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각"일기라고 간판을 걸면서, 쉽게 써질 것으로 생각했다. 해가 바뀌고 돌아보니, 그리 쉽게 써지지 않았다. 이제 욕심 내세울 일이 별로 없게 되어서 빈 마음으로 나 자신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욕심 일으킬 일이 자꾸 나타난다. 전 같으면 의욕 일어나는 것을 보며 "아직 안 늙었나봐" 하면서 기쁨을 느꼈을 텐데, 지금은 마음에 불편한 구석이 커진다. 몸의 늙어감에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서 "아직 덜 늙었나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 구석으로는 불편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보이고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금년 초에는 일의 의욕이 많이 일어난다. 그런데 전에 비해,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찾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나를 찾아오는 느낌이 크다. 이것은 퇴각의 자세에 맞는 현상 같아서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작년 초 천주교에 입교한 데도 큰 욕심이 없었다. 천당 입장권을 바란 것도 아니고 마음의 평안을 쉽게 얻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긴 여행(퇴각도 여행이라면)에 접어드는 마음이었다. 입교로 인해 내 생활과 활동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한두 주일에 한 번씩 미사에 참례하고 한 주일에 한두 번씩 빈 성당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성체조배"라 하는 이름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도다. 그런데 뜻밖에도, 활동에서 큰 변화의 계기가 보인다.

 

1월 15일에 신부님들 스터디에서 4-3사태에 관한 발제를 해드렸다. 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위원회를 앞둔 시간에 갖는 스터디 시간이었나보다. 십여 분 모시고 이야기를 했는데, 평생 강의해 본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의 하나였다. 주제에 관한 지식 수준이 특별히 높은 수강자 집단이 아니지만, 주제에 관한 생각에서 교인들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분들이기 때문에 공부에 잘 집중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만족하는 만큼 신부님들도 만족하는 기색이어서 앞으로도 신부님들과 함께 공부할 시간을 종종 가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활동에 큰 변화의 계기를 찾은 것은 다른 일이었다. 좀 일찍 가서 소장신부님과 조용히 이야기 나눌 시간을 좀 가졌는데, 이때 재미있는 얘기가 나왔다. 연구소의 금년 학술대회를 11월 8일 전후로 날자는 잡았는데, 그 내용에 관한 의논을 이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년 접어들면서 나는 한 가지 일의 방향에 막연하지만 강하게 생각이 끌리고 있었다. 내년이 3-1 백주년이다. 3-1정신에 대한 이 사회의 이해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내년이 닥치면 이미 늦을 것이고, 금년 중에 업그레이딩을 위한 노력이 쌓여야 할 텐데... 일체의 조직활동을 멀리 해온 나로서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고, 그저 책상머리에서 좋은 생각을 짜내도록 애쓸 다짐만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다.

 

소장신부님에게 학술대회 이야기를 듣자 마음속의 이 소망이 고개를 들고 기어나왔다. "평화"에 관한 생각을 넓히는 데 목적을 두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3-1정신에 관해서나 마찬가지로 평화에 관해서도 사람들이 어떤 건지 쉽게 생각해 버리면서 그 진짜 의미를 잘 살려내지 못하는 경향을 아쉬워하는 마음에서 내놓은 의견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종래 4강 중심으로 역학적 관계만 살피던 데서 벗어나 인류문명 전체를 살피면서 문화적-정신적 층위까지 생각의 범위에 넣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장신부님이 이 제안을 반가워하며 다음 운영회의에 제출할 기획안을 작성해 볼 것을 권해주었다. 반가워할 방향이 맞기는 하다. "동북아평화연구소"란 이름부터,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되 그것이 한반도 내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며 더 큰 질서 속에서 추구되어야 하겠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생전 처음 학술회의 취지문을 써보고 있다. (과학사학회에서 써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기억에 없으니 생전 처음 쓰는 "기분"은 틀림없다.) 혼자서 내 공부만 해오던 사람이 여러 사람의 공부를 끌어내려는 이 일에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미리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방향의 노력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 앞으로 꽤 재미를 붙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작성 중인 취지문 초안을 아래 붙여놓는다.

 

 

세계 속의 한반도 평화학술회의 구상

   

70년 전 분단건국 당시에는 통일이 민족공동체의 너무나 지당한 염원이었다.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영위해 온 민족사회가 35년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를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히면서 민족공동체는 생살 찢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찢어진 상처가 겉으로는 아물어져 있다. 불구 상태에 많이 익숙해져서, 이제 정상을 되찾기 위한 통일이라는 수술을 부담스러워하며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우는 뜻이 여기 있다. 상처의 아물림을 더 완전하게 함으로써 이대로 살더라도 불구 상태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술을 받더라도 위험이 적도록 하여, 장래 세대의 선택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 분단 상태의 이 사회에서는 평화에 관한 깊은 생각을 키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대결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압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세계적 냉전의 해소 이후로는 대결 상황이 서서히나마 완화되어 왔다. 대결 상황의 압박이 줄어들고 있는 지금, 풀려난 의식으로 평화에 관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이 사회의 과제다.

대결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분쟁을 회피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반 원리로서 평화의 적극적 의미가 자리 잡고 대결과 분쟁은 예외적 상황으로 처리되는, 그런 평화체제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평화체제는 인류문명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갈등과 분쟁이 전혀 없었던 일은 없다. 그러나 소수의 당사자들이 갈등과 분쟁을 겪어내는 동안 대다수 구성원의 생활과 활동이 교란받지 않는 상태라면 평화체제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150년 동안 인류의 대다수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직면해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상 하나의 특이한 시기, 전 세계적 난세(亂世)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 난세의 표현 하나가 냉전이었고, 한민족의 분단건국이 바로 냉전의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극복은 전 인류의 난세 극복과 맞물린 과제다. 세계적 평화체제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계적 평화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변 4의 향배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역사 속에서도 한민족의 운명에 큰 작용을 한 나라들이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이 예상되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우선, 세계가 좁아졌다. 70년 전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분단건국 관련 표결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모두 지금은 한국과 상당 규모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의 정착 여부에 상당 수준의 득실이 걸려 있다.

또한 평화체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나간 난세 중에서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힘의 공학적 관계에만 매달려서 안 될 것이다. 평화체제의 성립에는 현실적인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아니라 평화를 아끼는 인류의 사랑과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근대의 난세가 휩쓸기 전에 인류문명의 여러 갈래에서 크고 작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운영하던 경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난세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인류를 우리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이의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에만 매달려서 살았다.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며 인간 이외의 어떤 대상에도 두려움을 품을 줄 모르는 풍조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아끼는 마음을 잃었다.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내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잔치가 끝나고 있음을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에 관한 생각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품어줄 세계적 평화체제의 전망을 밝히는 데 이번 학술회의의 목적을 둔다. 주변 4강을 넘어 전 세계의 형세를 살펴볼 것이며, 지금의 형세만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도 시야에 담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를 통해 평화체제에 공헌해 왔고 앞으로도 공헌을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적 역량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
2018. 1. 23. 23:14

Pleasure and pain, joy and grief, all may be contained in the same view seen through the same window. It is in acknowledging both the light and the shadow at the same time, that you find the courage and wisdom with which you can face your life squarely.

 

The shadow derives from the light, and the light is revealed by the shadow. The true meaning of courage and wisdom, as you say, lies in the "way of union". Good-hearted, but not weak-minded. Cool-headed, but not cold-blooded. Confident, but not arrogant. There, you will find both the "wisdom of union" and the "courage of union".

 

[Shenzi]

 

'For Foreign Ey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shedding off  (0) 2018.02.08
holding a writing brush  (0) 2018.01.30
unsimple life  (0) 2018.01.16
Be a forest, feel the earth.  (1) 2018.01.09
a true sunrise  (0) 2018.01.04
Posted by 문천

 


10월 20일 ‘빈센트 발언’ 이래 ‘신탁통치’에 관련된 미국 측 메시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군정 최고 당국자인 아놀드와 하지가 ‘빈센트 발언’을 ‘개인 의견’으로 몰아붙이고 신탁통치 없이 한국을 즉각 독립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뜻인 것처럼 선전한 데서 혼란이 시작됐다. 국무성은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를 제안할 방침을 줄곧 분명히 해 왔는데도 하지와 아놀드는 이를 묵살하고 맥아더의 의중에만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회담 종결을 앞두고 나온 12월 27일자 <동아일보> 허위기사도 맥아더-미군정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맥아더-미군정 집단은 현지 점령군의 위상을 이용해 국무성 정책을 뒤집고자 했다. 국무성 정책은 한국을 연합 4국의 신탁통치 후에 독립시키려는 것이었다. 맥아더-미군정 집단은 한국을 미국만의 영향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모스크바회담 개막 전에 이승만의 독촉을 지원할 때는 한국 전체를 끌어들일 희망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스크바회담 결정이 나오고서는 남한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선 것 같다. ‘반소-반공’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동아일보> 허위기사는 분단 건국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국제무대에서 소련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명분을 일체 무시하는 노골적인 대립에는 아직 이르지 않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도 공산주의 운동이 안정된 정치세력으로 고착되어 있지 못했다. 국제적 미-소 협력도 국내의 좌-우 합작도 아직 길이 열려 있었다. 이 시점에서 ‘반소-반공’은 한 마디로, 판을 깨자는 뜻이었다. 미-소 협력과 좌-우 합작의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자는 뜻이었다.


‘솔로몬의 판결’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아기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리기 위해 솔로몬 왕이 짐짓 아기를 쪼개서 나눠주라고 하자 진짜 어머니는 아기를 포기할 테니 쪼개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는 이야기. 해방공간의 한국에는 아기를 쪼개더라도 내 몫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자들이 있었다. 분단 건국은 전쟁의 충분조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어난 일을 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하나의 민족을 두 개의 국가로 쪼개놓으면 꼭 6-25 같은 형태가 아니라도 어떤 전쟁이든 전쟁을 겪게 되어 있다. 통합을 향한 민족의 에너지가 현실 상황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1월 19일 빈센트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그 동안 군정 당국자들이 내놓은 혼란스러운 메시지가 국무성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 메시지들을 일일이 해명하고 수정하기보다 모스크바회담의 결정 내용을 기준으로 미국의 입장을 새로 그려 보인 것이다.


미국 국무성 극동문제위원장 존카트·빈센트는 19일 라디오 방송으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의견은 연합국 3국 의견과 동일한데 조선의 신탁통치를 만일 새로 설립되는 임시정부가 모두 능률이나 힘을 보여 준다면 조선의 신탁통치를 실현시키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만일에 새로 설립되는 임시정부가 통일적 치안이나 통치를 못 본다면 연합국기구 밑에 4대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현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의할 것이다. 만약 신탁통치가 실현되면 모스크바삼상회의와 같이 만5년으로 되기 쉽다. 우리가 조선에 대한 유일한 목적은 최단기간에 조선의 독립과 완전자치 완성에 있다. 조선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다. 그 이유는 현재 조선에는 90여개의 정치단체가 있는 까닭이다. (
서울신문 1946년 1월 21일)


사실 이것은 ‘미국의 입장’이 아니라 ‘연합3국의 입장’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최초 제안은 ‘5년 플러스 알파’의 신탁통치에 신탁기간 중 한국인의 임시정부나 과도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세 통치’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5년 마이너스 알파’로 바꾸고 임시정부를 신탁통치에 앞세우도록 한 최종 결정은 소련의 수정안에 따른 것이었다.

 


1월 19일 빈센트가 밝힌 미국의 입장은 모스크바회담 이후의 미국 입장이었다. 회담 이전의 미국 입장이 아니었다. 회담 결정이 알려진 후 한국인의 반응을 보고는 애초에 미국이 외세 통치 성격이 강한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국제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도중에 어느 참가자가 어떤 제안을 했었는지 과정을 밝히지 않는 것이 외교 관례다. 합의가 이뤄진 이상 합의 내용이 참가자 모두의 입장이 되는 것이고, 합의 이전의 의견 차이를 가지고 분란이 다시 일어나는 일을 피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소련은 합의를 발표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타스통신을 통해 합의 과정을 밝혔다. <동아일보> 허위기사 등 미군 측의 심한 왜곡이 있었고, 1월 19일 빈센트의 성명이 그 왜곡을 충분히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월 24일 타스통신의 회담 과정 공개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대응은 신중했다. 점령군과 영사관을 통해 3상회담 결정의 순조로운 이행을 유도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가 1월 22일 타스통신이 평양 발 기사로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배후조종한다는 비난을 인용했고, 이어 회담 과정을 공개했다. 23일에 스탈린이 미국 대사 해리먼을 접견하고 회담 과정을 공개해야 하는 소련의 입장을 알렸다. 이 접견을 해리먼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한국으로부터 받은 전보 하나를 내게 읽어주었다. 그곳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신탁통치 결정의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그와 같은 주장을 퍼뜨리기 위한 집회가 공개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이 아니라 소련만이 신탁통치를 고집했다고 하는 기사들이 한국 신문에 게재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전보였다. 이런 일에 러치 군정장관이 연루되어 있다고 지목해서 말했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25쪽에서 재인용)


스탈린까지 직접 나선 것이었다! 미국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먼은 2월 2일부터 3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아니, 하지를 방문했다. 소련 주재대사가 한국에 와서 사흘씩 지내다니! 한국 점령군의 행태가 미-소 관계에 일으키는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맥아더-군정청 집단은 판을 깨려고 날뛰고, 소련은 판을 지키려고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번즈 장관의 미국 국무성은 소련만한 열의는 아니라도 판을 지키려는 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후일의 회고에서 소련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돌아서고 있었다고 했는데,(커밍스 위 책 225-227쪽) 이것은 한국전쟁이 터진 후의 상황에 따라 기울어진 회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판을 지키려는 트루먼의 열의는 번즈보다 약했기 때문에 정책 혼선의 빌미를 주었을 것이다.


미국도 소련도 한국 독립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것이 아니었다. 1943년 11월 미-영-중의 카이로선언에서 한국 독립 방침을 세우고 소련도 이를 추인한 것은 한국인이 예뻐서가 아니라 일본제국 해체를 위해서였다. 일본이 막상 항복한 후 그 방침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인도주의적 ‘선의’와 자국 이해관계의 고려가 엇갈려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아더와 주한 미군 지휘관들은 현지 사정에 직접 접하면서 이 지역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깊이 살필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기 바라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혼선을 일으킬 동력이 여기에서 나왔다. 십여 년간 미국 대외정책을 이끌던 루스벨트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 때문에 조그만 동력으로도 혼선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반년 정도는 더 버틸 것으로 예상되던 일본을 단 며칠 만에 굴복시킨 원자폭탄! 원자폭탄을 가진 이제 소련을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미국인이 맥아더, 하지, 아놀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련과 사이좋게 지내기보다 싸우고 싶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싸움 붙기가 힘들었다. 영국, 프랑스 등 무시할 수 없는 나라들의 견제가 있고, 거기서 붙었다 하면 바로 제3차 세계대전이 될 텐데 전쟁에 지친 국민을 설득하기도 힘들다. 동아시아가 훨씬 편리한 위치였다. 판을 깨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소련도 원자폭탄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영향력은 아예 포기했고 한국에 대해서도 적대적 정권만 들어서지 않기 바라는 방어적 입장이었다. 대결을 피하면서 방어적 입장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3상회담에서 이끌어냈다. 원자폭탄을 자기네도 개발하기 전까지는 미국과의 대결을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 국경이 위협에 노출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3상회담에서 짜놓은 판을 지켜야 했다.


일반 한국인의 입장은 소련과 통하는 것이었다. 자력 해방이 아닌 만큼 승전국의 영향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국가로 독립해 여러 나라의 영향력을 고르게 받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하나의 국가로 한 나라의 영향력을 집중적으로 받는 것이 차선이었다. 두 개의 나라를 세워 각각 한 나라씩의 영향력을 받는 것은 최악의 길이었다.


한국이 최악의 길로 접어든 것이 어느 시점의 일이었는가? 여러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뤄진 일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비가 1946년 1월, 모스크바 결정을 받아들이는 단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맥아더-군정청 집단과 이승만의 마음속에서 분단 건국이 유일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유력한 목표로 떠오르게 된 것이 이 단계였다고 보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