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선공 15년(기원전 594)조의 "초세무"(初稅畝) 기사를 중국에서 조세제도가 틀을 갖춘 시점으로 흔히 파악한다. 그 400여 년 전 만들어진 주나라 봉건제도는 백성이 영주의 보호를 노동력으로 갚는 것이었는데, 이제 재물로 갚는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좌전>은 이 조치를 비판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임금이] 재산을 늘리더라도 곡식을 내가는 것이 힘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初 稅畝 非禮也 穀出不過藉 以豐財也]

노나라에서 재상 계평자가 같은 제도를 시행하려 할 때(기원전 483) 계평자의 가신으로 있던 제자 염구가 의견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베풀 때는 두텁게 하고, 섬길 때는 치우치지 않게 하고, 거둘 때는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예법의 원리를 등지고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한다면 설령 전부(田賦)를 행한다 하더라도 끝내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계손씨가 일을 올바르게 하려 한다면 주공의 전범을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자기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내 의견은 청해서 무얼 하겠는가?"

공자는 임금과 백성 사이가 물질적 거래 아닌 서로 돕는 정신으로 맺어지는 것을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미를 앞세운 관념이었지만, 실제적 효과도 가진 제도였다. 임금이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드는 상황을 공자는 경계했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돕는 사이라면 임금의 힘은 백성의 충성에만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관계가 물질적 거래가 되면 임금의 힘은 쌓아놓은 재물에 근거를 두게 된다. 임금이 백성보다 재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기 힘들 것이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춘추시대 말기에는 "물질적 거래"인 전부제도가 확장되고 있었다. 천자의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제후와 실력자들의 세력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백성의 의무를 노동력보다 재물로 거두는 것이 능률적인 제도였으므로 '부국강병'에 유리했다. 그리고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발달로 생산력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인신적 예속을 줄이는 전부제도에 대해 농민의 저항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능률보다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권력자가 재물을 쌓아놓기 시작하면 절제하기 힘들 것을 걱정했다.

이 시기에 확립된 전부제도가 중국 조세제도의 주종이 되었지만, 유교 이념은 합리성과 능률성을 추구하는 조세제도의 발전을 계속 억제했다. 양세법이나 일조편법 같은 세제 개혁이 당나라와 명나라 말기 혼란한 시대에 채택되었다는 사실에도 음미할 점이 있다. 재정이 어렵고 이념의 통제가 약한 시기에야 능률성 위주 세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조선조 최대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도 합리성과 능률성을 추구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수취 체제는 전세, 공물, 진상, 잡세, 잡역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최대한 통합해 단순화하는 목적으로 대동법이 추진되었다.

여러 수취 항목 중 가장 번거롭고 폐단이 많았던 공물 제도에 대해서는 16세기 초부터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중 공물 징수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어서야 쌀로 대납하는 대공수미(代貢收米)가 겨우 임시로 시행될 만큼 수취 체제의 변경이 힘들었다. 유교국가의 이념에 걸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란 후 사회경제 조건이 크게 바뀐 사실이 확인되면서 수취 체제의 전면적 개편을 위한 대동법이 제안되었다.

왜란 때 출병한 명나라 장수들이 군수품 확보가 어려움을 불평할 만큼 당시의 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미비한 상태였다. 조선 전기의 농업생산력 발달이 상당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상업 발달을 억제하는 유교적 질서가 강고했던 것이다. 왜란으로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서 억제되어 있던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수취 체제의 혼란으로 인해 능률성을 추구하는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1608년 경기도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장되는 데 꼬박 100년의 시간이 걸린 것만 보더라도 반대가 얼마나 끈질겼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반대를 통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김집(1574~1656)은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은 예학자였는데, 그가 효종 초년 대동법 반대에 나선 것은 유교 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아버지인 예학의 태두 김장생(1548~1631)과 함께 서인, 특히 장차 노론으로 수렴될 계열의 상징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반대는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에 맞서 대동법을 추진한 대표적 인물이 김육(1580~1658)이었다. 김육은 서인 명문가 출신으로 인조 반정(1623) 후에야 관직에 나아가 당쟁에 관여하지 않고 실용적 정책에 노력을 기울였다. 병자호란 후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수레와 수차의 보급을 꾀하고 <구황촬요>, <벽온방> 등 민생에 요긴한 서적을 편찬, 간행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화폐와 역법 등 기술 분야 정책에 주력하다가 효종 즉위(1649) 후 정승에 오른 뒤 대동법 시행의 확대에 가장 큰 노력을 쏟았다.

1608년 경기도 시행 후 심한 논란에 막혀 1623년 강원도 시행 외에는 확대돠지 못하고 있던 대동법이 1651년 충청도, 1658~62년 전라도로 확산되어 전국 시행을 바라보게 된 데 김육의 역할이 컸다. 1649년 말의 대동법 논쟁에서 우의정이던 김육이 이조판서이던 김집에게 밀려 정승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후 다른 사정으로 김집을 지지하는 소위 산당(山黨)이 퇴진한 후 영의정을 맡자 충청도의 대동법 시행을 시작했다. 1654년 다시 영의정을 맡았을 때도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준비해 그가 죽은 직후 전라도 시행의 발판을 만들었다.

대동법은 그 후 함경도(1666), 경상도(1677), 황해도(1708)로 넓혀 전국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평안도에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어서 대동법이라는 이름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대동법의 시행방법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른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핵심 원리는 세 가지였다. (1) 다양한 수취 항목을 통합한다. (2) 전세(田稅)의 형태로 하여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한다. (3) 봄과 가을에 1결 당 6말(실제로 5~8말)씩 나눠 징수한다.

대동법이 필요하게 된 것은 사회경제 상황의 변동 때문이었다. 원래의 세납 방법은 국가가 소민(小民)을 직접 파악한다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왜란을 겪고 나니 호구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구보다 파악이 쉬운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하고 수취 방법을 단순화하는 대동법이 제기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유교 이념에 투철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가 끈질겼던 것이다.

왜란 후의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대응책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은 두 가지 조건이 겹쳐진 것이었다. 하나는 7년간의 전란에 의해 기존 질서가 흐트러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왜란 전부터 이미 누적되어 있던 사회경제 변화가 국초의 체제로는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신이 매우 쇠약한 상태에 와 있을 때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무너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빚어 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산당의 흐름이 후에 노론의 주류로 흘러간 반면 인조 때의 한당은 뚜렷한 당파로 발전하지 못했고, 따라서 한당의 실용주의 노선은 조선 후기 정치에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

김육과 함께 한당의 대표적 인물이 최명길(1586~1647)이었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로 어려운 길을 걸었던 최명길은 투철한 실용주의자였다. 투항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침공 전에 충분한 대비를 해놓지 못한 이상 무작정 버티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화론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의 창시자로도 이름을 남겼는데, 현실을 이념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명학의 관점이 정치노선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한당의 실용주의 노선이 옳았던 것처럼 보인다. 16세기에 시작된 전 지구적 경제구조 변동이 왜란 전부터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조선 사회의 생산력 수준은 무농억상(務農抑商)의 유교적 질서에 담기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18세기가 되면 제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는 상업자본이 국가 질서를 와해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당의 원리주의 노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이 적절한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 사람의 안일한 관점이다. 두 세대의 기간 동안 혹독한 전쟁을 몇 차례나 겪던 당시 사람의 눈에는 오랫동안 쌓여 온 문제보다 급격한 전란의 피해가 더 강렬하게 비쳐졌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전쟁 전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복고 노선이 수용하기에 시대 변화가 너무 컸다고 하는 것은 결과론일 뿐이지, 너무 큰지 어떤지 판별할 확고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를 지배한 것은 서인 산당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이념으로 현실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당의 실용주의에 비해 원리주의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노선이 운영된 실제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국가 기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산당은 대동법에 반대했지만,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도 결국 전국적 시행에 이른 것은 그 현실적 필요성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대동법을 벗어나는 농민 수취가 늘어나 원래 의미를 잃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기제로 전락한 것은 공자가 걱정한 대로였다. 명분에 엄격하지 못한 제도는 힘을 가진 자에게로 굽어지기 마련이니까.

유교적 정치 원리는 경쟁이 격화되던 춘추전국시대에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국시대까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유교가 한나라가 안정된 후에 정치를 지배하게 된 것은 제국의 질서가 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유교정치는 경쟁에 몰두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국내 질서 유지만으로 국가의 기능이 충분하던 상황을 벗어나는 세계적 변화의 한 모퉁이가 드러난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외국과의 전쟁은 200여 년 동안 없었지만, 국외 상황은 계속 변해 가고 있었다. 전쟁 당시나 직후에는 배경 문제까지 인식하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변화에의 적응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가정 하에 조선 후기의 정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