수 국민은 이 정책에 순응하고 있다. 그 동안 중국의 많은 수출품이 국제시장에서 낮은 임금수준 덕분에 압도적인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중국인의 ‘국가’에 대한 신뢰는 합리주의 원리로 운영되는 서방의 ‘근대국가’와 수준이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는 ‘권위주의’ 국가다. 그런데 그 ‘권위’는 집권세력이 억지로 만들어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권위’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책임과 짝을 이루는 권위다. ‘천명(天命)’에 입각한 유교국가의 권위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서양의 근대국가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권력’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권력과 권위를 함께 운용하는 전통적 국가체제가 ‘국가’의 기본 기능 수행에 더 유리한 점이 있는지, 서양 근대사상의 타당성과 유효성이 널리 의심받는 이 시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공산중국이 유교국가의 특성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시각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훙호펑이 “단기적, 중기적으로 볼 때 과잉 축적 경향과 환경 위기로 인해 중국에서 경기 둔화나 불황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무게 중심이 일반적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될 것”(294쪽)으로 내다보는 근거 역시 국가의 역할에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년간 축적해온 대량의 금융 자원을 제공한다면, 경제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는 소비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재정적 부양 정책과 사회 지출에 의지할 만한 충분한 자금 여유가 있다. (...) 이는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진보 개혁가들이 재분배 및 규제 개혁과 뉴딜 정책의 도입에 대한 대기업의 저항을 분ㄱ쇄할 수 있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293쪽)
지금까지 중국의 성취에서 국가의 역할이 컸다. 일반 국가에서 보기 힘든 강하고 큰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중국의 진로에 국가의 역할이 큰 작용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에 모아놓은 글 중에도 이 관점을 가리키는 내용이 많이 있는데, 엮은이가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여러 사람 글을 여러 사람이 옮긴 책으로는 번역에 안정감이 있다. 조율을 위한 노력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정감이 지나쳐 문제를 일으키는 점도 있다. 예컨대 ‘global’을 일률적으로 ‘지구적’으로 옮겼는데, 그보다 ‘세계’ 또는 ‘국제’가 더 적합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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