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홀 사건’이라고도 불린 김계조 사건이 터졌다.


40년간 조선을 착취무대로 착취한 악마의 전당 전 총독부는 무조건 항복 후에도 그래도 무엇이 부족한지 놀랠만한 음모를 세워 우리 조선을 영구히 그들의 식민지화하려던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前 朝鮮鑛業會社 사장 金桂祚(39)를 중심으로 한 횡령장물 수수에 관한 사건은 그간 검사국의 金洪燮 검사의 담임 아래 취조를 전부 끝마치고 사건 일체를 서울지방법원으로 넘기었는데 동 법원에서는 머지않아 공판에 부치기로 되었다는 바 사건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금차 대전이 일본의 무조건항복이라는 확정적인 단계로 들어가게 됨을 알게 되자 8월 9일 후 총독부의 총독 이하 각 수괴자들은 자기들이 조선을 철거한 후 조선에 친일정부를 수립할 음모를 세웠으나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됨을 염려하여 8월 15일 후 또 다시 그들은 조선인으로 된 정치음모 비밀단체를 조직하고자 일본인 세화회 회장 穗積眞六郞(37), 전 경무국장 西廣忠雄, 전 조선신탁회 사장 石田千太郞, 전 재무국장 水田直昌, 전 광공국장 鹽田正洪 등은 전기 김계조에게 기밀자금으로 현금 250만원과 물자설비 500만원 이상 700만원 총계 1,000만원을 제공하여 國際文化社를 조직하고 표면으로는 극장, 댄스홀, 요리집, 여관 등을 경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실은 (1) 장래 조선정부에 친일파를 잠재시켜 친일적 시정을 하도록 하며 (2) 배일 친미파를 암살하며 (3) 조선정부 비밀정책을 탐지하며 (4) 조선과 미국과의 이간을 책동하고 (5) 조선국내 치안 교란 등……. 조선 독립발전의 방해와 일본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탐정과 정치모략을 꾀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들에게는 많은 무기와 악질적 폭력단까지 배치하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5일)


“친미파 암살”, “미국과의 이간” 등 목적은 미군정의 전개 양상에 따라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8-15 직후 상황에서는 점령군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물러나는 일본 식민지배자들이 바라는 것일 수 있었다. 구체적 목적에 앞서 중요한 사실은 식민지배집단의 핵심부에서 자기네 정치적 목적을 위해 39세의 조선인 기업가에게 거액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1월 18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문: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답: 동산 부동산 합하여 이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학력은?

답: 소학교 4년에 중도퇴학 하였습니다.

 

문: 일본에는 몇 살 때에 갔는가?

답: 19세 시에 일본 구주로 갔다가 다시 광도로 가서 돈벌이를 하였습니다.

 

문: 광도에 가서 일인 정치가들과 교분을 맺었다지?

답: 그렇습니다. 망월칠랑과 민정당의 목원 씨와 알게 되었으며 물정 양면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문: 광도에서 귀국한 후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답: 회문탄광을 발견하여 회사를 조척한 후 탄광개발비로 동척(東拓)으로부터 120만원의 대여를 받아가지고 석탄을 파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문: 김정목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가?

답: 4년 전에 알았습니다.

 

문: 피고가 관계한 8회사 자금은 2천만원이라는데 그 자금의 출처는?

답: 안전은행과 동척에서 얻은 게 1천만원, 개인에게서 얻은 게 6,7백만원 가량 됩니다.

 

문: 피고는 일본인들과 교제 시에는 배구자를 통하여 많이 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원등 정무총감과 수전, 서광 국장과는 언제부터 알았는가?

답: 원등은 작년 5월에 김정목의 소개로, 서광은 경전 사장 수적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며, 수전과 염전은 광산 관계로 알게 되었습니다.

 

문: 8-15 후 그들과 처음 만난 날짜는?

답: 8월 20일경에 딴스홀을 설립할 생각으로 서광을 방문하고 자금을 융통하여 달라고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등과 교분이 깊은 김정목을 시켜 매일같이 원등을 방문케 하여 자금을 운동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경영비로 서광 경무국장에게서 받은 50만원을 각 단체에 주었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일인세화회장 수적이 무상으로 60만원을 준 것은 이해키 어려운데?

답: 서광이는 제가 빌려준 50만원을 받기 위하여 60만원의 대여를 알선한 것입니다.

 

문: 기록에 의하면 위정자인 총독관리가 조선의 부녀자를 위하여 극력 거액을 대주었다는 것은 이해키 어려우며 딴 의사가 있지 않은가?

답: (대답이 없었다.)

 

문: 피고는 극력 부인하지만 김정목의 말에 의하면 친일 세력을 부식 유지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음모를 세우는 소굴을 계획하였다는데?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김정목은 피고와 어떤 원한이 있는가?

답: 딴스홀 경영에 있어서 경영권을 3분하자는 데에 피고가 응치 아니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 일본군사령부 연회는 항상 피고의 집에서 하였다는데?

답: 1년에 1,2회씩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문: 딴스홀 장소에 대하여 강(岡) 경기도 경찰부장이 힘을 썼다는데?

답: 그렇습니다.

 

문: 그 장소의 교섭은?

답: 다 여의치 못하고 우선 삼월(三越) 4층으로 하였습니다.

 

문: 딴스홀 수입은?

답: 한 달에 30만원 정도였습니다.


학력도 재산도 없는 한 19세 청년이 1925년경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일본 정치인들과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정치주먹 역할이 얼른 떠오른다. 귀국해서 탄광 설립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총독부 고관들과 가까이 지냈다. 동척, 은행과 개인으로부터 거금을 대여받아 사업자금으로 썼다. 일본군사령부 연회를 자기 집에서 열어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사람이 해방 직후 현금 250만원을 포함한 1천만원대 재산을 일본인 고관들에게 기밀자금으로 받아 댄스홀 등 유흥업소를 경영하며 무기를 모으고 폭력단을 조직했다는 것이 사건 내용이었다. 극우파 자금으로 활용될 성질의 돈이었다.


2월에 기소된 화신 사장 박흥식(1903-1994)의 횡령 혐의 역시 내용이 다르면서도 틀이 비슷한 사건이었다. 1946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의 공판 기사로 이 사건을 살펴본다.


문: 재산 정도는?

답: 8월 15일 현재 평가로 약 1천만원 가량 됩니다.

 

문: 교육 정도는?

답: 학교는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문: 피고는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하였다는데?

답: 제가 설립한 게 아니고 군부와 총독부가 설립한 회사에 사장으로 취임만 하였습니다.

 

문: 이 회사는 일본의 침략전을 조장하는 회사인 만큼 우리 조선사람이라면 이런 회사의 사장에 취임할 수는 없을 것인데?

답: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때 정세가 당국의 사장 취임 권유를 거부한다면 도저히 조선서는 살 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들의 압력으로 부득이 취임하였습니다.

 

문: 군부로부터 8월 27일 후 수차에 걸쳐 총액 4850만원의 돈을 받았다는데 사실인가?

답: 상월(上月) 군사령관에게 애원하여 4800만원을 받았습니다.

 

문: 상월에게서 위로금으로 2천만원을 받았다고 하나 그것은 거액이어서 위로금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답: 처음에 상월 군사령관이 1천만원을 주면서 그대의 입장이 곤란할 터이니 일본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생각하여 보니 이 돈을 받아가지고 건국사업에 쓰면 유효할 것 같아서 2천만원을 갱생자금으로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2천만원은 어떤 사업에 쓸 계획이었던가?

답: 5천만원의 재단을 설립해 가지고 지도자 양성(구미 각국에 유학생 파견), 대학 설립, 고아원, 병원 등 자선사업을 계획하고 군정 당국과도 상의 중이었습니다.


일제 말기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가 50억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방 직후 석 달 동안 35억원이 증발되었다. 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그 자체로 조선의 경제 구조를 충분히 뒤엎을 만한 문제였다. 늘어난 돈이 어디로 갔는가? 김계조와 박흥식 외에 일본 당국자들로부터 뭉칫돈을 받은 사람이 더 없었으리라고 볼 수 없다.


자기 재산 2백만원이라는 김계조는 1천만원을 받았고 자기 재산 1천만원이라는 박흥식은 5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재력을 키워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물러가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었나보다. 박흥식이 조선비행기회사 투자를 5천만원으로 보상받았다면 경성방직 김연수의 만주 방직공장은 어떤 보상을 받았을까?


박흥식은 지도자 양성, 대학 설립과 자선사업에 그 돈을 쓸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 듣기 좋은 사업들이다. 그러면서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도 좋은 사업들이다.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에 좋지만 듣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사업도 있었을 것 같다. 청년단체 조직이라든가, 극우정당 후원이라든가. 그런 사업은 공판정의 진술에서 물론 빼놓았을 것이다.


박흥식 한 사람이 5천만원을 거머쥐었다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친일파 인사들이 받은 뭉칫돈의 총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10억원은 넘었겠지. 당시 통화량의 10%가 넘는 돈이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돈벼락을 맞는 동안 민중 전체는 통화량 증가만으로도 곱절 가까운 물가상승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이승만의 야욕, 한민당의 반동성, 공산당의 독단 등 해방공간 역사의 흐름을 험한 길로 이끌어간 요인들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그런 인적 요인들의 파괴력은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한 것 아니었을까? 몇 달 사이에 통화량의 70%가 늘어나고 그 3분의 1이 소수 반사회적 집단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돈이 그렇게 괴상한 형태로 깔려 있다면, 아무리 의인이 많고 악인이 적은 사회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