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고등학생인 큰형이 바둑을 집에 도입한 뒤 얼마동안 3형제가 틈만 나면 매달려 살면서 모두 3급 안쪽까지 올라왔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는 1급으로 두기 시작해서 '물바둑' 소리는 듣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공식' 대국이라 할 만한 대회바둑을 처음 둔 것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박사과정 다니며 시간강사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고대 통계학과 교수로 있던 작은형이 과학기술단체총연맹 바둑대회에 나갈 통계학회 팀을 조직하면서 자기도 선수로 나가야 할 형편인데,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좀 쎈 나를 스카우트했다. 이기는 판마다 수당을 주겠다며 통계학회 회원으로 등록까지 해줬다. 첫 공식 바둑대회에 용병으로 데뷔하게 된 것이었다.
매회 세 명 선수가 뛰어 3판양승인데, 통계학회에 질 줄 모르는 선수가 있었다. 고대 통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김장한 선수였다. 그리고 통계청 소속으로 나랑 비슷한 수준 선수가 하나 있었다.
준결승까지 세 판인가 네 판인가 김장한 선수와 내가 모두 이겨서 결승에 올라갔는데, 결승까지 용병이 뛰기는 좀 뭣해서 내가 빠지고 형이 뛰었다. 형은 졌지만 다른 두 선수가 이겨 통계학회 우승. 형은 수당을 건네주며 "그렇게 판마다 다 이기면 어떡하냐? 돈에 눈깔이 뒤집혔구나." 투덜댔지만 우승 때문에 기분이 썩 좋았다. 아직 직장이 없던 내게 용돈 좀 보태주고 싶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듬해 계명대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는데, 신입교수 오리엔테이션에서 뜻밖의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김장한 교수였다. 그 후 수담을 나눠 보니 내가 선으로 들어가도 벅찬 확실한 고수였다. 그리고 함께 부임한 또 한 분 물리학과 김규택 교수도 나랑 비슷한 수준. 그리고 한 학기 후 김장한 교수와 같은 과에 부임한 김용곤 교수가 나보다 약간 셌다. 한 해 동안 짱짱한 1급 네 명이 같은 학교에 모인 것이었다.
그 이듬해 대구MBC에서였던가, 대구-경북 직장인 바둑대회를 창설했다. 십여 개 팀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4연승하면 우승이었던 것 같다. 선수들이 막 집합한 계명대를 강팀으로 예상한 사람이 계명대 선수들밖엔 없었는데, 거의 3판3승으로 결승에 올라갔다. 붙박이 주장인 김장한 교수 외에는 번갈아 쉬며 뛰었는데, 누가 뛰나 별 거침이 없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대구시청과 다크호스 계명대가 결승에서 붙었는데, 우리 팀에선 김규택 선수가 쉬고 내가 2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 상대가 장고파여서 다른 두 판이 1 대 1로 먼저 끝났다. 마무리에 접어든 내 판이 대회 결승국이 된 것이었다.
상대방은 매우 신중한 기풍의 선수였다. 힘은 그리 쎄지 않은 느낌을 초반부터 받았다. 그래서 나도 신중한 자세로 대응하면서 약간의 우위를 노리는 전략으로 나갔는데, 조그만 실수 하나로 우위를 놓쳤다. 다른 선수들 판이 끝났을 때 아직 끝내기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차 실수 없이 마무리를 진행해 한 집짜리 끝내기만 남았을 때 두어 집 모자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모두들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형세판단을 잘못해 불필요한 모험을 걸 희망도 없었다. 작은 차이에 던지기도 뭣해서 묵묵히 패배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데 상대방에서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 집 선수 끝내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다른 곳의 자기 선수 끝내기를 먼저 들어왔다. 내가 받은 다음 선수 당한 곳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 받은 곳을 내가 응징하면 네 집을 손해본 다음 역시 손을 뺄 수 없는 곳이었다. 네 집을 공짜로 갖다바치는 실수였다. 역전이 분명했다.
이 횡재를 앞에 놓고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장면에서 내가 던져야 폼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회 상품이 너무 컸다. 우승팀 주전선수 세 명에게 아마5단 단위가 상품이었다. 준우승팀은 주장만 5단 단위를 준다고 했다. 김장한 선수야 준우승이라도 5단이 보장되고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김용곤 선수가 나를 용서할까? 이런 생각이 오가는 중에 초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응징에 들어갔다.
씁쓸한 승리였다. 그 후 혼자 앉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면 그럴 때 어떤 식으로 승리를 사양하는 것이 멋진 길이었을까 달콤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실수를 확인하고 바로 상대에게 고개숙여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까? 묵묵히 앉아 있다가 초읽기를 넘겨버리는 것이 우리 편에 대한 예의였을까? "실수도 실력"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은 프로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바꾸기 힘들다.
아무튼 1회 대회 우승 후 이 대회는 계명대 팀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해마다 나가던 중에 준결승에서 한 번, 결승에서 한 번 외에는 져본 기억이 없다. 얼마 후 경북대 팀도 전자공학과의 박종식 교수와 경제학과의 이정우 교수를 주축으로 강팀을 이뤄 계명대 팀에 강력한 도전자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대학팀 사이의 경쟁도 각별한 재미가 있었다.
10년 가까이 같이 놀다가 내가 계명대를 떠날 때 팀 동료들의 한결같은 첫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후보 선수를 어디서 구해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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