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6. 13:06
 


1984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몇 달을 일본 교토에서 지냈다. 중국과학사에 마음을 두고 고대 역법을 공부해 온 내게 교토대학의 인문과학연구소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교토대학에서 중국사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박 선생이 내 보호자 노릇을 해줬는데, 박 선생 소개로 역시 중국사를 공부하고 있던 정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정 선생이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어서 바로 바둑판 앞에 앉게 되었다.

정 선생 기력은 내게 석 점 붙일 만한 정도라고 생각되었는데, 치수 내려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분이었다. 몇 판 둬보고 두 점까지 내린 다음 더 이상은 때려죽여도 내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치수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서 그 정도로 두게 되었다.

둘이서 몇 판 두다가 정 선생이 사에키 기원으로 안내해 줬다. 일본에 생각 외로 영업하는 기원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며, 일본인들이, 적어도 바둑 두는 일본인들이 집밖에서 노는 것을 한국사람들처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에키 기원은 교토대 정문에서 남쪽으로 십여 분 거리의 전통가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책하기도 좋은 동네라서 며칠에 한 번씩 들르게 되었다.

정 선생과 함께 구경간 며칠 후 혼자 바둑두러 들르니 부사범이(이름이 도다였던가? 4단이었다.) 몇 급 두냐 해서 1급이라 했다. 아마5단 단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아마 단제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서 아마추어로 센 사람을 그냥 1급이라고 할 때였다.

그런데 일본에는 아마 단제가 정착되어 있어서 1급이라면 아마초단보다 아래였다. 그래서 내게 대여섯 점 붙여야 할 상대와 대국을 하게 되었다.

한 판 두는 것을 보니 자기네 1급 하고는 다르니까 부사범이 말을 붙인다. 그래서 사정을 얘기하니까 한참 생각해 보다가 자기랑 한 판 둬보자 하고 내게 흑돌을 준다. 그래서 가볍게(나로서는 매우 점잖은 수법으로) 밀어붙여 줬더니 이제부터 3단으로 두라고 한다. 한국기원 5단이면 일본기원 3단 정도가 맞다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기원에서는 얼마동안 수십 국을 두면서 무패의 전적을 기록하게 된다.

며칠 후 내가 기원에 있을 때 마침 정 선생이 들렀다가 내가 3단으로 두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해서 이 분은 5단이라고 항의했는데, 부사범은 웃으며 천천히 올려드리겠다고, 곧 올라가실 거라고 대답했다. 정 선생은 거기서 2단으로 두고 있었는데, 내게 석 점으로 내릴 생각은 안 하면서 일본인 상대로는 내 단수를 확보해 주려 하니, 참 애국자시다.

며칠 후 사에키 사범에게 한 수 지도를 받았다. 사에키 7단은 교토 아마바둑계의 원로로 온화한 인상의 노신사였다. 기원에 나와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지도를 받으려면 약간의 수업료를 내는 것이 그곳 예절인 모양인데, 나랑은 예외로 무료지도를 베풀어주셨다.

역시 고수였다. 그러나 석 점이나 깔았는데... 석 점 붙이면 조훈현도 자신있을 때였다. 신나게 까불다가 두어 군데 당하고는 너무 늦기 전에 정신차려서 안전한 승리를 지켰다. 판이 끝나자 사에키 선생,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음을 띠고 몇 가지 촌평을 해준 다음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부사범에게 말했다. "김 선생은 이제 4단으로 두시도록 하게." 부사범, 눈이 뗑구레져서 뭐라고 하려는데 노 사범이 한 마디 덧붙였다. "자네보다 센 분이야." 부사범은 어안이 벙벙해서 나오려던 말이 도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다가 임자를 만났다. 농학부에 유학 와 있던 송 선생을 정 선생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나랑 딱 맞는 상대였다. 기력도 비슷할 뿐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두는 힘바둑 취향이 서로 딱 맞았다. 학위논문 준비에 매달려 좋아하는 바둑도 잊어버리고 살다가 겨우 풀려나는 판에 나랑 마주치니 너무너무 좋아한다. 둘이서 둔 바둑에 내가 승률이 앞섰지만, 그분이 오랫동안 안 둬서 손이 굳어 그렇지, 나보다 약한 바둑이 아니었다.

교토를 떠날 때가 되어 갈 때 교토신문사에서 "아마추어 선수권 및 승단대회"가 있었다. 5단 이상은 선수권전이고 4단 이하는 승단대회였다. 승단대회는 4전 전승을 올리면 무료로 상위 단증을 수여하고, 4승 1패를 올리면 1만엥인가 최소한의 수수료를 내고 상위 단증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거 한 번 나가보자고 송 선생과 의논이 되어 일요일 아침에 교토신문사로 갔다. 그런데 둘이 나란히 접수시켜 놓았더니 1회전을 우리끼리 붙게 되었다. 내가 졌다.

동족상잔의 1회전을 넘기고 일본인 상대로는 피차 전승을 거둬 송 선생은 4전 전승, 나는 4승 1패로 승단 자격을 땄다. 그런데 대국 끝난 뒤 주최측에서 구수회의를 하는 것 같더니 한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얘기한다. 4단 단증을 가지지 않은 분들이기 때문에 5단증을 드릴 수 없다, 단증은 드리지 못해도 5단 기력을 가진 고수로서 존경심을 표한다는 것이었다.

송 선생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나는 그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처리를 어째 그 정도로밖에 못하는지. 와서 노는 행동거지만 봐도 일본기원 회원으로 끌어들여 손해날 일 없을 손님들이라는 게 뻔히 보일 텐데. 일본 사회에서 배울 만한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이런 건 정말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접수를 받을 때는 자격에 문제가 없다가 상을 줄 때는 문제가 생기다니.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걸 보면 이걸 타산지석이 아니라 모범으로 삼는 게 아닌가 씁쓸한 생각도 든다.

이튿날 사에키 기원에 들르니 면 있는 이들이 모두 승단을 축하한다고 하는데, 이러저러해서 승단이 안됐다고 하니까 누구보다 부사범이 분개한다. 사에키 사범께서 4단으로 인정하셨는데 자격에 무슨 문제가 있냐는 것이었다. 나를 상수로 인정하기가 그렇게 힘들던 분이 이렇게 나서주는 것은 애국심보다도 애원심이 더 강해서였을까?

그 후로 일본에 많이 다니지 않게 되었다. 잠깐잠깐 들러도 그곳에서 바둑돌 만질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만일 일본기원 5단증을 쥐고 있었다면, 들르는 길에 기원 들르는 재미도 더러 찾게 되고, 그 재미에 더 많이 머무르게 되고, 그러다가 내가 지금보다는 친일파가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Posted by 문천
 


초등학교 5학년 때 고등학생인 큰형이 바둑을 집에 도입한 뒤 얼마동안 3형제가 틈만 나면 매달려 살면서 모두 3급 안쪽까지 올라왔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는 1급으로 두기 시작해서 '물바둑' 소리는 듣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공식' 대국이라 할 만한 대회바둑을 처음 둔 것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박사과정 다니며 시간강사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고대 통계학과 교수로 있던 작은형이 과학기술단체총연맹 바둑대회에 나갈 통계학회 팀을 조직하면서 자기도 선수로 나가야 할 형편인데,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좀 쎈 나를 스카우트했다. 이기는 판마다 수당을 주겠다며 통계학회 회원으로 등록까지 해줬다. 첫 공식 바둑대회에 용병으로 데뷔하게 된 것이었다.

매회 세 명 선수가 뛰어 3판양승인데, 통계학회에 질 줄 모르는 선수가 있었다. 고대 통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김장한 선수였다. 그리고 통계청 소속으로 나랑 비슷한 수준 선수가 하나 있었다.

준결승까지 세 판인가 네 판인가 김장한 선수와 내가 모두 이겨서 결승에 올라갔는데, 결승까지 용병이 뛰기는 좀 뭣해서 내가 빠지고 형이 뛰었다. 형은 졌지만 다른 두 선수가 이겨 통계학회 우승. 형은 수당을 건네주며 "그렇게 판마다 다 이기면 어떡하냐? 돈에 눈깔이 뒤집혔구나." 투덜댔지만 우승 때문에 기분이 썩 좋았다. 아직 직장이 없던 내게 용돈 좀 보태주고 싶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듬해 계명대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는데, 신입교수 오리엔테이션에서 뜻밖의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김장한 교수였다. 그 후 수담을 나눠 보니 내가 선으로 들어가도 벅찬 확실한 고수였다. 그리고 함께 부임한 또 한 분 물리학과 김규택 교수도 나랑 비슷한 수준. 그리고 한 학기 후 김장한 교수와 같은 과에 부임한 김용곤 교수가 나보다 약간 셌다. 한 해 동안 짱짱한 1급 네 명이 같은 학교에 모인 것이었다.

그 이듬해 대구MBC에서였던가, 대구-경북 직장인 바둑대회를 창설했다. 십여 개 팀이 참가해 토너먼트로 4연승하면 우승이었던 것 같다. 선수들이 막 집합한 계명대를 강팀으로 예상한 사람이 계명대 선수들밖엔 없었는데, 거의 3판3승으로 결승에 올라갔다. 붙박이 주장인 김장한 교수 외에는 번갈아 쉬며 뛰었는데, 누가 뛰나 별 거침이 없었다.

강력한 우승후보 대구시청과 다크호스 계명대가 결승에서 붙었는데, 우리 팀에선 김규택 선수가 쉬고 내가 2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 상대가 장고파여서 다른 두 판이 1 대 1로 먼저 끝났다. 마무리에 접어든 내 판이 대회 결승국이 된 것이었다.

상대방은 매우 신중한 기풍의 선수였다. 힘은 그리 쎄지 않은 느낌을 초반부터 받았다. 그래서 나도 신중한 자세로 대응하면서 약간의 우위를 노리는 전략으로 나갔는데, 조그만 실수 하나로 우위를 놓쳤다. 다른 선수들 판이 끝났을 때 아직 끝내기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모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차 실수 없이 마무리를 진행해 한 집짜리 끝내기만 남았을 때 두어 집 모자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모두들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형세판단을 잘못해 불필요한 모험을 걸 희망도 없었다. 작은 차이에 던지기도 뭣해서 묵묵히 패배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데 상대방에서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한 집 선수 끝내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다른 곳의 자기 선수 끝내기를 먼저 들어왔다. 내가 받은 다음 선수 당한 곳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 받은 곳을 내가 응징하면 네 집을 손해본 다음 역시 손을 뺄 수 없는 곳이었다. 네 집을 공짜로 갖다바치는 실수였다. 역전이 분명했다.

이 횡재를 앞에 놓고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장면에서 내가 던져야 폼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회 상품이 너무 컸다. 우승팀 주전선수 세 명에게 아마5단 단위가 상품이었다. 준우승팀은 주장만 5단 단위를 준다고 했다. 김장한 선수야 준우승이라도 5단이 보장되고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김용곤 선수가 나를 용서할까? 이런 생각이 오가는 중에 초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응징에 들어갔다.

씁쓸한 승리였다. 그 후 혼자 앉았다가 그 장면이 생각나면 그럴 때 어떤 식으로 승리를 사양하는 것이 멋진 길이었을까 달콤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실수를 확인하고 바로 상대에게 고개숙여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까? 묵묵히 앉아 있다가 초읽기를 넘겨버리는 것이 우리 편에 대한 예의였을까? "실수도 실력"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은 프로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바꾸기 힘들다.

아무튼 1회 대회 우승 후 이 대회는 계명대 팀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해마다 나가던 중에 준결승에서 한 번, 결승에서 한 번 외에는 져본 기억이 없다. 얼마 후 경북대 팀도 전자공학과의 박종식 교수와 경제학과의 이정우 교수를 주축으로 강팀을 이뤄 계명대 팀에 강력한 도전자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대학팀 사이의 경쟁도 각별한 재미가 있었다.

10년 가까이 같이 놀다가 내가 계명대를 떠날 때 팀 동료들의 한결같은 첫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후보 선수를 어디서 구해 오지?"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 평정기  (2) 2010.01.19
교토의 난가일몽  (8) 2010.01.16
민두기 교수와의 충돌 1969-81 (2)  / 09-10-31  (1) 2009.12.17
민두기 교수와의 충돌 1969-81 (1)  / 09-10-30  (3) 2009.12.17
고향 1968  / 09-10-28  (1) 2009.12.16
Posted by 문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지적되어 왔지만,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하는 것은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인클로저 현상이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점이다. 중세체제에서 벗어난다는, 산업화의 기본 의미에도 적합하다는 점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근 5백년에 걸쳐 진행된 인클로저 현상은 영국 사회에 많은 갈등과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보상이 19세기 대영제국의 패권이었다고 흔히 얘기한다. 나는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에 걸쳐 후발국들보다 완만한 전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 선택의 기회를 누림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영국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클로저 현상의 진행에는 영국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다. 영국 내부의 조건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었다.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는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고, 두 갈래 이상의 길이 보일 때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후발국들은 다른 사정이었다. 선발 산업국과의 경쟁 상황에 몰려 산업화를 모색하게 된 후발국들은 경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쟁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내부 조건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다. 영국에 바로 뒤이어 산업화를 수행한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혁명(1789) 이전의 프랑스 정치사회 체제를 '앙샹 레짐'이라 부른다. 이 앙샹 레짐은 매우 안정성이 높은 체제로서 한 세기 이상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정치체제와 사회체제가 강력하게 결합된 것이어서 정치나 사회 어느 한 방면에서 변화의 필요가 제기되어도 두 방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았던 것이었다.

이 체제는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초년에 구축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 국력 성장을 중심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고 왕권과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이 증폭된 시기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내전(1641-1651)을 통해 왕권이 몰락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프롱드'(Fronde)라 불리는 1648~53년의 항쟁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다.

루이 14세는 앞서 리슐리외가 궤도에 올려놓은 중상주의 정책을 굳건히 밀고 나감으로써 앙샹 레짐의 경제적-재정적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 재력으로 당시 유럽에서 독보적인 40만 상비군을 조직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결합은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귀족세력은 왕권에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1695년의 인두세와 1710년의 십일조는 귀족층의 전통적 권익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아무 저항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된 만큼 프랑스는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인클로저처럼 뚜렷한 농촌 분화 현상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1710년의 도시 인구 비율이 10%였던 것이 1789년 15%에 이른 정도였다. 1770년 영국의 석탄 생산량이 6백만 톤이었는데 프랑스는 70만 톤이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이 제조업 발전을 전연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처럼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1740년대부터 프랑스에는 변화의 필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가 없었다. 집중된 권력을 쥐고 있던 국왕은 앙샹 레짐에 집착했다. 왕권에 대항할 실력을 가진 두 집단, 귀족층과 상업 브루주아지는 영국에서처럼 연대감을 쌓지 못하고 서로 견제했다. 효율성을 잃은 채 견고성만을 지키고 있는 앙샹 레짐의 배경 위에서 개혁의 욕구는 계몽사상이라는 형태로 펼쳐졌다.

나는 프랑스혁명을 개관할 능력이 없다. 영국과의 경쟁의 압박이라는 한 가지 측면을 밝히고자 할 뿐이다. 앙샹 레짐 기간 내내 프랑스는 영국과 긴장상태에 있었다. 1740년대 이후 재정 문제의 가장 큰 원인도 영국과의 전쟁에 있었고, 미국 독립전쟁 개입으로 결정적 파탄에 이르렀다.

18세기의 프랑스 경제는 괜찮았다. 1730년대 이후 공업생산량이 연 평균 2% 가까이 성장해서, 1700년에서 1790년 사이 영국의 성장율 190%보다 더 큰 260%에 달했다. 한 세대 뒤진 산업화를 추격해 가는 기세였다. 서인도제도 등 식민지를 발판으로 한 무역활동도 크게 자라나 1780년대에는 수출이 국민총소득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었다. 내부 조건만으로는 무너지기 힘든 경제지표였다.

그러나 1756~63년의 7년전쟁으로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는 등 영국과의 경쟁에서 뚜렷해지는 열세가 앙샹 레짐의 위기를 재촉했다. 18세기 두 나라의 경쟁은 냉전시대 미-소의 대결과 어떤 면에서 비슷한 양상이었다. 견고한 체제의 프랑스가 내부 유동성이 큰 영국과의 장기간 대결에서 힘을 탕진하고 무너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보인 믿음은 두 나라의 경쟁 양상을 참고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정신없이 진행되던 18세기 말까지도 독일 지역은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중세 상태였다.

10세기에 세워진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무너질 때까지 독일 지역의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오랫동안 그 실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합스부르크 가는 15세기 중엽 이후 계속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었고,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17세기까지 스페인, 나폴리, 네델란드 등지까지 통치권을 가졌던 유럽 최고의 권력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세가 당당하던 시절 독일은 수십 개의(때로는 수백 개의) 조그만 정치조직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 군주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제후였다. 황제는 현상 유지를 위해 제후들의 안보를 책임졌다. 그래서 군주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 견제 없는 권력을 행사했고, 다른 나라와 경쟁할 일도 없었다. 중세적 질서를 벗어날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18세기 들어 프랑스의 국력이 자라나 오스트리아의 힘을 견제하게 되면서 독일 지역에서도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가장 강한 도전자가 프러시아였다.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프러시아는 몇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큰 영토국가로 자라났다. 그러나 18세기 중 프러시아의 성장은 아직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영지를 가져 더 큰 영주가 되고 싶은 욕심일 뿐이었다. 정치를 질적으로 바꿀 생각도 없고 독일 민족을 일으키려는 뜻도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나폴레옹의 패권이 동방으로 뻗쳐오면서 독일 지역이 갑자기 근대에 노출되었다. 반세기 후 동아시아 지역이 겪게 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오랜 종주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군에게 저항과 굴욕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하고 축소된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주저앉은 것은 중국의 경험과 흡사하다. 독일 지역의 제일 뒷쪽에 있던 새 실력자 프러시아가 약간의 시련 끝에 새로운 상황에 앞장서서 적응한 것은 일본의 경험과 비슷하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압력이 꾸준히 계속된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압력은 20년만에 사라지고 독일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대표하는 반세기 동안의 복고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충격은 독일 지역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겨 독일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갔다.

서유럽의 여러 기술, 사상과 제도가 19세기 초의 독일에 몰려 들어왔다. 서양문명의 여러 요소들이 20세기 초의 우리나라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망하는 측면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차츰 조정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 진취성을 보인 프러시아가 결국 오스트리아를 제치고 근대국민국가 독일의 새 역사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구체제가 무너진 후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결전을 거쳐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 중 독일제국이 선포되기까지 65년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에 벌어진 일보다 1866년 이후의 일이 사람들의 주목을 더 받는 것은 '독일'이라는 행위의 주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6년 이전의 일 중에서도 프러시아의 행적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새 '독일제국'이 프러시아의 단순한 확장은 아니었다. 프러시아는 독일제국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이고, 독일제국의 성격은 1871년까지의 형성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망했다. 어떻게 망했는지, 그리고 망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데서 문명 전환의 의미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 이 글에서 그 과정을 세밀히 살피지 못하지만 1848-49년의 상황 한 장면을 예시한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은 독일 지역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보냈다. 그 파장이 크게 증폭된 것은 반동체제 아래 잠복해 있던 개혁의 열망이 갑자기 촉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메테르니히가 퇴진하고 많은 나라에서 개혁파가 정권을 맡았으며, 통일국가의 헌법 기초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잠복해 있을 때는 한 목소리 같던 개혁파가 막상 칼자루를 쥐자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모든 국면에서 온건파와 과격파의 대립이 일어나는 가운데 지지 기반도 약화되어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상황을 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온건 개혁파가 모색한 돌파구가 프러시아의 실력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의 연방의회가 세습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일연방국 헌법을 만들고 프러시아 왕이 황제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것을 프러시아 왕이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49년에 황제 자리를 거절한 것은 전제적 황제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2년후 빌헬름 1세가 장악한 황제권도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그보다 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이는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이었다. 1849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선택이 분명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숙적 프랑스에 대한 복수의 기쁨에 들떠 민주적 절차까지도 경시하는 분위기였다. 1850년대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산업화의 성과를 가지고 국제 경쟁에 당당히 뛰어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는 프러시아의 독일제국 형성을 선망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제국에 합류한 작은 나라들은 언어와 문화를 프러시아와 공유하는 나라들이었고, 1871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두루 검토한 끝에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제국을 유력한 방안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 망국이 가진 세 가지 의미 중 그들에게 문제된 것은 왕조의 중단 뿐이었다. 프러시아인은 그들에게 이민족이 아니었으며, 문명 전환은 국가체제와 관계 없이 모두가 함께 서서히 겪어온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독일 민족이 정치적 분열 상태에 있다가 근대국민국가로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 겹쳐졌기 때문에 독일의 근대화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강한 힘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발전을 빠르게 해줬다. 그러나 1871년 이전부터 독일제국이 시원시원하게 제거해 온 장애물 중에는 민주적 가치도 있었고 문화적 가치도 있었다. 20세기 들어 독일인이 밖으로는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키고 안으로는 극도로 비인간적 상황을 펼치게 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추진력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 아닐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