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상은 현대인에게 현실주의적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공자가 죽음 이후에 관해서나 초월적 현상[怪力亂神]에 대해 이야기하기 꺼린 점도 많이 거론되지만, 사회질서의 원리를 제시하는 방향에서 유가사상의 현실주의적 특성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묵가에서 말한 박애정신[兼愛]을 유가에서는 배격한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가까운 대상일수록 더 강하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성정을 제대로 존중해야 사회의 질서가 잘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의 안정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다.
평등에 대해서도 유가는 현실적 한계를 둔다. 군자와 소인이 후세에는 도덕적 포폄의 표현이 되었지만, 공자 당시에는 정치사회적 신분의 표시였다. 유가는 신분을 타파할 것이 아니라 신분에 맞는 도덕적 기준에 따를 것을 제창했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서양식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사회 질서의 보완적 요소 정도로 생각되는 것인데, 유가사상에서는 신분과 도덕성의 함수관계가 사회 질서의 기본 틀이었던 것이다.
자유-평등-박애를 숭상하는 근대인은 유가사상을 미개하고 봉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가사상을 '현실주의'로 보는 근대인의 시각이 '이상주의'에 치우친 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정치 질서는 많은 사람의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현실주의적 접근이 타당한 것이다. 자유-평등-박애를 마치 제 호주머니에 넣어 놓기라도 한 듯이 과거의 '현실주의' 사상체계를 깔보는 근대인의 오만은 착각과 도취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교적 봉건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 체제가 통용되던 농업사회 시절과는 많은 조건이 달라졌다. 다만 그 체제를 맹목적으로 배척해 온 자세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기론적 봉건체제를 대치한 원자론적-기계론적 근대체제에 한계를 느끼는 데 따라 이 반성의 필요가 절실해진다. (이 글에서는 '봉건'을 근대 사조보다 유기론적 성향을 보인 전근대 질서 원리 전반을 가리키는 넓은 뜻으로 쓰겠다.)
근세 이전의 봉건체제는 유럽보다 동아시아에서 더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 있었다. 근대체제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유럽에서 쉽게 전환이 이뤄진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기존 봉건체제에 허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주변부에 있던 일본도 봉건체제의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과 중국은 고도로 발달한 봉건체제가 깊이 체화되어 있어서 급격한 전환이 어려운 상태였다.
봉건체제만이 아니라 어떤 체제라도 질서의 근본 가치는 비용 절감과 폭력 억제의 효과에 있다. 한국과 중국의 봉건체제가 유럽이나 일본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도 그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봉건체제를 '관료봉건제'라고도 하는데, 무력이든 경제력이든 정보력이든 우월한 실력을 가진 계층을 관료층으로 편성해서 제한된 범위의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 왕권의 통제 아래 두어 낭비적 무한경쟁과 무절제한 폭력 행사를 가로막는 것이다. 인구가 조밀한 동아시아 농업사회는 이 질서 위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과 일본의 봉건체제는 실력 계층의 중간권력이 일으키는 낭비와 폭력에 대한 억제가 약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20여 년간 중국에 체류한 마테오 리치는 중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지만(그래야 선교사업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 중국의 문민 질서만은 대단히 부러워했다. 아래와 같은 리치의 기록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보이는 당시 유럽의 사회상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다니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을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모든 영역을 질서있게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학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군인들은 학인들을 높이 존경하고 아무 여지 없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따른다. ...... 이러한 정서의 근원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학문의 연마를 통해 고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확장에 거의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군사기술보다 학문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 있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천하체제 역시 봉건의 원리를 국제관계에 연장시킨 것으로, '봉건적 국제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안에 강자와 약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사이의 경제적이고 평화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봉건의 원리에 따라 강대국과 약소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사이의 최대한 안정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강대국은 약소국과의 관계에서 제한된 범위의 특권을 누리는 대신 약소국의 존립을 보장해주는 책임을 맡는다.
천하체제를 가리켜 '사대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여 왔는데, 이것은 천하체제의 전복을 꾀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천하체제의 한 측면만을 악의적으로 폄훼한 것이다. '사대(事大)'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대하는 원리로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자소(字小)'의 원리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맹자>(양혜왕편)에 이 원리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인(仁)이 아니고는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런 까닭으로 탕임금이 갈(葛)을 섬기고 문왕이 곤이(昆夷)를 섬긴 것이요, 지(智)가 아니고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런 까닭으로 대왕이 훈육(獯鬻)을 섬기고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함이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함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천하를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강자에게도 한 순간에는 이익이 크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의 한 왕조가 어느 시점에서 이웃나라를 침략해 큰 이익을 거둘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힘을 남김없이 휘둘러 버린다면 상대방의 원한을 비롯한 많은 부담을 떠안게 된다. 힘이 조금 떨어지기만 해도 곧장 쓰러져버리게 된다. 힘의 사용을 아껴 상대방의 입장을 지켜주면서 꼭 필요한 범위의 이득만을 취해야 위험 부담 없이 유리한 관계를 오래 끌고 갈 수 있다. 그것이 "천하를 지키는" 길이다.
강자가 힘의 사용을 절제한다는 신뢰를 줄 경우 약자 입장에서도 강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거나 강자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모험하기보다 강자의 입장을 적정선에서 존중해 주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 된다. 그 적정선이 어느 선이냐를 놓고 수시로 갈등이 있겠지만, 벌거벗은 폭력의 세계에 비하면 훨씬 좁은 폭 안에서의 갈등이다.
임진왜란 무렵의 명나라를 관찰한 리치의 기록을 보면 제3자의 눈에도 중화제국이 팽창의 야욕을 가진 침략국가가 아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중화제국의 성격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인지에 의문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유럽국가들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평화지향적인 국가로 보였음이 분명하다.
"거의 무한한 영토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풍성하게 가진 이 나라, 주변의 어느 나라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추고 있는 나라임에도, 황제도 국민들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정복의 야욕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유럽사람들과 아주 다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출병도 자국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자국 이익"이라 하더라도 그 이익의 실질적 의미에는 편차가 있다. 없는 파탄을 만들어서라도, 인류 전체에게 손해를 끼치면서라도, 다음 단계에서 일어날 부담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챙기려는 "자국 이익"과 천하의 평화를 지킴으로써 그 안에서 지키려는 "자국 이익"이 같은 것일 수 없다. 이 차이를 생각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 인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도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인간은 모두 이기적 존재"라는 뉴라이트 명제에 동의할 것이다.
나는 명나라의 출병을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역할보다 더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국 이익을 위한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명나라의 출병에 들어 있던 천하 평화를 지키려는 뜻을 생각하며 한국전쟁 이래 세계 평화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1368년 명나라가 세워져 중국을 석권하고 있을 때 고려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고려 왕실은 충렬왕부터 몽골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으므로 그 4대손인 우왕 때까지 왕실 중심부가 모두 원나라 황실의 외손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여러 대 동안의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명나라와 안정된 신뢰관계를 맺는 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까지 고려 조정에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평면적 대립이 아니었다. 친원파는 몽골 지배기에 형성된 권력구조를 지키기 위해 명나라와의 대결을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친명파는 명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 대외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권력구조를 바꾸려는 입장이었다. 물론 실제 대립 속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뒤얽혀 작용했겠지만, 기본 쟁점은 '체제 수호'와 '국익 신장'의 충돌이었다.
결국 천하의 주인으로서 명나라의 위치가 확인된 시점에서 친명파가 정권을 잡았고, 그 이듬해에 공양왕을 추대한 데도 명나라를 안심시키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양왕은 충렬왕의 4대 위인 신종의 자손이므로 원나라의 외손이 아니었으니까.
공양왕 즉위 3년만에 조선으로 왕조 교체를 행한 데도 명나라와의 관계가 얼마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조 교체가 명나라의 신뢰를 늘리는 데 유리하다는 점이 반발을 줄이는 데 작용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 왕조가 국호 결정을 명나라에 맡긴 것을 주체성 없는 짓으로 매도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천하체제 편입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식행위였다. 500년 가까이 받들어 온 왕실까지 내던지는 판에 국호 결정 정도 가지고 흥분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조선 군대의 작전권을 통째로 명나라에 갖다바치지 않은 사실이 위안이 되기 바란다.
조선의 천하체제 편입은 이전 왕조들에 비해 철저한 것이었다. 신라와 고려에 있어서 천하체제는 외교관계의 의미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는데, 조선은 사회조직, 문화, 학술 등 인프라 분야까지 총체적으로 천하체제의 틀 속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건국 직전의 과전법 시행에서 시작되어 세종 때의 학술-문화 정책까지 이어졌다.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으로서 천하체제 속의 특별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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