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58세의 홍명희(1888-1968)는 당대 최고의 기인(奇人)이라 할 인물이었다. 초년에 글재주로 최남선(1890-1957), 이광수(1892-1950)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이름을 날렸는가 하면 여운형, 안재홍, 조만식, 송진우와 함께 가장 영향력이 큰 국내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28년 이래 십여 년에 걸쳐 불후의 작품 <임꺽정>을 써낸 독보적 ‘민족작가’였다. 그가 아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홍명희 성명 3자가 나 자신과 관계없이 나도는 일이 8-15 이전에도 간혹 더러 있었지만 8-15 이후에 자못 잦아서 나는 고소도 하고 개탄도 하고 동 성명의 타인이지 나는 아니라고 농담도 하였다. (...) 근자에 와서 성명 3자가 나도는 정도가 좀 심하여졌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파쇼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인데 성명 3자가 반팟쇼의 위원장이 되고 나는 총동원조직을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데 성명 3자가 위원회의 상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만 정도는 참을 수 있지만 나는 신탁통치에 대하여 열렬한 반대자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성명 3자가 삼국회의를 지지한다는 시민대회의 회장이 되었다니 이것은 그대로 참고 묵과할 수가 없다. (...) 내가 이번 시민대회의 교훈을 톡톡히 받아서 일후에는 홍명희 성명 3자가 나도는 것을 금지하여 필부의 의지도 권위 있는 것을 보이려고 결심하였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금지한 뒤에도 여전히 나돌면 그것은 나의 친구의 호의가 아니라 적의 악의인 것을 미리 단언하여두겠다. (<서울신문> 1946. 1. 5일자.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437-438쪽에서 재인용)


1945년 11월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꿀 때 고문으로 취임한 홍명희는 정치활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지만 명망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름을 올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 특히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좌익 쪽에서 그의 명망이 요긴하게 쓰이는 일이 많았다.


문학동맹이 그런 예의 하나다. 문학을 표방하면서 좌익을 지향하는 문학동맹 지도자로 작가로서도 존중받고 공산주의 선배로서도 존경받는 홍명희가 적격이었다. 가까운 후배들의 권유에 따라 12월 13일 위원장직을 맡았는데, 문학동맹은 바로 정치적(하지 사령관의 인공 부정 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문학동맹이 정치에 너무 적극 나서는 데 홍명희가 반대하는 생각을 가졌는지는 차치하고, 위원장이 모르는 채로 문학동맹의 성명서가 나간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문학동맹 일은 문학가들 사이의 일이니까 그런 일이 다시 없도록 다짐을 두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12월 30일 결성된 반팟쇼공동투쟁위원회(반팟쇼) 위원장을 맡은 데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따랐다.


공산당, 인민당, 전농, 전평, 문학동맹 등 40여 단체가 모여 반팟쇼를 결성한 것은 좌익 주도의 민족통일전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홍명희를 대표로 추대한 것은 20년 전의 민족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는 신간회를 주도한 경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명희는 위원장에 추대된 사실을 나중에 들었을 것이다. 김태준이 추대를 주도했을 것으로 강영주는 추측하는데,(<벽초 홍명희 연구> 431쪽) 좋은 뜻으로 추대해서 이미 정해진 일을 냉정하게 물리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튿날 ‘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때도 조금 난처한 정도지, 화까지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같은 날 우익 쪽의 총동원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지만, 같은 반탁인 한은 잠깐이나마 참아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월 2일 공산당의 입장 선회로 홍명희가 터무니없는 입장에 빠졌다. 반팟쇼가 서울시 인민위원회, 서울시정회연합회와 함께 1월 3일 개최한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는 ‘반탁대회’로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날의 신문에조차 추측기사인지, 마치 반탁대회로 치러진 것처럼 보도되었다.


불명예스러운 신탁통치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하고 하루바삐 자주독립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하여 3천만 겨레는 좌익 우익을 가릴 것 없이 한 덩어리로 당장에 뭉치자고 서울 120만 시민이 한결같이 목을 놓아 부르짖어 그 실천에 채찍질을 하기로 된 민족통일자주독립 시민대회는 3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좌우 양익 10여만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어 새해 벽두를 장식하였다. 이 날 회장은 살을 찌르는 찬바람이 휘날리는 각색 깃발의 물결과 시내 각 파, 각 단체, 각 정회 대표들의 얼굴로 메워진 가운데 씩씩한 주악에 뒤이어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金光洙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인민당대표 韓鎰의 경과보고와 합동조합 대표 羅東旭의 본 대회 취지 설명이 있은 후 공산당 대표 李承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진상을 보고하고 결의문을 낭독한 다음 자주독립만세를 삼창하여 지축을 진동시켰다. 이윽고 시위행진을 일으켜 동대문, 종로, 의주동, 서대문, 광화문, 군정청, 안국정 등 전 시내를 돌았다. (
<조선일보> 1946년 1월 4일자)


이 대회의 취지는 엄밀히 말해서 ‘찬탁’이 아니라 ‘3상회의 지지’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인의 인식에는 그것이 바로 ‘찬탁’이었다. 취지가 정반대로 바뀐 대회의 대회장으로 홍명희의 성명 3자가 걸려 있었다. 홍명희는 12월 29일 기자의 질문에 반탁의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소련영사관 직원 샤브시나의 회고에서 샤브신 부영사가 “소련의 지시니 찬탁에 앞장서 달라”고 요구할 때 박헌영이 내심 불복하는 기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정확히 어느 날의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박헌영이 12월 29일 평양에서 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견했다는 서용규의 증언을 보면(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259쪽) 평양으로 가기 직전, 모스크바회담 결과가 막 전해졌을 때였을 것이다.


박헌영은 1월 2일 새벽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그 날 공산당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가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을 지지하는 태도를 밝혔다. 박헌영을 통해 “소련의 지시”를 수용한 결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시였든 권유였든 왜 소련은 한국인이 모스크바 결정을 수용하기 바랐던 것일까?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당국자들은 10월 말부터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모스크바 결정 후에도 ‘개인적으로’ 반탁운동에 공감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소련이 후원하는 좌익에서 반탁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에 신탁통치안의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동아일보> 허위 기사가 더 잘 먹혀들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이유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국제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안은 강자 독식을 막고 약자의 지분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미국이 이것을 내놓을 때는 소련이 비교적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미국이 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 극우파는 타협적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실력대결을 원했다. 약자의 입장이 된 소련은 신탁통치안의 관철을 통해 지분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를 요구했다 하더라도 지지 방식까지 소련이 원하는 대로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신탁통치 반대’라는 명제에서는 이탈하지 않으면서 ‘3상회담 지지’를 표명할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공산당이 인민당, 한민당, 국민당과 함께 1월 7일에 작성한 ‘4당 꼬뮤니케’가 그런 방향이었던 것을 보면 온건한 접근방식을 소련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4당 꼬뮤니케는 공산당이 아니라 한민당의 손으로 파기되었다.


2일 새벽 박헌영의 귀경 직후 공산당과 인공의 입장이 돌변한 사실을 보면 이것이 박헌영의 작용에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박헌영의 작용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소련의 요청이고, 또 하나는 박헌영 본인의 판단이다. 짐작컨대 박헌영은 ‘3상회담 지지’라는 소련의 요청 위에 극단적 ‘반탁반대’라는 자신의 판단을 얹어서 내놓았을 것이다.


좌익의 향배에서 박헌영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인데, 나는 그에게서 권위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인상을 받는다. ‘8월테제’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념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도 코민테른의 권위에 의지하는 경향이 보이고, 해방 후 소련영사관에 밀착하는 자세에도 소련의 권위에 의지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리고 인공을 극단 노선으로 끌고 가 인공 자체의 권위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는 모험주의의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탁반대’가 꼭 ‘찬탁’이어야 하는가? 반탁운동은 극우파의 도발이었고, 반탁의 이념 자체보다 그 극단적 운동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의 요구가 ‘3상회담 지지’였다면 반탁을 하면서도 지지할 길이 있었다. 7일의 4당 꼬뮤니케와 같은 길이었다. 상식적 차원에서 ‘찬탁’으로 오해받을 극단적 ‘반탁반대’는 소련의 요구가 아니라 박헌영의 전술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극우파의 도발에 똑같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좌우 대립’ 국면을 고착시키고 그 안에서 극좌파의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극우와 극좌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추구하는 길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