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의 제주도민에게 4-3은 날벼락처럼 우연성을 띤 사태였다. 1946년 대구에서 터진 10월사태가 이남 전역을 휩쓸 때 제주도는 평온을 지켰다. 그런데 몇 달 후 3-1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의 터무니없는 발포로 사상자가 생기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된 끝에 1년 남짓 지난 후 온 섬이 폭력에 휩싸이는 4-3사태를 맞게 된다.
3-1 발포는 그 직전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이 자행한 것이었다. 3-1 발포에 대한 항의 파업에 공무원까지 포함한 전 도민이 참여했다. 이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더 많은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와 4-3사태에 이르는 상황 악화의 주역이 되었다. 3-1발포 이후 제주도민에게는 재앙을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주민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이 사태에 대해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했다. 이 사과 장면을 보며 이정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이런 대통령 밑에서 일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제주도민에게 가해자였던 국가가 반세기 만에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며 대한민국이 국가다운 국가가 되고 있다고 많은 국민이 생각하고 느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4-3사태의 완전한 청산이 될 수 없다. 청산 작업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3사태는 대한민국 정부가 없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태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의 책임은 일부분일 뿐이다. 4-3사태의 진정한 책임에는 아직 밝혀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당시 제주도를 포함한 이남 지역의 치안 책임은 미군정에 있었고 그 책임을 실행할 임무는 조병옥 경무부장 휘하의 군정경찰에 있었다. 사태를 잘 처리하지 못한 소극적 책임은 따질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 중요한 문제는, 미군정과 경찰의 지도부에게 사태를 잘 처리할 의지가 있었는가, 나아가, 사태를 악화시킬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 4-3사태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어떤 세력이 있었는지, 그 세력의 의지가 사태 진행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연성>
1945년 가을 미군이 점령한 38선 이남의 조선에서 제주도는 특이성이 큰 곳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약 1%를 가진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식민지처럼 차별받던 곳이었다. 왕조 후반의 '출륙금지령'이 상징하는 것처럼 제주인은 제주 밖으로 나가 큰소리치고 살 수가 없었다. 왕조 5백년을 통해 성균관에 진출한 제주인이 한 명도 없었다. 육지에서 파견한 관원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다. 운송-교통의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산업도 취약했다.
개항기 이후의 근대화는 조선의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민에게는 유리한 쪽으로 많이 작용했다. 섬 안의 산업도 크게 확장되었고, 섬 밖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시대 동안 제주민의 3분의 1 가량이 일본 등지에 나가서 활동했고, 유학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육지와의 사이에 상당 수준의 언어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진출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조선인의 향우회가 군이나 도 단위로 조직된 반면 제주인의 향우회는 리 단위로 많이 조직되어 있었다.
해방 당시 제주도 주민은 20만 남짓이었는데, 몇 달 동안 귀환한 인구가 6-7만으로 추정된다. 농업이 빈약한 데다가 해산물 등 수출의 길이 거의 다 막혀 있는 지역에서 경제난이 심했고, 일본과의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1947년 1월 '복시환 사건'이 터졌는데, 신우균 감찰청장(제주도의 경찰 총수)이 연루되었고 제주인 부하들과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결과 100명의 '응원경찰'이 육지에서 파견되었고, 곧 3-1 발포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3-1 발포에 대한 항의 파업에는 전 공무원과 상당수 경찰까지 참가했다. 당시의 경찰 330명 중 65명이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400명의 경찰이 추가로 파견되었고, 서북청년단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주인 박경훈 지사가 파업 사태로 사퇴하고 유해진 지사가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 단원들을 데려온 데서 서청의 제주 진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외부 경찰과 서청은 압제적-수탈적 태도로 제주인의 불만을 계속 키웠다.
1948년 3월 중에 세 건의 두드러진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4월 3일 봉기 때 고문치사 책임자들이 응징의 중요한 표적이 되었다. 제주인들에게 4월 3일 봉기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외부'의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분노의 대상이 당시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군정과 '육지것들'이었기 때문에 좌익 인사들이 상당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1946년 10월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도민들이 1948년 4월에 대거 항쟁에 나서게 된 차이는 1947년 3월 이후 파견된 외지 경찰과 서청의 자극에서 찾을 수 있다.
<필연성>
미군정 수뇌부는 미 국무부의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에 맞서는 미 군부 일반, 특히 맥아더 사령관의 국가주의(nationalism)를 공유하고 있었다. 점령 파트너인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립적인 단일국가를 한반도에 세우기보다 분단을 통해서라도 친미국가를 세우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194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좌우합작을 지지-지원할 때도 친미 극우파에게 경찰력을 맡기는 방침은 흔들리지 않았고, 1946년 10월사태 이후로는 반공-반소 태도에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았다.
친미 극우파는 과거의 친일파에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가세하여 형성한 집단이었다. 소위 친일파 중 상당수는 기득권을 얼마간 양보해서라도 새로 세워질 민족국가에 적응할 용의가 있었지만 민족국가 건설을 극력 회피하려는 악성 친일파도 있었다. 미군정은 이 악성 친일파에게 자금력과 경찰력 등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양심적인 친일파도 여기에 많이 휩쓸리게 되었다. 또한 이북에서 유산계층에 대한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상당수가 이남으로 넘어오면서 강렬한 반공정신을 갖게 되어 극우세력의 인적 자원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은 극우세력의 돈과 주먹을 키워주었다. 1945년 8월 15일 시점에서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약 50억 원이었는데 그로부터 9월 하순까지 약 35억 원을 더 찍었다. 화폐 발행은 체제 질서의 기본이기 때문에 일본제국은 항복 시점까지도 화폐 남발을 삼갔다. 조선은행권도 발행할 때는 일본에서 인쇄해서 수송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항복 후 미군 진주 후까지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해서 계속된 총독부의 화폐 발행은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었는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밝혀진 사실은 미군정이 증발된 화폐의 유통을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증발된 지폐는 대개 고액권인데 급하게 찍느라고 인쇄 품질이 눈에 띄게 나쁜 것도 있었다. 그래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잘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군정청에서 교환을 보장해주었다.
짧은 기간에 찍은 대량의 고액권이 정상적 거래를 통해 시장으로 퍼져나간 분량이 많을 수 없다. 누군가의 손에 뭉칫돈으로 남아 있었다. 김계조와 박흥식 같은 친일파 사업가들이 수사를 받을 때 각각 1천만 원과 5천만 원을 해방 직후 총독부 측에서 받은 사실이 드러났는데, 빙산의 일각이 분명하다. 이승만과 김구 등에게 친일파 사업가들이 거액을 제공한 사실이 일부 드러나 있는데, 그들 손에 많은 현금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제가 파탄나고 인민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편재된 거액의 화폐는 막강한 힘을 가져다주었다. 룸펜화된 인민을 마음껏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http://orunkim.tistory.com/471?category=295693 그로 인해 이남에는 정치폭력이 넘쳐나고 극우세력을 견제할 모든 정치세력이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군정청은 또한 경찰력을 극우세력의 손에 맡겼다. 경찰 지휘를 맡은 조병옥(경무부장)과 장택상(수도경찰청장)은 일제시대의 경찰을 주축으로 경찰 규모를 몇 배로 키워 경찰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해방 당시 전 조선의 경찰 인원이 약 2만 명이었는데, 1년 후 이남의 경찰 인원만 2만5천이 되었고 그후에도 계속 늘어났다. 미군 진주 당시 기존 경찰관들이 대부분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출근률이 30%도 되지 않았는데, 출근을 독려해서 모두 미군정 경찰로 삼았다.
식민지 경찰의 배경을 가진 미군정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공"을 근거로 "애국"을 주장하기 위해 극우의 길로 매진했다. 1946년 10월사태에서도 민중을 적대시하는 경찰의 태도가 사태를 일으키고 키웠다. 민중의 저항이 있어야 자기네 존재가치가 확립되기 때문이었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이래 육지 경찰이 사태의 악화에 큰 역할을 맡은 것은 당시 경찰의 이런 속성 때문이었다.
1948년 4월 3일 사태 발발 때까지는 미군 점령지역에 공통된 이런 조건들이 작용했다. 사태 발발 이후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정황이 있는데, 다음에 한 차례 정리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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