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파일 크기가 46M로 너무 커서 Mp3파일 여섯 조각으로 변환해 올렸습니다.
중간중간에 잡음이 좀 있고, 소리가 작습니다. 스피커 소리를 좀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장상황이라 방법이 없네요. 찰떡처럼 챙겨 들으십시오. 그럼 즐감!
( LIST 클릭하시면 파일순서가 보입니다. 저도 처음이라 끙끙~ )
-노을












Posted by 문천
2010. 2. 26. 19:53

며칠 전 연락을 준 이문숙 선생을 화정역에서 만나 함께 갔다. 이 선생은 나보다 몇 해 아래니까, 어머니가 50대 중반일 때 국문과를 다닌 제자가 이제 50대가 되어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 제자 중 나보다 연상인 분들은 집으로도 찾아온 이들이 꽤 있는데, 내 연하로는 뜸했다. 이 선생은 내가 기억하는 서너 명 중 하나다.

가는 길에 이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세대 제자들은 어머니에게 "엄한 선생님", "다가가기 힘든 선생님"의 인상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얼른 듣기에 뜻밖이었다. 어머니는 70년에 동생이 대학 들어가자 "해방 선언"을 하셨다. 자식들이 다 컸으니 이제 근엄한 체하지 않고 "생긴 대로 놀겠다"는 선언이셨다. 그래서 학생들과도 그 전보다 거리를 줄이셨을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무렵에 교수 노릇이 힘들어지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72년부터 2년간 해외에 다녀오신 후 어머니는 이대에서 '운동권 교수'로 딱지가 붙었다. 사상이 아무리 온건하더라도 할 말 못 참는 사람은 딱지가 붙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상류사회 지향주의로 나가는 학교 분위기도 불편하셨을 것이고. 정년을 몇 해 앞두고서부터 <어원 연구>에 건강이 위험할 정도로 집중하신 데도 학교생활의 다른 면이 원활치 못한 이유가 작용했을지 모른다.

이 선생은 어머니가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초년에 만난 사람보다 중년에 만난 사람 기억하기가 더 힘든 법이라는 이 선생의 의견이 내게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근래 내 글에 나타난 어머니 모습을 보면 명확하게 기억은 못하셔도 맥락은 대충 떠올리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졌다. 그 맥락 속에서 옛 제자로서 선생님께 이야기를 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문숙'이란 특정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옛 제자와 옛 스승 사이의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내게도 생각되었다.

현관에서 마주친 원무실장님이 지금 형님이 와 계시다고 한다. 미국의 큰형이야 7월에나 오기로 되어 있고, 신선 같은 작은형이 아직 모자간의 인연은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설 며칠 전에 다녀간 얘기를 들었는데, 그만하면 아들 구실이 됐다.

이 선생은 작은형도 마주친 적이 있어서 다행으로 여긴다. 어머니가 퇴직 후 마명리 작은형 집에 계실 때면 이 선생이 졸업한 십여 년 후일 텐데 그때까지도 찾아뵙곤 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오는 길에 이 선생이 엽서 한 장을 보여주면서 알아보시지 못할 경우 제자라는 증거로 어머니가 써 보내신 엽서를 들이대겠다고 했었다. 아마 90년대 초에 오고간 엽서 같다.

노인들이 모두 거실에 나와 앉아 피거스케이팅 중계를 보고 있는데, 맨 뒷줄에 어머니와 형의 뒤통수가 보인다. 이 선생에게 먼저 가서 부딪쳐 보시라고 권해놓고 볼일 본 뒤 5분 후 합류해 보니 사제간 신분 확인은 대충 되어 있는 것 같다. 형도 있고 제자도 있어 느긋하신지 십여 일만에 나를 보시는 반응은 미지근하신 편이다.

며칠 전 원장님 메일에서 어머니가 아들 찾으시더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조금 긴장했었는데, 와 뵈니 그리 아쉬운 기색이 없으시다. 지난 주부터 간병을 맡고 있는 여사님께 물어보니, 지난 토요일 유별나게 방문객이 많을 때 딱 한 번 "우리 아들은 왜 안 와?" 하셨다는데, 아들 찾는 일이 없던 분이 찾으셨기 때문에 특기사항이 되었던 모양이다. 물리치료사 김 선생은 어머니가 근래 신체의 불편 느끼시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얘기해 주고, 간호사 서 선생도 어머니가 쾌활한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지내셨다고 얘기해 준다. 한 가지 문제라면 오전이든 오후든 낮잠을 한 차례씩 주무시는 대신 밤에 깨어 계실 때가 많다는 것인데, 당신도 별로 힘들어 하지 않으시고, 여사님에게 별 부담을 주지도 않으신다고 한다. 원장님이 없어도 다들 어머니 상태를 잘 설명해 줘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김연아의 금메달이 확정된 후 작은형이 먼저 떠나고, 이 선생과 함께 복도 가 테이블에 어머니를 모시고 앉았다. 여사님이 의자를 챙겨주며 "이 자리가 할머니 전용석이예요." 일러준다. 오후 햇볕이 좋은 자리다. 햇볕을 참 좋아하신다. 오늘 날씨에는 따뜻한 실내에서 온 몸에 햇볕을 받으며 오래 앉아 있기가 꽤 더운데도 햇볕을 피하려 하지 않으신다.

이 선생은 80대 노부모를 모시는 데 이력이 나서 그런지 응대를 참 수월하게 잘한다. 그래서 어머니도 편안하게 대하시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신원 파악이 안 되어 그러신지 아주 편안하지는 않으신 것 같다. 노래가락 화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으신다. 반야심경 독경도 노래가락인데, 틀이 잡힌 솜씨다. 내가 모시고 있지 않을 때 혼자서도 수시로 암송을 하시는 건지?

"우리 아들 바보"론으로 이 선생을 몇 번 빵빵 터뜨려주셨는데, 이 선생이 녹음을 해놓았으니 나중에 받아보고 녹취록을 올리든지 녹음 내용을 올리든지 하겠다. 녹음을 해놓았다니 시원찮은 기억력 쥐어짜고 싶지 않다. 한 시간 남짓 청중을 즐겁게 해주다가 쉬고 싶다 하셔서 방에 눕혀 드리고 보니 꽤 노곤하신 기색이었다. 이 선생 접대가 제법 힘이 드셨던 모양이다. 저녁 식사 전에 한 숨 주무시는 게 좋겠다 싶어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언제나와 같이 선선하시다.
Posted by 문천
 


조선의 망국을 아주 간단하게 보면 1910년 8월 하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1905년 11월의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데서 이미 실질적 망국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보다 더 넓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이란 이름을 버릴 때, 5백여 년간 한국인의 국가로 존재해 온 조선 왕국의 실체가 이미 사라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 망국'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벗어나야 할 하나의 통념이 있다. 식민지가 되기 전의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었다는 통념이다. 조선 왕조는 존재 기간의 대부분을 통해 명나라,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조공관계를 청산한 후 외교권을 잃기까지의 불과 십년 기간 동안에도 조선 왕국은 중국과의 조공관계보다 더 심한 외세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형식적 독립만을 갖추고 있던 이 기간을 "잃어버린 국권"의 표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조공관계가 근대 국제법의 기준으로 '독립'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국제법의 기준만으로 그 기준이 세워지기 이전의 역사적 현상을 재단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한민족의 국가는 고대 이래 중국의 국가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독립성이 비교적 강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때부터 명나라와 안정된 조공관계를 맺었고, 이 관계의 기본 틀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교체한 뒤에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5백여 년간 계속된 이 관계 속에서 조선은 중국에 대해 약간의 종속성을 가졌지만, 그 종속성은 1945년 이후 한국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에 비해 미약한 것이었다. 중국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몇 년과 임오군란(1882) 이후의 몇 년에 불과했다.

"만국공법"이란 이름으로 근대 국제법이 들어오기 이전,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국제 질서의 기반이 된 것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였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전해져 온 '천명(天命)' 관념을 중심으로 한 이 체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로부터 각 지역의 군주가 정치적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유기론적 세계관이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체제가 계속 확장된 결과 7세기 이후로는 동아시아 거의 전역이 편입되어 있었다.

만국공법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달리 유기론적 세계관의 천하체제에는 완전한 '독립'의 관념이 없었다. 지상 최고의 권위자인 천자조차 천명에 종속된 존재였다. 천자가 천명을 저버릴 때는 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한민족 사회는 7세기에 이 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후로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이 체제 안에서 허용되는 최대한의 독립성을 누려 왔다.

천하체제의 종주국인 중국 왕조는 조공국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공국의 왕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민족 국가의 왕조 교체가 중국의 보호가 끊어질 때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의 종주국 당나라가 멸망할 때 고려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고, 고려의 종주국 원나라가 망할 때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큰 부담을 무릅쓰고 출병했으며, 개항기에 청나라가 조선과의 관계에 집착한 이유의 상당 부분도 이 역할에 입각한 것이었다.

천하체제의 붕괴가 완전히 확인된 계기는 청일전쟁(1894-95)이었다. 이 체제의 붕괴는 개별 국가의 쇠퇴와 멸망을 넘어,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존재 양식을 청산하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공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존재 양식도 이로써 단절을 맞았고, 여기에 조선 망국의 큰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 후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시도가 성과를 거두기 위한 조건이 극히 열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왕조와 식민지 시대 사이의 과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1897-1910)의 위상과 정체성을 낮추고 줄여서 보는 내 관점에 불만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 이번 작업에서 대한제국을 지키려 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음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화를 피하는 데 '실패한 시도'라는 기본 성격을 민족 자존심 때문에 감출 수는 없다.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의 연장이라고는 하지만, 국가의 성격이 정상적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조선의 망국에 두 개 단계를 나는 본다. 첫 단계인 천하체제의 붕괴는 조선 왕국이나 한민족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문명권 전체가 함께 겪은 일이다. 이 단계에서 한민족의 국가는 짧게 봐서 5백년, 길게 보면 1천년 이상 자리 잡고 살아온 생태 환경을 잃어버렸다. 다음 단계는 새로운 생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좌절이었다. 적응을 위한 조건이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피한 좌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내가 한국사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편향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사의 큰 흐름을 살피는 데 수십 년 동안 노력을 모아 온 만큼 한국사의 내재적 흐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한편 한국사 전공자들이 외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기 힘든 면도 생각할 수 있다. 나로서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열심히 설명할 수밖에 없다.

망국의 두 단계 중 천하체제의 붕괴에 거시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권 상실 이전에 문명의 단절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의 모든 질서가 넓고 깊은, 그리고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러 방면의 빠른 변화를 효과적으로 조율해 나가지 못하는 사회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의 한국 사회는 이 적응에 실패했고,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실패의 원인을 한국인들은 당시부터 따져 왔다. 지도층의 무능, 일본의 야욕, 매국노 집단의 배신 등이 많이 지목되어 왔다.

실패를 반성하는 자세 자체에 반성할 만한 하나의 추세가 있다.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원인만 아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낙관적 성향이다. 특정한 원인만 없었다면 성공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잘못된 일을 반성함에도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는 특별히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반성에도 자아 비판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성향이 작용한다. 반성에 인색한 자세는 실패를 극복하지 못한 표시이기도 하다. 실패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은 과거의 허물을 부끄러워는 할지언정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투철한 반성은 실패 극복의 조건이면서 또한 극복의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사회는 100년 전의 실패를 극복했는가? 새로운 환경에 제대로 적응했는가? 과거의 시련을 담담한 눈길로 되돌아볼 만큼 편안한 위치에 와 있는가?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부터 생각할 문제다. 문명 전환을 맞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어느 정도의 평형 상태에 도달해 있는지를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나는 생각한다. 상당 기간의 혼란과 격동을 겪고 나서도 현재의 위상과 향후의 진로에 대해 안정된 시각을 구성원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는 환경에 적응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주어졌던 "새 환경 적응"이라는 과제가 아직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과제의 성격조차 파악하기 힘들던 당시의 충격에 비교하면 과제를 직시하면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나설 수 있을 만큼은 자세를 갖춰 왔다고 본다.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세계적 환경은 지금도 계속해서 변해 가고 있다. 그런데도 환경 변화를 외면하는 냉전의 논리와 개발 지상주의 논리가 이 사회의 정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의 이런 문제들 역시 19세기 말 이래의 "새 환경 적응" 과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데 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망국 100년> 작업의 필요성을 떠올린 것은 재작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통해서였다. 역사의 전개를 '산업화'와 '자본주의화'의 외길로만 보는 '뉴라이트 역사관'은 역사의 정합성(整合性)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역사 담론이 못 되는 한낱 프로퍼갠더일 뿐이다. 이런 프로퍼갠더가 횡행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근대화' 과제의 의미가 이 사회에서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문제를 보여준다.

동아시아 전통문명으로부터 근대적 세계문명으로의 전환이 한국근대사의 주축이었다고 보는 뉴라이트 논객들의 관점에 나는 동의한다. 민족 주체성에 집착하는 관점보다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는 방향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근대적 세계문명의 본질이라고 내세우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우상숭배에는 따를 수 없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근대화'의 의미가 19세기 말의 새로운 환경이던 제국주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을 뜻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국 100년>을 내걸고 두 달 가까이 배경 조건만을 살펴 왔다. 조선의 망국이 문명 전환의 배경에 좌우된 면을 밝히는 것을 내 역할로 보고 문명 전환의 의미를 제시해 놓은 것이다. 이제 조선 말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내 입장이 연구자가 아니라 비평자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실 것을 독자들에게 당부드린다. 한국사 연구자들이 밝혀 놓은 사실들을 놓고 문명 전환의 관점에서 음미할 만한 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내 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