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방 선생이 발문을 부탁할 때 내 귀를 의심했다. 그의 무모함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었는가. 20여 년 어울려 온 바둑 친구들 사이에 그의 무모한 기풍과 내 악랄한 기풍은 나란히 정평이 있거니와, 이런 부탁을 받을 일은 상상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책이 인문학을 표방한 것이라는 말에는 기가 턱 막혔다. ‘작가를 내걸고도 온갖 잡문에 전념해 온 그가, ‘역사학자로 당당히 행세해 온 내게 인문학을 들고 나오다니... 우리 분야에서 나는 서평 모질게 쓰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늘 하던 식대로 한 차례 휘둘렀다가 많지도 않은 친구 하나 잃어버릴 걱정으로 기가 막혔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짐을 놨다. 착하지 못한 내용을 발문에 담아도 되냐고. 이 정도 협박에 물러설 허방 선생이 아닌 줄은 안다. 그래도 경고는 해놔야 뭐를 써도 쓸 수 있겠다.

 

보내준 글을 읽다가 이 선생이 스스로 지은 아호 허방(虛放)’의 뜻을 새로 생각하게 된다. ‘허랑방탕(虛浪放蕩)’을 줄인 말이라는데, 줄여도 참 묘하게 줄였다. ‘는 빈 것이고 은 가벼운 것인데, ‘만 취하고 을 버렸으니 비었지만 가볍지는 않다는 뜻인가? ‘은 풀려난 것이고 은 어지러운 것인데, ‘만 내놓는 것은 매이지 않으면서도 어지럽지 않다는 뜻인가? 본인이 알고 그렇게 고른 것일까? 참으로 허허실실이다.

 

아호의 의미가 새삼스레 떠오르는 것은 그와 비슷한 역설(逆說)’의 맛이 그의 글에 온통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잡문이란 말을 썼는데, 글쓰기에 일생을 바친 사람에게 대단한 실례의 말씀이다. 하지만 그 자신의 잡문에 대한 자긍심을 알기에 스스럼없이 쓰는 것이다. 그에게 순문(純文)’, 순수문학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기절초풍하고 도망갈 것이다. “아무거나, 아무렇게나쓰는 것이 그의 본령이다.

 

그의 잡문은 중국 고전에서 현대물리학에 걸친(그 밖의 곁가지도 많은) ‘잡학(雜學)’에 기초한 것이다. ‘잡학박식(博識)’과 다른 것이다. 박식은 쓸 데 있는 것인데 잡학은 쓸 데 없는 것이다. 쓸 데가 있고 없는 차이는 어떤 주어진 틀에 맞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잡학은 주어진 틀 밖(方外)에서 혼자만의 틀을 가지는 것이다.

 

혼자만의 틀을 가졌기에 역설이 일어난다. 됫박에 담기지 않으니 하지만 일생의 무게를 실었으니 한 것이 아니고, 왜 저런 얘기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하지만 제 딴에 이치를 갖췄으니 한 것이 아니다.

 

요 몇 해 동안 허방 선생이 새로 쓴 글 읽어달라고 내게 청한 일이 없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의 글쓰기가 너무 허랑방탕하다는 언젠가의 내 불평에 삐졌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장자(莊子)가 혜자(惠子)를 깔아뭉개는 대목에서, 장자의 가가대소(呵呵大笑)에 허방 선생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묻어 들리는 것 같다.

 

일전에 철학자인 한 친구가 무슨 말 끝에, “인문학 연구자는 나이 마흔 될 때까지 글 못 쓰게 해야 해!” 일갈했다. 논문 중심 연구평가 제도가 된장이 익기도 전에 자꾸 들쑤셔 썩혀버리는 꼴이라는 말이다. 그 이치에는 정학(正學)과 잡학의 차이가 없나보다. 허방 선생의 허랑방탕이 익을 만큼 무르익어 그 아호에 어울리는 경지에 이른 것을 치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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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저는 국가주의를 무척 싫어합니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제도라고 하죠. 독점한 폭력을 힘없는 백성에게 부당하게 행사하는 꼴을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백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어디서나 자행됩니다.

 

제가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주의에 대한 미움이 더한 면도 있습니다. “상상의 공동체발명된 전통이니 하는 말이 민족주의를 폄훼하는 데 많이 쓰이는데, 그런 말을 쓴 사람들이 실상 겨냥한 것은 내셔널리즘이죠. 서양식 근대민족주의를 가리킨 것이고 민족주의라기보다 국가주의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주의를 싫어한다고 해서 국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대상이든 뒤에 ‘~주의가 붙으면 그 대상의 가치만을 절대화해서 다른 가치를 묵살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일이 많습니다. ‘인종’, ‘권위’, ‘원리가 뭐가 나쁜 겁니까? 그런데 인종주의’, ‘권위주의’, ‘원리주의라면?

 

이치는 그렇다 해도 살아오는 동안 국가주의의 폐해를 너무 많이 겪다 보니 국가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은연중에 갖게 되었습니다. 국가권력의 축소를 민주화의 지표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의 줄푸세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데는 그런 풍조도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뉴라이트가 대표하는 신자유주의 역시 자유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자본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약화시키도록 획책해 왔습니다.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쓰면서 국가의 역할을 새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국가 기능을 형편없이 떨어트리고 있었죠.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이념 차원까지 갈 것도 없이, 국가 자체의 지속성을 위해 필요한 국익을 국제자본과 대기업 등에 마구 퍼준 사실이 지금 ‘4자방이니 뭐니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평소 국가라는 제도에 대해 삐딱한 생각을 갖고 있던 저 같은 사람도 국가의 장래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죠. 나라가 어려우면 애국자가 늘어난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애국자 많이 만들었어요.

 

국가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고 있을 때 2010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망국 100주년을 맞으며 이 사회에서 망국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마치 우발적으로 강도를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망국의 진정한 원인을 깊이 이해하려는 자세를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9년 가을에서 2010년 여름까지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를 쓰게 되었습니다.

 

합방에 이르는 과정을 정리한 그 책을 마무리할 무렵이 되자 망국이야기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1910년에 잃어버린 국가를 민족사회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되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1945해방을 맞고도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한 사정을 밝힐 필요를 느꼈고, 3년간의 <해방일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공자님도 말씀하셨죠. ‘그냥 아닌 것()’보다 비슷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이 더 나쁘다고. 해방 후 이 나라의 역사에서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국가가 아예 없던 식민지 시절에도 겪지 않던 참혹한 전쟁을 이 땅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한민족의 국가를 자칭하는 두 개 정권 아래 민족사회가 동강나 서로가 서로를 괴물처럼 싫어하고 원수처럼 미워하는 수십 년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사이비국가를 갖게 되었는지 해방공간의 역사 속에서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로부터 이 사이비 국가의 특성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특성 중 상당 부분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남아 있습니다. 민족 분단의 이유를 흔히 냉전으로 생각해 왔는데, 냉전이 끝나고도 아직까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이 사이비 국가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방일기>에 이은 <냉전 이후> 작업에서는 1990년대 남북관계에서 드러난 사이비 국가의 문제점을 살펴봤습니다.

 

사이비보다 좋은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세워져 있어서 현상 고착만을 바라는 집권세력에 대항하는 국민의 노력이 민주화라는 뚜렷한 지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국민의 희생과 노력을 발판으로 대한민국은 진짜국가에 접근해 왔습니다.

 

아직 변화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는 국가를 이용 대상으로 여기는 세력의 힘에 많이 휘둘리고 있어서 국민의 복리를 위한 제도로서 기능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달라진 점도 많습니다. 악당들이 수세에 몰렸어요. 예전처럼 힘으로 찍어 누르지 못하기 때문에 꾀로 속이고 이익으로 유혹해서 세력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정신만 차린다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진짜 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와있습니다.

 

<해방일기>에서 저는 이 악당들의 정체를 매판(買辦)세력으로 밝혔습니다. 친일파의 형태로 존재를 시작한 이 세력은 외부의 힘을 발판으로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외부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떡고물을 주워 먹는, 이 사회의 기생충입니다. 자기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이 세력의 속성입니다. 덩치가 커진 기생충 중에는 스스로 외부세력이 되어 과거의 경쟁자들을 매판세력으로 부려먹는 일도 있습니다.

 

20세기 민족 비극의 주된 원인이 세계정세의 변화와 외부세력의 작용에 있다는 외인론(外因論)’에 저는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작업을 격려하고 도와준 현대사 연구자들 중에는 이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만, 어떤 상황이든 내인과 외인이 어우러져 빚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외인론의 관점 확충에 공헌함으로써 우리 선인들의 노력에서 더 많은 가르침을 찾아내는 자세를 세우고자 합니다.

 

해방공간에서 중간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그 뜻입니다.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배합하려 한 그들의 노력이 정당한 것이었으나 외세의 개입 때문에 좌절된 것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자들만을 성공한 자로 받들며 좋은 뜻을 갖고도 좌절당한 이들을 무시하는 이 사회의 풍조가 바로 매판세력의 속성입니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매판성을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

 

2000614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김대중-김정일 회담의 내용을 배석자의 하나였던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88-121쪽에 소상히 기록했다. 남측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의제를 내놓고 김정일이 그에 응대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다.

사실 그대로인 것 같다. 김정일은 기본 원칙만 정상회담에서 확인하고 세부사항은 이후의 실무회담에서 다루기를 원했다. 반면 김대중은 몇 가지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는 구체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김정일의 최소주의와 김대중의 최대주의는 남북한의 상황을 비쳐 보여주는 것이었다. 북한은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계속 바뀌어갈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신축성을 남겨두고 싶은 입장이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확실한 것을 많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남측에서 내놓은 의제들이 대부분 합의문에 들어간 결과로 보면 이 회담은 김대중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김정일의 패배도 아니었다. 북한 입장에도 충분히 유리한 조건을 준비해 갔기 때문에 김정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측에서 준비한 의제는 크게 네 가지였다. (1) 화해와 통일 문제. (2) 긴장 완화와 평화 문제. (3) 교류-협력의 활성화 문제. (4) 이산가족 문제.

이산가족 문제는 지엽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남한에서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다. 관계의 근거인 신뢰를 무엇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2)(3)은 그에 비해 범위가 매우 넓은 과제들이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의제는 (1) ‘화해와 통일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지금 각각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부득이한 현실로 인식하고 이와 다른 현실을 추구해 나가는 특수한 관계라는 사실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긴장 완화와 교류-협력 정책을 추구해 나가는 발판이 될 것이었다.

이 의제에 대한 합의 내용이 남북공동선언의 제1항과 제2항에 이렇게 들어갔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1항 내용에는 아무 이견이 없었다. 반면 제2항의 연합’, ‘연방표현을 놓고 이 날 회담 중 가장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남측이 제안한 연합제와 북측이 제안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서로 상치되지 않는 것이라고 토론 초기부터 피차 인정했다. 그런데도 표현에 대한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연방제라는 말의 역사 때문이었다.

연방제는 김일성이 19608-15 경축대회에서 제기한 이래 북한의 평화통일론으로 유지되어 온 주장이었다. 40년 동안 그 내용에 적지 않은 굴곡이 있었지만 연방제라는 이름은 북한의 민족주의와 평화주의를 과시하는 말로 지켜졌다. 1960년 김일성의 연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하 북한의 연방제 주장에 관해서는 이재봉 <이재봉의 법정증언>(들녘 펴냄) 12(234-262) “연방제: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 높은 통일 방안을 참조하고 재인용함.)

 

그래도 남조선 당국이 남조선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아직도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민족적으로 긴급하게 나서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이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호상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194711월 유엔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한반도에서 남북 총선거를 통해 국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소련은 총선거에 앞서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 결의를 반대하고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북반부 진입을 거부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이었다.

친어머니를 밝혀낸 솔로몬왕의 판결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분단건국을 적극적으로 획책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손바닥 하나로 손뼉을 칠 수 있는가? 소련은 () 외군 철수란 명분 하나만 붙잡고 유엔의 조선 관련 결정을 보이콧함으로써 미국의 의지 관철을 쉽게 해주었다. 공동후견인으로 해방 조선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둘 다 아이의 몸을 쪼개서라도 제 몫을 챙겨야겠다는 가짜 어미들이었다.

19608월 김일성의 연방제 제안은 외군 철수 후 남북 총선거라는 13년 전 소련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전쟁을 겪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평화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남한에서는 몇 달 전까지 이승만 정권 아래 평화통일이란 말만 해도 빨갱이로 잡아가고 있었다.

7-4남북공동성명 1년 후인 19736월 김일성은 연방제 제안을 더욱 구체화한 고려련방공화국통일 방안을 내놓았다. 긴장 완화와 교류-협력, 그리고 대민족회의구성과 함께 단일 국호 아래 유엔 가입을 주장한 것이다.

 

오늘 나라의 통일을 앞당기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조성된 조건에서 대민족회의를 소집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룩한 데 기초하여 북과 남에 현존하는 두 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로 된다고 인정합니다.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경우 련방국가의 국호는 우리나라의 판도 우에 존재하였던 통일국가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고려라는 이름을 살려 고려련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960년의 제안은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우월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남한을 끌어들이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남한 교란을 위한 선전활동의 냄새가 난다. 그에 비해 1973년의 고려련방공화국 제안은 당시 전개되던 동서 간 데탕트 상황에 맞춰 상당 기간의 연방제 시행 기간을 상정한 것이었다. 198010월 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는 더 점진적인 통일방안으로 고려민주련방공화국제안이 나왔다.

 

해방 후 오늘까지 북과 남에는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하여 왔으며 서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북과 남이 제각기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거나 그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불가피적으로 대결과 충돌을 가져오게 되며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분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 련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련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을 지도하며 련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에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로 되어야 합니다.”

 

이때까지도 김일성의 연방제 제안에서는 평화공세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우선 시점부터 박정희 독재가 끝나고 광주항쟁을 겪은 뒤 신군부 정권이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에 대한 집착이 보인다. 독재정권 하에서도 다양성이 자라나 있던 남한과 주체사상 위에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한 북한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통일정부라면 북한 지도부의 의지가 쉽게 관철될 것이었다.

보다 현실성 있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야기는 1990년대 들어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다. 불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방어적 자세로 돌아선 것으로 볼 수 있다. 1991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여야 한다.”

 

그 해 가을에는 북한이 남한과 나란히 유엔에 가입했다. ‘하나의 조선주장에서 잠정적으로나마 물러선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 진입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34월에 발표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중 제5항에는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까지 들어갔다. 흡수통일에 대한 경계심이 비쳐 보이는 말이다.

남한에서는 1994년 광복절에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1) 화해-협력, (2) 남북연합, (3) 완전통일의 3단계 통일을 내놓았다. 김대중은 개인적으로 별도의 3단계 통일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1995년 들어 임동원과 만난 후 함께 수정-검토하여 그 해 9<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으로 발표했다. 그 경위를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남북연합단계로 진입하는 데도 한반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상당한 준비기간을 거쳐야 할 것임을 지적하고, 그 이전 단계로 화해-협력단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나는 화해-협력 단계 역시 통일의 중요한 한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1990년대 초부터 주장해온 것으로 1993년에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수용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구태여 연방제단계와 완전통일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1단계 화해-협력 단계, 2단계 남북연합 단계, 3단계 연방제 통일 단계로 정리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3단계론,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이라는 단계 공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제시한 화해-협력 단계를 통일의 과정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으며 남북 간에 합의만 되면 화해-협력 단계 없이도 남북연합은 언제든지 즉각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대통령이 된 후에는 남북연합의 즉각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따라서 남북연합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에 화해-협력의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화해-협력을 지향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화해-협력단계도 남북연합단계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분명한 한 과정임을 인정하게 된다.

김 대통령은 20006월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연합 단계로의 진입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사실상 정상회담의 성과인 6-15남북공동선언은 불신과 대결을 넘어 화해-협력 단계로의 진입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피스메이커> 322-323)

 

연방제 단계와 통일 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임동원의 관점을 나는 지지한다. 연방제 안에도 느슨하고 빡빡한 차이가 있다. 미국이나 독일처럼 단일국가에 가까운 형태에 비해 구 소련과 영국(United Kingdom)은 느슨하고, 소련 붕괴 후의 독립국가연합(CIS)이나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처럼 더 느슨한 것도 있다. 연방제에 일단 도달하기만 하면 기반조건의 변화에 따라 점차 빡빡해지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인데, ‘완전통일의 목표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킬 염려가 크다.

2체제-2정부를 용인하고 외교-군사권까지 분리된 연방제라면 대단히 느슨한 것이다. ‘연방제라는 이름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발표한 후 40년 동안 이 이름이 북한의 민족정책을 대표해 온 사실 때문에 김정일이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똑같은 사실 때문에 남한 측도 그 이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온 중요한 빌미 하나가 그의 통일론 중의 연방제였다. 꼭 연방제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단계를 낮은 단계란 수식어까지 붙이며 연방제란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절충안에는 로드맵에 적어 넣을 가장 중요한 지명에조차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절반쯤 채워진 물잔을 놓고 절반밖에 없네.” 할 수도 있고 절반이나 있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반세기 분단의 앙금 때문에 연방연합의 표현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도, 그 차이를 짊어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돋보이기도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종착점보다 출발점으로 의미가 큰 자리였음을 확인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