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약 1만년 전의 농업혁명과 약 2백년 전의 산업혁명을 나란히 꼽는 사람들이 많다. 농업혁명을 통해 인류는 지구상의 수많은 종 중의 하나로부터 문명의 주인공이라는 특별한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농업혁명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바꾼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역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또 한 번 바꾼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산업혁명이 처음 일어난 곳은 영국이었다. 19세기 초 이래 1백년 넘게 계속된 영국의 패권은 산업혁명을 먼저 이룩했다는 이점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대륙 전체를 석권한 나폴레옹군과의 대결에서 영국의 승리는 무엇보다 생산력의 우위에 원인이 있었다.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산업화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고, 이후 그런 사례는 19세기를 통해 계속해서 나타났다.

산업혁명 이전의 영국은 별 볼 일 없는 유럽의 변방국이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 성과를 가지고 19세기 초에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고, 19세기 후반에는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다른 나라 아닌 영국이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산업혁명의 원인과 조건에 관해서는 방대한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유럽에서 일어난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산업혁명에 대한 전반적 설명보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산업혁명의 기본 성격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기에는 다른 유럽국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촉발되기 좋았던 사정을 부각시키는 것이 좋겠다.


중세 유럽의 농촌에서는 개인의 토지 소유 관념이 약했다. 농지의 대부분은 장원이나 마을의 공유로, 주민들은 관습에 따라 그 땅에 경작을 하거나 가축을 풀어놓을 권리를 가졌다. 집 곁의 텃밭 정도가 개인 소유지로 인식되었다. 중세 후기부터 울타리가 없던 공유지에 울타리를 쌓아 영주의 개인 소유지로 만드는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 현상을 '인클로저' (enclosure 또는 inclosure)라고 불러왔다. 이 자체로는 중세체제의 완만한 해소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4세기 후반 흑사병 유행으로 인구가 격감하면서 인클로저 현상이 가속되었다. 일손이 달리고 임금이 급상승하면서, 게다가 식량 수요의 감소로 곡식값이 하락하면서 영주들이 종래의 관행대로는 수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황무지와 농지에 싸잡아 울타리를 쳐서 양을 키우려 들었다. 주민들의 관습적 권리를 침탈하는 현상이었지만 마을들이 통째로 사라지는 판국이라서 저항이 적은 편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영국만의 일이 아니었는데 유독 영국에서 인클로저 현상이 활발했던 이유로 두 가지가 명확히 이해된다. 첫째는 영국의 전체적 인구 감소가 심한 편이었다는 점. 국지적으로는 더 심한 곳도 있었지만, 큰 지역 단위로 보면 영국이 제일 피해가 심한 편이었다. 둘째는 영국 기후에 적합한 양치기가 적절한 대안으로 존재했다는 점. 양모는 13세기부터 17세기 중엽까지 가격이 꾸준히 큰 폭으로 올라간 특이한 상품이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가 말했다. "그러나 도둑질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잉글랜드에 많이 나타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추기경이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목장이 늘어나는 겁니다. 양이란 순한 동물이죠. 그런데 그놈들이 지금은 사람을 잡아먹어 마을만이 아니라 읍내까지도 텅텅 비게 만들고 있어요. 어느 곳이든 질 좋은 양털이 나오기만 하면 영주들, 지주들, 심지어 성직자들까지 다 달려듭니다. 종래의 농장 임대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네가 편안히 살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은 좋은 일 대신 나쁜 짓을 해주겠다고 달려드는 겁니다. 농사를 못 짓게 하고 교회만 빼놓고는 집도 마을도 다 때려부숩니다. 그리고는 울타리를 쳐서 양을 몰아넣습니다."


<유토피아>가 나온 1516년경은 흑사병으로 감소했던 인구가 회복되고 증가 추세에 있을 때였다. 농민들은 경작지를 필요로 하는데 영주와 지주들은 수익성이 높으면서 관리가 쉬운 목장을 더 만들고 싶어 했다. 국왕과 교회는 인클로저 현상이 조세를 부과할 농지와 군대에 징집할 농민을 줄이고 유랑민 증가로 치안을 해친다는 점에서 1489년 이래 인클로저를 억제하는 법령을 여러 차례 발포했다. 그러나 인클로저 현상은 계속 확대되었고, 1549년 이후로는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소요사태가 자주 일어났다.

농민 소요와 반 인클로저 법령은 17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영주와 지주들이 인클로저를 추진하고 국왕과 농민들이 이에 저항하는 형국이었다. 잉글랜드 내전(1641-51)에서 의회파가 근왕파를 제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학생 때 "잉글랜드 내전"을 "청교도 혁명"으로, "근왕파"를 "왕당파"로 배웠는데, 사건의 성격에 대한 심한 편견을 담은 표현이라 생각되어 피한다.) 영주와 지주층을 대표하는 의회는 국왕의 통제를 벗어나 인클로저 현상의 확대를 거들었다. 영주와 지주들이 개인적으로 추진하던 종래의 인클로저와 구분해서 17세기 후반 이후 의회의 입법에 따른 인클로저 현상을 '의회 인클로저'(Parliamentary Enclosure)라 통상 부른다.

의회의 권력 장악으로 인클로저의 고삐가 풀린 1650년대에는 인클로저의 내용이 또한 바뀌고 있었다. 양모 가격 상승이 끝나 목장의 수익성에 한계가 왔고, 인클로저의 채산성 향상을 위해 대규모 경작에 적합한 농법과 품종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때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 감자였다.


엥겔스가 말한 바 있다. 철과 함께 인류의 혁명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물건이 감자라고. 16세기 중엽 신대륙으로부터 유럽에 도입된 감자는 18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에서 중요한 작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중엽부터는 유럽인의 식량에서 10%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식량으로서 감자의 첫 번째 장점은 수확량이 많다는 것이다. 같은 면적 농지에서 곡식에 비해 두 배 내지 네 배의 식량을 얻을 수 있다. 노동력도 덜 든다. 농업 인구의 비율이 줄어드는 산업화 과정을 감자의 존재가 뒷받침해 준 것임을 엥겔스는 지적한 것이다.

중세 말기까지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식량 생산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농업 인구의 비율이 10%대까지 떨어진다. 중세에는 농가 한 집에서 두 집 먹을 식량을 생산했는데,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다섯 집 이상 먹을 식량을 생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농업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농법의 개발에 따른 변화도 있었지만, 변화의 큰 부분을 감자가 맡아 준 것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감자 재배의 확대가 늦어진 것은 전통적 농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곡물 재배와 가축 사육이 오랫동안 맞물려 행해지던 큰 밭에는 감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에 짜투리 땅이나 텃밭에서 조금씩 재배하는 정도였다. 18세기 후반 식량부족 사태가 여기저기 벌어지면서 감자 재배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감자 재배의 확대가 더 먼저 이뤄졌던 것이다. 그리고 감자의 존재가 인클로저 확대를 더 쉽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의회 인클로저'는 18세기 들어 대규모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개인 차원의 종래 인클로저에 비해 농촌 주민들에 대한 배려가 제도화되기는 했지만 그 배려가 대개 충분하지 못했다. 농지 일부를 할당받은 주민들은 울타리를 치는 등 인클로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국의 토지 소유가 대륙 국가들에 비해 대지주에게 집중되는 결과가 되었다. 1820년까지 인클로저 현상은 사유화할 만한 땅을 모두 사유화해 완결에 이르렀다.

18세기를 통해 영국의 농촌 인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농업 일자리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지 확장 등으로 농업생산량이 늘고 그에 따라 인구가 늘어난 것에 비추어보면 농촌으로부터의 인구 방출 압력을 인클로저 현상이 꾸준히 일으킨 것이다. 농촌의 잉여 인력은 도시와 공장지대로 흘러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산업화의 역군이 되었다.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은 인클로저 현상을 계급투쟁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해 왔다. 영주와 대지주들이 유산계급을 형성해 땅을 조금 가지거나 안 가진 사람들의 권익을 침탈했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을 깊이 공부해 오지 않은 나로서는 그보다도 '소유권' 개념의 확대에 더 눈이 간다. 봉건체제의 형성 과정에서는 토지에 소유 대상으로서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영주가 무엇인가 '소유'했다면 그 대상은 농지와 농민이 결합된 장원이었다. 경작하고 관리할 사람 없는 땅 자체에는 큰 가치가 없었다. 농민들도 장원이나 마을의 구성원으로 참여해서 관습적 권리를 누리는 것이 생존을 위한 조건이었지, 배타적 소유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봉건관계 해체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 토지 소유권이었다. 토지는 봉건관계의 매체로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공유물이었던 셈이다. 물이 물고기들의 공유물인 것처럼. 그런데 인구밀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자 토지 소유에 대한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경쟁이 칼자루를 쥔 영주-지주 집단에게 유리하게 펼쳐진 것이 영국의 인클로저 현상이었다.

일찍부터 농업사회가 안정되어 있던 중국에서는 영국보다 2천여 년 먼저 농지의 소유권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춘추> 선공 15년(기원전 594)조의 "초세무"(初稅畝) 기사다. 농지를 대상으로 하는 조세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토지 사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좌전>의 이 기사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임금이] 재산을 늘리더라도 곡식을 내가는 것이 힘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初 稅畝 非禮也 穀出不過藉 以豐財也] 중국의 전통적 왕토(王土)사상은 봉건제도의 기반이 된 것인데, 이를 무너뜨리는 현상이 기원전 6세기 초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중국과 한국에서 토지의 실질적 사유제가 발달해 왔지만 '토지 공개념'에 흡사한 왕토사상은 전면적 사유화를 가로막는 최후의 장벽으로 근세까지 존재했다. 중국과 한국에서 군주권이 지켜져 온 수준과 17세기에 국왕의 권력이 몰락한 영국 상황을 대비해 보면 인클로저 운동이 17-18세기 영국에서 거침없이 진행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토지제도 개혁을 구상하는 데도 왕토사상이 그 발판 노릇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한국에 토지 사유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왕토사상으로 대표되는 전통 질서가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일본 식민 정책의 첫 번째 과제였고, 1910년대의 토지조사 사업은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