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articular attachment has been growing in me to the idea of "Forest Together" ever since the image was impressed on my mind during the desolate years in prison. The image came from the verses of "El Condor Pasa", which I used to hum to myself in the solitary confinement cells. At the time, I was a snail, unable to leave the tip of the twig, and a nail, stuck to a spot. To such a creature, the reversal to the forest, "I'd rather be a forest than a street", was a deeply moving enlightenment.

 

The street, like the sparrow, has freedom of movement. Yet the singers would rather be a forest, fixed at a location. And feel the earth beneath their feet. Be a forest, and feel the earth beneath, it was a revolutionary vision indeed to a man in confinement. It was a consolation that you can become a forest, though you cannot depart from the here and now. It was a new possibility for the prisoner. As I think more of it, it seems to be not only a personal aspiration, but a collective assignment for the society of the time, to be a forest and feel the earth beneath.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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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이러한 점에서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조선의 3-1운동을 이끌었던 33인의 민족대표의 비폭력주의는 그 위상이 전혀 다르다. 민족대표의 경우에는 우민관(愚民觀)을 가지고 오로지 세계 공론에 호소하기 위해 비폭력의 수단을 선택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쉽게도 간디와 같은 깊은 철학은 없었다. (와다 하루키 외,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158쪽)

 

3-1운동을 한국현대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내 관점이다. 현대적 민족의식이 여기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에는 외국과의 접촉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물고기에 대한 물과 같았다. 너무나 당연한 조건이어서 행동의 준거로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왜란이나 호란 같은 비상시에만 일시적으로 표출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외국과의 접촉이 계속 늘어나다가, 1910년 이후로는 외국(일본)의 존재가 조선인의 생활조건을 전면적으로 좌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상황은 일시적 비상사태가 아니라 항구적 정상상태가 된다.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세울 시대적 필요에 대한 민족사회의 총체적 반응이 3-1운동이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은 이 때 나타난 것이었다.

 

위 글에서 조경달(趙景達)의 간디와 3-1운동 비교는 적절한 것이 아니다. 시기는 비슷하지만, 인도인은 그 시점까지 수십 년간 영국인의 압제를 겪으며 숱한 대응책을 모색한 끝에 가장 효과적인 저항방법을 선택하는 단계였다. 반면 조선인은 왕조시대의 형편없는 말기적 증상을 오래도록 겪은 끝에 일본인의 전면적 지배를 받기 시작한지 겨우 십년, 저항을 시작하면서 저항의 주체를 확인하는 단계였다.

 

내년에 백주년을 맞아 3-1운동이 사회의 이목을 많이 사로잡을 것은 분명한데, 과연 운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성숙해질 계기가 될까? 지난 10년간 한국현대사 정리 작업을 해 온 결과, 3-1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한국현대사 이해의 절반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세대는 3-1운동의 의미에 대해 윗세대로부터 배운 내용에 크게 보탠 것이 없다. 물론 관련된 연구는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일반인의 통념을 바꾸거나 키워준 것이 없다. 20세기를 지배한 가치체계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3-운동의 의미가 앞으로 잘 살아나게 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백주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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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제주 4-3사건 70주년이 다가온다. 사회활동이 거의 없이 지내는 터인지라, 마음속으로나 그 의미를 한 번 되새겨보며 지나가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의견을 청하는 곳이 있다. 민족화해센터 신부님들이 70주년을 맞아 4-3사건의 의미를 공부하는 모임에 도와달라는 것이다.

 

1990년대에 학교를 떠난 뒤 제주에 가서 10년 가까이 살았던 데는 문명교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적 차이가 상당히 있었던 제주와 육지 사이의 관계를 깊이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반세기 전의 4-3사건이 제주의 역사로서 현재까지도 얼마나 큰 무게를 갖고 있는지 놀라운 마음으로 공부하며, 제주의 정체성에 특히 주목하게 된 것은 '교섭'에 내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를 떠난 후 연변으로 갔다가 돌아와 수도권에서 지내며 10년간 4-3사건을 다시 살펴볼 계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해방일기> 작업이 1948년으로 접어들었을 때, 한국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4-3사건의 의미를 다시 정리해 보면서 몇 편의 글을 쓰게 되었다.

 

http://orunkim.tistory.com/1152

http://orunkim.tistory.com/1183

http://orunkim.tistory.com/1184

http://orunkim.tistory.com/1190

http://orunkim.tistory.com/1201

http://orunkim.tistory.com/1202

http://orunkim.tistory.com/1203

http://orunkim.tistory.com/1214

 

신부님들 부탁을 받고 나서 이 글들을 다시 훑어보며, 이 주제의 이해를 위해 내가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측면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주제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대부분 '제주인'의 입장에서 이뤄져 왔다. 내 공부는 비교적 '외부자' 입장에서 행한 것이어서 제주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잘 살필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사'의 범위를 넘어 냉전의 한 실마리로서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지난 10년간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정리한 작업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역시 그 측면이다. 물론 작업에 착수하면서 염두에 둔 측면이기는 하지만, 이제 그 작업에서 벗어나 되돌아보니 꾸역꾸역 엮어낸 성과에서 그 측면을 확인하는 마음이 뿌듯하다. 더우기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며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는 이 사회에 내 작업 성과도 한 몫 하게 될 것을 바랄 수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확실히 좀 미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4-3사건에 생각을 모으다 보니, 70주년을 불과 석 달 남겨놓고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내 의견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사건을 제대로 기념하려면 적어도 1년 전에는 사건의 의미가 파악되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침 <프레시안>에 올라온 김종민 기자의 글을 보니 http://orunkim.tistory.com/1152 이 생각이 더 굳어진다.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김 기자는 내가 제주 살 때 양조훈 국장, 김애자 기자와 함께 4-3 취재반을 구성하던 분인데 지방신문으로는 이례적인 '전문기자'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70주년 기념사업에 뜻을 가진 방면이 많지만 충분히 시간을 두고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위 기고문 끝에 "제주도 농민 김종민"이라고 서명을 해놓아서 의아했는데, 통화 중 내 주소를 묻기에 책을 보내주려나 생각했더니 귤이 한 상자 왔다. 이제 기자 아닌 농민이 맞나보다. 그가 보내준 알이 작은 귤, 대단히 먹기 좋다. 아침결에 먹은 껍질이 벌써 책상 위에 수북하다. 메일로 주문하면 jeju3796@hanmail.net 반가워하리라 믿는다.)

 

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눈 후 생각하니, 1년 남짓 남은 3-1운동 백주년을 위한 각계의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든다. 4-3 70주년과 격이 다른 큰 계기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도 3-1운동의 의미를 넓고 깊게 되새길 필요가 있는데, 그에 필요한 준비가 충분히 잘 되고 있을까? 남의 일이 아니다. 금년 한 해, 유념해 두고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늘 생각하고 애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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