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해방일기』1권이 나온 지 꼭 4년 만이다. 역사학자 김기협은 드물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추측도 마음껏 했다. 그렇게 들려주는 해방공간 3년 동안의 이야기가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로 시작해 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으로 끝을 맺었다. | 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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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일제의 항복 조짐이 시작된 1945년 8월 1일부터, 분단 건국이라는 비극적인 역사 사건에 이르는 1948년 8월 14일까지 3년 동안의 역사를 일기체로 써내려간 책이다. 모두 10권으로 분량만 무려 18,210장에 달한다. 매일 12시간씩 꼬박 4년이 걸렸다. 중국사 전공자이자 '역사에세이' 라는 새로운 장르로 그간 폭넓은 저술활동을 해온 저자가 다룬 해방공간에는 우리가 그간 놓쳤던 무언가가 있었다. 분단과 전쟁의 원인이 강력한 외세의 작용 때문이었다는 '외인론(外因論)'의 입장에서 저자는 중도 인사 '안재홍'을 내세워 당시를 바라보았다.

 

왜 안재홍일까. 해방공간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게 마련인 김구,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 같은 인사가 아닌 안재홍이었던 이유는 『해방일기』의 작업 이유와도 맥이 닿아있다.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점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는 저자는 "잃어버렸던 나라를 바로 세우는 올바른 노력"이 '중간파'에 있었다고 보았고,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인들의 뜻'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해방공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발점이다.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그늘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를 더듬다 보면 많은 부분 뜨겁고 치열했던 당시 상황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도 피 흐르는 역사의 상흔이 어떤 의도에 휩싸여 진행되었는지를 보려면 이 시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그간 많은 사람들이 놓쳤던, 지극히 원칙적이고 상식적인 노선을 주창했던 '중간파'의 가르침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는 기울어지지 않은 역사의 한 갈래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3부작


『해방일기』 10권을 완간하셨습니다. 엄청난 작업이셨어요. 집필을 시작하실 때와 완간하시고 난 지금, 생각에 어떤 변화가 있으신가요?

 

바뀐 게 없다면 헛일한 거죠.(웃음) 『해방일기』만이 아니라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냉전 이후'(프레시안 칼럼 연재)와 함께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00년대를 다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1940년대를 다룬 『해방일기』, 또 '냉전 이후'에서 1990년대를 다뤘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얻기 위해서였죠. 많이 하는 말로, 역사학을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사실 그 말을 한 E.H.카 자신도 진지한 대화를 위한 자세가 안 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근대인의 오만, 진보에 대한 믿음인데요. 현재가 과거보다 진보된 시기기 때문에 과거의 미개한 것들을 낮추어 보는 그런 시선에서 카도 자유롭지 않았거든요. 61년에 카의 그 (『역사란 무엇인가』)이 나왔고, 제가 68년에 사학과로 전공을 잡으면서 제일 처음 읽은 책 중 하나입니다. 그 책에서 생각을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보면 말이죠. 두 사람이 얘기를 하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의미 있는 대화가 되잖아요? 과거를 깔보는 그런 마음에서 카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 영향 받은 나도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 전근대사를 전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점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파악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 과거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 작업을 5년 간 해온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사 쪽에서 내가 뭘 밝혀 낸 것 못지않게 개인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과거를 보기 위한 현재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겠죠.

 

무엇보다 중도 인사 안재홍을 내세워 가상인터뷰로 맥을 짚으신 것이 특징적입니다. 특별히 안재홍과의 대화 형식으로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 무엇이었나요? 집필을 시작하실 때부터 중도의 시선을 강조하시기도 하셨잖아요.

 

전체적으로 일기 형식을 취한 것은 통상적인 역사서술에 비해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쪽으로 가고 싶었던 거고요. 대화 형식 역시 그런 의미에서 무게 잡고 과학적으로 확실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추측도 마음껏 하면서 서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은 독자들에게 생각을 보여주는 거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롭게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일기 형식, 대화 형식을 취했어요. 안재홍 선생을 모신 이유에 대해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노력을 나도 배우고 싶고,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중간파'에서 많이 배웠으면 하거든요. 당시 해방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중간파의 입장이 잃어버렸던 나라를 다시 제대로 세우기 위한 올바른 노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때는 여전히 외세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외세에 등 댄 사람들에게 밀려서 현실적인 작용에서는 좌절되고 말았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인들의 힘이 아니라 선인들의 뜻입니다. 그렇게 볼 때 좋은 뜻을 세웠던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중간파, 그 중에서 안재홍 선생을 모셨죠. 안재홍 선생은 다른 분들에 비해서 기록을 많이 남겼어요. 또 역사 연구자였고요. 내가 그 분의 생각을 아무리 추측한다 해도 너무 많이 지어내기는 부담스럽죠. 그렇지만 그 분의 많은 논설, 저술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고, 또 역사학도로서 내 입장, 역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이입할 수 있으니까 그런 뜻에서 안 선생을 택하게 된 거죠.

 

전통의 회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선인들의 힘'이 아니라 '선인들의 뜻'을 본다는 말씀이 같은 맥락에서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망국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자고 했을 때, 이것이 왕조의 멸망 보다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그 부분에 변화의 의미가 더 큰 거였어요. 그것보다 더 큰 의미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고 책에서 얘기를 했었는데요. 저는 전체적으로 문명 전통의 좌절과 단절을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문제로 보거든요. 지금 이민족 지배는 벗어났잖아요. 미국을 숭상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구나, 싶기는 하지만 그게 모든 사람에게 강요된 상황은 아니고요. 이민족 지배는 벗어났지만 아직까지 문제를 겪고 있는 이유는 문명 전통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거죠.

 

앞서 E.H.카를 말씀하셨지만 근대가 더 우월하고, 중세와 같은 과거가 미개하다는 시선이 말씀하신 문명 전통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하신 거군요.


크게 보면 문명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킨 게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인데요. '서세동점'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아시아에는 19세기 중엽에 닥쳤어요. 제가 희망을 가지는 근거는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현시점에 '서세동점'이 퇴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는 '자본주의 이후'라는 제목을 내걸고 '서세동점'의 퇴조라는 명제를 분명히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망국 때나 해방 때, 좋은 뜻을 가진 선인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세계정세가 불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제일 기본적인 문제로 봅니다.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는데, 지금 그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거예요. 정신을 제대로 차리면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다시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맞고 있어요. 기회를 잘 받아들이는 데 내 작업이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기본적으로는 먹물의 공부지만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보람을 거둘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없지 않죠.

 

서양중심주의를 벗어야


지금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후대에 가장 비판 받을 역사적 사건에 대해 생각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어려운 질문인데.(웃음) 역사학도의 입장에서는 사회가 역사의 흐름을 잘 읽어서 그 흐름에 순조롭게 어울려가길 바라는 마음이 제일 앞서죠. 이완용을 욕설의 대명사처럼 말하지만 그런 성향의 사람이 그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그에 비해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 이야기 나왔을 때 내가 하도 화가 나서 칼럼을 쓰면서 '이완용 못지않은 놈들이다' 이렇게 욕을 했어요(관련기사 보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7701). 그랬다가 지난 연말에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 나오는 것 보고는 '이완용 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고쳐서 했죠. 지금 생각하니까 '이완용한테 미안하다' 그러면서(웃음). 이완용은 고종이 맡겨놓은 총리대신으로서의 역할을 팔아먹은 건데, 이 여덟 명은 누가 맡겨주지도 않은 권한을 팔아먹었으니까 말이에요. 이완용이 국가 절도범이라면 이건 완전히 국가파괴범이다, 그렇게 욕을 했습니다. 이완용 시대에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요. 또 해방 때 못마땅한 행동이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이해가 가요. 미국 헤게모니가 퇴조하고 있다는 얘기는 서양에서 70년대부터 나왔고, 이제 어느 정도 자본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얘긴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것을 붙잡고 민족 정책부터 시작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이거에 매달리는 건 이완용이나 과거의 못난 사람들보다도 더 한심한 거죠.

 

'서세동점'이 물러나고 있는, 그런 지금 시점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전혀 없는 발걸음들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세계관에서부터 완전히 이용당하는, 정복당하는 사회의 멘탈리티가 내면화 되어 있는 거예요. 학술 분야, 당장 역사학만 하더라도 그래요. 카의 얘기라든지 그런 차원의 얘기에 대해서 나 역시도 대학에 그냥 있었으면 그만한 의심도 갖기 어려웠을 지도 몰라요. 그게 여기서 교수노릇 잘해서 명예교수 되고, 학술원 회원 되고, 그런 길에서 함부로 의심을 품으면 별로 유리한 길이 아니잖아요.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 이런 식으로 지내기가 훨씬 쉬웠겠죠. 역사학은 그래도 나은 편이고, 사회과학 쪽은 미국에서 공부해 온 사람들이 다 쥐고 있어서 더욱 문제예요. 세계체제론이라든가 유럽중심주의, 서양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그런 노력에 대해서도 아마 우리만큼 외면하고 있는 동네가 별로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만큼 엘리트, 지식층이 거의 없는 나라도 드물다고도 하셨어요.

 

엘리트의 자격기준 중, 도덕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스스로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엘리트의 자격에 도덕성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서는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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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성이 내면화된 사람들

 

해방공간은 참 독특한 시기입니다. 국가 이름 정하기 일화에서 보듯 지금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그 시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결정되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이 시기를 정확히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1945년 상황은 지금에 비해서 종속성이 덜 내면화 되어 있었어요. 35년 일제지배를 겪기는 했지만 그때는 친일파라고 하면 인근 동네에서 누구, 누구 전부 이름을 꼽을 정도로 분명히 드러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종속성이 일반적으로 강해요. 자기의 우월한 위치를 정당화 시키는 기준이 대개 종속성을 배경으로 해서 설정됐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말하자면 미국 박사를 받아왔다, 하면 떠받들어주는 게 있고, 그 속에 이미 종속성이 들어있는 거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종속적이다, 우리 사회가 종속적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걸 자신의 기득권,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마음에는 종속성이 깃들어있는 거거든요. 그런 내면화의 정도가 그때는 훨씬 덜했기 때문에 갑남을녀들도 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는 방향에 대해 지금 사람들에 비해 훨씬 잘 통했다는 걸 이번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었죠.


인상적인 것이, 1946년 8월에 군정청 여론국에서 여론 조사를 했어요. 길 가는 사람들 팔천 몇 백 명을 대상으로 했으니까 아마 해방공간에서 한 여론조사 중에는 제일 규모가 큰 여론조사 중 하나였을 겁니다. 문항 중, 어떤 체제를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사회주의가 70%, 자본주의가 14%, 공산주의가 7%, 아무거나 좋다가 8% 이렇게 나왔다는 거예요. 사회주의를 사회과학자들이 규정해 준 명확한 개념으로써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극단이니까 절충적인 노선이라고 본 거죠. 자본주의는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체제고, 공산주의는 소유권을 부정하는 체제인데 이것은 소유권을 적정선에서 인정해주는, 생산 수단만 개인 소유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절충적인 노선이라고 봤던 거예요. 그런데 그 정도 개념의 사회주의라면 그 상황에 맞거든요. 자본주의는 산업화가 된 국가한테 유리한 체제였고, 공산주의는 문명 수준이 어느 이상 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시행에 문제가 있는 체제였죠. 문명 수준이 있으면서 산업화가 되지 않은 그런 사회로서는 사회주의가 정답 맞아요. 당시 사람들이 그걸 잘 알고 쉽게 판단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그런 질문이 주어졌을 때 대답이 명쾌하게 나오질 못하겠죠.

 

당시보다 훨씬 자본주의가 내면화 된 상태기 때문인가요?

 

어떤 면에서 문화가 된 거죠. 그 당시에는 입장이 친일파들과 일반인들 외에는 근본적인 이질감이 없었는데요. 지금은 경상도, 전라도 사이의 이질감을 비롯해서 강남 주민과 어디 주민 사이에 어떤 이질감을 일상생활에서 다들 느끼잖아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나왔을 때가 분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내가 살던 명륜동도 같은 골목 안에 부잣집 있고, 가난한 집 있고, 다 어울려서 살았거든요. 같은 가게 이용하고요. 근데 지금은 자기 계층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그저 동네의 종업원들 빼고는 접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인구의 대부분이 됐죠. 그런 것을 포함해서 사회 문화 현상이 여러 조건에 의해 진행되어 그게 사회 전체의 진로를 놓고 얘기를 할 때도 자기가 속한 집단 정체성에 의해서 흐려지는 거예요.

 

역사의 새로운 팩트를 찾는 과정에서 '가정'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해방 이후 경찰 개혁에 대한 아쉬움이 곳곳에 읽혔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고, 만일 제대로 경찰 개혁이 있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경찰이 그렇게 커지면 안 되는 거였어요. 치안 유지를 위한 무력으로 일단 미군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경찰 인원이 1945년 8월 당시에 비해 1948년 8월까지 세 배가 늘어났단 말이에요. 그 문제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게 제주도였죠. 당시 기존 인원의 몇 배가 늘어났는데 몇 배 늘어난 숫자가 그것이 질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고 질서를 파괴하는 역할을 했던 거죠. 제주에서 4.3 사태로 해서 극단적으로 드러났잖아요. 그런 것처럼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아니어도 그로 인한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났던 거예요.

 

그런 문제가 쌓이고, 왜곡 되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경찰조직에 대한 불신에 영향을 준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이 정도 규모의 국가에서 국립 경찰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규모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문명국이라고 할 수가 없죠. 이런 대규모의 경찰을 일원 조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문명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디 가 봐요. 우리나라 경찰의 10분의 1 규모 되는 경찰이나마 일원 조직으로 운영하는 곳이 어디 있는지 말이에요.

 

그것이 도리어 권력의 손, 발이 돼서 오히려 국민들의 자유나 권리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이 되잖아요. 61년 이후는 군사독재라고 하는데 60년 이전은 경찰독재였거든요. 그때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든지 제주 4.3사태라든지 이런 것을 보면 군대는 경찰 앞에서 전혀 힘을 못 써요. 그렇게 경찰이 판을 치다가 6.25 때 군대가 커졌지만 군대는 미국의 컨트롤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에 이용되는 데 한계가 있었죠. 경찰 규모는 상대적으로 군대에 비해 작아졌지만 계속해서 권력 운용의 수단으로 이용이 됐어요. 61년 이후를 군사독재라고 하지만 결국은 유사 경찰, 기본적으로 경찰의 성격을 가진 조직에 의해서 권력이 유지가 됐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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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변하고 있어요

 

독도폭격연습 사건 말인데요. 당시 민족의 공분을 샀지만 속 시원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비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게는 주한 미군 범죄에서부터 전작권 관련한 문제까지 아직 미군과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에요.

 

왜 자꾸 욕을 시켜요?(웃음) 사실 그 못지않게 억울한 일 일본놈들한테 많이 당했잖아요? 1910년 이전부터 20세기 내내 겪어온 일이니까요. 그래도 명목상의 주권 국가가 되면서 그래도 좀 그런 폐단의 범위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미선이 효순이 사건처럼 21세기에 들어와서까지 계속 되고 있죠. 지금은 눈에 보이는 그런 일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불평등 관계에 대한 건 엄연히 계속 되고 있어요.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들, 강정 해군 기지 문제라든지, 사드 배치 문제라든지, 조금만 따져보면 명백히 국익 내지 민익에 배치되는 그런 것이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계속 되는 일이잖아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타파해야 할까요?


한국의 대외경제 의존도가 미국에게 2000년도까지 압도적으로 높았고 그 때문에 IMF 사태까지 당하고 그랬죠. 하지만 그런 상황과 대외 경제 관계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지금은 중국이 몽니 부리면 그게 더 무서워요. 미국이 예전 같은 장난질 이제 못해요. 중국이 쐐기를 박을 수 있으니까요. 상황은 변하고 있어요. 상황을 직시하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 새로 생각할 것들이 많아요.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분들의 노력이 은연중에 쌓인 측면도 있고요. 그런데 특히 지식층의 의식이 그렇게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 '이제는 'No'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되고도 말하면 안 되는 줄 알고(웃음).

 

친일파에 대해서 말인데요. 올림픽 참여라든지 초창기 체육계 이바지했던 이상백의 사례처럼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수완을 발휘한다는 자체가 후세의 눈에 일본과 타협 내지는 충성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잖아요. 그 내용을 다룬 경향신문은 친일파로 매도되기도 했다는데 이런 복잡한 역사의 다중성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지금 돌아보면 이상백 씨가 살아있을 때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해방 전에 어떤 식으로 놀았는지 다들 아는데 손가락질 받던 그런 얘기를 그 뒤에는 자랑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훌륭한 분이었다' 그러니까요. 내가 아마 기사를 인용했을 거예요.(228~230쪽) 일본에 가서 호탕하게 월세가 얼마라도 좋다고 하며 집을 구했다는 이야기요. 여기서 소작인들이 뼈골 빠지게 바친 돈을 가지고 거기서 그렇게 거들먹거리고, 그것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거죠. 본인이 잘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인들의 피와 땀을 뿌려서 얻은 결과잖아요. 그걸 자랑스럽게 내놓는 이후의 상황이 문제예요. 장택상이나 조병옥이나 행적을 살피는데 작업이 쉬웠던 것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문제 되는 행동들을 자랑스럽게 전기 같은 곳에 막 찍어 냈거든요. 그러니까 이것들이 무슨 짓을 했지,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요. 만약 그 사이에 사회 분위기가 그 말도 안 되는 인간들, 이런 식으로 제대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다들 감춰서 내가 조사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웃음)

 

앞서 잠깐 언급하셨는데요, '자본주의 이후'를 다루려고 하신다고요. 그 외에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시기가 있으신가요?


일단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간단히 '서세동점'의 퇴조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하고 있어요. 서양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러 방면에서 나왔거든요. 내 경우에는 과학 기술사의 관점에서 이게 막장에 왔다, 는 판단을 하게 됐고요. 세계체제론의 경우 경제면에서 비슷한 의견이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학술 사상 면에서 또 비슷한 의견이 있었죠. 서로 다른 경로에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건 개연성이 굉장히 높은 거예요. 세계체제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다른 경로에서 비슷한 결론이 어떻게 서포트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죠. 그것을 분명히 중국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많이는 아니라도 그런 방향에 맞는, 중국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함께 소개해서 '서세동점의 끝' 이걸 분명히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금년 말까지 1년 정도 하려고 해요.


그것보다 더 큰 일은 나의 원래 놀던 동네, 중국사로 돌아가서 일단 '자치통감'을 다시 읽어보려고 해요. '자치통감'을 전에 읽을 때는 카의 눈으로 읽었었거든요. 다시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눈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중국인들도 20세기 들어오자마자 노신이라든지, 신문화운동 일으킨 그런 것들이 전통을 두드려 패면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환이었어요. 그 이후로 학술계, 역사학계에서도 중국 역사를 서양인의 눈으로 보는 것만 통용되어 왔거든요. 맑시스트 사관이든, 자본주의 사관, 진보주의 사관이든 중국인들조차도 다 서양의 눈으로 읽었어요. 이제 중국인들도 다시 봐야겠어, 하는 시선이 틀림없이 나올 거예요. 지금 한국에서 내가 그럴 필요를 느끼고 있는데 당연히 나오겠죠. 그런데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을 보는 것과 중국이 주도하는 천하체제에 속해 있던 한국인의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또 어떤 상당한 편차가 있겠죠. 그래서 새로운 시각을 빨리 제시할 경우에 새로 형성되는 관점에 공헌을 하면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중국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한국의 비중을 키운다든가 그런 효과도 지금 우리 할 나름이거든요. 여태까지 미국이 우리를 잘 봐줬으면, 해서 많은 노력들을 했잖아요? 나에게 친중파라고 해도 좋고, 사대주의자라고 해도 좋은데 나는 그게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해방일기에서 다룬 3년의 역사 중에,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1945년 말, 반탁운동의 시작이 마음 아픕니다. 반탁 운동의 주류는 미국의 힘에 기대어 기득권을 지키려는 친일파 집단이었지요. 민족주의의 상징인 김구 선생이 여기에 말려듦으로써 민족주의가 해방공간에서 제 몫을 못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민족 수난사의 주된 원인이 민족 사회 내부의 결함보다 외부의 국제정세에 있었다고 보는 '외인론(外因論)'에 기울어진 관점이지만 김구의 반탁운동 한 가지는 변명할 길 없는 민족 사회의 오류라고 인정합니다.

 

Posted by 문천

 

여러 사람의 글을 묶은 책은 그 자체가 소개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 책을 다시 소개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다. 책에 소개된 여러 관점을 짧은 글에 두루 담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명료하게 내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책은 꼭 짚어보고 싶다. 2009년에(번역본은 2012년에) 나온 책이니까 2008년 금융위기 전에 기획되어 위기 후에 정리된 책이다. 앞서 소개한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2009년에 나온 책인데, 금융위기를 현실로 인식하면서 세계체제론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인 책이다. 반면 이 책에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포함되어 있고 금융위기를 아직 인식하지 않은 글이 많다. 중국의 진로와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금융위기 시점 학계의 전망을 폭넓게 살펴보기에 합당한 책이다. (‘world-system’세계체제로 옮기기도 하고 세계체계로 옮기기도 하는데 이론적 정확성으로는 체계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맥락에서는 체제가 더 효과적 표현이다. 내 글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세계체제로 옮긴다.)

각 장의 제목에 간단한 내용 설명을 붙인다.

 

(1) 서론: 지구적 자본주의의 세 전환과 중국의 부상(훙호펑): 미국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기존의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는 20세기 후반에 전환의 과정을 겪어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함께 동아시아의 역할 증대가 중요한 변화였다. 20세기 말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 역할 증대의 연장선 위에서 출발했으나 21세기로 넘어온 후 다른 차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의미를 폭넓게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장기적인 관점으로 본 중국의 시장경제(조반니 아리기): 유럽이 산업혁명으로 노동절약적-자본집약적 시장 발전의 길로 나설 때 중국은 노동집약적-자본절약적 노선을 지킴으로써 엇갈리게 되었다. 유럽의 선택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유리한 조건을 누렸으나 1970년대 이후 조건이 바뀌기 시작해 중국의 선택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정세의 변화는 중국 발전 경로의 장기적 우위가 확인되는 과정이다.

 

(3) 중국의 경제 기적과 그 궤적(앨빈 소): 고립상태에서 모택동주의를 지키고 있던 30년 동안 중국은 이후 발전의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이 시기에 확립된 당-국가는 빠른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체제의 기반이 되었고, 그 덕분에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달리 신자유주의 시장 개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국가가 뒷받침한 민족 해방 이데올로기도 자본 동원 등 해외의 우호적 네트워크 형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4) 대중화권의 거대 하청업체(리처드 애플봄):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는 유통업자가 제조업자에게 갑질을 하고 있다. 대규모 소매업체들이 영세한 하청업자들을 무자비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을 중심으로 거대 초국적 하청업체가 형성되면서 힘의 균형을 바꾸고 있다. 이 하청업체의 조직이 새로운 세계체제의 주축이 될 수 있다.

 

(5) 중국의 부상과 지구적 부의 재분배(요제프 뵈뢰치): 세계적 힘의 균형에 큰 변화가 생길 때 많은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20세기 초 독일의 부상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런 상황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동유럽 공산권의 희생 덕분인데, 이제 그 희생도 한계에 이르러 앞으로 지정학적 갈등의 격화가 예상된다. 미국-유럽-일본에서 중국의 위협에 예민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 그 조짐이다.

 

(6) 중국 경제의 상승과 일본의 원자재 주변부(폴 시캔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의 발전이 천연자원 공급 면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사이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자원 주변부를 순조롭게 넘겨받던 상황에 비해 중국의 자원 주변부 확보는 일본과 이해관계의 첨예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7) 중국과 러시아의 지경학적 통합(존 굴릭): 소련 시절의 위세를 잃어버린 후 다극적 세계질서를 추구해 온 러시아는 중국의 성장에 협조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군사기술과 우주기술 등 중국에게 요긴한 여러 분야의 기술이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온 것이다. 석유 등 주요 자원에 대해서도 미국의 영향권을 거치지 않는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 나라의 협력관계가 유지될 것이며, ()주변부 권력 블록의 기반이 될 것이다.

 

(8) 중국과 미국의 노동 운동(스테파니 루스 & 에드나 보나시치): 20세기 말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운동 쇠퇴 현상이 중국의 산업 발전에 따라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급격히 커지고 있는 중국의 노동자 집단이 행동주의로 나서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자라나 해외 노동자 집단과 연대를 맺게 된다면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협상력이 세계적으로 크게 늘어날 것이다.

 

(9) 세계 노동 소요의 진원지로 떠오르는 중국(비벌리 실버 & 장루): 중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노동 소요의 양상은 중국이 노동 소요의 세계적 중심지가 될 전망을 떠올려주고 있다. 폴라니식과 마르크스식 노동 소요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생활양식과 사회적 결속에 대한 위협에 저항하는 폴라니식은 중국 북부 지역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동적 행동주의 성격을 가진 마르크스식은 남부의 신흥 산업도시에서 활발하다.

 

(10) 경고: 중국의 부상은 지속 가능한가?(훙호펑): 엮은이는 이 질문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려 애쓰지만, 속마음은 긍정으로 기울어진 느낌이다. 마지막 문단을 옮겨놓는다.

 

단기적, 중기적으로 볼 때 과잉 측적 경향과 환경 위기로 인해 중국에서 경기 둔화나 불황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무게 중심이 일반적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될 것이며, 21세기의 새로운 국제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결국 중국이 자신의 발전 모델을 더 평등하고 더 조화로우며 덜 환경 파괴적인 모델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 여부이다.

 

간단히 넘어가는 제6~9

 

관심이 적게 가는 주제에 대한 의견부터 간단히 적어놓은 다음 내 흥미를 많이 끄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마음 놓고 길게 하겠다. 8장과 제9장에서 노동운동 이야기가 나오는데, 재미있는 시각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크게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 이래 세상이 움직이는 제1원리처럼 중시되어 왔는데, 어떤 상황에서나 그 중요성이 똑같이 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닌 다른 체제를 상정함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게 될 것으로 나는 예상한다.

6장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 7장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는데, 당장 상황의 진행을 잘 보여주는 주제다. 중국의 성장에 대한 일본의 경계심을 미-일 군사동맹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를 미국과 나토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을 넘어 자원 획득의 시각으로 내다봄으로써 훨씬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중국의 발전에 따라 자원의 실제적 의미가 겪을 변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계적 산업화가 덜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원 획득의 경쟁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원 가격도 낮은 수준에서 형성되었다. 20세기를 통해 산업 확대에 따라 경쟁이 심화되었지만 군사력에 의한 저유가(低油價) 체제가 유지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극한적 저유가 체제는 버티지 못하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은 가능한 한 낮은 수준에 유가를 묶어놓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 지금까지 석유를 비롯한 산업자원의 주요 수입국은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런데 그 밖에 있는 거대한 수입국이 새로 나타남으로써 자원 저가 체제가 버티기 어렵게 되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을 차후에 소개하겠다.

 

중국의 성장은 지정학적 구조 변화를 불러온다.

 

5장에는 세계경제의 지정학적 구조 변화와 그 속에서 중국의 역할이 설명되어 있다. 10여 년의 기간(1989-2001) 동안 구 공산권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구 공산권은 (1) 사회주의를 포기한 동유럽 및 구 소련 국가들, (2) 고립 상태를 지킨 북한과 쿠바. (3) 사회주의를 지키며 개방에 나선 중국과 베트남,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2)그룹은 특수한 조건 아래 있으니 비교의 의미가 없고, (1)(3)그룹의 성패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중국과 베트남은 소득수준의 향상은 크지 않아도 전체 국력에서 큰 발전을 보았는데, 동유럽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력도 쇠퇴하면서 소득수준도 폭락했다.

이 설명은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해온 (1990년경의) 냉전 종식의 의미와 부합한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원만한 지속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극약 처방처럼 나온(소수 행위자의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파국을 오히려 재촉한다는 의미에서) 반동노선이며 소위 냉전 종식도 자원 약탈의 범위를 넓히려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필요에서 빚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왔다. 동유럽 국가들의 몰락은 이 관점에 맞는 현상이다. 이 방향의 설명을 내놓은 연구나 논설이 있는지 더 찾아봐야겠다.

19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그리 크지 않은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그 성장이 세계경제의 지정학적 구조 변화를 급격하게 일으키지 않았다. 반면 중국 같은 거대한 경제권의 급격한 성장은 구조 변화를 크게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 변화의 방향으로 필자는 (1) 중국과 그에 버금가는 큰 성장을 이루고 있는 인도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협력관계를 맺을 가능성, (2) 두 나라를 포함하는 아시아연합의 형성 가능성, (3) 전 세계 차원에서 수평적구조의 도입 가능성 등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들 가능성은 서로 배타적인 것도 아니므로 두 가지 이상이 나란히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초국적 유통업체의 갑질이 끝난다.

 

4장에서 설명하는 제조업과 유통업 사이의 관계 변화 전망도 함축하는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신자유주의 노선이 관철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의 하나가 유통업체의 주도권 강화다. 초국적 대형 유통업체들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여러 나라의 수많은 소규모 제조업자를 하청관계로 이끄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그런데 공급생산의 비중이 중국에 쏠리면서 구매자의 일방적 주도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여러 나라의 소규모 제조업자들은 업체 간의 경쟁에 겹쳐진 국가 간의 경쟁 때문에 연대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국의 제조업자들은 하나의 국가에 속한다는 점에서 연대의 유리한 조건을 가진 위에 거대한 국내시장이 자라나고 있어서 초국적 유통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덜하다. 그래서 구매자와 생산자의 갑을관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큰 무역상품의 하나인 의류 분야에서 이 변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1975년 이래 30년간 시행된 다자간 섬유 협정(Multi-Fiber Arrangement)이 섬유 생산을 여러 나라로 분산시키고 있었는데 2005년 이 협정이 종료되면서 소수 공급국으로 생산 통합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중국과 그 주변국들이 비중을 크게 키우고 있다. 이에 따라 구매자에 대한 종속성을 벗어나 협상력을 키우는 생산업체들이 속출하고 있고, 제조업계의 상대적 위상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 예상된다.

생산업체 위상 상승의 예로 와이셔츠 제조업자인 홍콩의 TAL그룹의 경우가 흥미롭다. 큰 구매자 중 하나인 JC페니와의 관계에서 생산계획과 재고관리를 포함한 많은 기능을 넘겨받았다. “TALJC페니의 북아메리카 매장에서 직접 판매 시점 자료를 수집하여 자체 고안한 컴퓨터 모델을 통해 제조 수량을 관리하고, 스타일, 색상, 크기에 따라 얼마나 많은 셔츠를 생산할지를 결정한다. 제조업체인 TAL이 소매업체인 JC페니의 창고와 의사 결정자들을 거치지 않고 JC페니의 각 매장에 직접 와이셔츠를 보낸다.”(115)

국가 차원이 아니라 현장의 업체 차원에서 시장조성자(market maker)의 역할이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제조업은 하청업체의 입장으로 성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덩치가 커짐에 따라 하청업체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종속성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청업체의 입장을 벗어나는 추세도 이 위에 겹쳐져 종래의 갑을관계가 해소되고 있다.

 

경제정책을 자유자재로 선택하는 국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중국의 경제정책을 개관한 제3장이다. 개혁-개방 초기의 중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정책을 취했으나 2000년을 전후해서 국가 발전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돌렸다는 관점이 이 장의 중심 내용이다.

필자는 중국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2000년대 초까지 충실히 수행했다고 본다.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 시장 확대, 중앙정부의 약화, 지역 격차 심화, 사유화-법인화 정책, 사회서비스의 상품화, 시장 자유화의 심화 등이 19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를 벗어나는 정책 변화가 시작되어 2000년대 들어서는 국가 발전주의로 돌아섰다고 필자는 본다. 정부의 관리 능력과 재정 능력이 다시 강화되고 정부의 경제 개입이 심화된 점, 복지국가의 성격도 복원되기 시작하고 민족주의의 장벽이 강화된 점, 그리고 자본가 계급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꼽았다.

그리고 필자는 2000년대 중국의 경제정책이 다른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포함) 발전국가들과 유사한 점들을 열거한다. 강력한 국가 기구를 가진 점, 국가가 경제에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점,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점, 원활한 외국인 투자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억압한 점, 산업화의 초기 국면에 자본 유입을 촉진한 점 등.

그러면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중요한 차이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국가 자체가 기업가 정신을 내면화한다는 점. 둘째, 지방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유도하여 지방화된 상향식 전략을 구사한 점. 셋째, 평등주의에 비교적 많은 비중을 둔다는 점.

개혁-개방 초기에 중국에게 신자유주의 정책은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사실은 필자가 정확하게 밝혔는데, 다음 단계를 국가 발전주의로 규정한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른 발전국가들과의 유사점보다 차이점에 더 본질적 의미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필요한 단계에서는 이를 취하고 국가 발전주의가 유용한 측면은 이를 취하지만, 정책의 기본 원리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21세기 중국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국가의 힘이다. 단순히 강하다는 것뿐이 아니라 경제를 포함한 사회 운영에서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국가와 다른 계급들 간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라고 말하며, 이것이 수십 년간 다양한 발전 정책을 자유자재로 추진할 수 있었던 근거라고 한다. 정책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중국이 일반적 근대국가의 개념을 벗어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근대국가의 정책은 국내의 강한 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집권 세력이 바뀌지 않으면 정책 노선이 바뀌지 않고, 집권 세력이 바뀔 때는 정책의 변화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어떤 국내 세력과도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가진다면 초월적 위치에서 정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국가 원리보다 천명(天命)’ 사상을 떠올려주는 특징이다.

 

권위주의국가의 의미를 새로 생각한다.

 

아리기가 쓴 제2장을 옮긴이들은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의 축약본과 같다고 했다. 원본을 머잖아 따로 다룰 것이므로 제2장 내용은 간략하게 넘어간다. 아리기는 중국의 발전에서 전통의 회복측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데, 발전 초기의 자본 유치에 화교 자본이 선도적 역할을 맡은 사실도 그런 의미에서 중시한다.

1990년대 이후 향진(鄕鎭)기업이 맡은 역할을 그는 특히 주목한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산업에 대거 투입하는 과정을 순조롭게 했을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 기술 발전을 추구한 중국의 전통이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를 되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통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교육적 성취와 결합되어 교육받은 값싼 노동력이 비싼 기계와 관리자를 대치하고 있는 도시 산업의 관행을 이뤄낸 것이 대표적 사례의 하나다.

엮은이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제10장에서 훙호펑은 중국의 지속적 발전에 대한 긍정적 전망과 부정적 전망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려고 애쓴다. 우선, 지금까지 중국의 경이적 실적에 대한 경탄에서 나오는 섣부른 낙관론에 대한 반증을 제시한다.

중국의 발전 모델에서 가장 큰 모순으로 훙호펑이 지적하는 것은 과잉 투자과소 소비. 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생산력 과잉 현상이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주요 국유 은행들로 구성된 금융계의 자원 재분배 기능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잉 투자가 억제되기는커녕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이 사회주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불평등 해소를 경제 발전과 함께 추진한 것과 달리 중국의 권위주의 국가는 불평등을 더욱 확대시켰기 때문에 국내 소비시장의 성장이 더디다고 한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원인의 큰 부분이 중국의 특수한 국가 성격에 있다는 사실을 훙호펑도 파악하고 있다.(281)

 

중국의 기적을 가능케 한 첫 번째 정치 사회적 특징은 외곬으로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한 지방의 발전 국가 혹은 조합주의 국가적 특성이다. 두 번째 특징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와 시민 사회의 성장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당-국가의 지속성이다.

 

이 책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지금은 훙호펑이 지적한 과잉 투자과소 소비의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훙호펑이 이 문제들에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은 중국의 특수한 국가 성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중국 사회는 불평등을 견뎌내는 수준이 서방사회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2002년 가을 베이징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확연히 느꼈다. (“중국, 덩치 큰 나라에서 느끼는 힘” 2002-10-19)

 

중국에서 며칠 지내보며 절감한 것은 유럽의 크기와 중국의 덩치는 함께 비교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를 합친 유럽의 크기라는 것은 산술적 합계일 뿐이다. 비슷한 크기의 영토와 인구지만 하나의 역사배경을 가지고 하나의 언어를 쓰며 하나의 정부에 통제받는 하나의 나라를 이룰 때 그 크기는 각 지방의 산술적 합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중국의 물가구조에서 이 특이한 덩치의 존재를 느낀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엄청나게 싸다. 싼 물가수준은 싼 임금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급기술과 고급재료가 필요한 고급상품일수록 국제수준과 가격의 차이가 적다. 자동차는 우리나라보다 더 비싸다. 재래식 주거는 매우 싸지만 고급 아파트는 우리 수준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중국의 덩치를 어떤 식으로 느끼는가. 최저생활 개념에 가까우면서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안정된 생활조건을 누리는 10억 안팎의 인구가 하나의 정부를 쳐다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물가구조의 배경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임금과 물가의 국제수준과의 격차를 매우 천천히 줄여나가고 있고, 대다수 국민은 이 정책에 순응하고 있다. 그 동안 중국의 많은 수출품이 국제시장에서 낮은 임금수준 덕분에 압도적인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중국인의 국가에 대한 신뢰는 합리주의 원리로 운영되는 서방의 근대국가와 수준이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는 권위주의국가다. 그런데 그 권위는 집권세력이 억지로 만들어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권위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책임과 짝을 이루는 권위다. ‘천명(天命)’에 입각한 유교국가의 권위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서양의 근대국가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권력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권력과 권위를 함께 운용하는 전통적 국가체제가 국가의 기본 기능 수행에 더 유리한 점이 있는지, 서양 근대사상의 타당성과 유효성이 널리 의심받는 이 시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공산중국이 유교국가의 특성을 많이 물려받았다는 시각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훙호펑이 단기적, 중기적으로 볼 때 과잉 축적 경향과 환경 위기로 인해 중국에서 경기 둔화나 불황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무게 중심이 일반적으로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될 것”(294)으로 내다보는 근거 역시 국가의 역할에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년간 축적해온 대량의 금융 자원을 제공한다면, 경제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는 소비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재정적 부양 정책과 사회 지출에 의지할 만한 충분한 자금 여유가 있다. (...) 이는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진보 개혁가들이 재분배 및 규제 개혁과 뉴딜 정책의 도입에 대한 대기업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293)

 

지금까지 중국의 성취에서 국가의 역할이 컸다. 일반 국가에서 보기 힘든 강하고 큰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중국의 진로에 국가의 역할이 큰 작용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에 모아놓은 글 중에도 이 관점을 가리키는 내용이 많이 있는데, 엮은이가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여러 사람 글을 여러 사람이 옮긴 책으로는 번역에 안정감이 있다. 조율을 위한 노력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안정감이 지나쳐 문제를 일으키는 점도 있다. 예컨대 ‘global’을 일률적으로 지구적으로 옮겼는데, 그보다 세계또는 국제가 더 적합한 곳이 많다.

 

Posted by 문천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제일 많이 회자되는 답변이 E H 카가 1961년에 낸 같은 제목 책에 나오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란 말이다. 말인즉 간단하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에 실제로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 유럽에서 틀을 잡은 근대역사학에는 이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인의 오만때문이다. 모든 근대사상의 바탕에 깔려있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 많이 진보한 현재가 덜 진보한 과거를 깔보게 만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이뤄지려면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현재가 과거를 깔보는 자세로는 대화에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카가 대화를 내세운 것은 근대역사학의 불통을 반성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반성이 진지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이 말을 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래 근대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positivism) 비판의 맥락에서였다. “과거의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실증주의 입장은 오늘의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니, 오만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어느 역사가도 역사적 사실의 인식에서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한 카의 입장에는 오만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진지한 반성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반성은 못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열이 오르는 환자를 놓고 실증주의자가 열이란 건강의 표시다. 시체는 차갑지 않은가?” 하면서 몸을 더 덥혀주라고 하는데 카는 고열이 계속되면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회복이 어렵다며 얼음찜질을 권하는 정도다. 열병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카는 근대역사학의 지나친 폐단을 반성하면서도 그 구조적 문제를 스스로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보여준 두 가지 믿음에서 그 사실을 알아본다. 그 하나는 역사학에서는 우연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도덕성 아닌 이성만으로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합리주의의 믿음이다.

 

 

역사의 필연성과 역사학의 과학성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할 일이라고 카는 말한다. 사건의 여러 주변조건 중에서 진정한원인을 가려내는 기준을 카는 일반화가 가능한지 여부에 두었다. 존스 씨가 모는 차에 로빈슨 씨가 치어 죽은 사건을 그는 예시한다. 로빈슨 씨는 밤중에 담배 사러 나온 길이었고, 존스 씨는 술에 취해 있었으며, 존스 씨의 차는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고, 사고 장소는 길이 급하게 구부러진 곳이었다고 한다.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하고 차량정비 점검을 엄격하게 하고 위험한 도로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이지, 담배의 야간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카는 지적한다. 담배 사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이 사고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우연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비유다.

하지만 비유의 힘에 기대어 논리의 허점을 얼버무리는 문제가 있다. 담뱃가게가 위험한 장소에만 위치해 있고, 오후 늦게 배달을 받아 밤중에만 품종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담배 판매방법을 개선하는 것도 로빈슨 씨와 같은 사고를 줄이기 위해 효과적인 대책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의 일반화는 특정한 맥락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맥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이다.

한국의 뉴라이트 논설을 보면 카가 뭐라 할까? 안병직은 한국 근·현대사의 체계와 방법”(<시대정신> 40, 257)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민중 운동사가 북한의 역사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민중 운동사가 제시하는 대로 국정 방향을 설정하면, 국가의 장래는 지금의 북한 꼴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왜 한국 근·현대사의 주조를 민중 운동사에 두지 않고 대한민국사에 두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놓고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본주의의 성공을 일반화한 안병직의 주장은 명백히 자의적인 것인데도 이런 일반화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장의 원형인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문명화론은 20세기 초에 큰 위세를 떨쳤다. 식민체제 구축을 위해 조선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면서 문명화의 이름을 내건 것이다. 그리고 그 문명화론의 원조인 백인의 짐주장은 더 큰 위세를 전 세계에 떨치기도 했다.

카와 같은 근대 역사가들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집착한 것은 과학적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을 투쟁의 무기로 삼기 때문에 과학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침략을 정당화하는 백인의 짐이나 문명화같은 주장들이 당시에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당하는 측에서도 승복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일반화의 기준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필연성이 부인된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이 숭배 대상이 되면서 인간사회도 같은 방법으로 탐구하겠다는 사회과학이 일어났고, 역사학도 사회과학의 범주에 넣겠다는 것이 근대역사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런 노력이 역사학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지나친 믿음이 가치체계를 침해하는 폐단이 위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몇 해 후 1968년의 문화혁명’을 거치고는 역사학의 과학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여러 방향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펴냄) 182쪽에서 헤이든 화이트가 <메타역사: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1973)에서 제기한 역사 서술에는 어떤 진리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주목한다.

 

사료에 대한 문헌학의 비판적 작업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넘어서 역사적 설명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화이트의 경우 과학적 고려가 아니라 미학적-윤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역사 서술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 “역사 이야기는 언어적 허구이고, 그 내용은 발견된 만큼 창안되며, 그 형태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151쪽에서 이거스는 1979년에 나온 로렌스 스톤의 논문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 새로운 옛 역사에 대한 고찰에도 주목한다. 객관적 고찰의 대상이던 추상적 인간 대신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이야기체(narrative) 역사로 돌아갈 전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스톤은 1970년대에 역사가 파악되고 서술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사회과학적 역사의 핵심을 구성한 과거의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널리 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인간 실존의 매우 다양한 측면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등장했는데, 거기에는 집단의 문화 및 심지어 개인의 의지는 잠재적으로 최소한 물질적 산출과 인구의 증가라는 비인격적인 힘만큼 중요한 변화의 인과적 동인이다라는 확신이 동반되었다.

 

카가 1982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역사란 무엇인가>의 개정판을 위한 서문 원고가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1960년의 낙관과 1980년의 비관을 대비시켰다. 1960년에는 소련과 미국이 스탈린주의와 매카시즘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유럽의 부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서 세계경제도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1980년에는 냉전의 긴장이 다시 심화되고 있었고 세계경제는 불황과 위기의 연속인데다가 제3세계의 대두가 세계질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변화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토로한 다음에 카는 이런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서방 지식인의 입장이며 제3세계 인민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수반하는 이 변화를 반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서방 지식인이기는 하지만 주류가 아닌 재야(dissident) 지식인이기 때문에 제3세계 인민의 입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역사의 객관성을 중시하던 카가 만년에 이처럼 입장에 얽매이는 것이 뜻밖의 모습이다. 그가 죽기 전에 개정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시간 부족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초판을 낼 때의 낙관을 잃어버린 입장에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개정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도덕성의 문명과 진보성의 문명

 

카가 역사학의 과학성을 주장한 또 하나의 논점은 도덕성이 역사서술의 기준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관은 그가 속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빚어지는 것이므로 일반화의 기준이 될 만한 객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 안 된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역사서술도 일종의 서술이므로 가치기준이 없을 수 없다. 카는 도덕성 대신 진보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과학적 역사학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평가를 예로 든다. 서방의 과학기술을 도입해서 농업국가 소련을 산업국가로 만드는 것이 스탈린 당시의 소련에게 진보의 과제였다고 본다면, 이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스탈린이 저지른 어떤 짓도 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에 흠이 되지 않는다고 카는 주장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에서도 공산화가 진보의 과제였기 때문에 공산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는가 여부에 따라 그 전의 모든 일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카가 이런 말을 한 30 년 후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했다. 그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이뤄질 진보가 모두 이뤄졌다는 뜻이었다.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는 카가 생각했던 진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도 지금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카가 개정판 서문을 쓴 것은 공산권 붕괴의 10년 전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흐려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파괴와 붕괴만을 미래에서 바라보며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인류의 향후 발전에 대한 전망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워 버리는 오늘날 회의감과 절망감의 풍조는 일종의 엘리티즘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이 위기 속에서 안정된 위치와 특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엘리트집단과 과거에 다른 지역들을 당당하게 지배하던 위상이 무너지고 있는 엘리트국가들이 일으키는 풍조일 뿐이다. (<Wikipedia> "What is History"에서 재인용)

 

카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도덕성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태도와 성격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성이 쇠퇴하는 현실 속에서도 도덕적 인간은 도덕성의 실현에 역사의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진보적 인간은 진보의 이념이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 진보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카에게는 진보에 대한 헌신이 바로 도덕성이었던 것이다. 각자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내용이 좌우된다는 것은 진보나 도덕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과연 도덕성에는 불변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일까? 공자는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자신이 받드는 ()’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갖추고 있는 자연스러운 품성을 내놓은 것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낮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성의 그물을 만들려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좌우되지 않는 보편적 도덕성의 확립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공자가 산정(刪定)<춘추(春秋)>를 모델로 한 유교사회의 역사서술은 도덕성의 관리에 첫 번째 목적을 두었다. “공자가 <춘추>를 산정하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 떨었다는 말을 하고 춘추필법(筆法)’이란 말도 한다. “작은 말에 큰 뜻을 담는다(微言大義)”는 말은 사실의 담백한 서술에도 도덕적 평가를 함축한다는 뜻이다.

과거사를 반추하는 일은 역사학이 학문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 문명 초기부터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문자 발생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부족사회에서 주술사의 푸닥거리는 부족이 겪어온 일, 부족이 배출한 뛰어난 인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구성원의 결속력을 늘려주었다. 문자 발생 후에도 비슷한 목적을 위해 역사서술이 발전했다.

원시적 역사서술은 주관적 기준에 따랐다. 도덕성의 기준이 가변적이라고 카 같은 근대 서양인이 본 것은 이런 단계를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 이후 중국의 역사서술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원리를 채택했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이 된 것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역사학과 유교사회의 역사학이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차이는 보편성 구현의 실체로 도덕성을 설정하느냐 진보성을 설정하느냐에 있고, 그것은 배경 문명의 성격에 달린 일이다. 중국문명이 도덕성을 중시한 것은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 권력의 자의적 발동을 도덕성의 원리로 억제하는 데 중국문명의 지속성의 근거가 있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와 달리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도덕성을 배척하고 진보성을 내세운 것이었다. 힘을 가진 세력이 질서의 원리에 제약받지 않고 변화를 추동해 나가도록 풀어주고 밀어주는 것이 진보주의 이념이었다. 역사의 추동력을 가진 세력을 자본가로 보느냐, 프롤레타리아로 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의적 판단에 달린 일이었다.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노력을 기울이는 데 따라 수렴의 힘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반면 진보성에는 방향 설정의 확실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의 진보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갈등이 격화하게 되어 있다. 근대역사학이 분쟁의 심화나 강자 입장의 정당화에 쉽게 이용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명의 안정성을 위한 인문학의 역할

 

19세기에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산업문명과 그를 배경으로 한 근대역사학이 20세기 세계를 풍미한 것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룬 서유럽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세계를 휩쓸자 여타 문명권의 학술과 사상까지 유럽의 과학앞에 굴복한 것이다.

역사학의 전통을 비롯한 풍부한 학술과 사상의 자산을 가진 중국문명권의 항복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의화단사건으로 청나라의 위기가 극대화되었을 때 중국 학술계에서는 의고(疑古)’의 학풍이 일어났다. 상고시대에 관한 경전의 기록을 엄격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이 학풍은 전통적 학술과 사상을 포기하고 서양식 학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뒤이어 중국 사상계를 휩쓴 신문화운동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는 풍조가 더욱 확장된 현상이었다.

서세동점 현상이 퇴조하고 있는 지금 전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백 년 전 침략의 위기에 쫓기며 내버린 전통 중에 재활용이 필요한 것은 없을까?

서세동점의 물결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이치부터 살펴본다. 18세기까지 동아시아문명은 물질 측면에서도 유럽보다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농업생산력도 우월하고 제조업 기술 수준도 앞서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은 16세기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미개 지역을 정복하고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대거 수탈하면서 경제적 변화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해 변화를 무조건 숭상하고 정체(停滯)’를 무조건 폄하하는 진보주의가 유럽을 풍미하게 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데는 19세기 초에 나온 원자론이 도움이 되었다. 모든 물질의 근본 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어떤 변화를 통해 마주치게 될 어떤 상황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원자론은 또한 고립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줌으로써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유행에도 공헌했다.

물리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문명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19세기의 문명의 충돌에서는 질량이 더 큰 문명도 유럽문명의 기세에 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유럽문명이 보인 변화의 속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정적 한계가 1970년대 이후 환경과 자원의 벽으로 확인되어 왔다. 그 동안 유럽문명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끌어들여 서양문명으로 자라났으니 질량은 늘어난 셈이지만, 이제 변화의 속도가 너무 떨어져 운동량의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을 서양문명의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종차별 시대의 남아프리카에서 일본인을 백인으로 분류한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성공이 아니겠는가.)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는 유럽-서양문명의 운동량 하락에 따른 것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세계의 변화를 주도해 온 힘이 물러서고 나면 이제 세계의 진로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과거와의 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장면이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유럽-서양문명에서는 현재보다 덜 진보된 과거를 멸시하며 과거의 경험을 경시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에서 벗어나는 행태가 만연해서 지금의 위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상황이라고 하지만 그 구성 요소가 모두 전에 없던 것은 아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겪어 온 온갖 상황에서 나타났던 여러 구성 요소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합함으로써 닥치는 상황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되 현재의 조건에 따른 약간의 조정을 가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방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안정된 시각이 필요하다. 아직도 근대문명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뉴라이트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한다. 뉴라이트가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끼워 맞춘 관점인데, 그런 편협한 관점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안정적 시각이 불가능하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이든 말든 인간성의 고찰은 모든 고등문명에서 중요한 지적 활동이었다. 인간의 속성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를 위한 노력 없이는 문명의 안정성을 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0세기의 유럽-서양문명에서 이 노력이 소홀했던 것은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옮겨가는 이행기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변화가 빠른 시기이기 때문에 안정성을 경시할 수 있었지만, 그런 특수조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효과적 비판으로서 세계체제론이 1970년대에 제기된 것도 그 시점에 문명의 위기가 부각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체제론의 핵심 이론가 중 하나인 죠반니 아리기(1937-2009)는 마지막 역작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에서 중국의 문명전통이 큰 역할을 맡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학을 복고주의라 하여 진취적이지 못함을 흠잡곤 했다. 과거에만 매달려 미래를 내다볼 줄 모른다면 물론 학문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된 오늘의 위치에 자만심을 품고 옛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무시하는 근대역사학의 오만으로는 과거와의 대화가 어렵다. 문명의 안정성에 공헌하는 역사학의 역할도 이뤄질 수 없다. 조그만 사건 하나를 놓고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경망도 이런 오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읽은 책의 하나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고 그의 현란한 논설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얼마 후 중국사를 전공으로 잡고 많은 중국 역사서를 읽으면서도 카가 말한 과학적 역사학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서술이라고 낮춰보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카에게 넘겨받은 편견으로 인해 인문학의 마음을 여는 데 장애를 겪었음을 반성한다. 새로운 눈으로 중국 역사서를 다시 읽으면서 인문학적 역사서술의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