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륙의 면적은 약 55백만 평방킬로미터, 지구 표면의 10퍼센트를 조금 넘고 육지 전체 면적의 3분의 1보다 조금 크다.

항해기술 수준이 낮을 때는 사람의 이동이 거의 육지를 통해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초기 발전은 대륙의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 가장 큰 대륙인 유라시아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한 관계를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문명 발전의 주 무대가 되었다.

문명의 가장 강력한 기반은 농업이었다. 그래서 유라시아대륙의 중위도지대를 따라 중요한 문명들이 자라났다. 어느 문명에서나 중세라 할 수 있는 10세기경까지 기독교권, 이슬람권, 힌두권, 한자권 문명이 띠 모양으로 서쪽에서 동쪽까지 자리 잡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명권이 통상 특정 종교로 대표되는 까닭은 문명의 발달에 따라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질서 유지의 보편적 원리가 필요하게 되고 종교가 그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문명 초기의 종교는 작은 규모의 부족이나 종족에 귀속되는 것이었는데, 금속기가 보급되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자 문명권의 대형화에 부응하여 보편종교로 형태를 바꾸게 된다. 기원전 1천년기에 여러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독 한자문명권만이 종교를 간판으로 내걸지 않았다. 그것은 문명권 형성기에 이뤄진 제국 체제가 안정성을 지켰기 때문이다. 제국 체제의 중심 이념인 천명사상도 애초에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제국 중심의 천하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그 종교성이 퇴화하고, 보편종교 아닌 보편제국이 이 문명권을 대표하게 되었다.

한자문명권은 종교의 울타리에 묶인 다른 문명권보다 큰 포용력을 보이면서 특이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지금의 중국이 하나의 다민족국가로 파악되고 인구의 80여 퍼센트를 점하는 주류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칭하는데, 이것은 일반적 민족과 다른 성격의 인구집단이다. 중국은 진 시황의 통일 때부터 다민족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이민족들이 한인(漢人)’ 집단으로 통합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중국을 민족국가 아닌 문명국가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포용력은 문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한자문명권은 일찍부터 높은 정신적-물질적 문명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고, 다른 문명권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안정된 자세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후의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 앞에서 이 자세가 크게 무너졌으나 21세기 들어 원래의 자세를 회복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서(中西) 교섭사에 나타난 중국의 특이한 자세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동서교역에서 중국문명권의 능동적 역할

 

장건의 서역 탐험은 제국 체제를 갓 이룩한 한자문명권이 서방의 다른 문명권과 교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또한 중국의 이후 서방정책의 틀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장건의 여행 이전에도 중국과 서역 사이에 교역활동은 진행되고 있었으나 중화제국을 공식적으로 대표한 장건의 활동으로 인해 국가가 교역활동에 나서면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장건(?~114)의 활동은 무제(재위 전141~87)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16세에 즉위한 무제가 즉위 3년차에 장건을 파견한 데서 그 사업을 매우 중시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진시황이 전221년 천하를 통일했다고 하지만 중화제국이 그때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 지난 한 무제 때에야 안정된 중화제국이 자리 잡은 것으로 나는 본다. 밖으로는 흉노의 위협을 없애고 안으로는 황제의 전제권력이 확립된 것이다.

무제 즉위 십여 년 전인 전154년 오초칠국의 난으로 한 제국의 내부 질서가 안정되고 재정이 확충되기 시작했다. 젊은 무제는 이 재력을 발판으로 흉노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북방정책을 큰 과제로 삼았다. 198년 고조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참패를 겪은 평성의 치욕(平城之困)’ 이래 한나라는 흉노에 대해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취해오고 있었다.

무제가 흉노 공격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전134년의 일이었는데, 5년 전에 장건을 내보낸 것을 보면 즉위 초부터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건에게 주어진 사명은 월지(月氏)국을 찾아가 흉노에 대한 동맹을 맺으라는 것이었다.

한나라 조정이 서방 정보에 어두웠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아볼 수 있다. 월지국은 지금의 깐수성 지역에서 흉노에 대항하던 큰 세력이었으나 장건이 떠나기 30년 전에 흉노에게 격파당해 서쪽으로 이동,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 당시의 헬레니즘 지역 변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장건은 흉노에 잡혀 10년간 포로생활을 한 끝에 탈출해서 옮겨간 월지국을 찾아갔다가 전126, 출발한 지 13년 만에야 장안으로 돌아왔다. 흉노와의 본격적 전쟁은 그 3년 전인 전129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흉노 역시 중국문명권의 일부였다.

 

한나라 초기 흉노 세력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것보다 중서 교섭사의 관점에서 더 생각할 점이 있다고 나는 본다.

전국시대에도 흉노란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후에 한나라 제국과 정면대결을 벌이는 흉노와는 다른 존재였다. 전국7웅 중 최북방에 있던 조()나라와 티격태격하는 수준의 조그만 세력이었다. 그런데 진나라 통일 후에는 제국 전체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 떠오른다.

전국 말기에서 한나라 초에 이르는 전쟁의 시대에 흉노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한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패퇴한 세력이 주변부로 많이 망명했다. 고조선을 탈취했다는 위만도 그런 세력의 하나였다. 흉노로 망명한 세력 중에는 한왕 신과 연왕 노관 등 제후 급까지 있었다. 제철 기술, 전쟁 기술, 통치 기술 등 많은 기술이 이 세력들을 통해 흉노에 전해졌고, 흉노는 이를 활용해 북방 여러 세력을 통합할 수 있었다. 한 문제 때 흉노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투항한 환관 중항열에 관한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을 본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中行說)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單于)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흉노가 장악한 영역은 광대했지만 인구 희박 지역이기 때문에 인구는 작았다. 거의 모든 성인 남성이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중화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군인 노릇만 했다면 생산은 누가 했나? 전투원도 평시에는 생산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거대한 정치-군사 조직을 장기간 유지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군사력을 이용한 약탈이었다. 한나라에서 받는 세폐(歲幣)도 막대한 액수인 데다가, 중서 교역로를 흉노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경제 발전에 따라 서역과의 교역량도 늘어나고 있었는데, 흉노는 약탈이나 통과세 징수를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흉노 세력의 발전은 중국문명권 발전의 한 고리였다. 한나라에서는 흉노를 외부의 오랑캐로 보았지만, 큰 시각에서 본다면 흉노도 같은 문명권의 한 부분이었다. 문명권 발전이 가져오는 이득의 일부를 외곽에 자리 잡고 빨아먹는,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120년경에 흉노를 퇴치함으로써 중화제국의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내가 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사마천이 장건의 이름을 남긴 까닭

 

장건은 두 번째 사행에서 다녀온 이듬해인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사마천은 그의 행적을 <사기> “대원(大宛) 열전에 적었다. 장건의 신분은 열후(列侯)로서 우리 사회로 보면 국회의원 정도? 신분만으로는 사마천이 열전을 세워 줄 위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장건이 죽은 23년 후 완성된 <사기>대원(大宛) 열전을 실질적인 장건 열전으로 꾸몄다. 20여 년 동안 장건의 유업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대원 열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건이 죽은 후) 1년 남짓 지나자 장건이 대하(大夏) 등지에 보냈던 사신들이 모두 파견된 곳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에 서북의 나라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통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건이 이 길을 연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모두 박망후(博望侯, 장건의 열후 호칭)의 이름을 들어 바깥나라의 믿음을 얻으려 했고, 바깥나라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믿음을 주었다.

 

외국을 대상으로 한 6편의 <사기> 열전 중 서역 방면은 대원 열전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질적인 장건 열전이었으니, <사기>를 극도로 존숭한 후세 사람들에게 장건의 이름은 곧 서역 개척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진 시황이 중국을 처음 통일했다고 하지만 진정한 천하제국은 한 무제의 흉노 격퇴로 완성되었다. 중국문명이 정치적 통일체와 경제적 통합체를 이룩한 것이다. 한 무제와 장건 이후 천여 년간 중화제국이 중서교역의 주도권을 지킨 것은 이 통일성과 통합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후한 때의 중국 역사지도를 보면 서쪽으로 커다란 혹이 하나 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칭하이성과 타림분지에 해당되는 이 혹 모양의 지역은 한나라의 정상적 지방행정이 펼쳐진 곳이 아니라 교역로 운영을 위해 주둔군이 배치된 지역이었다. 인구가 희박한 이 지역에는 안정된 조공관계를 맺을 만한 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주둔군을 통해 한나라 조정이 직접 관할한 것이었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북방 초원지대에는 유목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의 길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흉노의 통제력이 사라진 후 한나라 입장에서 이 교역로를 이용하려면 분산되어 있는 유목민 세력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야 했다. ‘사막의 길1-2만의 주둔군만 배치해 놓아도 현지 세력의 도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편리한 길이었다.

중화제국이 운영한 사막의 길과 유목민이 장악한 초원의 길은 교역로로서 경쟁관계에 있었다. 중화제국의 힘이 강할 때는 사막의 길이 활발하게 이용되어 교역량이 커지고, 약할 때는 동서간 교역량이 줄어들었다. 예외적인 상황은 몽골제국 시절이었다. 유목민이 주도권을 쥔 이 시절에는 초원의 길이 거침없이 활용되어 동서간 교역이 다른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성화되었다.

중국은 비단을 위시한 가공제품을 실크로드를 통해 수출했다. 수입품은 무엇이었는가? 장건과 무제 당시에는 막대한 수량의 전마가 도입되었다. 그 수요가 줄어든 뒤에는 옥과 귀금속 등 사치품이 수입품의 주종이었다. 실크로드 교역은 중국의 산업 발전에 작용하기보다는 중국 기술의 전파로 서방의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사막의 길실크로드가 된 까닭

 

동서교섭사 연구자들 중에는 실크로드 외에도 두 개의 중요한 교통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얘기한 초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잇는 바다의 길이다. 나는 이 주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역사 속에서 실크로드가 맡은 역할에 비해 다른 두 길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은 지중해, 홍해, 인도양 등 바다 가까이에서 발달한 다른 주요 문명들과 달리 해양활동에 많이 의존하지 않았다. 남중국해 연안(지금의 광둥성과 푸젠성)이 제국의 중심부에 통합된 것은 장건의 시대보다 몇 세기 뒤의 일이었다. 해로보다 대운하 중심의 내륙수로를 활용한 데서 그 철저한 대륙문명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연안항해를 벗어난 대양항해가 발전한 것은 어느 문명권에서나 14-15세기의 일이었다. 그 전의 해상교통은 낮 동안 항해하다가 밤이면 육지에 기항해야 했다. 중국에서 서아시아 교역권에 해로로 다니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관할하는 수십 개 항구를 통과해야 했다. 험준한 산맥과 광대한 사막보다 더 큰 장애였다. 바닷길을 손쉬운 교통로로 보는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착각이다.

초원의 길 역시 지형과 자연조건은 교통로로 적합해 보인다. 실제로 스키타이인의 청동기 기술 전파는 초원의 길을 통해 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업적 교역활동을 위한 조건에는 맞지 않았다. 융가르 초원의 저쪽, 지금의 카자크스탄 방면은 상인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좋은 시장이 없었다. 그리고 초원지대는 농경지대보다는 인구가 적어도 사막지대보다는 많아서 크고 작은 유목민 세력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위협과 부담을 주었다.

사막의 길은 험한 자연조건 때문에 인구가 희박했고, 중국의 중세제국이 경영하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60년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감숙회랑(甘肅回廊)과 타림분지를 포괄하는 중국 쪽 절반이 한나라의 일원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자 상인들의 위험과 부담이 크게 줄어들어 교역이 이 통로로 집중되었다. 이 길은 장건 이전에도 사용되고 있던 길이었다. 장건의 탐사를 계기로 한나라가 교역로로서 제도화했기 때문에 교통량이 크게 늘고 역사상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2세기에 한나라가 쇠퇴하면서부터 7세기에 당나라가 서쪽으로 다시 손을 뻗칠 때까지 이 지역은 중화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교역로를 따라 발생한 도시 등 기반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지역을 장악하는 지방 정치세력도 교역로의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에 교역로의 역할이 유지되었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의 여행 때까지도 실크로드의 이용이 활발했던 사실을 그의 기록으로 알아볼 수 있다.

1557년 명나라가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기지 사용을 허가하면서 중서교역의 주축이 바닷길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막의 길이 계속 이용된 사실은 1605년 가톨릭 수사 핀토 데 고에스의 여행으로 확인된다. 고에스가 인도의 고아에서 출발하며 생각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라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나오는 카타이(Cathay)였다. 긴 여행 끝에 쇠약한 몸으로 돈황에 도착한 고에스를 베이징에 있던 선교사들이 영접하러 가면서 폴로가 여행한 나라가 중국이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분명해졌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유럽인이 동서교역을 장악하기 전까지 실크로드는 근 2천 년에 걸쳐 중국이 대외교역에 임하는 능동적 자세를 체현한 제도였다. 서양 중심의 근대 세계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속출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은 중화제국이 대외관계의 능동적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Posted by 문천

 

한 사람의 뜻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길을 두 갈래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힘으로 특정 행동을 강제하거나 금지하는 물리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심리적 방법이다.

물리적 방법은 결과를 예측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효과의 확산력이 없다. 우두머리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무력이든 재력이든)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심리적 방법은 따르는 사람의 주관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효과가 불확실한 면이 있지만, 제대로 작동이 될 경우 널리 전파되고 크게 확산될 수 있다.

지도력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가용자원의 범위를 넘어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다. 따라서 물리적 방법보다 심리적 방법이 지도력의 핵심 내용이다. 물론 지도력의 발휘가 마음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힘과 마음을 배합해서 운용하게 되지만 효과의 확장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지속적인 지도력이 아니라 그 시점의 지배력에 그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 호소력의 시간적-공간적 범위에 차이가 있다. 작은 범위의 사람들만 공감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공감이 가지만 오래 못 갈 수도 있다.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호소력이라야 한 사회를 지속적으로 이끄는 지도력이 될 수 있다.

문명 초기부터 인간사회에서 도덕을 탐구한 것은 파멸이 분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도덕성에 입각한 지도력을 갖춘 사회는 개인 간의 투쟁보다 협력을 조장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덕을 제도화하는 노력이 일어났는데, 종교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발전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국가가 도덕의 제도화에 활용되기도 했다.

 

 

유교국가의 권위주의

 

현대사회에서 지도력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은 도덕의 제도화가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교회든 국가든 제도화된 도덕적 지도력이 확립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곳에서 지도력을 찾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혼란을 피하기 위해 3의 지도력을 억누르기도 한다.

3의 지도력에 대한 교회나 국가의 억압을 권위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안정성의 필수적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존 체제의 도덕적 권위가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대다수 인민이 안정된 생활조건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성에 대한 집착이 지나칠 경우 지도력의 근거인 도덕성이 변질될 수 있다.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16세기에 도덕성의 훼손을 수습하지 못하고 종교개혁을 겪었다. 중국에서는 왕조의 도덕성 침식이 한도를 넘을 때를 대비해 혁명(革命)’의 안전판을 마련해 놓았다.

중국에서는 국가가 천명(天命)’을 내세워 도덕적 권위를 행사하는 제도가 일찍부터 발전했다. 이 제도를 조선에서도 받아들여 임금의 도덕적 지도력을 중시했다. 이 이념을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애쓴 임금이 세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념도 완벽한 구현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바람직한 것도 아닐 것 같다.) 세종의 아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왕조의 도덕성에 균열이 생겼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이 왕권과 별도의 도덕적 권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공식적 권위로서 왕권과 비공식적 권위로서 사림의 병립은 선조 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몇 차례 사화가 있었지만 체제의 근본을 흔드는 사태는 아니었다. 왕권과 사림 사이의 건강한 긴장상태가 계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왕조의 권위가 크게 무너진 후 유교국가의 기본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擇君)’ 인조반정을 통해 왕권은 땅에 떨어졌다. 18세기를 통해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기까지 왕권 회복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왕조 쇠퇴의 대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강화도령철종과 개똥이고종의 느닷없는 즉위 등 왕권의 실종을 보여주는 사태가 거듭된다. 

 

 

조선 말 위기의 3개 층위

 

고종이 즉위하던 1860년대에는 조선사회의 위기가 안팎으로 겹쳐졌다. 내부적 위기인 왕조의 쇠퇴는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어서 국가 기능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던 사실을 무엇보다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 위에 국제정세의 변화가 외부적 위기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외부적 위기는 동아시아 천하체제의 주축인 청나라의 동요를 통해 닥쳐왔다. 아편전쟁도 적지 않은 충격을 일으켰지만 베이징이 함락당한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위기의식에 휩싸인 청나라가 양무(洋務)운동에 나서면서 조선의 개항도 시간문제가 되었다.

대원군 집정기(1864-1873)에는 척화(斥和)의 깃발을 억지로 지켰으나 그가 물러나자 개항의 봇물이 터졌다. 그로부터 시작된 개항기는 혼란의 시대였다. 왕조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 외세가 밀려들어와 권력의 난립을 이루었다. 이 혼란이 망국(亡國)’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첫째, 왕조의 멸망. 5백여 년에 걸쳐 한반도 주민의 생활과 활동의 큰 틀로 작용해 온 조선의 멸망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왕조의 멸망이 유교국가의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히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부에 걸친 격변의 시대에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더 해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둘째, 이민족 지배. 중국에서는 이따금 일어난 일이었지만 한반도에서는 민족국가 역사상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시대에 이민족 지배를 받은 사회가 전 세계에 많이 있었지만 일본의 한국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는 다른 곳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는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 뒤에도 세계 변화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셋째, 전통문명의 단절. 친일파를 필두로 한 외세의존적 매판세력에게 권력(무력-재력-학력)이 집중되면서 전통적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민족정체성이 흐려졌다. 이 문제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사회에 닥친 위기는 여러 층위가 중첩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에도 혼선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응의 가장 강력한 주체여야 할 왕조의 권력과 권위가 모두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응 주체가 형성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방향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개화파 지도력의 허실

 

개항기의 여러 움직임 가운데 개화파를 선각자로 받드는 풍조가 있어 왔다. 반성이 필요한 풍조다.

선각자라 함은 개화’, 즉 근대화의 필요성을 앞장서서 깨닫고 실천에 옮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개화의 이름을 소위 개화파가 독점하는 데 문제가 있다. 개화파에 대비시키는 수구파중에도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실천에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일본을 모델로 하느냐, 청나라를 모델로 하느냐, 즉 친일파냐 친청파냐 하는 차이에 있었다. 후세의 일본인들이 친일파를 옹호하기 위해 개화의 이름을 독점시켜 준 것이다.

물론 개화파 중에도 친일에 쏠리지 않고 주체적 개화를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다. <서유견문록> 내용을 높이 평가한 글을(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725) 최근에 봤는데, 유길준도 그런 예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김옥균, 박영효 등 널리 알려진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의 이념보다 친일의 정략에 더 투철한 사람들이 많았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시작된 갑오경장 당시 총리대신을 맡았던 김홍집(1842-1896)과 박영효(1861-1939)의 거취를 비교해 본다. 김홍집은 온건개화파로 일본보다 청나라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일본은 그의 명망 때문에 경장 내각의 수반으로 앉혔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도망했다가 일본군 등에 업혀 10년 만에 돌아온 박영효는 내무대신을 맡고 실세노릇을 하다가 몇 달 후 김홍집이 물러나면서 총리대신 서리가 되었다.

그런데 두 달도 안 된 18957월 박영효는 민비 시해 음모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다시 도망했다. 그리고 김홍집이 총리대신으로 복귀했는데 몇 달 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몇 달 후 아관파천 때(18962) 군중에게 맞아죽었다. 오카모토 다카시는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소와당 펴냄)"프롤로그"에서 김홍집의 죽음을 부각시켰다.

 

청일전쟁 직후 당시의 김홍집은 일본의 지지를 얻어 수차례 내각을 조직하고 근대화 개혁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국왕과 왕비를 정부에서 분리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왕실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189510월 일본이 경복궁에서 민비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김홍집은 일본의 뜻대로 이 사건을 유야무야 수습하려다가 왕인 고종의 신임을 잃고 만다. (...)

이러한 불온한 공기 속에 민비 살해 이래로 고종과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끼던 친러파 관료들이 결탁한다. 그들은 곧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고 거기에서 신정부를 조직한다. 그런 뒤 김홍집 등 구정권의 요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포박을 명령했던 것이다.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실현되었다. 상하 관민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상실한 것에 절망했기 때문일까? 김홍집은 담담하게 죽을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김홍집이 떳떳이 죽음을 맞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가 민비 시해사건을 원만히 수습하려 애쓴 것이 군중의 분노를 산 것이지만, 국정 담당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당시의 뜻있는 사람들은 이해했던 것이다. 반면 박영효는 일제강점기에도 귀족 대접을 받으며 아흔 가까운 나이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충간(忠奸)의 경계가 애매한 시대상황이 있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실권을 잡은 여 태후가 여 씨 일족을 제후에 봉하고 싶어서 대신들의 의견을 청했다. 우승상 왕릉은 유 씨가 아니면 제후에 봉하지 않는다고 한 고조의 맹서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좌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은 태후께서 황제 노릇을 맡으신 이상 여 씨를 제후에 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찬성했다. 조회가 끝난 뒤 왕릉이 진평과 주발에게 선제와의 맹서를 어겼다며 꾸짖자 두 사람은 대답했다. “조정에서 바른말 하는 데는 우리가 당신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직을 지키고 왕조의 앞날을 확실히 하는 데는 당신이 우리보다 못합니다.” 왕릉은 대꾸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보는 의병 정신

 

개화파와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주장이고 그 구체적 모습으로 의병이 떠오른다. 구체제에 집착하며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자세를 흔히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반성할 점이 있다. 가장 명망 높은 의병장의 한 사람인 유인석(1842-1915)<우주문답(宇宙問答)>이란 글을 남겼는데, 정치, 사회, 학문, 종교, 윤리, 교육 등 문명 전반에 걸친 40개 주제에 관한 문답 형식의 이 글에는 당대 어느 개화론자 못지않은 넓고 깊은 식견이 담겨 있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하여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하였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하였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하였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수구인(守舊人)’을 자임했지만, 변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오늘날의 수구파와는 다른 뜻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더라도 내 자세를 바로 갖춘 뒤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살펴볼 때는 그 당시의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만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개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였다고 하는 오늘날의 관점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는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얻을 길이 없다.

의병이 군사 활동을 효율적으로 벌이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비판도 승패만을 중요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 얽매이는 것이다. 서울 가까이 의병이 집결했을 때 과감하게 진군하지 않고 둘러앉아 입씨름만 하다가 대세를 그르쳤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근사 활동보다 도덕적 시위에 의병(義兵)’의 원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야기다.

유교 질서는 무력 사용을 억제하여 전쟁과 예악(禮樂)을 천자만이 주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제후는 천자의 위임을 받아 주재했다. 임금의 명령 없이 민간에서 무력을 일으키는 것은 명분에 관계없이 원천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의병이란 천하 질서가 비상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 의병이 나타난 후 1895년에 와서야 다시 의병이 나타났다.

궁궐이 짓밟히고 왕비가 살해당한 을미사변은 250년 만에 의병을 일으킬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국왕과 조정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따지는 것은 국왕과 조정이 지켜진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자 일부 의병이 무기를 내렸고, 1년 후 고종이 환궁하자 거의 모든 의병이 해산했다. 국왕과 조정이 주권을 회복한 상황에서는 의병의 명분이 해소되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전면적으로 침해됨에 따라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077월 고종의 강압에 따른 퇴위와 뒤이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전국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초 1만 의병의 양주 집결이 가장 적극적인 출동이었다. 당시 서울 진격을 주장한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진격을 반대한 주장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명목상의 임금(순종)이 존재하는 도성에 진격을 삼가고 민의를 시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유교 질서의 기준에는 합당한 것이었다.

의병 운동이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경시하는 것 역시 결과만을 중시하는 지금의 세태에 얽매인 단견이다. 그런 기준으로는 독립운동과 광복군의 의미도 무시될 것이다. 당시의 세계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면에 있었다. 일본을 위시한 외세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정면대결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의 선인들이 어떤 을 행사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을 세웠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고 한 말이 널리 회자된다. 이 말의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현재의 의미다. 우리의 근대적 사고를 지배하는 진보주의 관점에서 현재는 과거보다 진보된 상태이므로 현재의 관찰자는 덜 진보된 과거를 내려다보기 쉬운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갖추고 있는, 또는 갖춰가고 있는 발전된 탐구방법을 통해 과거의 사실을 우리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는 과거로부터 지혜를 얻는활동으로서 역사학의 의미가 부정되거나 축소된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도 그런 관점 덕분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류사회의 진보가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던 후쿠야마도 2008년 금융위기 앞에서는 관점을 수정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가 금융위기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1970년대 이래 예견해 온 월러스틴과 아리기 등 비교사회학자들의 세계체제론이 부각되고 있다. 그들은 유럽중심주의가 빚어온 많은 착시 현상을 지적해 왔는데, 역사진보주의도 그중 하나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성립하려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현재가 과거를 깔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가르침을 찾으려 애쓸 때 대화로서 역사학의 의미가 살아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현재가 과거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에 매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19세기 말 조선사회에서도 근대화의 원조랄 수 있는 개화를 내세운 사람들이 길을 잘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의 세계관으로 1880년대의 현상을 재단한 것이다. 그런 눈으로 1880년대 개화파의 지도력을 평가하는 것은 1980년대의 근대화주의를 증폭하는 방편일 뿐이지, 1880년대 사람들에게서 가르침을 얻는 길이 아니다.

서세동점 현상은 19세기 후반 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고통과 치욕의 길에 빠져드는 배경조건으로서 압도적 위세를 떨쳐 왔다. 식민지 전락과 민족 분단의 근본 원인이 이 현상에서 나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21세기 들어 이 현상의 해소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서세동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생각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던 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성하기 위해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필요가 절실해졌다. 개화파를 의심쩍게 보고 위정척사파를 숭상하던 19세기 말 당시의 민심을 무지몽매한 것이었다고 오만하게 내려다보기보다, 우리가 그 동안 잃어버린 지혜가 그 안에 들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열심히 찾아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1. 40년 내력 역사학자의 4년 작업

 

김기협의 <해방일기> 전 10권이 완간되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해방 3년의 역사를 매주 2∼3건의 토픽을 정해 '일기'의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완간 후 신문 인터뷰를 보니 원고 분량이 1만8120매에 달한다고 한다. 매일 12시간 이상씩 자료를 정리하고 집필하는 데 꼬박 4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필력과 정력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도 아직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작업이다. 이 일을 4년을 끌고 온 노력과 집중력에 일단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왜 '해방일기'인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이 있다. 저자는 '일기(日記)'보다는 '일지(日誌)'가 더 정확한 이름이겠지만, 조금이라도 일기의 주관적 특성에 접근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기'라고 이름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1권 19쪽). 기획 의도는 198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참조해 <해방 전후사의 인식> 다음 단계의 담론을 제시하려는 목적이었다(7권 345쪽). 또 저자는 연재 중 <해방일기> 작업이 완료된 후 1948∼1987년까지를 다룬 <대한민국 실록>을 한때 계획하기도 했다. 에세이 성격으로 계획했던 이 4개년 집필 구상은 중단된 것 같지만 저자의 뚝심과 도전 의지를 알 수 있다.

이 작업의 형식적 모태는 아마도 부친 김성칠의 일기 <역사 앞에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칠은 해방 이후 꾸준히 일기를 써왔는데, 매일의 반복적 일상을 기록하기보다는 역사학자로서 시대의 흐름과 결을 파악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평자는 수년 전 <역사 앞에서>의 해제·교감 작업을 한 바 있는데, 김성칠의 글솜씨와 탁월한 시대 비평에 탄복한 바 있다. 김성칠은 한국전쟁기 주요한 상황적 단서들을 중심으로 시대에 대한 가감 없는 비평을 거리낌 없이 기록했다. 전쟁 중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를 기록한 것이다. 문체는 단정하고 평이해 잘 읽혔고, 나아가 대격변의 시기에 중도적이며 이성적 판단을 덧붙임으로써 후세 독자들의 호평을 얻었다. 김기협도 부친의 일기 쓰기 형식을 빌려와 이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역사학자라는 직업과 일기라는 글쓰기 형식을 물려받았고, 나아가 탁월하고 평이한 글솜씨를 물려받은 것 같다.

ⓒ너머북스

ⓒ너머북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도 '일기' 형식에 있다.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남들에게 쉬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속내와 생각을 적기 쉬운 형식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는 윤치호의 것인데, 그는 1883년부터 사망하던 1945년까지 일기를 썼다. 그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1889년부터 영어로 일기를 썼다. 반백년 이상 한국 사회 상층에서 경험한 개인과 사회, 시대에 대한 온갖 단상들을 거리낌 없이 기록했다. 윤치호 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이 일기를 영원히 비밀의 공간에 감춰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겠구나 하고 느끼는 대목들이 있다. 독자를 생각하고 쓴 느낌이 강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김성칠의 한국전쟁기 일기 역시 미증유의 역사적 대사변을 맞아 그 속에서 생동하는 현실과 가장으로서 삶, 역사가로서 소회 등을 내밀한 개인 기록 형식을 통해 표출함으로써 울림이 강했다. <해방일기> 역시 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해방 3년사를 다루면서 저자의 판단과 시각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대를 재해석하려 했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미시적으로 다루면서 화자의 적극적 평가를 강하게 배합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이 책은 김기협이라는 저자가 아니면 누구도 도전하거나 마무리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그는 "여생을 바치게 되기 쉬운 이 거창한 작업, 참고할 포맷도 없는 이 막막한 작업"을 구상 후 한 달 만에 착수하게 되었고,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 내 삶이 배치되어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라고 책머리에 쓰고 있다. 시작하던 소회였지만, 끝맺는 소회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매우 특이한 역사학자이다. 전도유망한 물리학도였으나 뜻이 있어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동양사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가 되었으나 강단을 떠나 전업 문필가로 변신하였다.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방랑자이자 기인이랄 수 있겠다. 자유분방한 재사(才士)이자 박람강기한 문사(文士)의 대표 격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개인적·학문적 풍상을 겪으며 동서양과 한국사를 넘나드는 40년의 내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문필적 재능과 역사학자 40년의 내력이 이 책을 가능케 했다. 학회지 논문 편수에 얽매인 강단 역사학자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범주의 작업이다. 다른 한편 자극적이고 말초적 가공으로 대중을 현혹하거나 전문학자의 성과를 슬쩍 베끼거나 역사학계 비난을 책 판매의 도구로 사용하는 축과는 격이 다르다.

현대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치밀하고 정교한 자료의 연계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평가가 과도하거나 인색한 측면이 있으나, 부족한 자료와 증거들은 역사학자의 뛰어난 상식적 감각으로 채워 넣었고, 인물과 사건에 대해선 주저함 없는 적극적 평가를 덧붙였으며, 못다 한 얘기는 안재홍과의 가상 담화를 통해 해설했다. 유려하고 매끈한 솜씨가 돋보였다.

 


2. 연대기와 적극적 평가의 교직

먼저 이 책의 형식을 살펴본다. 총 10권의 부제, 머리말, 간략한 소목차만 적어보자.

해방일기 1 (1945. 8. 1∼10. 29)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머리말 :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년 8월 전반)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이들(1945년 8월 후반)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1945년 9월 전반)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1945년 9월 후반)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1945년 10월 전반)
6. 이승만의 등장(1945년 10월 후반)

해방일기 2 (1945. 11. 1∼1946. 1. 31)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
머리말 : 독립의 길을 험하게 만든 반탁운동
1. 이승만, 주도권을 선점하다(1945년 11월 전반)
2. 기다리고 기다린 임정의 귀국(1945년 11월 후반)
3. 좌우대립의 선봉장 이승만과 박헌영(1945년 12월 전반)
4. 파국을 향해 떠내려가는 조선(1945년 12월 후반)
5.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대립의 격화(1946년 1월 전반)
6. 쪼개진 임정, 굳어진 좌우대립(1946년 1월 후반)

해방일기 3 (1946. 2. 1∼4. 30)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
머리말 : 미국과 소련이 조선에서 원한 것
1.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1946년 2월 전반)
2. 해방공간의 미소 대결, 극심한 좌우 대립(1946년 2월 후반)
3. 민심을 읽지 못한 미군정 정책(1946년 3월 전반)
4. 미소공동위원회 개막(1946년 3월 후반)
5.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조적 문제(1946년 4월)

해방일기 4 (1946. 5. 2∼8. 31)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
머리말 :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휴회(1946년 5월 전반)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1946년 5월 후반)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1946년 6월 전반)
4. 좌우합작 추진(1946년 6월 후반)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1946년 7월)
6. 해방1주년을 돌아보다(1946년 8월)

해방일기 5 (1946. 9. 2∼12. 30)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
머리말 :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
1.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1946년 9월)
2. 좌우 대립 격화의 분수령, 대구사태(1946년 10월)
3.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역할과 의의(1946년 11월)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1946년 12월)

해방일기 6 (1947. 1. 2∼4. 30)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
머리말 :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1. 반탁운동 재개와 건국 노선 갈등(1947년 1월)
2. 김구·이승만의 동상이몽(1947년 2월)
3. 외세에 따른 분단 건국 vs. 통일 건국(1947년 3월)
4. 미군정, 친일파에게 친미파의 길을 열어주다(1947년 4월)

해방일기 7 (1947. 5. 2∼1947. 8. 31) 깨어진 해방의 약속
머리말 : 냉전의 시작과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탄
1. "이박사 지령 앞에 무서울 것이 없다"(1947년 5월)
2. 미소공위, 성공의 희망이 보인다(1947년 6월)
3. 여운형의 죽음에서 조선의 현실을 본다(1947년 7월)
4. 미국은 미소공위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1947년 8월)

해방일기 8 (1947. 9. 3∼1947. 12. 31)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
머리말 :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1. 미소공동위원회를 떠나 유엔으로(1947년 9월)
2. 미군정이 키워낸 '부패공화국'(1947년 10월)
3. 38선을 굳힌 것은 누구였던가?(1947년 11월)
4. 어지러워진 김구의 행보(1947년 12월)

해방일기 9 (1948. 1. 2∼1948. 4. 29)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
머리말 : 김구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1. 유엔에서 온 '칙사'들(1948년 1월)
2. 진면목을 찾은 김구(1948년 2월)
3. 남북협상의 동상이몽(1948년 3월)
4. 목소리를 빼앗긴 민족주의(1948년 3월)

해방일기 10 (1948. 5. 1∼1948. 8. 14) 해방을 끝장 낸 분단건국
머리말 : 대한민국을 '권력의 시장'으로 만든 이승만
1. 해방 조선의 비극을 대표한 제주 '폭동'(1948년 5월)
2. 유엔은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1948년 6월)
3. 독재의 길을 닦는 이승만(1948년 7월)
4. 독립 아닌 건국(1948년 8월)
연재를 끝내며 : 내일의 민족주의를 생각한다

번호가 붙은 소목차 밑으로 최대 23개에서 최소 6개의 작은 꼭지들이 달려 있다. <프레시안> 1회 연재 분량이다. 1945년 104꼭지, 1946년 172꼭지, 1947년 131꼭지, 1948년 89꼭지를 다루었다. 37개월 동안 총 496개 꼭지를 다루었다. 이 작은 꼭지 제목만을 적어도 수십 페이지 분량이 될 것이다. 일단 해방 3년의 매달별로 연재한 꼭지 수를 정리하니 다음과 같다.

ⓒ정병준

ⓒ정병준



평균을 내보니 1개월에 13.4개 꼭지를 다루었다. 연재를 처음 시작한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까지는 매달 20여 건에 달하는 꼭지를 다루었다. 1946년 4월 이후부터 1946년 8월호까지는 14∼15꼭지의 과도기를 거쳐 1946년 9월부터는 12건 내외의 꼭지를 매달 다루었다. '꼭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제1권에 수록된 1945년 8월분을 살펴보자.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15일
1945. 8. 1.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1945. 8. 2. 포츠담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1945. 8. 3. 폴란드의 해방 아닌 해방
1945. 8. 4. 모겐소가 부끄러워한 지독한 점령정책, '모겐소 플랜'
1945. 8. 5.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밥'
1945. 8. 6.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1945. 8. 9.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참극
1945. 8. 10. 일본의 항복 시점이 미·소 지분을 결정했다
해방의 시공간 - 1945년의 세계
1945. 8. 11. 미-소의 '눈치 보기' 속에 그어진 38선
1945. 8. 12.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
1945. 8. 13. '항복'이라는 마지막 칼자루를 쥔 일본
1945. 8. 15.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나요?

1945년 8월 전반기를 다루면서 모두 12개의 주제를 정해서 정리한 것이다. 한 꼭지는 단순하게 하나의 사실, 인물을 다룬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 흐름과 갈래 중 핵심적인 사안을 정해 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쓴 것이다. 해방 3년의 3∼4개월이 책 한 권으로 묶였고, 해방 3년사가 총 10책이 되었다.

과문한 탓인지 <해방일기>와 형식적인 면에서 동일한 시도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유사한 책들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최영희의 <격동의 해방 3년>이다. 국사편찬위원장 시절 최영희 선생은 신문기사 스크랩을 중심으로 해방 3년사를 실록처럼 정리한 <자료 대한민국사> 전7권을 편찬한 바 있다. 해방 3년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상세 일지와 연보를 제공하는 책이다(현재는 한국전쟁 휴전 시점까지 다룬 총 29권이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 내용의 일부를 축약해 일간지에 연재했는데, 이것이 훗날 단행본으로 묶인 것이다. 이 책은 주요 일지와 사건을 정리했지만, 논평이나 흐름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무색무취에 가까웠다. <자료 대한민국사>는 이후 해방 3년사의 길잡이 역할을 했고, <해방일기>도 이 책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같은 뿌리에서 갈려나온 한 갈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오소백), <해방 20년(목격·내막·증언)>, <한국 근세 30년사> 등이다. 오소백의 책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연도별 주요 일지를 정리하고 특정 사건들에 대해 해설을 붙인 책이다. 다음 두 책은 8․15, 건국, 6․25, 휴전, 4․19, 5․16 등 주요 주제를 정하고 그 밑에 작은 제목의 글을 수록한 형태이다. 다만 해방 3년에서 다룬 주제는 10여 개에 불과했다.

형식적으로 이 책과 가장 유사한 것은 한국편집기자협회가 펴낸 <(기자가 본) 100大 뉴스 : 事件 365日>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1985년 이래 매년 편집기자들이 선정한 100대 기사를 심층 분석해 놓은 것이다.

해방 3년사를 대상으로 한다면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나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산책>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들은 주제별·통사적 접근을 하고 있으되 연대기적 묘사가 강하지 않다.

정리를 하면 이 책은 연대기적 서술과 적극적 평가를 버무린 독특한 글쓰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신문에 연재된 것이므로 평가가 강조된 소제목을 앞세운 인상도 강하다. 이 책은 전문적 학술 연구는 아니다.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적극 활용한다고 했으나, 저자가 주로 의지한 연구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자료의 주된 출처는 이미 공개되어 있는 당시의 신문류로, 앞서 언급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대한민국사> 및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을 주로 참조했다.

 

 
3. '열린 보수주의자'의 중앙노선

이 책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해방 3년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자. 이 책에서 특징적으로 제시된 저자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자세·관점은 '열린 보수주의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이다. 자료와 근거가 있으면 서술하고 비평하지만 없는 사실을 조작·창작하지는 않는다는 역사학계의 오랜 전통을 강조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연재가 4년여에 이르면서 저자와 인터넷 언론사 관계자들이 내란음모죄로 고발까지 당할 정도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은 오랫동안 '열린 보수주의자'의 시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7권 331쪽). 저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해온 정통성과는 다른 의미의 정통성을 모색할 뿐"라고 썼다. 저자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으나 아끼는 내 나라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너무 크게 봐서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세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정체성 위에 세우는 자세란 말인가? 한편 뉴라이트처럼 그 정당성을 절대화하는 태도에서는 더 큰 문제를 본다.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가로막으려는 야비한 술책이기 때문이다. (8권 155∼156쪽)

<뉴라이트 비판>, <밖에서 본 한국사>, <망국의 역사> 등 수년래 저자의 노력이 모두 한국 근현대사를 비판적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자기 성찰적 미래를 열어가자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반성 능력, 자기비판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사상가인 후지타 쇼조(藤前省三)가 일본인들의 자기비판 능력 결여를 비판하며 행한 발언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하다.

"그 나라의 문화적 성숙도는 국민들에게 얼마만큼 자기비판 능력이 갖추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자학과 자기비판은 다르다. 자기비판은 자기만족의 반대이고, 자신의 그릇된 점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자기변혁을 수행해가는 고도의 지적이고 심리적인 작업이다." "참된 의미에서의 예리한 역사의식, 긍지로 여길 수 있는 역사의식이란 자기비판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기비판이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용기에 차 있다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지적 능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나카무라 마사노리, <일본 전후사 1945∼2005>, 223∼224쪽) 아마도 김기협이 지향하는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 책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것은 분단건국이 내인론(內因論)보다는 외인론(外因論)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 책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 가운데 상대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더 중한 편이었다고 본다.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군림의 자세를 취한 것과 달리 소련군은 '해방군'의 자세를 지키려고 애썼다(2권 6쪽), "해방 조선의 자연스런 진로를 왜곡한 외세로서 미국의 역할이 소련보다 압도적으로 컸다"는 커밍스의 관점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만, 커밍스는 이를 지나치게 일관적이고 확정적인 것으로 본 점에 불만이 있다(7권 345∼347쪽). 소련은 조선의 주권을 적극 인정하는 공식적 관점을 따른 반면 미국은 조선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현실적 관점을 취했다. 그래서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를 육성, 지원한 것과 달리 이남의 미군은 조선인을 통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5권 5∼6쪽).

평자 역시 분단의 주요 동력이 외세에 있었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다만 현상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미국 책임론 강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은 모두 강대국으로서 남북한에 '우호적 정부' 수립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를 추구했고, 다만 대한 정책의 수단과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기 군사 점령, 군정 실시, 신탁 실시 후 독립이라는 대한 정책을 구상했고, 그 주된 지렛대는 미국이 갖고 있는 국제 외교 자원·능력의 우위였다. 즉 국제적 우위가 미국의 강점이었다. 미국은 군정 실시와 직접 통치를 정책적 선택지로 택했으므로 해방 후 남한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면 소련은 태평양전쟁기 구체적 대한 정책을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지리적으로 소련과 연결된 한반도가 오랫동안 식민 지배와 계급 갈등 속에 민족 문제, 계급 문제가 폭발 일보 전이라고 판단했다. 즉 한반도는 혁명적 상황이기 때문에 직접적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친소적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소련의 대한 정책은 대소 우호적 정부의 수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이 제안한 다자 간 국제 신탁통치나 한반도 내부의 동력을 중시한 즉시 독립 방안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련의 강점은 국내적 우위였으며, 대한 정책은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통치와 현지화였다. 이것이 북한에서 구현될 때 소련이 앞장선 것이 아니라 한인들이 주인인 것처럼 비쳤을 뿐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행해진 주요 정치·정책의 최종 결정권은 크레믈린에 속해 있었다.

한편으로 미소는 해방 후 1945년 12월까지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태만을 통해서 한반도를 혼란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미소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신의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현지 정부, 경찰, 군대를 창설했으며,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고, 누가 좀 더 적극적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마치 거울을 마주 보듯, 미소 양군은 상대방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의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남북한은 서로의 거울이었고, 한쪽의 압력은 다른 쪽으로 그대로 이전되었다. 거울 효과이자 풍선 효과였다. 북한이 민주기지로 거듭날수록 남한은 자유기지, 반공기지로서 성격이 강화되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북한에서 '민주기지노선'을 채택해 5도행정국­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 2)­북조선인민위원회(1947. 2)의 길을 걸었다면, 미군정은 남한에서 일종의 '자유기지노선'을 채택해 정무위원회 계획(1945. 10)­민주의원(1946. 2)一입법의원(1946. 12)·과도정부(1947. 4)에 이르는 '과도정부' 형태를 만들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라는 공식적인 외교 합의가 존재했지만, 서로 자국군이 주둔한 남한과 북한을 공고히 함으로써 미소·남북·좌우의 협력과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인민위원회', '과도정부', '자율정부', '단독정부'로 불리는 분단의 이명(異名)이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이 책이 제시한 새로운 시각은 해방 후의 대립 구도는 좌익과 우익의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도파와 극단파의 중극(中極) 대립이었다는 주장이다. 김기협은 "해방 후 좌우 대립은 이념 대결이 아니라 중도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극좌와 극우가 평행선을 그린 정략 대결"이라며(2권 6쪽) 중도파를 재평가하기 위해서 '좌우 대립'이 아닌 '중극 대립'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극좌·극우파는 외세로부터 힘을 얻은 반면 중간파는 민심의 지지로부터 힘을 얻었으나 결국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는 것이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4권, 8∼9쪽).

나는 이러한 주장과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 대해 오기영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좌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합당한 복수 수준을 벗어나, 넘치는 복수를 거듭한 결과, "좌는 모두 극렬분자가 되어 버렸고, 우는 모두 반동분자가 되어 버렸다. 이를 해탈하고 충고하라는 부류는 기회주의자로 분류되었다"고 한탄했다. 조선에는 극렬분자, 반동분자, 기회주의자뿐이라는 그의 하소연은 비극적인 해방 정국의 민낯을 드러내준다. 오기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에 속한 아버지는 반동분자요, 좌에 속한 아들은 극렬분자인데 만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만있으면 이근 기회주의자요, 부창부수로 각기 남편을 따라서 고부마저 진영을 달리하면 극렬과 반동은 뚜렷할까 모르거니와 이것이 도시 이 집안의 흥조(興兆(냐 망조(亡兆)냐. (482∼384쪽) <신천지> 1권 6호(1946년 7월)

한국에서 중도파 혹은 중간파는 이상주의자, 비현실주의자로 규정되고 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어느 곳에서 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김규식과 안재홍은 납북되어 역사에서 마멸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소 대결, 좌우·남북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좌우 합작, 남북 협상을 주장하는 비현실적 노선을 취했고,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오랫동안 이들의 노선은 가장 현실적인 노선이었고,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한반도는 미소라는 진영의 대립, 남북이라는 지역의 분립, 좌우라는 사상의 대결 구도 하에 놓여 있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한반도가 통일·독립을 목적으로 한다면 미소·남북·좌우 대립이라는 3층위의 중층적 대립 구도를 타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소와 협상하고, 좌우가 연합하고, 남북이 합작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민족의 분열, 국토의 분단, 통일·독립의 좌절, 동족상쟁의 앞날이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가장 쉽고 간단한 미국·남한·우익, 소련·북한·좌익이라는 일극적(一極的) 노선을 취했다.

해방 후 중간파는 한반도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인정한 위에서 이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 주체들이었다. 안재홍은 중간파, 중간노선이란 호명에 대해 '중간'이란 어구부터 배격했다. "소위 극좌 극우의 편향노선에 비추어 진정 민주주의노선은 그 상대성에 당연히 중앙노선이 가하다. 중앙노선은 민족자주노선, 독립기본노선, 신민주주의의 사회건설의 토대 위에 구축 현현되는 신민족주의노선, 독자적인 민주독립노선이다."(9권, 165∼166쪽). 가히 안재홍다운 '중앙노선'의 주창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 중앙노선은 존립하기 어려웠다. 여운형은 미군정에 드나들었지만, 소련군 고위 장교들과도 회담했고,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며,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방북해 남북 합작을 추구했다. 해방 후 분단이 가시화되기 전 공개적으로 방북해 남북 합작과 통일을 모색한 것은 여운형이 유일했다. 해방 후 남북한 정치인들은 38선을 금단의 경계선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각각 자신이 속한 서울과 평양의 권력 강화에만 몰두했다. 분단내인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1945∼1948년간 남북 주요 정치인들의 평화통일·남북합작 외면·회피는 가장 중요한 귀책사유에 해당했다. 여운형의 노선은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이성적 판단이었고 현실적 접근이었다. 그러나 극단적 입장에 선 정적들은 그에게 '미국의 주구', '공산당의 스파이', '팔방미인',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극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2차례의 테러를 당했으나 굴하지 않던 여운형은 경찰서 앞에서 끝내 암살당했다.

▲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분단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분단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4. 탁견과 약점

이제 이 열 책의 강점과 약점, 제시된 탁견(卓見)과 다양한 질문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먼저 이 책의 장점과 강점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 책은 해방 3년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정치사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다루었다. 기성의 사실과 연구사들을 힘닿는 범위 내에서 잘 종합했다. 해방 3년사의 큰 흐름을 일별, 주간별, 월별의 미세하고 세밀한 순간으로 포착했다. 포커스가 예각적이므로 평가 역시 미세적이고 국면적이고 예각적인 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장은 '해방 3년 정치사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연구 성과가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연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이는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은 일기적 형식을 취함으로써 다양하고 자유로운 평론,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안재홍과의 대담 형식을 빌린 부분은 저자의 생각이 대폭 드러나는 지점인데, 안재홍에 의탁한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그럴법한 대목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초기에는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다 왜 좌절되었는지에 대해 유럽에서 전개된 마셜플랜의 사정을 대입한 부분은 설득력 있게 읽혔다.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공산권을 유혹하던 시점에는 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게 보였고 유별난 성의가 표출되었지만, 공산권의 보이콧이 확실해지자 미소공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그러하다. 또한 1948년 2월 소련이 유엔 소총회를 보이콧한 사실, 한국 문제가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유엔 총회에서 다뤄진 사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소총회 결정 수용 과정 등에서 소련과 공산측이 참석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고 분석한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셋째,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역사에서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이미 역사의 경로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결과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다. 역사를 결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경로와 과정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들의 강점과 약점을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중도파의 시각과 입장에 서서 해방 3년사의 결정적 분기점들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넷째, 이 책의 문제 제기는 당위성의 차원이 아니라 비교역사의 차원에서 제시됨으로써 설득력과 합리성을 부여받았다. 저자는 동시대 타국의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해방 3년사에 대입했다. 이 책은 베트남, 폴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2차 대전 이후 '독립'을 획득했거나, 강대국의 점령지가 된 국가들의 전후 '독립' 획득 과정을 한국과 비교해 설명했다. 재미있고 수긍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각국은 2차 대전기 상이한 국제적·국내적 지위에 놓여 있었는데, 이후 역사의 경로를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고 평가한 부분들이 눈길을 끌었다. 얄타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한 '서방의 배신',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호치민이 택한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적 노선, 오스트리아가 10년 신탁통치를 감수한 사실, 1939∼1944년간 독립을 지키기 위해 독일과 소련 사이를 오가며 전쟁과 휴전을 주도한 핀란드의 국부 마너하임의 노력 등을 해방 직후 한국 상황과 견준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다섯째, 이 책은 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 훼예포폄(毁譽褒貶)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적극적인 평가에는 긍부(肯否)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적극적인 평가를 시도하다보니 저자의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 책은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유림, 정인보, 오기영 등 중도파에게는 내내 우호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반면 이승만, 조병옥, 장택상, 신익희 등 '극우파', 박헌영, 김일성 등 '극좌파'에 대해서는 냉정한 비평으로 일관했다. 우파 가운데 '양심적 극우파' 김구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긍정을 오갔고, 이시영은 따뜻한 시선으로 다루었다. 김대중도 다루어졌다.

이번에는 이 책의 약점을 생각해 본다.

첫째, 이 책의 형식적 약점이다. 해방 3년사를 다루었지만 정치사 위주이며 그 밖의 사회나 문화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남한·미군정은 많이 다뤄진 반면 북한·소련군은 거의 다루지 못했다. 자료와 연구의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고,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닌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료와 서술 분량의 비대칭성·부등성(不等性)은 북한·소련에 대한 정밀한 분석 부족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 책이 취한 일기 형식의 글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일기는 단기적, 국면적 느낌과 평가가 강조될 수밖에 없는 형식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는 인생을 걸고 화급을 다투던 것 같던 일이나 감정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면 흐린 기억이나 추억으로 남듯이, 긴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중요하지 않은 대목들이 미시적이고 일기적 평가를 통해 과도하게 강조된 측면이 강하다. 특히 김구, 이승만, 박헌영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해 일제 강점기 이래의 긴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해방 후 김구의 반탁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이런 점들이 눈에 띄었다. 김구는 '정치가'라기보다는 26년간 임정을 지키며, 임정을 통해서만 존립 가능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그가 반탁운동을 벌이고 해방 후 국내 정치에 정착하는 과정은 '운동가'의 삶이 '정치가'의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인 동시에 그를 이끌어온 역사적 관성의 연장이었다. 긴 호흡의 평가가 아쉬웠다. 저자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문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셋째, 선별적 주제 선정으로 해방 후 다양한 정치적 사건, 주제, 인물, 정당, 사회단체들이 저자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또한 과감하고 적극적 평가를 앞세웠으나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진 실수 혹은 오류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소련의 1국 신탁통치 결정이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자 기사를 허위 기사, 오보로 단정한 부분이다. 이 기사는 허위·가공의 사실을 <동아일보>가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사는 워싱턴발 합동통신(UP)의 「May Grant Korea Freedom」이란 기사를 번역·전재한 것이고 국내외 신문에 많이 보도되었다. <동아일보>가 해당 기사를 다른 신문보다 도드라지게 편집해 1면 톱으로 부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사 자체는 외신 보도를 전재한 것이었다. 물론 이 기사는 단 하나의 사실도 포함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사실을 정반대로 왜곡하며 허위 사실을 주장했다. 날조와 왜곡을 목적으로 창작된 기사였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1국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카이로선언에 따라 한국은 주민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하기로 했다는 등 허위 사실과 왜곡을 담고 있다. 어떤 미국 기자가 무슨 이유로 이런 기사를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철저한 언론 통제를 자랑하던 미군정 하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고, 이런 논조가 1946년 1월까지 지속될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한 문제이다.

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저자의 분석 가운데 패전 직후 총독부가 발행한 30억 원 '붉은 지폐'가 대량 위조지폐의 출발이었다고 지목한 대목은 탁견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로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북한에서는 조선은행권 대신 소련군표가 유통되고 있었고, 조선공산당에는 다양한 경로로 사용 중단된 북한의 조선은행권이 유입된 흔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 회고록에도 북한이 거액의 화폐를 드럼통에 숨겨 경북의 좌익에게 보냈고, 이 사람이 이를 은닉해 방직회사를 매수해 거부를 쌓았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김모 씨는 훗날 공화당 중진을 지냈다.

박헌영이 1946년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는 이야기를 부정한 대목도 재미있다. 그런데 북한 주둔 소련 제25군 정치위원을 지냈고 초대 평양 주재 소련대사가 된 슈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가 남긴 일기 1946년 10월 7일 자를 보면 따르면 박헌영은 관에 숨어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박헌영은 1946년 10월 6일 북한에 도착했는데,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고,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도 1920년 11월 하와이에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배편을 구하기 어렵자 장의사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고향에 묻히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 중국인 관들을 실은 화물선에 몰래 숨어 하와이를 빠져나간 것이다. 이승만 자신의 기록이고, 이것이 훗날 이승만이 관에 숨어 상해로 향했다는 전설의 출발이 되었다. 좌우익 거물들이 모두 관에 숨어 탈출함으로써 일종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해방일기>는 독자들의 평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각 권의 소주제와 개별 꼭지 글들은 쉽게 읽히는 미덕이 있으나, 10권의 덩치는 쉽게 완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대중적 글쓰기의 장점과 아쉬운 점들이 교차하지만, 이런 노력과 작업이 지니는 긍정적 의미들이 잘 부각되길 희망한다. 시비·곡직·긍부가 교차하는 인물들에 대해 눈 밝고 예리한 독자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저자는 즉문즉답으로 응대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해방 3년사의 중요성과 의미가 새로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가 집필 과정에서 구상했다가 포기한 <대한민국 실록>과 같은 방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와 시간이 다시 허락되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