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 16:08
2000년 09월 통권 311호 | 글· 영주(塋宙) 이님덕 |
금년 들어 우리 민족에게 큰 변화가 온 것을 느낀 것은 봄 4월,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6월(12∼14일)에 만난다는 소식이 보도되었을 때다.
때마침 총선을 며칠 앞두고의 발표인지라, 야당들은 ‘총선용(總選用)’이라고 했으나, 국민들은 우선 꿈에도 원하고 그리던 일이기에 남북합의서 전문을 읽고 또 읽고(4월 11일자), 남북 정상의 만남과 거기서 거론될 냉전 체제 해체를 위한 여러 가지 문제, 남북 이산가족 재회 및 고향방문 문제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원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6월에 감격스러운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남북 정상이 서로 손을 잡고 반가이 만나는 장면은 참으로 압권(壓卷)이었다.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만인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거기서 한국인의 순수한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눈으로 보았다. 남과 북이 이 ‘한마음’뿐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랴. 나는 눈물 속에서 ‘한 핏줄기, 한 모국어’라는 것의 참 모습을 본 것이다. 피가 통하고 말이 통하기에 그렇게 한 마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 8·15에 이산가족 만남의 결실이 이루어진 것이다. 절에서는 마침 음력 7월 보름(8월 14일) 백중날, 조상들의 왕생극락 위한 우란분제(盂蘭盆齋)도 백일 지장기도도 마치고 선방의 하안거(夏安居)도 이날 해제했기 때문에 나는 이번 이산가족 만남의 보도는 마음놓고 푹 빠져서 지켜볼 수 있었다. 산철 수행도 거르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그 수행보다 더 귀중한 것이 이 겨레의 만남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서다.
헤어진 지 50년, 그들은 만나자 마자 얼싸안고 소리내어 통곡하고 또 소리 없이 흐느껴 울지만 기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애띤 홍안 소년이 난리통에 행방불명이 되고,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가족과 헤어져서 월남·월북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제 얼굴에 주름살 깊어 고향을 찾으니 그 선대들이야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너무 노쇠하여 휠체어에 실려서 나오거나, 또는 만나러 왔다가도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만남의 장소에는 나오지 못하고 병원에 실려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떤 경우는 100세 된 어머니가 6·25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헤어진 아들(69세 이종필 씨)을 만나보고도 처음엔 못 알아보다가, 아들을 알아보고 “종필아!” 하고 기억을 회복하는 행운의 경우도 있었다. 옛날의 모습을 찾으려고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는 그 눈길, “더 늙지 마시라.”고 당부하는 그 안쓰러워하는 마음.
부모 자식간의 천륜의 정이 가장 깊다는 것을 만남의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서기석(67세)이란 분은 형제간의 정이 ‘별’이라면 어머니의 존재는 태양이라고 했다. 91세 된 어머니는 “이제 눈을 감아도 한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부부의 만남은 대개가 처자를 두고 월남한 남편이 자기는 월남 후에 새 가정을 이루고 북에 남기고 온 전 부인을 만났으니 제일 어색한 만남이 아닐까 싶어서 유심히 보았는데, 처음엔 어색한지, 남편은 부인에게는 눈길도 못 준 채 옆에 있는 형제들에게 누구누구 안부를 묻는 질문만 해대고,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웃는 입모습이지만 꼭 다물고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계기에 남편이 선물로 남쪽에서 마련해 간 쌍가락지 두 개를 아내의 손에 끼워 주면서 남편의 눈물보가 터진 것이다. 그는 아내 앞에 엎드리면서 절하는 마음으로 “건강해야 돼요.” 하니 북의 아내 또한 “오래 오래 살아야 돼요.” 하며 눈물을 흘린다. 남편이 월남한 후 시어머니 모시고 어린 딸 키우면서 50년을 살아온 여인답게 부드러우면서도 의젓한 부인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가 생각케 하는 부인이었다.
나는 이번 만남의 장면에서 ‘참다운 한국, 참다운 한국인’의 참모습을 눈물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아들을 만난 노부인이 “이제 눈을 감아도 한이 없겠다.”는 말처럼, ‘부처님 이제 저는 언제 이 세상 떠나도 여한이 없습니다.’를 마음속으로부터 아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반 세기의 아픈 한국인의 역사 속에서 모든 인간의, 모든 생물의 일체개고(一切皆苦)와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의 소식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고, 변화와 무실체의 공성(空性)을 인정한다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소식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35세 때인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와 숙명여대에 근무할 때였다. 하루는 관상 보는 이가 교수실로 들어와 청하지도 않았는데 교수들의 관상을 봐준 일이 있었다.
그 때 봐준 관상평이 다른 것은 별 기억이 없지만 맨 마지막 줄에 나의 수명이 81세라는 것이었다(壽則 兩井加一). 우물정(井)자가 십(十) 자(字)가 네 개라 40이고, 그것이 둘이라 80, 거기다가 1세를 더 붙이니 나의 한명(限命)은 81세라는 계산이 된다. 그 때는 아직 30대라 내가 그렇게나 장수 할 줄은 상상을 못했는데 금년이 바로 그 나이 81세다.
지난 해 『여든 살의 연꽃 한 송이』를 내고 나서 간단없이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이거 늦게서야 ‘이 뭣고?’ 화두를 들자는 것인가 하고 속으로 웃게 된다.
이 뭣고 화두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보편적으로 가지는 물음이며, 나이를 먹어가면서 뭔가 인생(인간, 삶)에 대한 결론을 간절히 얻고 싶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승불교의 이상은 보리심(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려는 보살의 행을 구하는 데 있으니 인간은 마땅히 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은 이미 나와있는 것이다. 그 대표자가 화엄경의 마지막 장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소년 구도자 선재동자(善財童子)다. 문수보살의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53 선지식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니 그 지극정성심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다. 76세가 되어서 한 소리가 “그래 나는 영원한 선재동자다, 76세에 한 갑자(60) 뺀 16세 소년이다!” 이런 큰소리를 했었는데 그보다 또 5년을 더한 81세이니 지금은 방년 21세인가!
그러나 금년 들어 우리 민족에 대한 생각이 확실해진 것이 있다. ‘우리 민족은 영원한 선재동자다!’ 하는 희망찬 생각이다. 이번 겨레의 만남을 통하여 그 느낌을 더한 셈이다.
나는 30년 전에 단군 탄생(檀君 誕生)이라는 서사시(敍事詩)를 쓴 일이 있다. 그 작품에서 누가 주인공인가 하면 바로 단군을 낳은 곰녜(熊女)다. 짐승의 몸으로 하늘님 아들(桓雄)과 혼인하여, 이 하늘과 땅(짐승)의 혼인으로 인간 단군이 탄생하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는 바로 선재동자의 구도심·향상심과 일치하는 역사관·우주관의 표현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발전시켜 나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 하나뿐이 아니고, 또 우리 민족뿐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모든 존재가 향상심을 가지고 있는 선재동자인 것을 인정할 때, 일체 존재에 대한 자비심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 그리고 무생물, 시초의 단세포인 아메바도 보다 잘 살려고 세포분열하여 음양(陰陽) 양성으로 갈라졌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긍정적 사고를 ‘일체유심조’의 뼈대로 삼으니 언제 가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지금 눈앞의 일들이 위태롭게, 미타(未妥)하게 보이더라도 우리의 불성 생명은 영원한 것이기에,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변천하더라도 성·주·괴·공(成住壞空) 겁(劫)의 변화를 되풀이하더라도 영겁(永劫)의 불성은 변하지 아니함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 우주생명과 더불어 영원한 성불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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