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임금의 성 바꾸는 데 그친 일이 아니었다. 한 세기에 걸친 몽골 지배기를 거치는 동안 고려라는 국가는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다. 고쳐서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새로 만들 정도로 큰 변화가 필요했다.
고려가 망가진 첫 번째 이유는 안보를 오랫동안 도외시한 데 있었다. 내부적 체제 안보를 말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쌓이게 되고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 질서가 해이해진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국가 권력이 대응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고려는 안보를 원나라에 맡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와 비슷한 것이었다.
몽골 지배기 동안 여러 왕이 즉위 초마다 시도한 개혁의 핵심이 전민 변정(田民 辨正)이었다. 부의 과도한 집중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은 내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의 집중이 새 왕 쪽으로 옮겨지기만 하면 개혁은 구조 변화에 이르지 못한 채 잊혀지곤 했다. 궁극적인 안보 책임이 원나라에 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 더 이상 의존하지 못하게 된 공민왕 때에야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되다가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우왕(1374~88) 때 '친원파'는 "체제 수호" 명분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파였다. 몽골 지배기의 모순 구조에 집착해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원나라에 매달려 천하 대세를 외면한 이기집단이었다. '친명파'는 개혁파였다. 누적된 모순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였고 다수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기득권을 해체하고 안정된 정치사회 체제를 새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평면적 대결처럼 들리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구분은 적절하지 않다. 수구파가 중국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국내 모순을 외면하려 한 반면 개혁파는 중국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생력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한 것이므로 친명파가 아니라 독립파라 해야 마땅하다.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에 비하면 대단히 독립적인 관계였다. 조선을 건국한 개혁파는 국내 문제를 명나라에 의지하지도 않고 간섭받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원나라에 의지하려 한 수구파와 달랐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정권을 잡은 개혁파의 첫 번째 역점 사업이 과전제 실시였다. 두 가지 목적을 가진 사업이었다. 그 하나는 공민왕 때까지 거듭되어 온 전민 변정과 같은 방향으로, 불법으로 축적된 기득권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송나라 관료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중소지주 중심의 사회경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체제에 적합한 중국 농업기술이 이미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타당한 과제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새 왕조가 추진한 사업은 과거제 확충이었다. 이 역시 공민왕이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1860년대에 역점을 두고 추진한 사업이었으니,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안정성 있는 관료체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왕 때 개혁파에는 공민왕 때의 과거 출신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문벌 출신 수구파의 행태를 보며 과거제 확충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1368년 황제를 칭한 직후부터 고려와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1374년 공민왕이 죽은 후 수구파가 장악한 고려 조정이 계속 수상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 심한 불신을 키우게 되었다. 더욱이 1380년대 들어 중원을 완전히 평정한 뒤로는 주변국과의 조공관계 기준도 엄격해졌다. 홍무제는 1398년 죽을 때까지 고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계속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
조선 건국 세력은 강대국 명나라에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섭 내지 침략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의 신임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절대권력을 표방하는 홍무제에게는 줄서기 충성경쟁의 길도 없었다. 우리나라 우리가 잘 관리해서 그쪽에 폐 끼칠 일 없으리라는, 그리고 우리가 분수를 잘 알아서 그쪽에 대들 일 없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길밖에 없었다.
몽골 지배기에 원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한 상황에서 고려에는 중국의 학술, 사상과 기술이 폭넓게 도입되어 있었다. 개혁파는 원나라 이전의 중화제국인 송나라의 관료체제와 사회경제 체제를 새 국가의 모델로 삼고 주자학 정통론에 입각한 사대-자소 관계를 청함으로써 명나라의 신뢰를 얻고자 했다. 과전제와 과거제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었다.
홍무제 재위 중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조공 빈도에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자주 오기 힘들지 않냐, 3년에 한 번씩만 오라고 거듭거듭 일렀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뻗댔다. 결국 1410년부터 1년 세 차례 조공이 상례가 되었다.
중국 중심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조선에게는 명나라의 관계가 다른 조공국들보다 중요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모델로 국가체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을 최대한 늘릴 필요가 있었다. 초기의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서 제일 열심히 가져온 물건이 서적이었고, 그것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인쇄 사업에도 큰 노력을 쏟았다.
조선을 중국식 국가로 세우는 작업은 세종 때 틀이 잡혔다. 이 작업이 맹목적 모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세종의 여러 사업에서 알아볼 수 있다. 역법, 음악, 의약, 문자 등 많은 분야에서 중국 제도와 문물을 도입해 1차 표준으로 삼되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제도를 그와 나란히 세운 것이다. 상대방과 어울리면서도 나의 다른 점을 살린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였다.
조선은 명나라에게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면서 또한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왕조 말기의 무기력에 빠져 있음에도 출병한 까닭을 놓고 명나라의 이기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이야기 중에는 조-중 관계를 폄훼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억지스러운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 본토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조선까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방어전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안전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 상식이다. 출병 결정의 궁극적 이유는 조공관계의 의리였다.
임진왜란의 위기를 명나라의 도움으로 넘기면서 조-명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변질했다. 이에서 파생된 대표적 문제가 광해군 세자 책봉의 거부였다. 조공국의 안정을 도와주는 것이 종주국 입장에도 이로운 것인데, 이 문제를 하나의 이권처럼 다룬 것은 황제권의 퇴화로 사신과 관료들이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을 보여준다. 종래 조선은 형식적 예절을 지키는 선에서 명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지내다가 이제 명나라의 '힘'에 의지하다 보니 그 '힘'에 휘둘리게 된 것이었다.
광해군(1608~23)이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축출한 반정 세력이 공표한 주요 죄목의 하나였다. 그는 만주족 세력에 대한 명나라의 강경노선이 잘못되었음을 힘껏 지적하였으나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자 명나라에 직접 맞서지는 않더라도 '올인'을 피하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세자 책봉 거부 사태를 통해 명나라의 정책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절감했을 것이다. 명나라 장군 웅정필이 "조선이 중국을 걱정해 주는 것이 중국 스스로 걱정하는 것보다 낫다." 한 것은 광해군의 제안을 평한 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에서 1644년 명-청 교체에 이르는 기간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큰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다.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들어섰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교체했다. 한국에는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변화가 없었지만 국가의 실제 성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왕권 쇠퇴'로 집약되는 변화였다. 임진왜란 때 왕이 쩔쩔매던 상황, 전쟁 후 세자의 위상이 명나라의 오만 앞에 흔들리던 상황 등이 겹쳐져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나타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신하들이 왕을 힘으로 내쫓는 상황에 이르렀다. 인조 이후 여러 임금들은 정권을 장악한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빠졌다. 8년간 청나라에서 지내고 1645년 귀국한 소현세자의 죽음이 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는 유럽인의 해외 활동 확장 등 전세계적 정치경제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동아시아 지역에도 교역의 증대와 기술 교류 등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급격한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기존 체제로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었고, 중국의 왕조 교체와 일본의 막부체제 강화에는 적응력을 대폭 늘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권 쇠퇴는 적절한 대응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17세기 조선의 왕권 쇠퇴는 국가 기본 기능의 퇴화를 가져왔다. 국가는 질서 유지와 비용 절감의 목적을 위해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변화에 대응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유교국가는 왕권이 중간권력의 지나친 경쟁과 발호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17세기 조선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효과적인 대안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쟁이 정책 결정보다 정권 쟁탈에 치우치면서 정치의 안정성이 무너지고 정통론이 정치 담론을 지배하면서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조선의 권력구조상의 문제는 청나라와의 관계에도 비쳐져 보인다. 광해군을 축출한 반정 세력의 명분이 명나라에 대한 충성에 있었으므로 인조 조정을 장악한 그들은 만주족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불러왔다. 1637년 청군에 항복하면서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내심으로 불복하는 분위기가 계속 조정을 지배했다.
소현세자는 봉림대군(뒤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8년간 머모르는 동안 실질적으로 외교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조-청 관계 개선을 바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서 청나라의 신임을 받았으나 1645년 귀국 직후 죽었는데, 반청파의 암살이 분명하다.
인조 반정 세력과 그 후예들의 반청 자세는 효종(1649~59) 때 '북벌론'으로 나타났다. 청나라의 중국 통치가 아직 확고하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다소의 빌미는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무리한 주장이었음은 당시에도 누구나 알아보았을 것이다. 정권 독점을 위해 대외적 긴장을 이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북벌론의 기수로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이 송시열(1607~89)이었다. 그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맡은 인연을 발판으로 효종 즉위 직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반청파의 기린아로 등장했다. 정통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노선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집권세력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학자로서 송시열의 업적은 어떠한지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지독한 파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인간관계까지 번복한 그의 행적을 보면 진정한 덕행과는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인물이 태산북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조선 후기 정치계의 풍토에 있다.
북벌론은 효종 때의 조정을 지배하고, 현종 때 잠복해 있다가 숙종(1674~1720) 초년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숙종 초년의 북벌론은 효종 때보다도 현실성이 줄어든, 당쟁용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바탕인 정통론의 분위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명나라가 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조선의 일부 사대부들은 묘지(墓誌) 등에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었다.
조-청 관계는 조-명 관계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실제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이 군사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건국 단계에서 알아보고 뒤이어 비협조적 태도를 확인한 청나라에게는 조선이 명나라 때처럼 특별히 중요한 조공국이 아니었다. 조선에게 크게 도움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특별히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천하체제가 통째로 위험에 빠지기 전까지는.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 나라'로 깔보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당장의 권력투쟁에 몰두해 국가와 사회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 기간 동안 재야 학자들의 몫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 오랑캐에게라도 길을 물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에서 가장 심각하게 논의된 현실정책이 '3정(三政)', 즉 조세정책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국가 기능의 쇠퇴가 심했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1644년 명-청 교체 이후의 조선은 '쇄국'에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경을 걸어잠근 것보다도 마음을 닫은 셈이다. 대다수 학자들이 제도적 지원을 받는 성리학과 정통론에만 매달린 상황에서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의 목적은 학술의 주변부로 쫓겨나고 중국의 학술과 기술을 도입하려는 노력도 소수파에 머물렀다. 조선 후기의 지식층은 현재의 권력에 매몰되어 미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적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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