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분단건국 당시에는 통일이 민족공동체의 너무나 지당한 염원이었다.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영위해 온 민족사회가 35년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민족국가를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히면서 민족공동체는 생살 찢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70년이 지난 지금은 찢어진 상처가 겉으로는 아물어져 있다. 불구 상태에 많이 익숙해져서, 이제 정상을 되찾기 위한 통일이라는 수술을 부담스러워하며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우는 뜻이 여기 있다. 상처의 아물림을 더 완전하게 함으로써 이대로 살더라도 불구 상태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술을 받더라도 위험이 적도록 하여, 장래 세대의 선택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 분단 상태의 이 사회에서는 평화에 관한 깊은 생각을 키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대결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압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세계적 냉전의 해소 이후로는 대결 상황이 서서히나마 완화되어 왔다. 대결 상황의 압박이 줄어들고 있는 지금, 풀려난 의식으로 평화에 관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이 사회의 과제다.

대결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분쟁을 회피한다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반 원리로서 평화의 적극적 의미가 자리 잡고 대결과 분쟁은 예외적 상황으로 처리되는, 그런 평화체제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평화체제는 인류문명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갈등과 분쟁이 전혀 없었던 일은 없다. 그러나 소수의 당사자들이 갈등과 분쟁을 겪어내는 동안 대다수 구성원의 생활과 활동이 교란받지 않는 상태라면 평화체제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150년 동안 인류의 대다수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직면해 있었던 것은 인류 역사상 하나의 특이한 시기, 전 세계적 난세(亂世)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 난세의 표현 하나가 냉전이었고, 한민족의 분단건국이 바로 냉전의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의 분단 극복은 전 인류의 난세 극복과 맞물린 과제다. 세계적 평화체제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한반도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계적 평화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한반도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변 4의 향배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역사 속에서도 한민족의 운명에 큰 작용을 한 나라들이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이 예상되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우선, 세계가 좁아졌다. 70년 전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분단건국 관련 표결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모두 지금은 한국과 상당 규모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의 정착 여부에 상당 수준의 득실이 걸려 있다.

또한 평화체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나간 난세 중에서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힘의 공학적 관계에만 매달려서 안 될 것이다. 평화체제의 성립에는 현실적인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아니라 평화를 아끼는 인류의 사랑과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근대의 난세가 휩쓸기 전에 인류문명의 여러 갈래에서 크고 작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운영하던 경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난세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인류를 우리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이의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에만 매달려서 살았다.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기며 인간 이외의 어떤 대상에도 두려움을 품을 줄 모르는 풍조 안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아끼는 마음을 잃었다.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내 행복의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잔치가 끝나고 있음을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에 관한 생각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징표로 나타나는 평화의 염원 앞에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의 표준으로 부각된다. 무기력의 균형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뤄나가겠다는 의지로부터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한반도 평화를 품어줄 세계적 평화체제의 전망을 바라보고자 한다. 주변 4강을 넘어 전 세계의 형세를 살펴볼 것이며, 지금의 형세만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도 시야에 담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를 통해 평화체제에 공헌해 왔고 앞으로도 공헌을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적 역량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