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친일·친미의 매판세력이 지배하는 사이비 국가 탓에 극복 못해”

역사학자 김기협씨(65)가 <해방일기> 10권 시리즈(너머북스)를 4년 만에 완간했다.

저자는 1910년 이후 잃어버린 국가를 지금도 제대로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8월1일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즈음인 1948년 8월14일까지 역사를 일기 형식으로 정리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1만8120장에 이른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연재분이다.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저자는 먼저 “시원하다”고 완간 소감을 밝혔다. 김씨는 집필 기간 동안 매일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썼다. 한 달에 두 번 숨을 돌리는 정도로 쉰 게 다다. 어떤 의지가 이런 작업으로 이끌었을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이번 작업을 하면서 국가라는 게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절감했다”며 “국가의 부재를 여러 층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잃어버린 국가를 민족사회가 제대로 되찾지 못하고, 냉전이 끝나고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사이비 국가’의 특성에서 찾는다.

그는 “사이비 국가를 지배하는 사이비 악당인 ‘매판 세력’은 친일파의 형태로 존재를 시작해 외부의 힘을 발판으로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외부 세력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말했다. 이 매판 세력을 교체하면 세상이 바뀔까. 그는 “정치세력을 욕하고 있는 나 자신도 매판적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저자는 “우리는 흔히 남북이 합쳐서 민족 통일을 이뤄 일본, 중국을 혼내주는 것을 분단 이후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분단 현상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현상 뒤에 작용하는 원리를 극복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명 전통의 회복’도 얘기했다. “공자 이래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그중에서도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탐구였다”며 절대 불변의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 없다 잘라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의 도덕성을 우습게 보고 이성만 믿으면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해준다는 신념으로 세상이 엉망이 된 것”이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명 전통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해방일기> 시리즈는 내용 면에서 해방공간의 한국 정치지형을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간파와 좌우 양극단의 갈등으로 파악하자는 ‘중극(中極) 대립’으로 학계의 시선을 끌었다. 김씨는 해방공간에서 ‘중간파’의 역할을 강조하며 “이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적 정치노선이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배합하려 한 노력이 정당한 것이었으나 외세의 개입 때문에 좌절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며 “김구,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보다 여운형, 김규식, 김두봉, 안재홍, 홍명희 같은 보통 사람들의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도 밝혔다.

 
Posted by 문천

 

<해방일기> 10권을 완간한 역사학자 김기협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극우에 포획되어 조정되고 있는” 지금의 보수와는 다르다. 해방공간에서 안재홍 등이 표방했던 민족주의 노선, 사회주의를 포괄하는 중도로서의 보수주의다. “1946년 8월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답합니다. 자본주의가 14%, 공산주의가 7%입니다. 당시 사회주의는 보수적인 선택이었어요.”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중간파’ 안재홍의 시각으로
해방이후 3년 역사 재구성
“내 안의 매판성부터 버려야
치욕의 역사 벗어날 수 있어”

해방일기 1~10
김기협 지음/너머북스·22만5000원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역사학자 김기협(65)이 <해방일기> 완간을 기념해 내놓은 메시지는 뜻밖에 강경했다. “<해방일기>에서 저는 이 악당들의 정체를 ‘매판(買瓣)세력’으로 밝혔습니다. 친일파의 형태로 존재를 시작한 이 세력은 외부의 힘을 발판으로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외부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떡고물’을 주워 먹는, 이 사회의 기생충입니다.”

 

‘중간파’의 시각을 표방한 <해방일기> 1권 이후 마지막 10권이 나오기까지 4년 반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2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실제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뭐 이런 이상한 놈들이 있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마음 속에 분노가 자라났어요. 제가 글을 쓰면서 감정이입을 했던 안재홍 같은 중간파로서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를 생각하게 된 겁니다.”

 

<해방일기>는 일제의 항복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1945년 8월1일부터, 이승만의 권력 사유화 의지에 대한민국이 떠밀려가는 1948년 8월14일까지 3년의 역사를 일기체로 써내려간 역작이다. 특히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민세 안재홍(1891~1965)의 관점으로 당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재홍은 여운형(1886~1947)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던 중간파로, 사회주의자까지 포괄하는 합동정부 구성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미 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과 모험주의로 기운 좌익 사이에서 세력을 잃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나 전쟁 중인 같은 해 9월 북한군 보위부에 의해 납북됐다. <해방일기>는 장이 바뀔 때마다 김기협과 안재홍의 가상 대화를 통해 당시 정세를 상세히 분석한다.

 

원고지로 1만8120매나 되는 방대한 저작에서 지은이가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장면은 2권에 나오는 반탁운동 대목이다. ‘기생충’들의 매판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기도 하고, 백범 김구가 정치적 한계를 보이면서 실패해가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협정문이 공식 발표되기도 전에,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이를 반대하는 것처럼 신탁통치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뒤집은 ‘고의적인 오보’를 싣는다. 책은 이를 “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 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해온 사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을 들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우익의 음모라고 말한다. 신탁통치를 식민지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중 정서를 이용해 반소반공운동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미군정과 한민당과 이승만은 한반도의 분단을 원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그렇다면 반탁운동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분단을 원하지 않던 김구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김구가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정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본다.”(<해방일기> 제2권 1946년 1월13일치 일기)

 

인용문에서 보듯 이 책은 추측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료의 그물에 숭숭 뚫린 구멍을 합리적 추론으로 메운다. 안재홍과의 가상대화와 함께, 당시의 내밀한 사정을 뜯어보고 유추하는 효율적인 장치다. 같은 시기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또다른 약소국들이 처한 상황을 수시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미국과 소련 두 열강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정세의 변화가 조선을 비롯한 탈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전후 처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지구적 시각으로 국지적 사건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결과적으로 <해방일기>는 80~90년대 대학사회를 풍미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이나 <해방 40년의 재인식>(돌베개)의 성과를 받아 안으면서 한계를 확장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해방공간을 공부했던 사람도, 새로 공부하는 사람도 당시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서울대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드문 경우다. 애초 이론 물리학에 흥미가 있었던 그는 “노벨상을 타기 위해 방대한 연구비를 투입해 조직적 연구에만 매달리는” 물리학계 분위기에 대해 “이게 무슨 학문이냐”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골방에 틀어박혀” “자유로운 관념”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역사를 택하게 된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어머니가 보여주신 아버지(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를 계기로 대학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재야 사학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나중에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그가 펴낸 아버지의 일기는 그에게 “학문이란 끼니를 때우기 위해 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꾸짖는 것 같았다고 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자들만을 성공한 자로 받들며 좋은 뜻을 갖고도 좌절당한 이들을 무시하는 이 사회의 풍조가 바로 매판세력의 속성입니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매판성을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Posted by 문천

연합뉴스와 전화로 인터뷰했는데 예상 밖으로 기사를 잘 뽑아줬네요. 한겨레와 경향 인터뷰기사가 이번 주 중에 나오겠습니다. 담당 기자들이(이재성, 임아영) 제 메시지를 잘 전해줄 것이 기대됩니다. 3월 5일에 채널예스와 cbs(시사자키, 19:30) 인터뷰가 있습니다. 연합뉴스 기사를 아래 붙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해방일기'를 집필한 3년간 건강에 별문제가 없었고 작업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어요.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해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해방정국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성공한 듯하지만 세밀한 요소들을 독자들이 알아보기 좋게 분석하는 일까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해방공간을 조명한 역사학자 김기협(64)의 '해방일기'가 전 10권으로 완간됐다.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연재분을 모은 책으로,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8월1일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즈음인 1948년 8월14일까지 역사를 일기 형식으로 정리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치면 1만8천120장에 이른다.

 

 

 

2011년 4월 1권 출간 이후 4년 만에 전권 출간을 매듭지은 김씨는 2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반세기 이상을 사이에 둔 해방공간과 오늘날의 공통점으로 '국가의 부재'를 꼽았다.

"'해방일기'의 주된 주제는 광복을 맞고 나서도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억지로 세운 국가였으니 폭력에 의지해야만 했죠. 그 폭력의 성격은 경찰국가와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에는 '주먹'이었고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부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김씨는 "주먹의 폭력이 심각했던 시절에는 그 뒤에 '돈'의 폭력이 숨어 있다가 1987년 이후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라며 "주먹의 폭력이든 돈의 폭력이든 폭력이 방치된 상태에서 국가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방일기'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명료한 편이다. 해방정국은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배합하려 한 중도파를 억압하고자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생한 시공간이었고 분단과 전쟁의 1차적 책임은 외세의 작용에 있었다는 인식이다.

 

"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밖에서 주어진 상황이 역사적 굴곡을 만드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즉 '외인론'(外因論)을 내세우는 쪽입니다. 하지만 해방공간에서도 상황을 바로 보고 훌륭한 노력을 기울인 분들이 많았어요. 주어진 조건이 워낙 엄혹해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그런 측면을 대표한 이들이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간파였죠."

 

아울러 그는 외부의 힘을 발판삼아 권력을 잡고 외세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들을 '매판(買辦)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친일파에 이은 친미파, 이후 오늘날 자본에 복무하는 친자(親資)파까지 모두 매판세력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현대사를 치욕과 고통의 역사로 만든 기본 조건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지만 그 조건이 바뀌고 있다"며 "우리 선인들 중 올바른 전망을 한 이들의 지혜와 노력을 이어받는 데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방일기'는 엄격한 실증에 근거하는 일반 역사학자들의 저술 경향과 달리 역사에 대한 과감한 해석과 논평을 가미해 현장감을 높이는 방식으로 쓰인 점이 특징이다. 사실 그는 애초 물리학도였다가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서 중국사를 전공한, 한국 현대사 집필자로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저도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시는 분들한테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분들 기준으로는 제게 좀 어설픈 점이 있어도 뭔가 다른 각도에서 작업해낸 점을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하죠. 저는 사이비(似而非, 비슷하지만 아닌) 연구자가 되지 않으려고 '비이사'(非而似, 아니지만 비슷한)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잘못된 곳으로 빠지지 않도록 제 한계를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작업하려 하죠."

 

그는 향후 집필 계획에 대해 "나이가 있으니 '해방일기' 같은 미시적 작업을 더 하긴 어렵고 좀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볼 계획"이라며 "지금의 세계를 '자본주의 이후'라는 명제로 살펴보는 작업과 더불어 서구중심적 관점을 탈피한 방식의 중국사 서술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