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해방의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새해가 ‘독립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9일 전 일본이 항복할 때, 독립의 과업이 해를 넘기게 되리라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튀어나온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은 ‘즉시 독립’의 기대가 어그러졌기 때문이겠죠.


국민당은 12월 29일 반탁결의문을 발표했고, 선생님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권동진 선생이 위원장을 맡았지만 노환이시라 이름만 내놓고 실제 일은 선생님이 나섰죠. 반탁운동의 기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동안 “건국 준비”나 “독립 촉성” 같은 이름을 제안한 데서도 나타난 것처럼, 독립과 건국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었죠. ‘즉시 독립’의 환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반탁운동의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벌써 139일이나 되었군요. 8월 15일, 해방의 날 모든 조선인이 함께 밝은 장래를 떠올리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해방’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길든 짧든 조선인 모두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독립 건국’의 과정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의 필요성을 많은 다른 동지들보다 내가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 내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인이 40년 전 무엇 때문에 일본인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일본의 야욕 때문이라고들 하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원인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선인이 약하고 무능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외적 원인과 내적 원인이 합쳐져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해방’은 외적 원인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적 원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지금의 조선인이 40년 전의 조선인보다 강해지고 능력이 커졌을까요? 그렇게 볼 수 있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넉 달 반 동안 그런 면이 잘 나타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일본인은 조선인의 역량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짓눌러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역량은 크게 증대되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증대된 역량을 주체적으로 발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독립 건국의 과정은 조선인의 증대된 역량을 스스로 조직해서 주체적으로 발휘하는 길을 여는 노력으로 이뤄질 것입니다.


지금도 반탁운동을 마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데는 허점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이 함께 가진 민족국가 건설의 염원을 확인하는 것은 독립의 과정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중요한 일에는 개인적인 의혹을 접어놓고 열과 성을 다해 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독립의 과정’을 국민의 역량을 주체적으로 발휘하는 길을 찾는 ‘조직의 과정’으로 본다는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이 ‘지도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지도자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은데, 선생님 자신은 여운형 선생, 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지도자로 받들면서 자신은 낮춰 왔지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설명해 주십시오.


안재홍: 나 자신에게도 지도자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피할 생각이 없어요. 다만 내 역할은 작은 지도자입니다. 작은 지도자의 역할은 큰 지도자의 큰 역할을 떠받드는 데 있습니다. 한 사회의 지도력은 크고 작은 지도자의 역할이 상보-상생의 관계로 화합을 이룸으로써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몽양, 우남, 백범, 모두 개인적으로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가진 분들입니다. 나랑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지도자의 조건을 갖춘 분들입니다. 나처럼 합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직접 대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뿐입니다. 큰 지도자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선망과 기대의 마음을 일으키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자질과 능력만으로 지도자의 역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대로, 사회의 요구에 맞출 때 지도자의 역할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실천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민주주의가 올바른 민주주의냐 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이로 인해 이 사회가 분열될 위험도 있습니다. 반면 민족주의에는 그런 위험이 없습니다. 민족의 단결을 민족주의로 보장한 조건 위에서 적절한 민주주의 노선을 결정하는 과정을 겪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 지도력이 이 사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 정신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가 임정입니다. 임정을 대표하는 백범 선생이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 주고, 민주주의 노선 모색에는 몽양과 경중(조소앙), 우사(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 미국과의 관계에는 이승만 박사 같은 분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주기 바랍니다.


김기협: ‘독립의 과정’ 중에 민족의 분열을 막을 구심점으로 민족주의 이념의 역할을 생각하신다면 이에 대한 위협도 두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외적인 위협으로는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 상태가 있고, 내적인 위협으로는 친일 세력의 저항이 있지요. 특히 한민당을 통해 친일 세력이 미군정과 결탁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안재홍: 소련군의 역할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미군정에 비해 별로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미군정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 제기가 있어 왔고,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이 대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시정되어 가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아직 남아있는 문제들도 계속 시정되어 나갈 것을 희망합니다.


아직도 충분히 시정되지 못하고 있는 미군정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일제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원리와 민주주의 원리에 모두 역행하는 조치입니다. 기존 통치기구의 운영에 익숙한 집단에는 친일파가 많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행정과 경찰의 실권을 맡겨놓고는 민족주의 원리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존 통치기구는 철저하게 지배자 위주의 억압체제에 맞춰 만들어지고 운영된 것입니다. 그런 기구를 그대로 두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인민의 염원이 제대로 펼쳐질 수 없습니다.


이 문제점이 한민당의 역할에도 나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이 사회의 발전을 바라되 변화의 고통이 가급적 적은 완만한 발전을 바라는 양심적 보수주의자들이 한민당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한민당의 주력을 이루어 다소 반동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감화하고 이끌어 나간다면 한민당도 이 사회를 위해 훌륭한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반동 집단에게 실권을 쥐어주니까 돈과 권력이 결탁한 힘으로 한민당의 진로를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김기협: 한민당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송진우가 엊그제 저격당했습니다. 몽양 선생과 선생님이 건준을 함께 하자고 간곡히 청하던 분인데 길을 달리하고 이제 유명까지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그분의 역할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재홍: 얽혀있는 일들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이제 그 동안 말하기 어려웠던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조금 있기는 합니다.


11월 27일 아침 고하와 내가 백범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던 생각이 제일 먼저 납니다. 막 귀국한 백범 선생께 국내 상황을 설명드리기 위해 한민당과 국민당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은 자리였습니다. 그 날 오후에는 인민당과 인공을 대표하는 몽양과 긍인(허헌)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지요.


내가 먼저 말씀드렸죠. 임정이 건국 사업의 토대가 되어 그 토대 위에 민족의 건국 의지와 역량이 결집되기 바란다는 ‘임정 보강론’과 함께, 인공이 내 나라 내 정부에 굶주린 일부 인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포용하기 바란다는 뜻,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나 이북 지역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좌익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뒤에 고하가 세 가지 점을 중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 (1) 민족주의 일색으로, 이류(異類)를 허용치 말고 사상통일을 꾀할 것. (2) 임정을 개조하려면 엽관(獵官)의 풍조로 분규가 일어날 것이니 지금의 구성을 바꾸지 말라는 ‘임정 직진론’. (3) 수천만 원의 애국성금을 모으고 적당한 인물들을 외국에 파견,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칠 것.


해방의 날부터 죽음의 날까지 이 세 가지가 고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모두 진정보다 책략을 보여주는 것이라서 그를 위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1) ‘사상통일’이라니, 고하는 좋은 사상으로 통일할 경우 ‘사상통일’이란 것이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처럼 명민한 사람이 파시즘의 본질을 간과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민의 염원을 억누르기 위해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사상통일을 내세운 책략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2) 한민당 일각 반동 세력의 임정 ‘절대 지지’는 민족주의 기준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정 역할의 진정한 발전은 바라지 않은 것이었죠. ‘직진론’은 임정을 극존대하는 듯하면서 사실은 임정을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3) 외교활동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것을 앞세워야 합니까. 한민당이 국민당보다 돈 잘 모아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한 것일 뿐이죠.


몽양과 내가 고하를 건준에 끌어들이려 애쓴 것은 그의 자질과 능력이 민족과 사회를 위해 잘 쓰이기 바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질과 능력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 자질과 능력이 충분히 잘 활용되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