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김구와 하지 사이에 군정청 사무실에서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하지는 김구에게 “잡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고, 김구는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고 뻗대기까지 했단다.


충돌의 직접 원인은 전날 임정이 발표한 ‘국자(國字)’였다. 국자 제1호의 제1항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及 한인 직원은 전부 本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은 군정청을 마비시키고 행정권과 경찰권을 임정이 탈취하겠다는, 군정청 입장에서 보면 ‘쿠데타’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지가 험하게 나온 데는 이틀 전 송진우의 죽음을 김구의 책임으로 보는 의심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송진우는 때때로 하지의 주장을 언론에 대신 전할 만큼 신임을 받는 고문이었다. 그런데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시점에서 그가 저격당했으니 반탁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김구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의심이 일어난 것이다. 임정 시절 김구가 여러 ‘의거’를 주도한 경력도 이 의심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고 하지의 의심을 곁에서 부추겨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2월 29일의 노선 충돌을 암살의 계기로 볼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10일자 기사 “송진우 씨 암살범 5명을 일망포진”을 보면 4월 9일 한현우와 함께 체포된 두 공범 김의현과 유근배는 원래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다. 다른 세 명의 경호원과 함께 “작년 12월말경의 의견충돌로 말미암아 송 씨의 신변보호자로서의 책임으로부터 자퇴한 사실”을 진술하였다고 한다.


주범은 한현우라도 송진우의 신변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직 경호원들 덕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암살은 몇 시간 전의 논쟁으로 인해 급히 결정된 것일 수 없다. 한현우가 그 논쟁을 보고 난 뒤에 송진우 저격을 결심하고 공범들을 포섭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튼 1월 1일 오후 8시 김구를 대신한 엄항섭의 방송으로 임정의 ‘국자 제1호’는 꼬리를 내렸다.


김구주석을 대리하여 엄항섭 선전부장은 1일 밤 8시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해서 일반 민중이 파업을 중지하고 곧 복업하라고 대략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나는 질서정연한 시위운동에 대하여 십분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거나 또는 우리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오늘 워싱턴에서 온 보도에 의하면 미국 국무장관 번즈 씨는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행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 그러나 만일 불행히 신탁통치가 결정될 때에는 또 다시 반대운동을 할 것은 물론이다. 지금부터 작업을 계속해서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별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하고 또 지방에서도 파업을 중지하고 복업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1일)


이 날도 경기도청 조선인 직원이 총사직을 결의했고, 군정청 직원들은 정동예배당에서 모임을 갖고 반탁과 임정 지지를 결의했다. 그 전날에는 경찰 대표들이 경교장을 찾아와 임정 지시에 따를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임정 지지’가 뜨거워도 김구를 하지의 협박으로부터 보호해주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연말연초 동안 임정과 인공 사이에 합작을 놓고 한 차례 공방이 있었다. 인공 측에서도 12월 29일 반탁 입장을 밝혔다. “진위는 아직 공식발표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개인적 입장에서 말하겠다”고 했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라도 조선의 자주독립이 침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과거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던 이상으로 단호히 싸워야 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2월 31일 저녁 임정의 성주식, 장건상, 최동오 3인과 인공의 홍증식, 홍남표, 이강국, 정백 4인의 회담은 반탁운동의 과제 앞에서 임정과 인공의 합작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진 결과였다. 이 회담에서 제기된 인공 측 제안을 공문으로 작성해 임정에 보내고 언론에 공표했다.


조선을 위요한 내외정세는 지극히 급박하여 있으며 민족통일은 시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만일 차제에 우리의 자력으로서 통일치 못하고 외방에 의하여 부득이 통일케 된다면 이것은 민족만대의 치욕이요 천추의 遺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명한 민중은 위기에 처하여 민족의 절대통일을 강렬하게 요청하며 나아가서 귀 정부와 본 정부의 동시해체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조선 민족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원인은 양 정부의 병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실로 양 정부의 통일이 민족통일의 유일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정하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서 다음과 제 조건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제시합니다.

 

一. 양방에서 각각 약간 명의 위원을 선출하고 교섭에 관한 일절 전권을 위임하여 통일위원회를 형성할 것

 

一. 該 위원회는 매일 긴밀하게 회합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관한 구체안을 토의 결정할 것

 

一. 右 임무의 달성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이전에 완수할 시급한 필요로써 1월 5일까지 成案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것

 

본 제안에 대하여 1946년 1월 2일 오전 10시까지 회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46년 1월 1일 朝鮮人民共和國 中央人民委員會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2일 오전 인공 측은 합작 제안 공문을 임정이 접수 거부한 사실을 밝히고 임정을 맹비난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아래와 같이 경위를 밝힌 다음 “시각을 다투는 급박한 현하 내외정세에 있어서 서식을 운운하는 무성의한 임정의 태도를 보라!”“민족분열의 최고책임자라는 낙인은 소위 대한민국임시정부 위에 찍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昨日 발표한 바와 같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의 공문을 1946년 1월 1일 오전 9시에 국무위원 崔東旿에게 수교하여 그가 접수하였다는 서명을 받고 성의 있는 회답이 있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동일 오후 6시에 右 공문이 반환되었는데 뜯어보고 봉환한 것이며 그 반환하는 이유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進啓者 貴方來函을 서식상 접수키 難하므로 玆에 반환함

洪南杓 貴下

大韓民國臨時政府 秘書處 啓" (<서울신문> 1946년 1월 2일)


그러나 3일 아침에 다시 발표한 담화문은 임정을 계속 비난하면서도 끝에 “임정도 애국 우국의 지성에서 그 태도와 경향을 시정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것을 포옹할 용의가 있다.”고 하여, 합작에 대한 인공 측의 성의를 강조했다. (<중앙신문> 1946년 1월 4일)

 


인공 측에서 사흘 계속해서 임정과의 합작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는 동안 임정 측은 공식 대응이 없었다. 12월 31일 모인 7인이 양측 ‘정식 대표’라고 인공 측에서는 강조했다. 임정 측에서도 인공과의 합작을 원천적으로 무시할 명분이 없기 때문에 회동 제안에 형식상 응하면서도 ‘비주류’ 국무위원들을 대표로 내보내고는 그 회담 내용을 “서식상의 문제”라는 핑계로 묵살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12월 27일 김구의 방송연설(엄항섭 대독) “3천만 동포에게 고함” 내용에서 김구는 친일파 배척을 앞세울 뜻을 밝히고 임정 비주류가 주도하는 ‘특별정치회의’를 지지하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 반탁 문제가 터져 나오자 비주류의 좌익과의 합작 주장이 경시되는 분위기로 임정이 돌아선 것이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임정의 약점은 국내의 기반과 대중조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반탁의 함성 속에 각계각층의 ‘임정 지지’ 선언이 쏟아져 나오자 이 에너지를 발판으로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전국 조직을 만들 전망이 떠올랐다. 그리고 경찰 간부와 군정청 직원 등 유력한 새 지지 세력은 우익 성향이었다. 김구가 반공 노선을 굳히기까지는 않았더라도, 좌익과의 합작이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리는 과제가 되어버렸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 대립의 구조는 공산당과 인공이 2일 ‘3상회담 결의 지지’로 급선회하면서 완성되었다. 좌익 측에서 준비한 1월 3일 오후의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는 갑자기 ‘반탁 반대’의 팻말로 바뀌었다.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는 3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많은 군중의 참집 아래 개회되었다. 그런데 대회의 진행은 최초의 소집 취지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걸어서 외상회의 절대 지지를 표명하여 탁치반대를 반대한다는 것 등을 결의하고 동 2시 반부터 각 단체는 反託反對의 시가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취지가 달라진 시위행렬에 크게 의아해하고 호응치 아니하였다. (
<동아일보> 1946년 1월 4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