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홀 사건’이라고도 불린 김계조 사건이 터졌다.


40년간 조선을 착취무대로 착취한 악마의 전당 전 총독부는 무조건 항복 후에도 그래도 무엇이 부족한지 놀랠만한 음모를 세워 우리 조선을 영구히 그들의 식민지화하려던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前 朝鮮鑛業會社 사장 金桂祚(39)를 중심으로 한 횡령장물 수수에 관한 사건은 그간 검사국의 金洪燮 검사의 담임 아래 취조를 전부 끝마치고 사건 일체를 서울지방법원으로 넘기었는데 동 법원에서는 머지않아 공판에 부치기로 되었다는 바 사건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금차 대전이 일본의 무조건항복이라는 확정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됨을 알게 되자 8월 9일 후 총독부의 총독 이하 각 수괴자들은 자기들이 조선을 철거한 후 조선에 친일정부를 수립할 음모를 세웠으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됨을 염려하여 8월 15일 후 또 다시 그들은 조선인으로 된 정치음모 비밀단체를 조직하고자 일본인 세화회 회장 穗積眞六郞(37), 전 경무국장 西廣忠雄, 전 조선신탁회 사장 石田千太郞, 전 재무국장 水田直昌, 전 광공국장 鹽田正洪 등은 전기 김계조에게 기밀자금으로 현금 250만원과 물자설비 500만원 이상 700만원 총계 1,000만원을 제공하여 國際文化社를 조직하고 표면으로는 극장, 댄스홀, 요리집, 여관 등을 경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실은 (1) 장래 조선정부에 친일파를 잠재시켜 친일적 시정을 하도록 하며 (2) 배일 친미파를 암살하며 (3) 조선정부 비밀정책을 탐지하며 (4) 조선과 미국과의 이간을 책동하고 (5) 조선국내 치안 교란 등……. 조선 독립발전의 방해와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탐정과 정치모략을 꾀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들에게는 많은 무기와 악질적 폭력단까지 배치하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5일)


“친미파 암살”, “미국과의 이간” 등 목적은 미군정의 전개 양상에 따라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8-15 직후 상황에서는 점령군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물러나는 일본 식민지배자들이 바라는 것일 수 있었다. 구체적 목적에 앞서 중요한 사실은 식민지배집단의 핵심부에서 자기네 정치적 목적을 위해 39세의 조선인 기업가에게 거액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1월 18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문: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답: 동산 부동산 합하여 이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학력은?

답: 소학교 4년에 중도퇴학 하였습니다.

 

문: 일본에는 몇 살 때에 갔는가?

답: 19세 시에 일본 구주로 갔다가 다시 광도로 가서 돈벌이를 하였습니다.

 

문: 광도에 가서 일인 정치가들과 교분을 맺었다지?

답: 그렇습니다. 망월칠랑과 민정당의 목원 씨와 알게 되었으며 물정 양면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문: 광도에서 귀국한 후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답: 회문탄광을 발견하여 회사를 조척한 후 탄광개발비로 동척(東拓)으로부터 120만원의 대여를 받아가지고 석탄을 파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문: 김정목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가?

답: 4년 전에 알았습니다.

 

문: 피고가 관계한 8회사 자금은 2천만원이라는데 그 자금의 출처는?

답: 안전은행과 동척에서 얻은 게 1천만원, 개인에게서 얻은 게 6,7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피고는 일본인들과 교제 시에는 배구자를 통하여 많이 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원등 정무총감과 수전, 서광 국장과는 언제부터 알았는가?

답: 원등은 작년 5월에 김정목의 소개로, 서광은 경전 사장 수적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며, 수전과 염전은 광산 관계로 알게 되었습니다.

 

문: 8-15 후 그들과 처음 만난 날짜는?

답: 8월 20일경에 딴스홀을 설립할 생각으로 서광을 방문하고 자금을 융통하여 달라고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등과 교분이 깊은 김정목을 시켜 매일같이 원등을 방문케 하여 자금을 운동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경영비로 서광 경무국장에게서 받은 50만원을 각 단체에 주었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일인세화회장 수적이 무상으로 60만원을 준 것은 이해키 어려운데?

답: 서광이는 제가 빌려준 50만원을 받기 위하여 60만원의 대여를 알선한 것입니다.

 

문: 기록에 의하면 위정자인 총독관리가 조선의 부녀자를 위하여 극력 거액을 대주었다는 것은 이해키 어려우며 딴 의사가 있지 않은가?

답: (대답이 없었다.)

 

문: 피고는 극력 부인하지만 김정목의 말에 의하면 친일 세력을 부식 유지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음모를 세우는 소굴을 계획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김정목은 피고와 어떤 원한이 있는가?

답: 딴스홀 경영에 있어서 경영권을 3분하자는 데에 피고가 응치 아니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 일본군사령부 연회는 항상 피고의 집에서 하였다는데?

답: 1년에 1,2회씩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문: 딴스홀 장소에 대하여 강(岡) 경기도 경찰부장이 힘을 썼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그 장소의 교섭은?

답: 다 여의치 못하고 우선 삼월(三越) 4층으로 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수입은?

답: 한 달에 30만원 정도였습니다.


학력도 재산도 없는 한 19세 청년이 1925년경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정치인들과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정치주먹 역할이 얼른 떠오른다. 귀국해서 탄광 설립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총독부 고관들과 가까이 지냈다. 동척, 은행과 개인으로부터 거금을 대여받아 사업자금으로 썼다. 일본군사령부 연회를 자기 집에서 열어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사람이 해방 직후 현금 250만원을 포함한 1천만원대 재산을 일본인 고관들에게 기밀자금으로 받아 댄스홀 등 유흥업소를 경영하며 무기를 모으고 폭력단을 조직했다는 것이 사건 내용이었다. 극우파 자금으로 활용될 성질의 돈이었다.


2월에 기소된 화신 사장 박흥식(1903-1994)의 횡령 혐의 역시 내용이 다르면서도 틀이 비슷한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로 이 사건을 살펴본다.


문: 재산 정도는?

답: 8월 15일 현재 평가로 약 1천만원 가량 됩니다.

 

문: 교육 정도는?

답: 학교는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문: 피고는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하였다는데?

답: 제가 설립한 게 아니고 군부와 총독부가 설립한 회사에 사장으로 취임만 하였습니다.

 

문: 이 회사는 일본의 침략전을 조장하는 회사인 만큼 우리 조선사람이라면 이런 회사의 사장에 취임할 수는 없을 것인데?

답: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때 정세가 당국의 사장 취임 권유를 거부한다면 도저히 조선서는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들의 압력으로 부득이 취임하였습니다.

 

문: 군부로부터 8월 27일 후 수차에 걸쳐 총액 4850만원의 돈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답: 상월(上月) 군사령관에게 애원하여 4800만원을 받았습니다.

 

문: 상월에게서 위로금으로 2천만원을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거액이어서 위로금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답: 처음에 상월 군사령관이 1천만원을 주면서 그대의 입장이 곤란할 터이니 일본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생각하여 보니 이 돈을 받아가지고 건국사업에 쓰면 유효할 것 같아서 2천만원을 갱생자금으로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2천만원은 어떤 사업에 쓸 계획이었던가?

답: 5천만원의 재단을 설립해 가지고 지도자 양성(구미 각국에 유학생 파견), 대학 설립, 고아원, 병원 등 자선사업을 계획하고 군정 당국과도 상의 중이었습니다.


일제 말기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50억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석 달 동안 35억원이 증발되었다. 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조선의 경제 구조를 충분히 뒤엎을 만한 문제였다. 늘어난 돈이 어디로 갔는가? 김계조와 박흥식 외에 일본 당국자들로부터 뭉칫돈을 받은 사람이 더 없었으리라고 볼 수 없다.


자기 재산 2백만원이라는 김계조는 1천만원을 받았고 자기 재산 1천만원이라는 박흥식은 5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재력을 키워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물러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나보다. 박흥식이 조선비행기회사 투자를 5천만원으로 보상받았다면 경성방직 김연수의 만주 방직공장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까?


박흥식은 지도자 양성, 대학 설립과 자선사업에 그 돈을 쓸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 듣기 좋은 사업들이다. 그러면서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도 좋은 사업들이다.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 좋지만 듣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사업도 있었을 것 같다. 청년단체 조직이라든가, 극우정당 후원이라든가. 그런 사업은 공판정의 진술에서 물론 빼놓았을 것이다.


박흥식 한 사람이 5천만원을 거머쥐었다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친일파 인사들이 받은 뭉칫돈의 총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10억원은 넘었겠지. 당시 통화량의 10%가 넘는 돈이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돈벼락을 맞는 동안 민중 전체는 통화량 증가만으로도 곱절 가까운 물가상승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이승만의 야욕, 한민당의 반동성, 공산당의 독단 등 해방공간 역사의 흐름을 험한 길로 이끌어간 요인들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그런 인적 요인들의 파괴력은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한 것 아니었을까? 몇 달 사이에 통화량의 70%가 늘어나고 그 3분의 1이 소수 반사회적 집단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돈이 그렇게 괴상한 형태로 깔려 있다면, 아무리 의인이 많고 악인이 적은 사회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해방 후의 제주도민에게 4-3은 날벼락처럼 우연성을 띤 사태였다.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월사태가 이남 전역을 휩쓸 때 제주도는 평온을 지켰다. 그런데 몇 달 후 3-1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의 터무니없는 발포로 사상자가 생기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된 끝에 1년 남짓 지난 후 온 섬이 폭력에 휩싸이는 4-3사태를 맞게 된다.

 

3-1 발포는 그 직전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이 자행한 것이었다. 3-1 발포에 대한 항의 파업에 공무원까지 포함한 전 도민이 참여했다. 이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더 많은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와 4-3사태에 이르는 상황 악화의 주역이 되었다. 3-1발포 이후 제주도민에게는 재앙을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주민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이 사태에 대해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했다. 이 사과 장면을 보며 이정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이런 대통령 밑에서 일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제주도민에게 가해자였던 국가가 반세기 만에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며 대한민국이 국가다운 국가가 되고 있다고 많은 국민이 생각하고 느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4-3사태의 완전한 청산이 될 수 없다. 청산 작업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3사태는 대한민국 정부가 없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태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의 책임은 일부분일 뿐이다. 4-3사태의 진정한 책임에는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당시 제주도를 포함한 이남 지역의 치안 책임은 미군정에 있었고 그 책임을 실행할 임무는 조병옥 경무부장 휘하의 군정경찰에 있었다. 사태를 잘 처리하지 못한 소극적 책임은 따질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 중요한 문제는, 미군정과 경찰의 지도부에게 사태를 잘 처리할 의지가 있었는가, 나아가, 사태를 악화시킬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 4-3사태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어떤 세력이 있었는지, 그 세력의 의지가 사태 진행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연성>

 

1945년 가을 미군이 점령한 38선 이남의 조선에서 제주도는 특이성이 큰 곳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약 1%를 가진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식민지처럼 차별받던 곳이었다. 왕조 후반의 '출륙금지령'이 상징하는 것처럼 제주인은 제주 밖으로 나가 큰소리치고 살 수가 없었다. 왕조 5백년을 통해 성균관에 진출한 제주인이 한 명도 없었다. 육지에서 파견한 관원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다. 운송-교통의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산업도 취약했다.

 

개항기 이후의 근대화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민에게는 유리한 쪽으로 많이 작용했다. 섬 안의 산업도 크게 확장되었고, 섬 밖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시대 동안 제주민의 3분의 1 가량이 일본 등지에 나가서 활동했고, 유학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육지와의 사이에 상당 수준의 언어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진출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조선인의 향우회가 군이나 도 단위로 조직된 반면 제주인의 향우회는 리 단위로 많이 조직되어 있었다.

 

해방 당시 제주도 주민은 20만 남짓이었는데, 몇 달 동안 귀환한 인구가 6-7만으로 추정된다. 농업이 빈약한 데다가 해산물 등 수출의 길이 거의 다 막혀 있는 지역에서 경제난이 심했고, 일본과의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1947년 1월 '복시환 사건'이 터졌는데, 신우균 감찰청장(제주도의 경찰 총수)이 연루되었고 제주인 부하들과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결과 100명의 '응원경찰'이 육지에서 파견되었고, 곧 3-1 발포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3-1 발포에 대한 항의 파업에는 전 공무원과 상당수 경찰까지 참가했다. 당시의 경찰 330명 중 65명이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400명의 경찰이 추가로 파견되었고, 서북청년단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주인 박경훈 지사가 파업 사태로 사퇴하고 유해진 지사가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 단원들을 데려온 데서 서청의 제주 진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외부 경찰과 서청은 압제적-수탈적 태도로 제주인의 불만을 계속 키웠다.

 

1948년 3월 중에 세 건의 두드러진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4월 3일 봉기 때 고문치사 책임자들이 응징의 중요한 표적이 되었다. 제주인들에게 4월 3일 봉기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외부'의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분노의 대상이 당시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군정과 '육지것들'이었기 때문에 좌익 인사들이 상당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1946년 10월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도민들이 1948년 4월에 대거 항쟁에 나서게 된 차이는 1947년 3월 이후 파견된 외지 경찰과 서청의 자극에서 찾을 수 있다.

 

<필연성>

 

미군정 수뇌부는 미 국무부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에 맞서는 미 군부 일반, 특히 맥아더 사령관의 국가주의(nationalism)를 공유하고 있었다. 점령 파트너인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립적인 단일국가를 한반도에 세우기보다 분단을 통해서라도 친미국가를 세우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194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좌우합작을 지지-지원할 때도 친미 극우파에게 경찰력을 맡기는 방침은 흔들리지 않았고, 1946년 10월사태 이후로는 반공-반소 태도에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았다.

 

친미 극우파는 과거의 친일파에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가세하여 형성한 집단이었다. 소위 친일파 중 상당수는 기득권을 얼마간 양보해서라도 새로 세워질 민족국가에 적응할 용의가 있었지만 민족국가 건설을 극력 회피하려는 악성 친일파도 있었다. 미군정은 이 악성 친일파에게 자금력과 경찰력 등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양심적인 친일파도 여기에 많이 휩쓸리게 되었다. 또한 이북에서 유산계층에 대한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이남으로 넘어오면서 강렬한 반공정신을 갖게 되어 극우세력의 인적 자원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은 극우세력의 돈과 주먹을 키워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시점에서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약 50억 원이었는데 그로부터 9월 하순까지 약 35억 원을 더 찍었다. 화폐 발행은 체제 질서의 기본이기 때문에 일본제국은 항복 시점까지도 화폐 남발을 삼갔다. 조선은행권도 발행할 때는 일본에서 인쇄해서 수송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항복 후 미군 진주 후까지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해서 계속된 총독부의 화폐 발행은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었는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밝혀진 사실은 미군정이 증발된 화폐의 유통을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증발된 지폐는 대개 고액권인데 급하게 찍느라고 인쇄 품질이 눈에 띄게 나쁜 것도 있었다. 그래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잘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군정청에서 교환을 보장해주었다.

 

짧은 기간에 찍은 대량의 고액권이 정상적 거래를 통해 시장으로 퍼져나간 분량이 많을 수 없다. 누군가의 손에 뭉칫돈으로 남아 있었다. 김계조와 박흥식 같은 친일파 사업가들이 수사를 받을 때 각각 1천만 원과 5천만 원을 해방 직후 총독부 측에서 받은 사실이 드러났는데, 빙산의 일각이 분명하다. 이승만과 김구 등에게 친일파 사업가들이 거액을 제공한 사실이 일부 드러나 있는데, 그들 손에 많은 현금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제가 파탄나고 인민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편재된 거액의 화폐는 막강한 힘을 가져다주었다. 룸펜화된 인민을 마음껏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http://orunkim.tistory.com/471?category=295693 그로 인해 이남에는 정치폭력이 넘쳐나고 극우세력을 견제할 모든 정치세력이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군정청은 또한 경찰력을 극우세력의 손에 맡겼다. 경찰 지휘를 맡은 조병옥(경무부장)과 장택상(수도경찰청장)은 일제시대의 경찰을 주축으로 경찰 규모를 몇 배로 키워 경찰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해방 당시 전 조선의 경찰 인원이 약 2만 명이었는데, 1년 후 이남의 경찰 인원만 2만5천이 되었고 그후에도 계속 늘어났다. 미군 진주 당시 기존 경찰관들이 대부분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출근률이 30%도 되지 않았는데, 출근을 독려해서 모두 미군정 경찰로 삼았다.

 

식민지 경찰의 배경을 가진 미군정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공"을 근거로 "애국"을 주장하기 위해 극우의 길로 매진했다. 1946년 10월사태에서도 민중을 적대시하는 경찰의 태도가 사태를 일으키고 키웠다. 민중의 저항이 있어야 자기네 존재가치가 확립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이래 육지 경찰이 사태의 악화에 큰 역할을 맡은 것은 당시 경찰의 이런 속성 때문이었다.

 

1948년 4월 3일 사태 발발 때까지는 미군 점령지역에 공통된 이런 조건들이 작용했다. 사태 발발 이후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정황이 있는데, 다음에 한 차례 정리해 보겠다.

 

 

Posted by 문천

 

해방 당시 58세의 홍명희(1888-1968)는 당대 최고의 기인(奇人)이라 할 인물이었다. 초년에 글재주로 최남선(1890-1957), 이광수(1892-1950)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이름을 날렸는가 하면 여운형, 안재홍, 조만식, 송진우와 함께 가장 영향력이 큰 국내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28년 이래 십여 년에 걸쳐 불후의 작품 <임꺽정>을 써낸 독보적 ‘민족작가’였다. 그가 아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홍명희 성명 3자가 나 자신과 관계없이 나도는 일이 8-15 이전에도 간혹 더러 있었지만 8-15 이후에 자못 잦아서 나는 고소도 하고 개탄도 하고 동 성명의 타인이지 나는 아니라고 농담도 하였다. (...) 근자에 와서 성명 3자가 나도는 정도가 좀 심하여졌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파쇼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인데 성명 3자가 반팟쇼의 위원장이 되고 나는 총동원조직을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성명 3자가 위원회의 상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만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 나는 신탁통치에 대하여 열렬한 반대자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성명 3자가 삼국회의를 지지한다는 시민대회의 회장이 되었다니 이것은 그대로 참고 묵과할 수가 없다. (...) 내가 이번 시민대회의 교훈을 톡톡히 받아서 일후에는 홍명희 성명 3자가 나도는 것을 금지하여 필부의 의지도 권위 있는 것을 보이려고 결심하였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금지한 뒤에도 여전히 나돌면 그것은 나의 친구의 호의가 아니라 적의 악의인 것을 미리 단언하여두겠다. (<서울신문> 1946. 1. 5일자.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437-438쪽에서 재인용)


1945년 11월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꿀 때 고문으로 취임한 홍명희는 정치활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지만 명망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름을 올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 특히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좌익 쪽에서 그의 명망이 요긴하게 쓰이는 일이 많았다.


문학동맹이 그런 예의 하나다. 문학을 표방하면서 좌익을 지향하는 문학동맹 지도자로 작가로서도 존중받고 공산주의 선배로서도 존경받는 홍명희가 적격이었다. 가까운 후배들의 권유에 따라 12월 13일 위원장직을 맡았는데, 문학동맹은 바로 정치적(하지 사령관의 인공 부정 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문학동맹이 정치에 너무 적극 나서는 데 홍명희가 반대하는 생각을 가졌는지는 차치하고, 위원장이 모르는 채로 문학동맹의 성명서가 나간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문학동맹 일은 문학가들 사이의 일이니까 그런 일이 다시 없도록 다짐을 두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12월 30일 결성된 반팟쇼공동투쟁위원회(반팟쇼) 위원장을 맡은 데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따랐다.


공산당, 인민당, 전농, 전평, 문학동맹 등 40여 단체가 모여 반팟쇼를 결성한 것은 좌익 주도의 민족통일전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홍명희를 대표로 추대한 것은 20년 전의 민족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는 신간회를 주도한 경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명희는 위원장에 추대된 사실을 나중에 들었을 것이다. 김태준이 추대를 주도했을 것으로 강영주는 추측하는데,(<벽초 홍명희 연구> 431쪽) 좋은 뜻으로 추대해서 이미 정해진 일을 냉정하게 물리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튿날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때도 조금 난처한 정도지, 화까지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같은 날 우익 쪽의 총동원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지만, 같은 반탁인 한은 잠깐이나마 참아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월 2일 공산당의 입장 선회로 홍명희가 터무니없는 입장에 빠졌다. 반팟쇼가 서울시 인민위원회, 서울시정회연합회와 함께 1월 3일 개최한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는 ‘반탁대회’로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날의 신문에조차 추측기사인지, 마치 반탁대회로 치러진 것처럼 보도되었다.


불명예스러운 신탁통치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하고 하루바삐 자주독립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하여 3천만 겨레는 좌익 우익을 가릴 것 없이 한 덩어리로 당장에 뭉치자고 서울 120만 시민이 한결같이 목을 놓아 부르짖어 그 실천에 채찍질을 하기로 된 민족통일자주독립 시민대회는 3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좌우 양익 10여만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어 새해 벽두를 장식하였다. 이 날 회장은 살을 찌르는 찬바람이 휘날리는 각색 깃발의 물결과 시내 각 파, 각 단체, 각 정회 대표들의 얼굴로 메워진 가운데 씩씩한 주악에 뒤이어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金光洙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인민당대표 韓鎰의 경과보고와 합동조합 대표 羅東旭의 본 대회 취지 설명이 있은 후 공산당 대표 李承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진상을 보고하고 결의문을 낭독한 다음 자주독립만세를 삼창하여 지축을 진동시켰다. 이윽고 시위행진을 일으켜 동대문, 종로, 의주동, 서대문, 광화문, 군정청, 안국정 등 전 시내를 돌았다. (
<조선일보> 1946년 1월 4일자)


이 대회의 취지는 엄밀히 말해서 ‘찬탁’이 아니라 ‘3상회의 지지’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인의 인식에는 그것이 바로 ‘찬탁’이었다. 취지가 정반대로 바뀐 대회의 대회장으로 홍명희의 성명 3자가 걸려 있었다. 홍명희는 12월 29일 기자의 질문에 반탁의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의 회고에서 샤브신 부영사가 “소련의 지시니 찬탁에 앞장서 달라”고 요구할 때 박헌영이 내심 불복하는 기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정확히 어느 날의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박헌영이 12월 29일 평양에서 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견했다는 서용규의 증언을 보면(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59쪽) 평양으로 가기 직전, 모스크바회담 결과가 막 전해졌을 때였을 것이다.


박헌영은 1월 2일 새벽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그 날 공산당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가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을 지지하는 태도를 밝혔다. 박헌영을 통해 “소련의 지시”를 수용한 결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시였든 권유였든 왜 소련은 한국인이 모스크바 결정을 수용하기 바랐던 것일까?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당국자들은 10월 말부터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모스크바 결정 후에도 ‘개인적으로’ 반탁운동에 공감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소련이 후원하는 좌익에서 반탁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동아일보> 허위 기사가 더 잘 먹혀들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이유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국제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안은 강자 독식을 막고 약자의 지분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미국이 이것을 내놓을 때는 소련이 비교적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미국이 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 극우파는 타협적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실력대결을 원했다. 약자의 입장이 된 소련은 신탁통치안의 관철을 통해 지분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를 요구했다 하더라도 지지 방식까지 소련이 원하는 대로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신탁통치 반대’라는 명제에서는 이탈하지 않으면서 ‘3상회담 지지’를 표명할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공산당이 인민당, 한민당, 국민당과 함께 1월 7일에 작성한 ‘4당 꼬뮤니케’가 그런 방향이었던 것을 보면 온건한 접근방식을 소련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4당 꼬뮤니케는 공산당이 아니라 한민당의 손으로 파기되었다.


2일 새벽 박헌영의 귀경 직후 공산당과 인공의 입장이 돌변한 사실을 보면 이것이 박헌영의 작용에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박헌영의 작용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소련의 요청이고, 또 하나는 박헌영 본인의 판단이다. 짐작컨대 박헌영은 ‘3상회담 지지’라는 소련의 요청 위에 극단적 ‘반탁반대’라는 자신의 판단을 얹어서 내놓았을 것이다.


좌익의 향배에서 박헌영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인데, 나는 그에게서 권위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인상을 받는다. ‘8월테제’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념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도 코민테른의 권위에 의지하는 경향이 보이고, 해방 후 소련영사관에 밀착하는 자세에도 소련의 권위에 의지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리고 인공을 극단 노선으로 끌고 가 인공 자체의 권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는 모험주의의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탁반대’가 꼭 ‘찬탁’이어야 하는가? 반탁운동은 극우파의 도발이었고, 반탁의 이념 자체보다 그 극단적 운동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의 요구가 ‘3상회담 지지’였다면 반탁을 하면서도 지지할 길이 있었다. 7일의 4당 꼬뮤니케와 같은 길이었다. 상식적 차원에서 ‘찬탁’으로 오해받을 극단적 ‘반탁반대’는 소련의 요구가 아니라 박헌영의 전술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극우파의 도발에 똑같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좌우 대립’ 국면을 고착시키고 그 안에서 극좌파의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극우와 극좌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추구하는 길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