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으로 옮긴 서울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80년도는 어수선한 때였다. 부산의 교수직 이야기 나온 것이 12-12 쿠데타 직후였다. 그 때 나는 서점 점포를 접고 주택가에 사무실을 열어 인문학 분야 서적 유통 사업을 한다고 하고 있었는데 별로 신통치 않았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신분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복학 쪽으로 더 끌리기도 했다. 아예 서울대 후문 부근에 전세방을 얻어 파묻혀 지내기로 했다.
군대 가기 전부터 과학사학회에 가입해 놓고 있었다. 당시 과학사학회에는 역사학 전공자가 별로 없고, 과학 전공하다가 자기 전공 분야의 역사를 살펴보게 된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외국 대학원 과정에서 과학사를 익히고 온 이가 전상운 교수와 송상용 교수 두 분 뿐이었다. 송 교수는 "과학사의 전도사"라 할 만큼 과학사의 불모지 한국에 과학사 도입을 위해 초인적 활동을 한 분인데, 당시 과학사가 한국 대학에서는 교양과학 강의에 일부 활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전임 자리가 없었고, 송 교수는 나보다 10년이나 위인데도 그때까지 시간강사를 뛰고 있었다. 시간강사 경력이 한국 최고라고 자랑하곤 했다. 내 석사논문이 그 분 눈에 띄어 학회 가입을 권유받은 것이었다.
내가 군대 있는 동안 미국에서 과학사를 전공한 분 두 분이 돌아와서 과학사학회의 틀이 더 든든해졌다. 박성래 교수와 김영식 교수. 전 교수, 송 교수와 함께 네 분이 한국의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 성신여대 총장이던 전 교수가 얼굴로 한 몫 하고 송 교수가 몸으로 한 몫 해 온 터에 이제 박 교수는 글로 한 몫 하고, 김 교수는 그 배경 위에서 진짜 큰 일을 벌였다. 화학과 교수로 서울대학에 들어와 있으면서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의 대학원 과정을 만든 것이다. 많은 인재가 이 과정에서 배출되어 한국 과학사학계를 30년 동안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과학사학회에 참여하면서 나는 과학사 분야의 잠재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학부와 석사 논문에 천문학과 수학이 관계되는 역법을 주제로 고른 것은 수학 기초가 있으니까 편의상 고른 것일 뿐이었는데, 역사 전공자 중에는 수학 기초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방치되어 있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위에 분야사로서 과학사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면서 "이거다!" 방향을 잡고, 군대 있는 동안 유학길을 모색한 것도 중국과학사 분야였다.
그래서 나는 과학사 방면에 뜻을 둔 상태에서 박사과정에 복학했는데, 민 교수는 이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고병익 교수는 과학사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총장으로 있으면서 김영식 교수의 협동과정 개설을 적극 도와준 분이었지만 이미 학교를 떠나 있었다.
함께 입학했던 최갑순, 이성규 두 선배는 내가 복학할 때 이미 과정을 수료했고, 조동원, 조병한(65학번, 서강대) 두 선배가 박사과정에 들어와 있었다. 두 분 다 역사학도로서는 특출하게 감수성이 예민한 분들이었는데, 석사과정에서 민 교수에게 참혹하게들 당한 얘기는 오랫동안 동양사학과에서 괴담으로 떠돌았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경북대학으로 도망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조동원 선배는 박사과정을 아예 안 하겠다고 뻗치고 있다가 전임교수로 들어가기 위해 부득이 박사과정에 들어왔다.
80년의 두 학기를 지내는 동안 민 교수에 대한 내 감정은 공포에서 분노를 거쳐 경멸로 옮겨갔다. 돌아가신 분을 놓고 심한 말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너무 심했다. 나도 그분에게 피해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내 놓고 생각하면 새옹지마로 생각할 측면이 많다. 나보다 더 참혹하게 당한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박해를 받아도 굽히지 않는 자신감을 나는 보통사람들보다 많이 가진 편이기 때문이다. 민 교수에 대한 내 인식을 심화시킨 몇 가지 사례만 내놓겠다.
민 교수는 학점이라는 무기를 절제 없이 휘둘렀다. 대학의 학점제도에는 A, B, C, D, E, F, 여섯 개 표시가 있지만 E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이고 D는 전혀 쓰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민 교수는 이것들까지 휘둘렀다. 특히 D는 너무했다. F를 받으면 한 학기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데 그치지만 D를 받으면 고칠 길이 없다. 열심히 강의에 임한 학생들을 민 교수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이 흉악한 무기들로 내리쳤다. 리포트 제출 기한을 어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가 지정한 형태의 원고지에 써 오지 않았다거나... 대학원 수료 자격에 평균 평점 B제로 이상이어야 한다는 항목은 대개 사문화되어 있었는데, 동양사학과에서는 이것이 많은 학생들에게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그것 때문에 수료를 포기한 학생도 여럿 있었다.
첫 학기부터 민 교수와 나 사이의 신경전은 시작되었다. 학기 도중 5월 사태로 학교 문이 닫혔고, 결국 학기말까지 열리지 않았다. 민 교수는 자기 과목의 리포트를 어느 날까지 가져오라 하고 리포트를 낸 학생들에게 모두 같은 학점을 줬다. 자기 딴에는 강의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게 한 상황에 대한 항의로 사부타쥬를 한 셈이다. 그런데 나는 리포트 내라는 얘기를 마감 지난 뒤에야 전해 들었고, 다음날 준비해 둔 리포트를 정리해서 가져갔다. 그런데 F가 나왔다. 그래서 찾아가 불가항력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B플러스로 고친 학점이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전원 A마이너스로 내줬던 클라스메이트들의 학점을 모두 B플러스로 바꾼 것이었다.
분노와 경멸을 동시에 느끼게 한 일이었다. 석사과정과 함께 운영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8년 후배까지 같은 반에 있었다. 나에게 학점을 주어야 하는 불쾌감을 보상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히다니... 군대에서도 제일 저질의 행태였다.
둘째 학기를 앞두고 나는 민 교수와 정면으로 맞설 결심을 했다. 한 학기에 세 과목 수강이 정상인데, 두 과목만 신청했다. 하나는 민 교수 과목이고, 하나는 국사학과에 개설된 전상운 교수의 한국과학사였다. 전 교수는 여러 해 동안 과학사학회 활동을 함께 하며 나를 역법 전문가로 인정해 주고 있는 터였다. 아무 부담이 없는 과목이었다. 민 교수 과목 하나에만 한 학기를 전력투구해서 결판을 볼 심산이었다.
학기가 끝난 후 B마이너스를 받고 민 교수를 연구실로 찾아갔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이번 학기 선생님 강의에 최선을 다해 임했습니다. 어떤 데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B제로였으면 아마 찾아가서 그런 질문을 꼭 해야 할지 망서렸을 것이다. 그러나 B마이너스는 실질적인 낙제점수다. 모든 과목을 그 수준으로 받으면 수료가 안 되는 점수다. 지적받을 점이 있다면 지적받고 고쳐야 하는 입장이다.
오래된 장면을 내 일방적인 기억대로 되살려 돌아가신 분께 누가 되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꼭 필요한 요점만 적겠다. 그 학기 과목이 제도사였는데, 내가 연구주제로 천문관서를 택한 것이 좋은 평가를 줄 수 없는 이유였다고 그분은 대답했다. 그리고 쓸 데 없는 과학사 집어치우고 쓸모 있는 정치사 쪽으로 바꾸라고 권유도 해줬다. 그런데 과학사와 정치사의 가치 문제에 앞서 내가 또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선생님, 제가 연구주제를 잘못 택했다고 생각하셨으면, 왜 학기 초부터 단계적으로 발표해 오는 과정에서 일찍 지적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영원한 작별인사인 줄을 그분은 몰랐을 것이다. 대학원생 연구실에 돌아가자 후배들이 몰려들어 하회를 물었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제 민 선생님 강의는 수강하지 않기로 했어."
그리고 계명대학에 부임했다. 교수직 적응에 집중할 필요도 있어서 한 학기를 쉬고 그 다음 학기에는 고병익 교수 과목 하나만 신청했다. 그 때 고 교수는 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가 있고 충남대학에 있던 기돈 형님이 그 밑에 문헌정보부장으로 파견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연구원에 컴퓨터가 들어와 있었는데, 당시의 인문학 연구자 중에 컴퓨터가 뭔지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동양학 분야에서 컴퓨터 이용 전망에 대한 자문을 두 분께 해드렸고, 그로부터 논문 두 편도 쓰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아무 부담 없이 지낸 한 학기였다.
그렇게 한 학기 더 걸치고 있었던 것은 마침 고 교수 강의가 개설되었기 때문이고, 서울대 박사과정은 내게 이미 끝난 것이었다. 민 교수는 학생들의 수강신청까지 검열하여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학과장 승인"을 학점에 이어 또 하나의 무기로 휘두르고 있었다. 80년 2학기에 내게 B마이너스로 경고를 주고자 한 것은 사실 한국과학사 수강신청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식적으로 수강신청 승인을 거부할 명분은 없으니까 자기 재량의 학점으로 뜻을 밝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82년 1학기부터 휴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후 다른 박사과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서울대학에서 이수한 여섯 과목 학점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수기간을 1년 이상 줄일 수 있는 조건이니까. 연세대학과 영남대학이 이 조건에 맞았다. 영남대학은 위치에서부터 편안한 조건이었지만 너무 편안한 조건만 찾을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연세대학을 택했다.
연세대학에 동양사 담당으로 황원구, 박영재 두 분 교수가 있었다. 황 교수는 민두기 교수와 잘 통하는 사이여서, 입학 때부터 학위논문 심사 때까지 껄끄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취향이 맞지 않는다는 정도의 의사표시에 그쳤지, 민 교수처럼 무도한 짓은 할 줄 모르는 신사였다. 박 교수에게는 실질적인 지도를 많이 받았지만 일본사 전공이어서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를 메워준 것이 퇴직해서 명예교수로 계시던 민영규 교수님이었다. 명예교수 신분으로 내 지도교수를 맡아주시고 살짝 살짝 힌트를 주는 것 외에는 연구방향에 간섭하지 않으셨다. 그분께 실질적인 지도를 더 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연세대학에서 얻은 가장 큰 행운은 김용섭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계기다. 내 학부 시절에 서울대에 계셨지만 특별한 관계가 없었는데 그 사이에 연세대학으로 옮겨 계셨다. 같은 연세대 사학과라도 동양사 전공자인 내가 한국사 담당인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기는 어려운 것인데, 85년 그분이 파리에 체류하실 때 마침 내가 케임브리지에 있으면서 각별한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분은 사제관계로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언젠가 그 이야기도 한 번 풀어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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