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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3. 17. 21:07

<근대성 modernity>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근대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그 전과 다르다는 것은 근대 내내 천착되어 온 사실인데, 근대성의 특징 가운데 어떤 것이 아주 바뀐 것이고 어떤 것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인지 가려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과제죠. 저는 '근대'라는 시기를 급격한 기술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자원 공급의 급속한 확장이라는 조건으로 규정하는 관점을 생각해 왔습니다.

기술 발전과 자원 공급 확대가 원활할 때는 인간이 스스로 대단히 잘난 존재처럼 생각하기 쉽죠. 많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고요. 그런 자기인식 중에는 기술 발전과 자원 공급의 여건이 바뀜에 따라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의술과 의학의 목적이나 의미에도 근대적 인간관이 비쳐져 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저는 잘 모릅니다만, 다른 영역의 근대성을 놓고 떠올린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이와 관련된 의사학 연구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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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에 의사학회 집담회에서 발제를 하기로 얼결에 승락해 놓고 보니 막막하네요. 위의 메일을 주최측에 보내놓기는 했는데, 그 사이에 책 찾아볼 여유도 별로 없을 것 같고, 큰일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뭐 얘기할 거가 많을 듯하긴 한데,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백지상태로 시작하려니... 혹시 이런 쪽에 생각 있는 분들 생각을 좀 적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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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책으로 묶어 낼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대단히 착한 출판사가 있어서 책으로 내 준답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중 쓴 페리스코프가 하나의 범위를 이루기도 하는 것 같아서 매우 반갑고 고맙네요. 
이번 주 중에 제목 등 편집 방침을 정할 참인데, 의견 있는 분들은 부탁드립니다. 아래 초고는 방침이 정해지는 데 따라 고쳐 쓸 것을 전제로 작성해 본 것입니다. (아래 내용, 4월 6일에 고쳐 올립니다.)



나이 예순 된 사람이 그리 크게 변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09년 한 해 동안 나는 놀랄 만큼 크고 깊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고맙게 생각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에 이 변화의 곡절이 모르는 사이에 담겨 있었음을 이제 돌아본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 어머니였다. 어머니와 수십 년 동안 관계가 좋지 않았다. 대체로 불편했고, 때로는 험했다. 어려서부터 '보통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럽지 않으신 것이 은근히 불만스러웠거니와, 23년 전 내 나이 서른여덟일 때 비로소 아버지 일기를 보여주신 이후 그분에게 매우 비판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일기는 몇 해 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그분이 사후 40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조연으로 나온 어머니와 엑스트라로 나온 나도 음덕을 입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석연치 않고 아직도 아주 풀리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다. 왜 어머니는 그렇게 늦게야 그 일기를 보여주신 것일까?
반공법이 핑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사 공부한다는 아들이 나이 사십 다 되도록 그렇게 감춰놓으실 수가 있나? 고민을 나눌 자격이 이 아들에게 없다고 무슨 근거로 판단하신 것인가? 일기를 감춰놓은 것은 아버지를 감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돌아가신 연세가 다 되어서야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깨닫고 내 불초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마음 때문에 원망이 더 컸다. 40대에 사춘기를 겪은 셈이다.
그 후 20년간 나는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지냈다. 형식적인 모자관계는 지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분을 위선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니 스스로 떳떳할 수 없고, 따라서 세상 사는 길도 갈수록 편벽하게 되었다.
일기를 본 이후 오랫동안 나는 한 가지 정형화된 악몽에 시달렸다. 갑자기 죽는다든가 하는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그 시점에서 내 인생의 단면이 드러나 버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죽음보다도 노출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불초'란 말을 나처럼 절실한 강박으로 느끼며 산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8년 전부터 연길에 가 살며 이름없이 파묻혀 살 생각을 했다. 칼럼 쓰기도 그만뒀다. 그러다가 2005년 10월 한국에 다니러 온 길에 많이 쇠약해지신 어머니 모습을 보고 당분간 국내에 머물기로 했다. 계룡산의 암자에서 지내고 계셨는데, 절살이가 한계에 이르신 것 같아 양로원에 옮기시는 것이라도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애틋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는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본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지내다 보니 그 동안 구상해 오던 책 하나를 정리할 계기를 얻어 체류가 자꾸 길어지고 있던 차에 2007년 6월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 동안 살펴둔 파주의 요양병원에 모시고 시병생활을 시작했다.
최소한의 의무로 생각하고 시작한 시병생활인데, 원래 체질에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부자연스럽게 멀어졌던 모자관계의 회복 추세 때문인지, 갈수록 그 의미가 커지고 깊어졌다.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마음이 연민으로 순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어머니 마음도 편안해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다가 기력이 급격히 떨어져 튜브피딩을 시작할 때 뇌 단층촬영을 한 차례 해보고는 떠나실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2008년 11월 이후의 회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12월 31일 입으로 식사를 시작하시고 꾸준히 회복일로였다. 지난 6월에 퇴원해 요양원으로 옮기실 수 있었고, 이후 내내 좋은 건강을 누리고 계시다. 걸음을 못하실 뿐이지, 이제 찻잔을 손에 들고 할머니들과 담소를 나누실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회복이다. 한두 해 사이의 어려움을 이겨낸 정도가 아니라 30년 전, 퇴직 이전의 건강을 되찾으신 것 같다.
몸의 회복보다 더 놀라운 것이 마음의 회복이시다. 수십 년간 마음을 짓눌러 온 모든 질곡을 벗어나신 듯,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편안하시다.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집착이 없으시다. 엊그제 가 모시고 앉았을 때도 무슨 얘기 끝에 "이제 살아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 하시는데, 아무 미련도 묻어 있지 않은 담담한 말씀이었다.
늙으면 애기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애기 마음이 되셨다. 장난을 너무 좋아하신다. 어느 날은 말끝마다 "고맙다."를 거듭하시기에 "어머니, 어머니 뱃속에 고마운 마음이 가득차 있으신가봐요. 건드리기만 하면 '고맙다.' 소리가 나오시는 걸 보니." 했더니, "그래, 그게 똥만 가득차 있는 것보다 낫지 않냐?" 구십 노인의 농담 수준이 이러하니 요양원에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실 수밖에. 간병인들에게 돌봐드리느라 수고 많다고 인사를 하면 "박사 할머니 덕분에 저희들 생활이 얼마나 즐거운데요." 하며 손사래를 친다.

돌이켜보면 인간관계란 역시 상호적인 것이다. 꼼짝 못하고 누워 계신 모습을 뵈며 나는 그 동안 얽매여 있던 시비지심을 벗어나 모자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즐겁고 편안하게 만들어 드리는 데 노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나와의 관계가 인생의 큰 질곡이었을 텐데, 이 질곡의 해소가 다른 모든 질곡까지 넘어서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런 변화가 의무감으로 출발한 내 노력을 즐거움의 경지로 이끌어가는 피드백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어머니를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도 떳떳해질 수 있었다. 가족관계도 원만히 풀어가지 못하는 놈이라는 자격지심을 벗어날 수 있었고,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비지심에 얽매임 없이 아끼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사칼럼을 다시 쓰게 되었는데, 그 전에 쓰던 칼럼과 자세가 달라졌다. 종래의 태도는 연전에 낸 책 제목 <밖에서 본 한국사>에 나타나 있다. 나는 바깥에 있었다. 시사에 대해서든 역사에 대해서든 내 비평은 개입 없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이었다.
칼럼에 다시 손대게 된 계기는 2008년 가을의 <뉴라이트 비판>이었다. 역사 교과서 파동을 보며 <밖에서 본 한국사>의 취지를 이어 펼칠 필요를 느낀 것이었는데, 이 작업을 통해 나는 현실감각을 얻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내 자리를 찾은 것이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마치고 나니 칼럼을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2009년 초부터 <10년 전으로>라는 새로운 형태의 칼럼을 《프레시안》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0년 전이면 <<중앙일보>>에 매주 2~3회 <분수대>를 쓸 때였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며 그 때 썼던 글 생각나는 것 위에다가 지금의 생각을 얹어서 풀어내는 형태다. 1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사회의 변화와 나 자신의 변화를 엇갈려 입체적으로 펼쳐놓는 것이 역사학도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느껴졌다. 연말에는 번역하고 있던 <공자 평전> 내용을 바닥에 깔고 비슷한 형태로 몇 차례 쓰기도 했다.
2009년 한 해 동안 30회 가량으로 일단락된 이 복합형 칼럼을 통해 나는 사회 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왔어도 주변부의 소수파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도 중심부의 다수파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수가 많지 않더라도 이 사회를 함께 걱정하는 동지들의 숨결을 느끼게 되며 마음이 놓이는 것은 사회적 동물의 본능일 것이다. 오랫동안 아웃사이더로 지낸 내게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같은 영양가가 있겠는가? 소금 노릇이 제격이다.

사회로 돌아오는 동력을 어머니에게서 얻는 시점에서 돌아오는 방향을 짚어준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어머니의 회복을 계기로 내 살아가는 자세, 나 자신을 대하는 자세가 변화를 겪었다면, 노 대통령의 비극은 내 일하는 자세, 사회를 대하는 자세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2003년 노 대통령의 취임 무렵까지 그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 때 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 아웃사이더가 되려고 중국으로 떠나던 참이었다. 그분이 대통령 노릇 잘하기를 막연히 바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주기를 구체적으로 바라는 생각도 없었다. 내가 몹시 좋아하고 아끼는 두 친구, 이정우와 유시민이 그분을 가까이서 보좌하게 된 것도 그냥 그럴싸한 일로 여겨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참여정부 5년 동안 그 친구들 얼굴조차 보지 않고 지내게 된다.
2005년 말 이후 국내에서 지내면서도 노 대통령에 대한 관심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뉴스와 그에 따른 논란이 눈에 띄면 "아무리 봐도 괜찮은 사람인데 어째 저렇게 고생이 심할까?", "저 양반 하는 일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시끄럽지?" 하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스쳐보내는 정도였다.
그러다 2008년 들어 퇴임 후의 모습을 보며 그때까지의 피상적 호감과 다른 차원의 존경심을 품게 되었고, 얼마 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위해 우리 사회의 과제를 살펴보며 참여정부의 정책노선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0년 전으로> 칼럼을 시작하면서는 현 정부 들어 나타난 우리 사회에 대한 위협 요소들을 참여정부 노선을 기준으로 지적하는 데 중점을 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9년 들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현 정권이 짖을 줄만 알지, 물 줄은 모르는 개 같은 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산 참사도 마음먹고 저지른 게 아니라 까불다 사고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런데 일단 주워담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보니, 똥개도 광견병 걸리면 물 줄 안다고 날뛰게 되었다.
무책임한 인간은 잘못된 일이 있을 때 더 큰 잘못을 저질러 앞서의 잘못을 감추려 한다. 촛불 사태 때부터 현 정권은 전임 대통령에게 짖어댐으로써 비판의 소리를 가리려 하고 있었는데, 용산 사태 뒤에는 진짜로 물겠다고 날뛰기 시작했다. 사태는 파국으로만 흘러갔다.
4월로 접어들며 나는 "노무현 지키기" 외의 다른 주제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5월 들어가서는 뒷전에서 칼럼 쓰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게 되었다. 5월 20일경 유시민 씨를 찾아가 이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 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분이 세상 떠난 소식을 들었다.

2009년에 나는 '노빠'가 되었고, 분노를 많이 느끼며 지냈다.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도 분노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분노를 아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2009년의 내 분노는 그 이전의 분노와 다른 것이었다. 아웃사이더의 분노와 인사이더의 분노 사이의 차이라 할까?
사회와의 총체적 접촉을 인정하는 인사이더에게는 분노가 분노에서 분노로 끝나는 명쾌한 것일 수 없다. 고통이 뒤섞이고 슬픔이 곁들이는 것이다. 타자만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기에 슬프고, 깨끗이 해소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기에 고통스럽다. 뱉어버리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분노요, 고통이요, 슬픔이다.
"미친 것들!"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서서 잊어버릴 수 있던 아웃사이더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 그러나 괴롭고 답답해도 이제 이 사회를 다시 떠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돌아가신 분이 남긴 말씀 "함께 사는 세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많이 보지 않고 틀어박혀 지낸다. 그러나 "함께 사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의식은 분명히 전과 달라졌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어머니다! 어머니와 불화하던 시절, 나는 세상이 두려웠다. 감정이 남과 뒤얽히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분이 내게 편안히 의지하시고 내가 그분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펴드리게 되니, 겁나는 것이 없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함께 사는 사람들과 함께 겪으며 당당하게 살아갈 자신감을 얻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세상"을 즐겁고 편안하게 느끼니까.

한 가지 얼마동안 어색했던 것은 내가 노빠이면서 보수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 스스로 구분할 필요도 느낄 일 없이 살아 오다가 <뉴라이트 비판>을 하면서 밝히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조금 생각해 보니 보수 같았다. 그러고도 미심쩍어서 보수주의에 관한 책까지 구해서 읽어보며 더 생각해 봤다. 생각할 수록 제대로 찍은 것 같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를 진보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 쪽 인사들과 교우관계도 많고 수구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강하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들에게 나는 내가 "향상심도 없고 정의감도 약한 인간"이라고 겸손한 척하며 말한다. 그 개떡 같은 말을 "욕심이 없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으로 찰떡처럼 알아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정말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 것 다 겪으면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노와 고통을 오히려 불필요하게 늘리기 쉬운 일에 따라 나설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 자신 불만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근년에 얻은 편안한 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나 자신을 확! 바꾸고 싶은 마음이 많았기에 이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도 강했을 것이다. 지금은 더 풍족한 생활도 바라지 않고 더 훌륭한 사람 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회에 대해서도 더 풍요로운 세상이나 더 정의로운 세상보다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조건만을 생각하는 것일 게다.
그토록 마음이 너그러운 내게도 2009년 현 정권의 행태는 너무했다. 이 책에 실린 비판 중에는 과격하게 보이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봐도 진짜 과격한 내용은 없다. 엄청나게 좋은 세상을 요구하는 글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최소한의 요건을 주장한 글일 뿐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과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절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최소한의 요건,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는 내 마음은 절실하다.
대중집회에는 한 번 고개를 들이밀지 않으면서도 그 한 해를 나는 이 사회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수시로 적은 이 기록이 그 때를 지나면 그냥 지나가버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게는 하나의 전환으로 의미가 남는 기록인데, 그 의미를 함께 새길 독자들을 찾아주겠다는 서해문집이 고맙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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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