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음이요, 장작더미를 보지 못함은 밝음을 쓰지 않음이요, 백성이 보살펴지지 못함은 은혜를 쓰지 않음이니,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니이다." (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 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맹자>의 가장 잘 알려진 귀절의 하나로, 왕권의 전제성을 밝힌 대목이다. 임금 노릇의 단적인 표현이 "백성의 보살핌"으로 되어 있고, 임금이 이 노릇 하는 것은 의지만 있다면 깃털을 들거나 장작더미를 보는 것처럼 저절로 되는 일이라고 했다. 여건이 이러니 저러니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가 살던 기원전 4세기에도 임금이 임금 노릇 제대로 못하는 일은 적지 않게 있었고, 그중에는 임금에게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도 많이 있었다. "하지 못함"과 "하지 않음"은 현실의 양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맹자가 의지를 강조한 것은 현실(sein)보다 당위(sollen)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 당위가 바로 유교적 봉건제의 원리였다. 맹자는 현실에 작용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인식할 줄 모르는 원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벌거벗은 힘의 무한경쟁을 억제하는 바람직한 질서를 세우기 위한 발판으로 왕권의 전제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드라마 <용의 눈물>이 큰 인기를 끌 때 '왕권'과 '신권'의 긴장관계가 많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작용을 한 이런 실질적 요소를 부각시킨 것은 후궁의 암투 따위보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좋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왕권과 신권을 같은 평면 위에 놓고 보는 근대적 시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당위의 힘인 왕권과 현실의 힘인 신권 사이의 긴장관계는 유가 정치사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상나라로부터 천하를 얻은 주나라 무왕이 죽었을 때 아들 성왕이 아직 어린 나이여서 무왕의 여러 동생 중 주공이 섭정을 맡아 천자 노릇을 대신했다. 섭정을 맡은 동안 반란을 일으킨 자기 형 하나를 처형하고 동생 하나를 추방한 일도 있을 정도로 권위가 굳건했다. 필요할 때는 천자 노릇을 대신하고도 성왕이 장성하자 신하의 자리로 물러난 그의 자세를 공자 이래 유가에서는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주공의 시범은 주나라 이후 적장자 왕위 상속의 원칙을 확립한 계기였다. 상나라 왕실 세계를 보면 대부분 기간 동안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농업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현실적 힘이 그대로 반영되는 형제 상속에서 상징적 권위를 앞세우는 적장자 상속으로 바뀌면서 유가 정치사상의 표준이 될 봉건제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한나라 이후의 중화제국에서는 황제권이 유가사상에 입각한 이론적 전제성을 늘 가지고 있었지만, 신하들이 가진 현실적 힘과의 긴장관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언제나 질서의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한다"(君君臣臣)는 관계를 공자가 강조한 것은 이 원리를 전복시키려는 현실조건을 경계한 것이다. 임금은 신하의 현실적 힘을 묵살하지 않고 신하는 임금의 상징적 권위를 존중해야 양자가 함께 속한 체제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원리를 살리기 위한 역대 왕조 초창기 황제들의 노력 중에 볼 만한 것들이 많다. 당 태종 때 오랜 심복 당인홍의 독직사건이 있었다. 사형이 판결되자 태종은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같은 처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투쟁을 통해 황제 자리에 오른 당 태종이었지만 국가가 신하들의 자발적 협조 없이 자기 마음대로만은 잘 운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제스처를 쓴 것이다. <정관정요>에는 군신 관계의 긴장감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생산적 방향으로 풀어나간 사례들이 많이 실려 있다.

후주의 신하였다가 동료들에게 추대되어 송 태조가 된 조광윤은 지난 날 대등한 권위를 누리던 옛 동료들을 모아놓고 은퇴를 권했다. 황제를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할 일이었더라도 자신이 그들과 다른 신분이 된 이제 황제와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던 그들에게는 사라져주는 것이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겼고 황제는 원로들이 사라진 조정에서 독존의 위엄을 누렸다.

명 태조는 공포정치를 통해 황제의 권위를 세웠다. 창업을 도운 공신 대다수가 몇 차례 옥사에 희생당했다. 황제권에 바로 다음가는 공신 집단의 권위를 물리적으로 해소하면서 황제의 절대 권력을 확립한 조치였다. 제국의 규모가 송나라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커지고 구조도 복잡해진 때문에 일도양단의 절대 권력을 추구하게 된 것이겠지만, 이 절대 권력은 명나라 통치체제에 머지 않아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조선은 한국에 처음 세워진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의 유교국가를 추구하느냐 하는 모색의 과정이 있었고, 중국에서 나타났던 여러 스타일이 검토되었을 것이다. 태조는 송 태조 정도를 모델로 했던 것 같다. 왕조 교체 필요성을 인식한 개혁파의 추대를 받은 태조는 유교 교양도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고려의 왕을 대신하는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생각했을 것이다.

태조의 아들 중 유일한 문관이었던 태종은 물론 태조보다는 유교국가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그 이념성보다 현실정치의 감각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에게는 명 태조가 모델이었다. 살벌한 숙청으로 공신 집단을 위축시키고 왕의 위엄을 세우는 방향이었다.

유교 교양을 깊이 체화한 세종은 관료 집단의 자발적 협조 분위기를 키워내는 당 태종의 스타일을 따라갔다. 조선 관료체제의 바탕은 이 때 만들어졌다. 이 바탕 위에서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하는" 분위기가 임진왜란 때까지 대략 지켜졌으나 불안 요소가 차츰 나타났다. 불안 요소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훈구세력과 척신세력이었지만, 거시적으로 더 중요한 불안 요소는 사림이었다. 훈구와 척신은 왕권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왕권과 거리를 가진 사림의 팽창은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사림을 "불안 요소"로 지적한다 해서 사림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림이 높은 도덕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인데, 그 도덕적 권위 자체가 유교국가 체제에 구조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유교국가가 잘 운영되려면 임금에게 도덕적 권위가 모여야 하고 유능한 인물들이 관료집단에 최대한 편입되어야 한다. 국가체제와 거리를 둔 집단이 '사림'이란 이름으로 별개의 도덕적 권위를 누리는 상태가 일차적으로는 국가 기능의 저하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국가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것이다.

사림 성장의 발단은 물론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않음"에 있었다. 세조에게 아무리 왕조에 큰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신하가 임금 몰아내는 꼴을 보인 것은 유교국가 이념을 치명적으로 해친 일이었다. 이로 인해 관료집단 안에서 훈구세력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척신세력과 사림세력이 번갈아 투입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세조 찬탈은 그 자체로도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훼손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소모적 도덕성 논쟁에 빠뜨리는 단초가 되었다.

16세기 전반의 사화 시대를 지나며 왕의 권위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사림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말기에 일어난 유교국가의 기형화 현상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고, 사림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왜란에 대한 조정과 의병의 대응 자세 차이 때문이었다. '천조(天朝)'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으로 왕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던 명나라가 그 말기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 것도 여기에 보탬이 되었다.

광해군(1608~22)이 정인홍(1535~1623)을 높이 떠받들고 의지한 것도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의병장으로도 크게 활약하고 즉위 전 불안한 위치의 광해군을 굳건히 지지한 정인홍은 임금이 의지할 정도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첫 사림 인사였다. 그는 의리에만 치중하며 경세를 소홀히 하는 사림의 폐단을 보여주며 광해군의 정치적 실패를 이끌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것이 인조였다. 명분 없는 광해군 축출에 동의한 데서 시작해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억지 명분 때문에 두 차례 호란을 초래하고, 막상 적군이 쳐들어오기만 하면 그 명분마저 내던져버렸다. 그도 모잘라 세자를 제거함으로써 왕실에 정통성 문제까지 남겼다. (소현세자의 의문사를 인조가 묵인 내지 방조했으리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나는 인조를 주범으로 본다. 물론 단독범행은 아니겠지만, 그가 관여한 이상 다른 인물을 주범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송시열은 사림의 권위가 권력으로 변질되는 단계를 대표한 인물이었다. 지난 회에서 그가 파벌적 인물이었다는 논평을 남겼는데, 그에 대해 도덕적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교국가의 성격 변화에 관계된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것뿐이다.

송시열의 영도하에 형성된 노론이라는 집단에는 하나의 파벌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드러난 권력조직과 병립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권력조직이 사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론, 남인 등 다른 당파도 그 영향을 받아 권력조직의 성격을 얼마간 띠게 되기도 하지만 200년간 하나의 조직으로서 일관성을 지킨 노론과 비교할 존재는 못 된다.

영국에서 잉글랜드 내전(1641-51)으로 왕권이 중간권력에게 제압당해 국가의 성격이 바뀐 것과 비슷한 하극상의 변화가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정치사상이 빈약하던 잉글랜드에서 의회를 근거로 권력구조의 변화가 자유롭게 전개된 것과 달리 고도의 유교 정치사상이 자리 잡고 있던 조선에서는 중간권력이 공식적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음성적 권력조직을 형성했다.

한 사회의 지식층 주류가 현실 변화에 대응하는 경세(經世)의 과제를 외면하고 형이상학적 과제에만 매달리는 퇴행적 풍조는 왜곡된 권력구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음성적 권력조직은 구성원들에게 원리주의적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가속되어 가는 세계적 변화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 분야에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국가의 대응능력은 갈수록 더 떨어지고 경세의 과제는 후세에 실학파라 불리게 되는 일부 재야 학자들의 몫에 그쳤다.

숙종에서 정조까지 18세기 임금들은 왕조 초기의 임금들 못지 않은 능력과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국운을 되돌리지 못한 것은 맹자가 뭐라 하더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국가의 틀이 망가져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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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임금의 성 바꾸는 데 그친 일이 아니었다. 한 세기에 걸친 몽골 지배기를 거치는 동안 고려라는 국가는 형편없이 망가져 버렸다. 고쳐서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새로 만들 정도로 큰 변화가 필요했다.

고려가 망가진 첫 번째 이유는 안보를 오랫동안 도외시한 데 있었다. 내부적 체제 안보를 말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쌓이게 되고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 질서가 해이해진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국가 권력이 대응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고려는 안보를 원나라에 맡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와 비슷한 것이었다.

몽골 지배기 동안 여러 왕이 즉위 초마다 시도한 개혁의 핵심이 전민 변정(田民 辨正)이었다. 부의 과도한 집중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은 내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의 집중이 새 왕 쪽으로 옮겨지기만 하면 개혁은 구조 변화에 이르지 못한 채 잊혀지곤 했다. 궁극적인 안보 책임이 원나라에 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 더 이상 의존하지 못하게 된 공민왕 때에야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되다가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우왕(1374~88) 때 '친원파'는 "체제 수호" 명분으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파였다. 몽골 지배기의 모순 구조에 집착해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원나라에 매달려 천하 대세를 외면한 이기집단이었다. '친명파'는 개혁파였다. 누적된 모순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였고 다수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기득권을 해체하고 안정된 정치사회 체제를 새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평면적 대결처럼 들리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구분은 적절하지 않다. 수구파가 중국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국내 모순을 외면하려 한 반면 개혁파는 중국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생력 있는 체제를 만들고자 한 것이므로 친명파가 아니라 독립파라 해야 마땅하다.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에 비하면 대단히 독립적인 관계였다. 조선을 건국한 개혁파는 국내 문제를 명나라에 의지하지도 않고 간섭받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원나라에 의지하려 한 수구파와 달랐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정권을 잡은 개혁파의 첫 번째 역점 사업이 과전제 실시였다. 두 가지 목적을 가진 사업이었다. 그 하나는 공민왕 때까지 거듭되어 온 전민 변정과 같은 방향으로, 불법으로 축적된 기득권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송나라 관료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중소지주 중심의 사회경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체제에 적합한 중국 농업기술이 이미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타당한 과제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새 왕조가 추진한 사업은 과거제 확충이었다. 이 역시 공민왕이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1860년대에 역점을 두고 추진한 사업이었으니,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안정성 있는 관료체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왕 때 개혁파에는 공민왕 때의 과거 출신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문벌 출신 수구파의 행태를 보며 과거제 확충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명나라는 1368년 황제를 칭한 직후부터 고려와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1374년 공민왕이 죽은 후 수구파가 장악한 고려 조정이 계속 수상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 심한 불신을 키우게 되었다. 더욱이 1380년대 들어 중원을 완전히 평정한 뒤로는 주변국과의 조공관계 기준도 엄격해졌다. 홍무제는 1398년 죽을 때까지 고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계속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

조선 건국 세력은 강대국 명나라에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섭 내지 침략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의 신임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절대권력을 표방하는 홍무제에게는 줄서기 충성경쟁의 길도 없었다. 우리나라 우리가 잘 관리해서 그쪽에 폐 끼칠 일 없으리라는, 그리고 우리가 분수를 잘 알아서 그쪽에 대들 일 없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길밖에 없었다.

몽골 지배기에 원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한 상황에서 고려에는 중국의 학술, 사상과 기술이 폭넓게 도입되어 있었다. 개혁파는 원나라 이전의 중화제국인 송나라의 관료체제와 사회경제 체제를 새 국가의 모델로 삼고 주자학 정통론에 입각한 사대-자소 관계를 청함으로써 명나라의 신뢰를 얻고자 했다. 과전제와 과거제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었다.

홍무제 재위 중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가장 큰 이견은 조공 빈도에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자주 오기 힘들지 않냐, 3년에 한 번씩만 오라고 거듭거듭 일렀지만 조선에서는 1년에 세 번씩 가겠다고 뻗댔다. 결국 1410년부터 1년 세 차례 조공이 상례가 되었다.

중국 중심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조선에게는 명나라의 관계가 다른 조공국들보다 중요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모델로 국가체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을 최대한 늘릴 필요가 있었다. 초기의 조선 사신들이 중국에서 제일 열심히 가져온 물건이 서적이었고, 그것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인쇄 사업에도 큰 노력을 쏟았다.

조선을 중국식 국가로 세우는 작업은 세종 때 틀이 잡혔다. 이 작업이 맹목적 모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세종의 여러 사업에서 알아볼 수 있다. 역법, 음악, 의약, 문자 등 많은 분야에서 중국 제도와 문물을 도입해 1차 표준으로 삼되 한국의 고유한 문화와 제도를 그와 나란히 세운 것이다. 상대방과 어울리면서도 나의 다른 점을 살린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였다.

조선은 명나라에게 가장 중요한 조공국이면서 또한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왕조 말기의 무기력에 빠져 있음에도 출병한 까닭을 놓고 명나라의 이기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이야기 중에는 조-중 관계를 폄훼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억지스러운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 본토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조선까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방어전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안전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 상식이다. 출병 결정의 궁극적 이유는 조공관계의 의리였다.

임진왜란의 위기를 명나라의 도움으로 넘기면서 조-명 관계는 예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변질했다. 이에서 파생된 대표적 문제가 광해군 세자 책봉의 거부였다. 조공국의 안정을 도와주는 것이 종주국 입장에도 이로운 것인데, 이 문제를 하나의 이권처럼 다룬 것은 황제권의 퇴화로 사신과 관료들이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을 보여준다. 종래 조선은 형식적 예절을 지키는 선에서 명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지내다가 이제 명나라의 '힘'에 의지하다 보니 그 '힘'에 휘둘리게 된 것이었다.

광해군(1608~23)이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축출한 반정 세력이 공표한 주요 죄목의 하나였다. 그는 만주족 세력에 대한 명나라의 강경노선이 잘못되었음을 힘껏 지적하였으나 명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자 명나라에 직접 맞서지는 않더라도 '올인'을 피하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세자 책봉 거부 사태를 통해 명나라의 정책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절감했을 것이다. 명나라 장군 웅정필이 "조선이 중국을 걱정해 주는 것이 중국 스스로 걱정하는 것보다 낫다." 한 것은 광해군의 제안을 평한 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에서 1644년 명-청 교체에 이르는 기간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큰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다. 일본에는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들어섰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교체했다. 한국에는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변화가 없었지만 국가의 실제 성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왕권 쇠퇴'로 집약되는 변화였다. 임진왜란 때 왕이 쩔쩔매던 상황, 전쟁 후 세자의 위상이 명나라의 오만 앞에 흔들리던 상황 등이 겹쳐져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나타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신하들이 왕을 힘으로 내쫓는 상황에 이르렀다. 인조 이후 여러 임금들은 정권을 장악한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빠졌다. 8년간 청나라에서 지내고 1645년 귀국한 소현세자의 죽음이 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6세기는 유럽인의 해외 활동 확장 등 전세계적 정치경제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동아시아 지역에도 교역의 증대와 기술 교류 등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급격한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기존 체제로 적응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었고, 중국의 왕조 교체와 일본의 막부체제 강화에는 적응력을 대폭 늘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권 쇠퇴는 적절한 대응 방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17세기 조선의 왕권 쇠퇴는 국가 기본 기능의 퇴화를 가져왔다. 국가는 질서 유지와 비용 절감의 목적을 위해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변화에 대응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유교국가는 왕권이 중간권력의 지나친 경쟁과 발호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17세기 조선에서는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효과적인 대안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쟁이 정책 결정보다 정권 쟁탈에 치우치면서 정치의 안정성이 무너지고 정통론이 정치 담론을 지배하면서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줄어들었다.

이 시기 조선의 권력구조상의 문제는 청나라와의 관계에도 비쳐져 보인다. 광해군을 축출한 반정 세력의 명분이 명나라에 대한 충성에 있었으므로 인조 조정을 장악한 그들은 만주족을 적대하는 정책으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불러왔다. 1637년 청군에 항복하면서 조공관계를 맺었지만 내심으로 불복하는 분위기가 계속 조정을 지배했다.

소현세자는 봉림대군(뒤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8년간 머모르는 동안 실질적으로 외교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조-청 관계 개선을 바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서 청나라의 신임을 받았으나 1645년 귀국 직후 죽었는데, 반청파의 암살이 분명하다.

인조 반정 세력과 그 후예들의 반청 자세는 효종(1649~59) 때 '북벌론'으로 나타났다. 청나라의 중국 통치가 아직 확고하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다소의 빌미는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무리한 주장이었음은 당시에도 누구나 알아보았을 것이다. 정권 독점을 위해 대외적 긴장을 이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북벌론의 기수로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이 송시열(1607~89)이었다. 그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맡은 인연을 발판으로 효종 즉위 직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반청파의 기린아로 등장했다. 정통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노선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집권세력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학자로서 송시열의 업적은 어떠한지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지독한 파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운 인간관계까지 번복한 그의 행적을 보면 진정한 덕행과는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인물이 태산북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조선 후기 정치계의 풍토에 있다.

북벌론은 효종 때의 조정을 지배하고, 현종 때 잠복해 있다가 숙종(1674~1720) 초년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숙종 초년의 북벌론은 효종 때보다도 현실성이 줄어든, 당쟁용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바탕인 정통론의 분위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명나라가 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조선의 일부 사대부들은 묘지(墓誌) 등에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었다.

조-청 관계는 조-명 관계의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실제 내용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이 군사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건국 단계에서 알아보고 뒤이어 비협조적 태도를 확인한 청나라에게는 조선이 명나라 때처럼 특별히 중요한 조공국이 아니었다. 조선에게 크게 도움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특별히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천하체제가 통째로 위험에 빠지기 전까지는.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오랑캐 나라'로 깔보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당장의 권력투쟁에 몰두해 국가와 사회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 기간 동안 재야 학자들의 몫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 오랑캐에게라도 길을 물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에서 가장 심각하게 논의된 현실정책이 '3정(三政)', 즉 조세정책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국가 기능의 쇠퇴가 심했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1644년 명-청 교체 이후의 조선은 '쇄국'에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경을 걸어잠근 것보다도 마음을 닫은 셈이다. 대다수 학자들이 제도적 지원을 받는 성리학과 정통론에만 매달린 상황에서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의 목적은 학술의 주변부로 쫓겨나고 중국의 학술과 기술을 도입하려는 노력도 소수파에 머물렀다. 조선 후기의 지식층은 현재의 권력에 매몰되어 미래에 대한 준비를 너무 적게 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

나는 꿈에 보았다. 분명히 보았다.
자주빛 휘장을 몸에 감은
키 큰 여인
흰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너울 너울
푸른 풀밭에 나와 총에 맞는 것을.
국방색 검은 兵士들은 개미떼
그녀를 둘러싸고 총을 겨눈다.
일제히 集中射擊
그녀는 서서히 쓰러졌다. 푸른 풀밭에
큰 팔로 공중에 弧를 그으며
가슴에서 뿜은 피는 멀리 숲을 적시고
가까이 풀밭의 꽃을 적시고
흙을 적시었다.

하늘은 청천하늘, 구름도 없었다.

나는 잠에서 펄쩍 깨어나
내 祖國의 땅, 한 허리를 두 동강 낸 내 나라
아픔과 쓰라림에서 이 글을 바친다.

Ⅰ. 하늘 나라

白頭山 靈峰에 동이 틀 때
天體는 잠시 그 運行을 멈추는 듯
고요의 바다
빛을 기다리는 잔잔한 흐름 속에
하얀 山 봉오리 홀로 거룩하다.

아스라히 東海를 부르는
連連한 山脈의 물결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바다와 山과 구름의
물결 물결 물결

이제 하늘과 땅 사이 틈을 깨치고
아침 햇빛이 새어 나온다.
빛의 물결이여,
바다도 山도 구름도
일시에 빛의 물결 속에 춤을 춘다.

歡喜의 바다
푸른 파도 부서지는 곳
흰 구름은 泡沫을 안는다.
줄기줄기 山脈들은 구름 속에 떠 있는 섬
구름과 바다와 山은 하나
빛의 물결

여기 아침의 나라
白頭山 靈峰에 새날이 온다.

아득한 太古 아직도 땅 위에는 人間이 없었을 때
온 누리는 빛과 어둠으로 나누인 채
두터운 구름장 위엔 하늘님 나라만이 빛났었고
땅 위엔 캄캄한 어둠만이 깔렸었다.
白頭山 靈峰은 구름 위에 우뚝 솟은 하늘님 나라
玉皇上帝 하늘님이 하루 한 번
새벽에 보는 아침 조회ㅅ터

日 月 星神도 한 자리에 머무는
새벽 동 틀 때

天上의 諸神 仙女, 平和와 光明을 찬탄하고
風師 雨師 雲師도 天地運行의 正常함을
사뢰는 아침 조회ㅅ터

그 속에 오로지 홀로 괴로운
하늘 아들 桓雄의 모습이여,
하늘 나라 光明도 주춤하는 憂愁의 그늘.

그는 노래한다.

하늘 나라 光明의 외로움이여, 뜻 없도다.
天上의 平和는 架空의 것
빛 속에 살면서 빛을 깨닫는 者 없도다.

바람아 저 구름을 헤치라.
구름아 저 두터운 옷자락을 걷으라.

光明의 한 겹 발 밑은 暗黑의 나라
나는 보았노라, 저 어둠의 세계를.
빛을 찬양하는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없노라.

어둠은 빛의 그림자.
빛 속에 살아도 외로운
하늘 나라 영광의 공허함이여.

빛 속에 빛이 무슨 뜻이 있으리
내가 갈 곳은 어둠의 나라
나의 소망은 저 어둠을 뚫고 가는 것

光明과 秩序를 깨뜨리는 아들의 反抗 앞에
하늘님인들 어찌하리
反抗과 冒險은 아들의 것.
人間 최초의 어버이 하늘님도 아들 앞에는 약하였나니.

네 진정 무엇을 원하느냐. 하늘 나라의 平和와
영광을 버리고, 암흑에 한 발을 들여놓으려는
네 소망의 목적이 무엇이냐.
저 땅을 보라. 오직 짐승들의 울부짖음뿐,
네가 저 곳에 무엇을 어찌하려느냐.
저 不毛의 땅에 무엇을 심으려느냐

아들은 대답한다.

나에게 하늘의 권능을 나누어 주소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념의 불빛을 밝히소서.
나의 소망은 두터운 구름장을 쪼개어
저 어두운 땅에 빛을 심는 것.

나에게 하늘의 권능을 나누어 주소서.
축축한 봄비로 大地를 적시어
풀을 나게 하고
나무를 자라게 하고
모든 생명을 땅 위에 깃들게 하리로다.
나무와 나물과 낟알과,
모든 나(生)는 일 낳(産)는 일을 다스리리로다.

공중의 나는 새와 물의 고기는 알을 낳고
산과 들의 짐승들은 새끼를 낳게 하리니,
卵生, 胎生, 化生, 濕生 온갖 생명이
땅에 충만 하리로다.

나에게는 하늘의 권능을 나누어 주소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념의 불빛을
내 마음 속에 밝혀 주소서.
제 한 몸 마음 속뿐 아니오라 모든 목숨 탄 者
내부에 영혼의 불빛을 밝히소서.
나는 새, 기는 짐승에게까지도 생명의 빛을 주소서.
나의 소망은 저 어두운 땅에 빛을 심는 것.

하늘 아들 桓雄의 抱負는 웅장했고 소망은 간절했다.
玉皇上帝 하늘님은 인자한 어버이,
아들의 소망을 꺾을 수 없었나니,

내 아들아!
이제부터 너는 모든 생명에 책임을 져라.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는
어버이처럼 생명을 사랑하고
그들 속에서 영혼의 불빛을 일깨워 주라.

내 이제 하늘의 권능을 너에게 주리라.
이후로 땅 위에 깃드는 모든 生命을 축복하나니
타고 난 목숨껏 충분히 누릴 지어다.
하늘의 무수한 별의 수만큼
땅 위에 무수한 목숨이 충만하리로다.

그러나 슬프다. 너희 生命들은 살기 위하여
목숨이 목숨을 먹는도다.
움직이는 목숨들은 살아있는 植物을 먹어야 하고
큰 짐승은 작은 짐승을 먹는도다.
슬프다, 땅 위에는 고요와 平和는 없고
목숨과 목숨의 싸움이 있으리니
슬프다, 땅의 운명이여!

이제 땅 위의 목숨들을 위하여 다섯神을 따르게 하리니

첫째 나무웃도〔主 〕는 植物을 다스리라.
山과 들에 모든 푸성귀 나물 낟알 나무를 나게 하여
움직이는 목숨의 양식이 되게 하라.
슬프다, 목숨이 목숨을 먹는도다.

다음 목숨웃도〔主命〕는 모든 생명의 命을 다스리라.
무릇 살아있는 것은 죽는 날이 있으리니
처음이 있은즉 끝이 있음이라.
낙낙 장송의 천년 푸르름도 제 命이요,
풀잎에 이슬 먹는 하루살이의 덧없음도
제 명임을 알라.
슬프다, 목숨의 덧없음이여.

셋째 번 앓음웃도〔主病〕는 목숨이 살다가 상하고 약할 때
내가 허락한 땅 위의 물건으로 그 몸을 고치라.
모든 생명은 그 몸을 스스로 상하지 말지어다.
숨을 탄 자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는 지혜를 주었나니,
피는 흘러도 스스로 멎을 것이요,
앓을 때 쉬면 원기를 회복하리라.
슬프다, 목숨의 고단함이여.

넷째 번 싸움웃도〔主刑〕는 땅 위 생명들의 싸움을 다스리라.
질서 없는 중에 질서를 찾고
길 없는 중에 길을 찾아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고
안 되는 자는 되는 자를 헤살짓는도다.
어리석음으로 눈이 어두워
적은 이익에는 밝고 큰 이익은 안 보이는도다.
슬프다, 미물의 어리석음이여.

마지막 특별히 허락하나니
모든 생명의 마음을 다스리는 착함웃도〔主善惡〕는
그들 마음 속의 양심을 다스리라.
하늘의 별에 목숨을 빌어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양심의 불빛, 하늘 마음을 주노라.

어둠과 싸워 이긴 者만이
하늘 나라의 平和와 고요를 얻으리라.
너희들 육신은 슬프나 너희들 마음은 하늘의 것.
착하도다, 착하도다.
모든 생명은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리로다.

내뜻과 권능을 받은 내 아들아,
네가 몇 劫을 두고 태어나는 곳곳마다
목숨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보호하라.
一切 殺生을 금하노라. 이는 내가 주는 唯一한 誡命
생명을 해치지 말지어다.

이제 땅을 다스리는 표적으로
天符印 세 개를 네게 주리니
아들아 너는 저 어둠의 땅에 빛을 심고
천지 무궁토록 생명을 이어가라.

구슬은 하늘의 권능을 상징함이니
네 원하는 대로 이루어 질 것이요,
칼은 破邪 顯正의 상징이로다.
不義를 보면 쳐부수고 義로움을 나투어 빛내게 하라.
거울은 맑음이니 안과 밖이 하나되어
거짓 없음을 상징함이로다.

玉皇上帝 하늘님은 인자한 어버이,
하늘 나라 天神과 仙女들이 함께 찬탄할 때
하늘 아들 桓雄은 하늘님 권능을 받았도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들으라.
바람과 비와 구름의 神도 들으라.
이제 땅 위에 생명을 충만케 하기 위해
그대들은 힘을 합해, 줄 것을 주라.
빛과 熱과 공기와 물을 주라.

저들이 어리석음으로 하여 자연의 은혜를 모를 때에도 주라.
저들이 생명의 근원을 잊었을 때에도 주라.
저들이 하늘을 원망하고 저주할 때조차도 주라.
진실로 저들이 암흑 속에서 죄를 지을 때
그들을 일깨워 주도록 가뭄과 장마와 폭풍과
한 밤중에 천둥 번개를 때려 벌을 주어도 좋으나
그대들 응징의 힘이 저들의 힘을 넘지 않을지어다.
그 罰마저 저들의 시련이 되어
再生의 용기를 얻도록 할지어다.

하늘님이 명하신 다섯 웃도는 나를 따르라.
이제 太白山 꼭대기 神壇樹 밑에 내려
하늘 저자〔神市〕를 열리로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는 아침해 고운 나라〔朝鮮〕,
뜻이 큰 한(韓) 나라.

나를 도와 땅을 다스릴 삼백예순 가지 神들도
나를 따르라.
저 어둠의 세계,
검은 땅과 바다는 이제 내가 다스리는 나라
山에는 山신령, 바다와 가람에는 용왕이 지키고
꽃 하나 나무 하나에도 목숨이 있으니
신령(神靈)이 있도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는 아침해 고운 나라, 신령한 나라.


하늘의 神들이여, 저 울부짖는 짐승의 소리를 들으라.
한 줄기 하늘에 사무치는 救授의 기도를
나는 역력히 듣는다.
저 땅 어둠 속에는 나를 끄는 힘이 있도다.
내 저들에게 참 삶을 주리니
하늘의 神들은 나를 따르라.
우뢰 번개여, 어둠을 찢어
한 줄기 빛의 길을 내어라.
나는 어둠을 뚫고 가노라.

이때 하늘의 神들은 앞을 다투어
하늘 아들 桓雄 天王의 뒤를 따르니 그 무리 三千.
太白山 꼭대기 神檀樹 나무 밑에 下降할 때
바람웃도〔風伯〕, 비웃도〔雨師〕, 구름웃도〔雲師〕
한꺼번에 몰아 치며
천둥 번개로 天地는 진동하니
그 威儀 그 壯觀, 天地 개벽 후 처음이었다.

Ⅱ. 사람 되어지이다

두터운 구름장으로 갈라진 하늘과 땅
여기는 不毛의 땅
해도 달도 없는 나라엔 時間이 없다.
처음도 끝도 없는 어둠뿐
바람도 없고 비도 안내리는 眞空지대
죽음의 바다
검은 땅 위에 차가운 돌덩어리 山
바위틈에는 실낱같은 물줄기도 없었으니
나무도 풀도 없는 不毛의 땅

오직 어둠 속에서 태어난 짐승들의
서로를 잡아먹는 울부짖음만이 있다.

여기는 짐승의 나라, 鬼神의 나라
어둠을 먹고 어둠을 吐하는 어둠의 生理
어둠 속에서도 더 짙은 어둠을 찾아
캄캄한 동굴 속에 몸을 숨긴다.

한 동굴에 숫범과 암곰이 살았으니
아득한 옛날 어둠 속에서 태어난 짐승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서로를 잡아먹는 짐승의 삶
그들은 짐승들의 王이었으니
이 山에서 저 山으로 훌훌 뛰면서
작은 짐승, 먹이들을 찾아 헤맨다.

그들이 동굴 속에 잠든 시간은
妖鬼들이 돌 틈에서 나와 亂舞한다.

그들의 노래는 죽음의 노래
그들의 눈은 푸른 빛이 넘실거리고
그들의 입은 붉은 불길을 내뿜는다.

검은 장막을 몸에 감고
妖鬼들은 밤을 새워 춤을 춘다.

곰녜는 짐승의 삶이 괴로웠다.
검은 털로 추위를 막아도 막아도
뼛속까지 추웠고
작은 짐승을 잡아 먹어도 먹어도
배는 고팠다.
낮과 밤을 모르는 어둠 속에서
곰녜는 짐승의 삶이 괴로웠다.

곰녜는 빛을 몰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빛을 어찌 알았으리.
그러나 하늘 나라 桓雄이 下降하던 날
어둠을 찢은 한 줄기 빛은
곰녜의 환상 속에 역력히 나타났다.

곰녜는 꿈에서 깨어나 동굴 밖으로 뛰쳐 나온다.
妖鬼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사방은 죽은 듯 고요한 시간
곰녜는 하늘을 우러러 발원(發願)한다.

나는 보았노라, 한 줄기 빛을
정녕코 보았노라, 한 줄기 빛을

아아 이 몸은 어둠을 옷 입고
죽음의 공포 속에 항상 떠는 몸

아아 내게 단 한 줄기 빛만 있다면
아흔 아홉 개의 어둠을 능히 참으리라.

하늘님이시여, 내게 빛을 주소서.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짙은 어둠을 면케 하옵소서.

아아 이 몸은 짐승의 몸
죽음의 공포 속에 항상 떠는 몸

아아 내 삶은 짐승의 살음(삶)
내게 참 살음 얻어지이다.
참 살음 얻어지이다.
나는 짐승의 몸, '사람' 되어지이다.
'사람' 되어지이다.

이제 곰녜의 願力은 먹장 구름을 뚫고
하늘에 사무쳤으니
하늘 아들 桓雄이 救援의 손길을 뻗었도다.
빛과 어둠의 만남이여
햇빛은 이때로부터 땅을 비쳤도다.

바람은 山봉우리에서 구름을 밀고
구름은 하늘에 뭉치어 비 내리니
山골 줄기 줄기마다 냇물 이루어
샘이 깊은 물 가뭄에 아니 마르고
바다로 가도다.

뿌리 깊은 나무
山野에 생명 얻으니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꽃과 열매
풍성하도다.

밤이면 달빛에 불을 밝히고
낮이면 햇빛에 물을 맑히니
물 속의 노는 고기, 공중의 나는 새
돌 틈의 수달이며 땅머구리
구물구물이 기는 짐승, 뱀, 지렁이까지
몸을 적시고 물을 마시며
생명을 얻었도다.

빛은 하늘의 啓示
곰녜는 범쇠와 함께 햇빛에 절하고
날마다 밤마다 비는 마음, '사람 되어지이다'
정성이 사무쳐
桓雄天王의 공수를 받았나니

쑥과 마늘을 먹고 百날을 가리라.
햇빛을 보지 말고 百날을 기도하라.
너희가 짐승의 허물을 벗고
참 살음 얻으리니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하라.

내가 땅에 내려 온 뜻은
너희에게 참 삶을 주려 함이니
너희가 짐승의 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리라. 참 삶을 얻으리라.

너희가 내 뜻을 알지어다.
짐승의 몸이 사람으로 변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할 試鍊이 있나니

쑥과 마늘을 먹고 百날을 가리라.
햇빛을 보지 말고 百날을 기도하라.
고난과 試鍊은 하늘의 慈悲
참고 이기는 者만이 사람되나니

만일에 고난과 試鍊을 참지 못하면
너희는 영원히 짐승의 몸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리로다.

동굴 속에 들어간 곰과 범의 三七日.
그것은 葛藤의 三七日, 苦難의 三七日.

이기는 마음과 지는 마음과
참는 마음과 못 참는 마음과
되는 마음과 안 되는 마음과

곰은 참았고 이겼고, 그리하여
사람이 되었나니
슬프다, 범은 못참았고 졌고, 그리하여
사람이 못되었도다.

하나의 나는 지켜 보는데
또 하나의 나는 매를 맞는다.

아흔 아홉의 어둠속에서
단 한줄기 빛을 믿나니

마구니(魔軍)들아 妖鬼들아 물러가라.
나는 나 자신을 지켜보리로다.

아득한 옛날 어둠 속에 태어나
어둠을 먹고 자란 어둠의 목숨
거머리와 박쥐와 거미는 나의 밥
아아, 나는 슬픈 짐승이로다.

동굴 속의 삶은 죽음의 삶
언제 그칠지 모르는 폐쇄된 운명을 저주하며
바위너덜에 붙어 공포에 떠는 몸

원컨대 이 몸의 罪를 씻어주소서.
多劫生來 지은 죄를 사하여 주소서.

내 이제 피 흘려 참회하나니
매 맞는 저 짐승을 불쌍히 여기소서.
짐승의 허물을 벗겨 주소서.

두 개로 쪼개어진 곰녜의 몸은 참회의 눈물로
전신의 不淨을 씻고야 하나 되었으니
이제 갈등은 멎었도다.

洞窟의 새 아침,
곰녜는 눈 부신 太陽 앞에

겹겹이 싸인 짐승의 껍질을
홀홀히 벗고
새로운 생명으로 몸바꿈하였나니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난
거듭난 女人
아침의 太陽보다도 눈부신
昇華의 무지개

곰녜는 자신을 응시한다.
어깨와 팔과 젖무덤과 그리고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두 발로 곧게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아 나는 네 발로 기는 짐승이 아니다.
두 발로 서있는 사람이다!

최초의 환희, 최초의 矜持

곰녜는 첫 걸음을 떼어본다.
왼 발, 그리고 바른 발,
머리는 하늘을 이고
똑바로 앞을 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
붓(筆)같이 꼿꼿한 不動의 자세는
한 순간에 허물어지고 허물어지고.

인간 최초의 서투른 걸음마는
均衡을 잃어 비틀거리고 비틀거리고.

슬프다. 三七日 만에 얻은 女人의 몸
갈대와 같이 연약한 몸
너의 시련은 끝났음이 아니라
이제로부터 시작이로다.

百날 기도를 三七日로 줄인 것은
하늘님 은혜. 네 만일 百날을 채웠더라면
못 살아 남았으리, 네 연약한 몸.

슬프다. 곰녜는
아름다운 變身속에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의 갈등을 안았도다.

Ⅲ. 하늘과 땅의 사랑

洞窟을 벗어난 곰녜의 새 삶은
하늘 아들 桓雄의 크나큰 기쁨이었으니

아름답다, 짐승에게서 벗어난 곰녜의 女身이여.

땅 위에 나는 어느 나무보다 싱그러운
그의 몸매
어깨에 물결치는 검은머리
눈부신 全裸의 살결을 덮었도다.

몸을 일으켜 두 발로 꼿꼿이 걸어다니는
가벼운 걸음걸이
홀로 서있는 矜持의 자세
桓雄의 視線은
神檀樹 나무 위에 햇살 되어
곰녜를 본다.

이처럼 아름다운 生命이 또 있었던가.
달덩어리 솟아오르는 환한 얼굴
이슬 머금은 눈은 빛나는 검은 별
꽃봉오리 터지는 붉은 입술
桓雄은 찬탄한다.
아침 햇살을 받고
황금빛으로 물든 곰녜의 몸

그러나 아침 햇살 속, 긴 그림자 물가에 서서
곰녜는 외로운 不安에 떤다.

우거진 나무숲에 몸을 감추고
처음 느낀 부끄러움에 몸을 떤다.
離脫의 不安 속에 몸을 떤다.

하늘과 땅 사이
나무 한 그루, 꽃 한 떨기에도
의지할 수 없는 不安이여.

곰녜는 참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다.
不安에 못 이겨 몸을 가린다.

하늘엔 해와 달이 뜨고
땅위엔 낮과 밤이 갈리며

싱싱한 나무, 아름다운 꽃
공중의 새와 물 속의 고기
온갖 짐승은 산 속에 가득하여
뛰놀며 노래 부르며 속삭인다.
바람과 햇빛이 속삭인다.

그러나 곰녜는 외로운 몸
자신을 닮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최초에 '하나'이었으니
나무를 타고 바위를 뛰며
오직 홀로 물 그림자를 굽어본다.

아름다운 물 속의 그림자
그러나 不安한 영혼

물결 잔잔한 水面에 바람이 스치면
순간에 사라지고 또 떠오르는
쓸쓸한 물그림자

溪谷은 열두 구비
구비마다 푸른 소〔潭〕에
太古의 고요를 안고 헤엄치는 人魚
곰녜는 머리를 감고 또 미역〔沐浴〕을 감는다.

공중 펄쩍 뛰어 바위 위에 오르면
복숭아 나뭇가지 한 팔로 휘어잡아
주렁주렁 달린 열매 목을 축이고
머루랑 다래랑 먹고 외로움을 잊는다.

물 가운데 바위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면
곰녜의 외로움을 싣고 흰 구름이 흐른다.

사각사각 갈대 소리
찌직찌직 풀벌레 소리
와락 밀려오는 서러움에
곰녜는 펄쩍 일어나 앉는다.

갈대숲 속에서 튀어나온 다람쥐
참나무 가지 끝으로 내려온다.

곰녜의 동무는 다람쥐, 토끼, 사슴
곰녜는 짐승 하나 하나마다 이름을 지어준다.
여우, 너구리, 담비, 고슴도치
숱한 꽃풀 하나 하나에도 이름을 짓는다.
나리꽃, 메꽃, 도라지꽃, 별꽃, 엉겅퀴
아욱, 속새, 떡갈나무, 엄나무, 소나무
낮에는 이름을 짓는 일에 외로움을 잊는다.

그러나 밤이 오면
어둠 한 가지뿐
사랑스런 꽃과 나무는 잠들고
猛獸들이 洞窟의 잠에서 깨는 때
어둠 속에 번뜩이는 승냥이의 눈
山골짝을 울리는 범의 咆哮 소리

푸른 달빛이 냇물에 흐를 때
낮 동안 조용하던 사나운 精靈들이
일제히 깨어나 수런거린다.

짐승의 세계에서 離脫한 삶
곰녜는 이제 밤에 살 수 없는 몸
어둠 속 공포에 홀로 떤다.

다시 짐승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이 된 것을 뉘우치지는 않는다.
밤새워 七星님 별을 보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어둠 속 공포에 홀로 떤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님이시여,
이 어둠 속에 나 홀로 있나이다.
하늘과 땅 사이 아무도 없는
이 어둠 속에 나 홀로 있나이다.

저 무서운 짐승들의 울부짖음
귓전을 스치는 귀신들의 속삭임
밤새는 밤마다 죽음을 울고
풀벌레는 달빛에 슬피 우네.

슬픔이야 이 몸보다 더한 것 있으리
하늘과 땅 사이
나 하나뿐

명감하고 거룩하신 하늘님이시어
이 몸을 점지하신 하늘님이시어
짐승의 허울 벗고 사람된 이 몸
천만 뉘우침은 없사오나
제 적은 가슴은 무서움에 떨고 있나이다.

제 몸에 항상 햇빛과 같이 강림하소서.
무지개발로 강림하시고
서리발로 강림하시고
구름발로 강림하소서

낮에는 열매를 따먹고 배고픔을 잊고
보는 것마다 이름지어 외로움을 잊으나
밤에는 밤마다 무서움에 떠는 몸

내 이제 神檀樹 밑에 치성 드려 비오니
제 몸에 항상 햇빛과 같이 강림하소서.

밤새워 기도하는 소리
桓雄이 별빛으로 곰녜를 본다.
하늘과 땅 사이
저 홀로 애절한 祈願

神에게 향한 思慕가 싹트고 자랄 때
그에게 쏠리는 神의 사랑도 눈뜨나니

神檀樹에 깃든 하늘과 땅의 사랑

땅이 원하는 것을, 진실로 원하는 것을
하늘이 어찌 느끼지 않으리, 주지 않으리.

땅이 추위에 떨 때 햇빛을 주고
가뭄에 목마를 때 단비를 주듯
아름다운 자기의 被造物이 不安과 恐怖에 떨 때
神은 그 최선의 것을 준다.

샛별이 神檀樹 나뭇가지에 걸려
새벽이 다가올 때
山川의 鬼ㅅ것들도 잠잠해지고
銀河水 흐르는 별만 하늘을 지키는데
桓雄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곰녜 앞에 나타난다.

하늘과 땅의 만남, 하늘은 땅을 안고 돌며
天地 公事를 한다.
사랑하는 하늘은 사랑 받는 땅이 없을 때
햇빛도 비도 구름도 바람도 無用한 허사
땅이 없다면 山川草木의 꽃을 어찌 피우리.
열매를 어찌 맺으리.

내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것을 주리라.
내 만든 모든 생명 중에 가장 아름다운 生命이여.
내 이제 인간의 형상으로
네 앞에 나타나 네 외로움을 위로하고
두려움을 없이 하리니 너는 나의 사랑
영원한 나의 半身이로다.

나는 네 안에 하늘 나라 생명을 심고
너는 새 목숨 잉태하여 열 달을 수고하여 낳으리니
하늘의 축복이 그 자손에게 있으리라.

환웅은 땅의 引力에 끌리듯
곰녜 앞으로 내려간다.
무지개를 타고도 내려오고
서리발을 타고도 내려오고
구름을 타고도 내려왔으련만
환웅은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에 눈부실 때
곰녜의 發見을 기다려서 나무 뒤에서 나타난다.

사랑은 奇蹟의 發見
곰녜는 神檀樹 나무 밑에서
人間 최초의 남자를 發見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가르친다.
아낌과 보살핌의 손길로 쓰다듬고
뜨거운 視線으로 사랑을 익게 한다.

사랑은 주는 것, 오직 주는 것
주는 일 속에 기쁨이 있고
주는 행위 속에 보람이 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넉넉함이여
내 잔(盞)은 차고 넘치나니

곰녜는 자신의 몸을 주고 마음을 주고
목숨의 속속들이
桓雄에게 바친다.

새로운 삶, 참 삶이 이것인가.
이제 마음 속 어둠은 사라지고
공포의 떨림도 멎었나니

이제 몸만의 사람이 아니라
마음마저 사람, 참 삶이 이것인가.

곰녜의 마음이 환히 열리고
곰녜의 사랑이 붉은 능금처럼 익어갈 때

남자는 여자에게 생명의 씨를 내린다.

참밤같이 여문 사랑, 사랑의 씨를 심는다.

Ⅳ. 檀君 탄생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아
곰녜는 桓雄의 품에 안겨 잠을 잔다.
초경에 잠이 든다.
이경에 꿈을 꾼다.

桓雄은 혼자 잠 못 이루며
하늘의 별을 본다.
北斗七星은 서편으로 기울었고
銀漢은 三更인데 소쩍새 넋이 운다.

품안에 든 곰녜는 安心과 平和의 잠을 잔다.
운명을 맡기고 목숨을 맡긴 女人의 모습
나무 그늘에 어려 돋아오는 반달이요, 갓핀 박꽃이다.
하늘의 仙女인들 이보다 더 고우리.

桓雄은 사랑스러움에 겨워 아드답삭 껴안는다.
이마에 입마춤한다.
그래도 품에 안긴 곰녜는 곤한 잠을 잔다.

환웅은 귀기울여 쉼없는 天體의 運行을 듣는다.
이제 머지않아 동이 트리니
桓雄은 하늘 아들 사람의 몸을 벗어야 한다.
桓雄은 홀로 탄식한다.

만남은 瞬間이오 헤어짐은 永遠이로다.
가련하다 연약한 너
나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차라리 나를 몰랐던들
이보다는 덜 괴로웠으리.
이제 어두운 밤이면
전보다 백 배나 무서움에 떨고, 외로움에 지치리.
나의 사랑, 너 연약한 몸.

그러나 만나고 헤어짐은 생명의 원리
처음이 있은즉 끝이 있나니
땅에 사는 모든 생명의 슬픔이로다.

桓雄은 조용히 곰녜는 어깨를 흔든다.
공중 펄쩍 곰녜는 일어나서 꿈 얘기를 한다.

오른쪽 어깨는 달이 뜨고
왼쪽 어깨는 해가 뜨고
하늘에 샛별이 떨어져 내 입으로 들어 왔네.
신단수 나무 밑에는 커단 범 한 마리
내 품에 안겼으니 이 무슨 꿈이리.

그 꿈은 정녕 하늘 아들을 낳을 胎夢.
네 이제 열 달을 비루서 땅검〔地神〕을 낳으리니
이 땅은 영원히 너희에게 속하리라.
너희는 수고하여 땅을 갈고
그 풍성한 소산을 먹으리니
얼굴에 땀흘려 일할 동안
너희는 외로움을 잊고 보람을 거두리라.

이 땅은 너희의 땅, 축복 받은 땅.
山 높고 물 맑은 아름다운 땅
오랑캐 짐승들이 사방에서 밀려와도
이 땅은 영원히 너희에게 속하리라.

桓雄은 축복하고 하늘로 올라간다. 몸바꿈한다.
온데도 없고 간데도 없으니
곰녜는 공중펄쩍 뛰어 기절한다.

이럴 수가 있으리
어찌 이럴수가.
나혼자 버려두고, 어찌 이럴 수가.

저 하늘아, 어찌 이럴 수가 있으리
나를 사람 만들어 놓고
또 짝을 주고
이제 와서 내 목숨 앗아가네

시퍼런 하늘에 날벼락 쳐라.
하늘이 무너진들 이에서 더하리.

해도 달도 별도 구름도 썩 물러가라.
폭풍아 불어서 다 쓸어버려라.
비야 쏟아져라 天地를 뒤집어라.

이 땅은 사막, 저주받은 땅
풀조차 메뚜기조차 씨를 말리리.

그대 없는 땅,
나 혼자 이 땅을 어찌 지키리.
나는 이 땅에
매이지 않았노라.

연약한 여인 아름다운 곰녜는
일시에 사나운 짐승으로 표변한다.

곰녜의 통곡은 山川을 올리고
처철한 怒號는 天地를 흔든다.
桓雄은 곰녜의 무서운 힘에 놀라고
사나운 짐승으로 표변한 데 놀란다.

桓雄은 공중에서 곰녜를 부른다.

내 사랑 곰녜야
나는 하늘, 너는 땅

네 소원한 바를 잊었느냐.
참 살음 얻어, 사람되기 원하던
네 당초의 소원을 잊었느냐.

나는 네게 참 삶을 주기를 약속했나니
참 삶이 무엇인지 내 말을 들으라.

참 삶은 사랑, 오직 사랑.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풀포기 하나하나, 꽃송이 하나하나
짐승과 고기와 새와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사랑을 주는 것, 오직 주는 것
마음을 주고 몸을 주라.

박한 땅에는 거름을 주고
마른 나무에는 물을 주라.

배고픈 자에게 먹이를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

고단한 자에게 쉴 곳을 주고
약한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라.

사랑을 주는 것, 오직 주는 것
주고서 받기를 원치 말라.
하늘의 해 달은 빛을 주고도, 받지 않고
바람은 모든 생명에게 숨을 주고도 받지 않네.

비는 뿌려서 땅을 적시고
구름은 가려서 그늘을 주건만
오직 줄 뿐, 받지는 않네.

사랑은 주는 것, 오직 주는 것
사랑하되 가지지 말라.

세상 만물은 하늘에 속했을 뿐
다 하나 하나의 삶, 온전한 삶이니

풀잎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꽃 한 송이도 꺽지 말라.
다람쥐 한 마리도 잡지 말라

사랑은 살리는 것
죽이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네가 나를 갖기를 원하느냐.
영원히 갖기를 원하느냐.

네가 아직도 나를 잃었다고 하느냐.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나니라.
잃고 얻음을 말하는 건 소유의 욕심
사랑은 결탄코 욕심이 아니로다.

내 사랑 곰녜야, 분명히 깨달으라.
너 없이 나 못산다는 사랑, 참 사랑 아니로다.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로다.

만물은 하나하나 제 각기의 목숨이니
둘의 갈대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아무리 가늘고 외로워도 하나 하나의
오롯한 삶이로다.

네 만일 열 달을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때
진정코 네 것이라고 말하려면
낳지를 말라.
종신토록 잉태한 채
낳지를 말라.

네 아들 낳는 날의 고통은
오늘의 백 배를 더하리니
하나의 생명에서 또 하나의 생명을
떼어내는 아픔이로다.

아픔 없이는 삶은 무의미한 것
아픔 없이는 새 생명을 창조할 수 없도다.

이 세상 한 가지도 네 소유는 없나니
온갖 생명들은 하루 아침에 목숨 끝나면
한 줌 흙으로 돌아 가리라.

내 사랑 곰녜야, 뼈에 사무쳐 알라.
사랑은 지키는 것, 보살피는 것.

네 어린 아들이 猛獸에게 물릴 때
너는 네 몸을 던져 지키리로다.
죽기를 무릅쓰고 건지리로다.

여린 꽃 한 송이 상한 갈대라도
적은 새 한 마리 병든 사슴 새끼라도
다 이 땅에 태어난 것. 가련한 목숨.
땅을 지키지 않으면 어찌 그 목숨 지키리.

이 세상 한 가지도 네 것은 아니로되
너는 네 몸을 던져 지키라, 보살피라.
네 목숨은 하늘에 속한 목숨
네 몸도 네 것이 아니로되
목숨을 다 하여 네 몸 지키라.

너는 땅, 네가 이 땅을 지키고 보살핌은
소유가 아니라 사랑이로다.
목숨을 다하여 네 몸 지키라.

내 사랑, 곰녜야
나는 하늘, 너는 땅.

네가 삶에 지칠 때 하늘을 보라.
사나운 오랑캐 짐승들이 너를 괴롭힐 때
하늘에 빌라.
이 땅은 영원히 나와 너의 아들에게 속했나니
하늘 땅 끝나도록 함께 지키리라.

네 이제 열 달을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생명의 어머니, 삼신〔生産神〕이 되고
아들은 땅의 검〔神〕, 땅의 임금이로다.

이 땅은 白頭山이 本이요
나라는 아침 해 고운 나라 朝鮮이라 하리라.
西으로 妙香山, 九月山
東으로 金剛山, 雪岳山, 太白山
구부러져 智異山, 漢拏山
山 줄기 줄기마다 山神靈되어
이 나라 땅 끝까지 지키리로다.
영원 무궁토록 지키리로다.

곰녜는 기절한 채 神託을 받고
다시 참다운 사람 몸으로 再生한다.

곰녜의 마음의 傷處는 남았으나
아픔은 곰녜를 成熟케 한다.

아침 햇덩어리처럼 뜨겁게 달쿠고
싸늘한 그믐달처럼 그 마음을 식힌다.
鍛鍊의 나날.
밤에 죽고 아침에 다시 살아나는
再生의 나날.

이제 곰녜는 어둠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다.
어떤 짐승도 무섭지 않다.
고독과 不安에 떨던 곰녜는 간 곳이 없다.

새벽이면 찬물에 不淨을 씻고
밤이면 日月星辰을 모시고
다시 살아난 몸
하늘을 향하여 고마움에 절한다.
곰녜의 마음에는 하늘님이 살아 있고
곰녜의 몸에는 하늘 아들이 깃드렸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가니 입덧이 난다.
흙에서 흙내 나고 물에서 물내 난다.
동산에 뙤기 복숭아, 시금털털 개살구,
능금조차 앵두조차 다 따먹는구나.
한 달 두 달 피를 모아
석 달 넉 달 인정 걸어서
다섯 여섯 달에 반짐 걸어서
일곱 여덟 달에 칠성 드려서
아홉 열 달에 해운 받는다.

檀君아기 낳는 날에
곰녜는 神檀樹 나무 그늘에 누워
혼자 産苦를 치룬다.

난데없는 청천 하늘에
흙비조차 돌비조차 천둥이 와장창 지장창 치는데
흙비조차 눈비조차 박수로 날린다.

곰녜는 아픔을 못이겨
하늘을 향하여 소리를 친다.
또 한번 살려달라고 救授의 소리를 친다.

檀君은 드디어 탄생하였다.
곰녜는 胎줄을 끊어 삼을 가른다.
하나의 생명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分離된다.
檀君은 드디어 탄생하였다.
천지 진동하던 폭풍우도 이제 자고
모든 생명은 기쁨의 극치에서 소리가 없다.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내려와
최초의 어머니, 大地의 어머니 곰녜와
땅의 神 단군아기의 둘레를 조용히 싼다.

하늘의 諸神 仙女의 노래 소리는
땅 위의 모든 목숨들의 讚歌와 合하여
檀君아기 탄생을 축복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