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음이요, 장작더미를 보지 못함은 밝음을 쓰지 않음이요, 백성이 보살펴지지 못함은 은혜를 쓰지 않음이니,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지 않음이니이다." (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 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맹자>의 가장 잘 알려진 귀절의 하나로, 왕권의 전제성을 밝힌 대목이다. 임금 노릇의 단적인 표현이 "백성의 보살핌"으로 되어 있고, 임금이 이 노릇 하는 것은 의지만 있다면 깃털을 들거나 장작더미를 보는 것처럼 저절로 되는 일이라고 했다. 여건이 이러니 저러니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가 살던 기원전 4세기에도 임금이 임금 노릇 제대로 못하는 일은 적지 않게 있었고, 그중에는 임금에게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도 많이 있었다. "하지 못함"과 "하지 않음"은 현실의 양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맹자가 의지를 강조한 것은 현실(sein)보다 당위(sollen)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 당위가 바로 유교적 봉건제의 원리였다. 맹자는 현실에 작용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인식할 줄 모르는 원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벌거벗은 힘의 무한경쟁을 억제하는 바람직한 질서를 세우기 위한 발판으로 왕권의 전제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드라마 <용의 눈물>이 큰 인기를 끌 때 '왕권'과 '신권'의 긴장관계가 많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작용을 한 이런 실질적 요소를 부각시킨 것은 후궁의 암투 따위보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좋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왕권과 신권을 같은 평면 위에 놓고 보는 근대적 시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당위의 힘인 왕권과 현실의 힘인 신권 사이의 긴장관계는 유가 정치사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상나라로부터 천하를 얻은 주나라 무왕이 죽었을 때 아들 성왕이 아직 어린 나이여서 무왕의 여러 동생 중 주공이 섭정을 맡아 천자 노릇을 대신했다. 섭정을 맡은 동안 반란을 일으킨 자기 형 하나를 처형하고 동생 하나를 추방한 일도 있을 정도로 권위가 굳건했다. 필요할 때는 천자 노릇을 대신하고도 성왕이 장성하자 신하의 자리로 물러난 그의 자세를 공자 이래 유가에서는 성인으로 우러러보았다.
주공의 시범은 주나라 이후 적장자 왕위 상속의 원칙을 확립한 계기였다. 상나라 왕실 세계를 보면 대부분 기간 동안 형제 상속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농업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현실적 힘이 그대로 반영되는 형제 상속에서 상징적 권위를 앞세우는 적장자 상속으로 바뀌면서 유가 정치사상의 표준이 될 봉건제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한나라 이후의 중화제국에서는 황제권이 유가사상에 입각한 이론적 전제성을 늘 가지고 있었지만, 신하들이 가진 현실적 힘과의 긴장관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도 언제나 질서의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한다"(君君臣臣)는 관계를 공자가 강조한 것은 이 원리를 전복시키려는 현실조건을 경계한 것이다. 임금은 신하의 현실적 힘을 묵살하지 않고 신하는 임금의 상징적 권위를 존중해야 양자가 함께 속한 체제가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원리를 살리기 위한 역대 왕조 초창기 황제들의 노력 중에 볼 만한 것들이 많다. 당 태종 때 오랜 심복 당인홍의 독직사건이 있었다. 사형이 판결되자 태종은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같은 처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투쟁을 통해 황제 자리에 오른 당 태종이었지만 국가가 신하들의 자발적 협조 없이 자기 마음대로만은 잘 운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제스처를 쓴 것이다. <정관정요>에는 군신 관계의 긴장감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생산적 방향으로 풀어나간 사례들이 많이 실려 있다.
후주의 신하였다가 동료들에게 추대되어 송 태조가 된 조광윤은 지난 날 대등한 권위를 누리던 옛 동료들을 모아놓고 은퇴를 권했다. 황제를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할 일이었더라도 자신이 그들과 다른 신분이 된 이제 황제와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던 그들에게는 사라져주는 것이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겼고 황제는 원로들이 사라진 조정에서 독존의 위엄을 누렸다.
명 태조는 공포정치를 통해 황제의 권위를 세웠다. 창업을 도운 공신 대다수가 몇 차례 옥사에 희생당했다. 황제권에 바로 다음가는 공신 집단의 권위를 물리적으로 해소하면서 황제의 절대 권력을 확립한 조치였다. 제국의 규모가 송나라에 비해서도 엄청나게 커지고 구조도 복잡해진 때문에 일도양단의 절대 권력을 추구하게 된 것이겠지만, 이 절대 권력은 명나라 통치체제에 머지 않아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조선은 한국에 처음 세워진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의 유교국가를 추구하느냐 하는 모색의 과정이 있었고, 중국에서 나타났던 여러 스타일이 검토되었을 것이다. 태조는 송 태조 정도를 모델로 했던 것 같다. 왕조 교체 필요성을 인식한 개혁파의 추대를 받은 태조는 유교 교양도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고려의 왕을 대신하는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생각했을 것이다.
태조의 아들 중 유일한 문관이었던 태종은 물론 태조보다는 유교국가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그 이념성보다 현실정치의 감각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태종에게는 명 태조가 모델이었다. 살벌한 숙청으로 공신 집단을 위축시키고 왕의 위엄을 세우는 방향이었다.
유교 교양을 깊이 체화한 세종은 관료 집단의 자발적 협조 분위기를 키워내는 당 태종의 스타일을 따라갔다. 조선 관료체제의 바탕은 이 때 만들어졌다. 이 바탕 위에서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하는" 분위기가 임진왜란 때까지 대략 지켜졌으나 불안 요소가 차츰 나타났다. 불안 요소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훈구세력과 척신세력이었지만, 거시적으로 더 중요한 불안 요소는 사림이었다. 훈구와 척신은 왕권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왕권과 거리를 가진 사림의 팽창은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사림을 "불안 요소"로 지적한다 해서 사림 개개인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림이 높은 도덕성을 보여준 것이 사실인데, 그 도덕적 권위 자체가 유교국가 체제에 구조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유교국가가 잘 운영되려면 임금에게 도덕적 권위가 모여야 하고 유능한 인물들이 관료집단에 최대한 편입되어야 한다. 국가체제와 거리를 둔 집단이 '사림'이란 이름으로 별개의 도덕적 권위를 누리는 상태가 일차적으로는 국가 기능의 저하를 보여주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국가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것이다.
사림 성장의 발단은 물론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않음"에 있었다. 세조에게 아무리 왕조에 큰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신하가 임금 몰아내는 꼴을 보인 것은 유교국가 이념을 치명적으로 해친 일이었다. 이로 인해 관료집단 안에서 훈구세력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척신세력과 사림세력이 번갈아 투입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세조 찬탈은 그 자체로도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훼손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소모적 도덕성 논쟁에 빠뜨리는 단초가 되었다.
16세기 전반의 사화 시대를 지나며 왕의 권위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사림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말기에 일어난 유교국가의 기형화 현상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고, 사림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왜란에 대한 조정과 의병의 대응 자세 차이 때문이었다. '천조(天朝)'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으로 왕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던 명나라가 그 말기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 것도 여기에 보탬이 되었다.
광해군(1608~22)이 정인홍(1535~1623)을 높이 떠받들고 의지한 것도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의병장으로도 크게 활약하고 즉위 전 불안한 위치의 광해군을 굳건히 지지한 정인홍은 임금이 의지할 정도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첫 사림 인사였다. 그는 의리에만 치중하며 경세를 소홀히 하는 사림의 폐단을 보여주며 광해군의 정치적 실패를 이끌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왕의 권위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것이 인조였다. 명분 없는 광해군 축출에 동의한 데서 시작해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억지 명분 때문에 두 차례 호란을 초래하고, 막상 적군이 쳐들어오기만 하면 그 명분마저 내던져버렸다. 그도 모잘라 세자를 제거함으로써 왕실에 정통성 문제까지 남겼다. (소현세자의 의문사를 인조가 묵인 내지 방조했으리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나는 인조를 주범으로 본다. 물론 단독범행은 아니겠지만, 그가 관여한 이상 다른 인물을 주범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송시열은 사림의 권위가 권력으로 변질되는 단계를 대표한 인물이었다. 지난 회에서 그가 파벌적 인물이었다는 논평을 남겼는데, 그에 대해 도덕적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교국가의 성격 변화에 관계된 하나의 정치적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것뿐이다.
송시열의 영도하에 형성된 노론이라는 집단에는 하나의 파벌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드러난 권력조직과 병립하는 또 하나의 감춰진 권력조직이 사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론, 남인 등 다른 당파도 그 영향을 받아 권력조직의 성격을 얼마간 띠게 되기도 하지만 200년간 하나의 조직으로서 일관성을 지킨 노론과 비교할 존재는 못 된다.
영국에서 잉글랜드 내전(1641-51)으로 왕권이 중간권력에게 제압당해 국가의 성격이 바뀐 것과 비슷한 하극상의 변화가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정치사상이 빈약하던 잉글랜드에서 의회를 근거로 권력구조의 변화가 자유롭게 전개된 것과 달리 고도의 유교 정치사상이 자리 잡고 있던 조선에서는 중간권력이 공식적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음성적 권력조직을 형성했다.
한 사회의 지식층 주류가 현실 변화에 대응하는 경세(經世)의 과제를 외면하고 형이상학적 과제에만 매달리는 퇴행적 풍조는 왜곡된 권력구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음성적 권력조직은 구성원들에게 원리주의적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가속되어 가는 세계적 변화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 분야에도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국가의 대응능력은 갈수록 더 떨어지고 경세의 과제는 후세에 실학파라 불리게 되는 일부 재야 학자들의 몫에 그쳤다.
숙종에서 정조까지 18세기 임금들은 왕조 초기의 임금들 못지 않은 능력과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국운을 되돌리지 못한 것은 맹자가 뭐라 하더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국가의 틀이 망가져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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