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4. 23:32




 


수요일에 아내와 함께 가려다가 때아닌 폭설 때문에 며칠 늦춰 혼자 가게 됐다. 그러고 보니 달랑 혼자 가 뵙는 것은 꽤 오랫만인데, 그럴싸하게 봐서 그런지 어머니도 덤덤하신 편 같다. 텔레비전 열심히 보고 계신 앞에 가서 얼굴을 보여드리니 "어, 너 왔구나." 당연히 올 놈 왔다는 듯이 도로 화면에 시선을 돌리신다. 가만히 옆에 서 있었더니 1분쯤 지난 후 생각났다는 듯이 옆 자리 할머니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씀하신다. "이놈이 내 아들이라우."

무슨 퀴즈 프로그램인데 한참 보다가 이번엔 내게 고개를 돌리고 "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연예인들이 아이들 데리고 나와서 노는 건데, 내가 봐도 취향에 안 맞으시다. 좀 더 보시라고 권해도 흥미가 잘 붙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텔레비전보다 불경이 더 좋으시죠?" 했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이신다.

창가의 전용석으로 모시고 와 반야심경부터 외웠다. 근래에는 독경도 노랫가락에 실으시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늘은 예전 낭송하시던 대로 담담한 방식이었다. 금강경을 읽기 위해 독경집을 가져올까 여쭈니 "아까 읽었다. 오늘은 얘기나 하자꾸나."

마침 원장님이 오니까 또 "이놈이 내 아들이라우." 몇째냐고 원장님이 물으니까 나를 돌아보며 "너 몇째냐?" 농담과 진담이 천연덕스럽게 어울려 판별하기 힘들다. 지금처럼 뻔히 아시는 질문도 아는 척 모르는 척 허허실실 수법이 몸에 배셨다. 내가 짐짓 고지식하게 손가락 셋까지 펼쳐보이며 "어머니, 제가 셋째입니다." 하니까 원장님을 돌아보며 "셋째래요." 내가 받은 질문을 대신 대답해 주시는 것처럼.

원장님이 "어제 오신 아드님은 몇째예요?" 하니까 정말 어리둥절해서 "어제 누가 왔나?" 하신다. 작은형이 왔던 모양인데, 이런 기억은 안 되시나보다. "둘째 아드님이 오셨잖아요. 둘째 아드님 이름이 뭐죠?" 원장님이 다시 묻는데, 얼른 생각이 안 나시는 듯, "나 몰라요." 셋째 아드님은 이름이 뭐예요?" 하니까 "이놈 이름은 알죠. 김기협. 너 김기협 맞지?"

이거 참... 어쩌다 이렇게 되셨나? 가까운 분들 중에는 작은형에 대한 어머니 편애가 지나쳐 문제가 될 지경이라고 걱정해 주는 분들까지 있었다. 내가 봐도 두 분 코드가 정말 잘 맞는다. 그런데 작은형 이름은 생각이 안 나고 내이름은 척척? 표정으로 보아 일부러 내게 아첨하시는 것도 아니다. 서양 속담이 맞나? "Out of sight, out of mind.(눈에 보여야 마음에도 보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보호자로서 내 역할을 인식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식들 직접 대하시는 데는 이름이 필요없다. 그런데 제3자에게 내 보호자가 누구다, 밝히기 위해서는 이름 석 자를 댈 필요가 있다. 3년 가까이 어머니의 대외관계를 내가 맡아 드리는 상황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에 "김기협" 석 자가 머리에 박혀 있으신 것 아닐지? 그렇다. 아까도 "기협이"라 하지 않고 "김기협"이라고 하셨다.

아무튼 잠깐 마주치는 틈에도 기억력에 자극을 주려 애쓰는 원장님, 참 철저한 분이다. 간간이 어머니 모습을 담은 사진을 메일로 보내주기도 하는데, 노인들을 잘 모시는 것 못지않게 가족들에게 요긴한 서비스다. 이따금 가서 몇 시간 모시고 있으면서 파악하기 힘든 생활 내용과 분위기를 알아보며 잘 지내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장님이 물러간 후 순옥이 내외와 전화 통화를 시켜 드렸다. 먼저 기훈이부터 통했는데, 아무리 설명해 드려도 정확히 파악이 안 되시는 듯 거듭 물으신다. "누구라구?" 그러나 막상 기훈이 목소리가 들리니까 그냥 직접 와 닿는 것 같다. 애매한 것을 얼렁뚱땅하시는 기색도 약간은 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더할 수 없이 분명하시다. 뒤이어 순옥이랑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친자식들 못지않게 정이 깊고 어머니를 잘 모셔 온 이들인데, 어머니가 자기네를 제대로 알아들으시는 말씀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기훈이가 병원으로 와 뵌 것이 1년이 되었고, 순옥이는 더 오래 되었다. 진즉 통화를 시켜드릴 걸.

순옥이를 수양딸 삼으신 것이 벌써 30년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느 절에서 만나셨다던가? 퇴직 전 몇 해 동안 자식들 다 떠난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다가 어머니의 조카(이종매의 아들) 기훈이랑 결혼했으니 수양딸이자 조카며느리인 셈. 기훈이는 조카이자 수양사위. 제주도에서 젖소 키우며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난 듯이 사는 이들 내외에게 어머니뿐만 아니라 나도 의지해서 지낸 세월이 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연전부터 순옥이가 육지에 나와 사느라고 둘이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안타깝다.

통화를 하시고 나니 그 사람들 생각이 떠오르시는지 한참 망연히 앉아 계시다가 불쑥 한 마디 하신다. "참 힘들다." 오래 앉아 계셔서 피곤하시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어머니, 방에 들어가 누우시는 것이 좋겠어요?" 묻는데 이 여사가 마침 곁에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늘 아드님 오신다는 말씀 듣고 아까까지 가급적 많이 누워 계시도록 했는데요?"

말하는 동안 어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이 여사를 쳐다보신다. 가히 뇌쇄적인 미소다. 이 여사가 어머니를 각별히 따른다고 원장님이 메일에서 이야기한 일이 있는데, 저런 미소 풍겨주는 할머니가 있다면 나라도 뿅갈 거다. 다른 간병인들도 어머니 살펴드리느라 수고 많으시다고 인사하면 박사 할머니 때문에 재미있다, 일하기가 즐겁다, 자연스러운 반응이 비슷하게 나온다. 평생 처세술 갖고 한 몫 하신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완전히 처세술의 달인이시다.

이 여사가 잠시 후 물러갈 때까지 빙긋이 웃음만 띄고 말씀이 없다가 불쑥 또 한 마디 하신다. "산다는 게 힘들어." 표정까지 처연해지신다. 몇 주일 전에도 이런 말씀을 한 번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옛날 기억을 더듬다가 그러셨던 것 같다. 순옥이 내외에게 더 잘해 주지 못하신 것이 괴롭게 느껴지신 것일까?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나보다. "어머니, 바람이라도 한 바퀴 쐬시겠어요?" 뜻밖의 대답이 나오신다. "걷지도 못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기실 줄 알았는데, 이것도 마음에 걸리시나보다. "어머니, 아들은 뒀다 뭐에 씁니까? 제가 밀어 드릴께요." 그러자 얼굴에 환한 웃음을 피우며 "그래? 그럼 호강 한 번 해볼까? 밀어다고!"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서쪽으로 꺾어 쭉 가면 복도 끝 전면이 유리창이고, 정원과 건너편 숲이 내다보인다. 거기서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셔서 모셔가면 오랫동안 앉아 계실 때도 있다. 오늘도 좋아하시는 것이, 피어오르는 봄빛이 느껴지시는 것 같다.

"어머니, 풀잎도 나뭇잎도 다시 살아나고 있네요." 하니까 같은 것을 생각하고 계셨던 듯이 바로 말씀하신다. "그래, 살았던 것은 죽고, 죽었던 것은..." 좀 가라앉기는 했어도 편안한 기분이 느껴진다.

"어머니, 떠나실 일이 걱정되시는 거예요?"

"아니, 걱정된달 것은 아니고..."

"어머니, 요즘 마음이 늘 편안해 보이세요."

건너편 숲을 바라보던 눈길을 내게 돌리고 말씀하신다. "그래, 고맙다. 네 덕분이다."

응대할 말씀이 생각나지 않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노랫가락 화법을 많이 쓰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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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춘추> 선공 15년(기원전 594)조의 "초세무"(初稅畝) 기사를 중국에서 조세제도가 틀을 갖춘 시점으로 흔히 파악한다. 그 400여 년 전 만들어진 주나라 봉건제도는 백성이 영주의 보호를 노동력으로 갚는 것이었는데, 이제 재물로 갚는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좌전>은 이 조치를 비판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임금이] 재산을 늘리더라도 곡식을 내가는 것이 힘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初 稅畝 非禮也 穀出不過藉 以豐財也]

노나라에서 재상 계평자가 같은 제도를 시행하려 할 때(기원전 483) 계평자의 가신으로 있던 제자 염구가 의견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베풀 때는 두텁게 하고, 섬길 때는 치우치지 않게 하고, 거둘 때는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예법의 원리를 등지고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한다면 설령 전부(田賦)를 행한다 하더라도 끝내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계손씨가 일을 올바르게 하려 한다면 주공의 전범을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자기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내 의견은 청해서 무얼 하겠는가?"

공자는 임금과 백성 사이가 물질적 거래 아닌 서로 돕는 정신으로 맺어지는 것을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미를 앞세운 관념이었지만, 실제적 효과도 가진 제도였다. 임금이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드는 상황을 공자는 경계했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돕는 사이라면 임금의 힘은 백성의 충성에만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관계가 물질적 거래가 되면 임금의 힘은 쌓아놓은 재물에 근거를 두게 된다. 임금이 백성보다 재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기 힘들 것이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춘추시대 말기에는 "물질적 거래"인 전부제도가 확장되고 있었다. 천자의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제후와 실력자들의 세력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백성의 의무를 노동력보다 재물로 거두는 것이 능률적인 제도였으므로 '부국강병'에 유리했다. 그리고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발달로 생산력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인신적 예속을 줄이는 전부제도에 대해 농민의 저항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능률보다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권력자가 재물을 쌓아놓기 시작하면 절제하기 힘들 것을 걱정했다.

이 시기에 확립된 전부제도가 중국 조세제도의 주종이 되었지만, 유교 이념은 합리성과 능률성을 추구하는 조세제도의 발전을 계속 억제했다. 양세법이나 일조편법 같은 세제 개혁이 당나라와 명나라 말기 혼란한 시대에 채택되었다는 사실에도 음미할 점이 있다. 재정이 어렵고 이념의 통제가 약한 시기에야 능률성 위주 세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조선조 최대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도 합리성과 능률성을 추구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수취 체제는 전세, 공물, 진상, 잡세, 잡역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최대한 통합해 단순화하는 목적으로 대동법이 추진되었다.

여러 수취 항목 중 가장 번거롭고 폐단이 많았던 공물 제도에 대해서는 16세기 초부터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중 공물 징수가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어서야 쌀로 대납하는 대공수미(代貢收米)가 겨우 임시로 시행될 만큼 수취 체제의 변경이 힘들었다. 유교국가의 이념에 걸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란 후 사회경제 조건이 크게 바뀐 사실이 확인되면서 수취 체제의 전면적 개편을 위한 대동법이 제안되었다.

왜란 때 출병한 명나라 장수들이 군수품 확보가 어려움을 불평할 만큼 당시의 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미비한 상태였다. 조선 전기의 농업생산력 발달이 상당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상업 발달을 억제하는 유교적 질서가 강고했던 것이다. 왜란으로 기존 질서가 무너지면서 억제되어 있던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수취 체제의 혼란으로 인해 능률성을 추구하는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1608년 경기도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장되는 데 꼬박 100년의 시간이 걸린 것만 보더라도 반대가 얼마나 끈질겼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 반대를 통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김집(1574~1656)은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은 예학자였는데, 그가 효종 초년 대동법 반대에 나선 것은 유교 원리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아버지인 예학의 태두 김장생(1548~1631)과 함께 서인, 특히 장차 노론으로 수렴될 계열의 상징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반대는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에 맞서 대동법을 추진한 대표적 인물이 김육(1580~1658)이었다. 김육은 서인 명문가 출신으로 인조 반정(1623) 후에야 관직에 나아가 당쟁에 관여하지 않고 실용적 정책에 노력을 기울였다. 병자호란 후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수레와 수차의 보급을 꾀하고 <구황촬요>, <벽온방> 등 민생에 요긴한 서적을 편찬, 간행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화폐와 역법 등 기술 분야 정책에 주력하다가 효종 즉위(1649) 후 정승에 오른 뒤 대동법 시행의 확대에 가장 큰 노력을 쏟았다.

1608년 경기도 시행 후 심한 논란에 막혀 1623년 강원도 시행 외에는 확대돠지 못하고 있던 대동법이 1651년 충청도, 1658~62년 전라도로 확산되어 전국 시행을 바라보게 된 데 김육의 역할이 컸다. 1649년 말의 대동법 논쟁에서 우의정이던 김육이 이조판서이던 김집에게 밀려 정승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후 다른 사정으로 김집을 지지하는 소위 산당(山黨)이 퇴진한 후 영의정을 맡자 충청도의 대동법 시행을 시작했다. 1654년 다시 영의정을 맡았을 때도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준비해 그가 죽은 직후 전라도 시행의 발판을 만들었다.

대동법은 그 후 함경도(1666), 경상도(1677), 황해도(1708)로 넓혀 전국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평안도에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어서 대동법이라는 이름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대동법의 시행방법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른 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핵심 원리는 세 가지였다. (1) 다양한 수취 항목을 통합한다. (2) 전세(田稅)의 형태로 하여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한다. (3) 봄과 가을에 1결 당 6말(실제로 5~8말)씩 나눠 징수한다.

대동법이 필요하게 된 것은 사회경제 상황의 변동 때문이었다. 원래의 세납 방법은 국가가 소민(小民)을 직접 파악한다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왜란을 겪고 나니 호구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호구보다 파악이 쉬운 농지를 부과 대상으로 하고 수취 방법을 단순화하는 대동법이 제기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유교 이념에 투철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가 끈질겼던 것이다.

왜란 후의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대응책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은 두 가지 조건이 겹쳐진 것이었다. 하나는 7년간의 전란에 의해 기존 질서가 흐트러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왜란 전부터 이미 누적되어 있던 사회경제 변화가 국초의 체제로는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신이 매우 쇠약한 상태에 와 있을 때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무너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충격에 따른 파괴를 수습해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노선이 산당(山黨)이었다면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질서를 빚어 나가자는 노선이 한당(漢黨)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산당의 흐름이 후에 노론의 주류로 흘러간 반면 인조 때의 한당은 뚜렷한 당파로 발전하지 못했고, 따라서 한당의 실용주의 노선은 조선 후기 정치에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

김육과 함께 한당의 대표적 인물이 최명길(1586~1647)이었다. 병자호란 때 주화파로 어려운 길을 걸었던 최명길은 투철한 실용주의자였다. 투항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침공 전에 충분한 대비를 해놓지 못한 이상 무작정 버티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화론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의 창시자로도 이름을 남겼는데, 현실을 이념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양명학의 관점이 정치노선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한당의 실용주의 노선이 옳았던 것처럼 보인다. 16세기에 시작된 전 지구적 경제구조 변동이 왜란 전부터 조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조선 사회의 생산력 수준은 무농억상(務農抑商)의 유교적 질서에 담기 어려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18세기가 되면 제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는 상업자본이 국가 질서를 와해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당의 원리주의 노선이 득세함으로써 조선이 적절한 발전의 길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 사람의 안일한 관점이다. 두 세대의 기간 동안 혹독한 전쟁을 몇 차례나 겪던 당시 사람의 눈에는 오랫동안 쌓여 온 문제보다 급격한 전란의 피해가 더 강렬하게 비쳐졌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전쟁 전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복고 노선이 수용하기에 시대 변화가 너무 컸다고 하는 것은 결과론일 뿐이지, 너무 큰지 어떤지 판별할 확고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를 지배한 것은 서인 산당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이념으로 현실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당의 실용주의에 비해 원리주의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노선이 운영된 실제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국가 기능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산당은 대동법에 반대했지만,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도 결국 전국적 시행에 이른 것은 그 현실적 필요성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대동법을 벗어나는 농민 수취가 늘어나 원래 의미를 잃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기제로 전락한 것은 공자가 걱정한 대로였다. 명분에 엄격하지 못한 제도는 힘을 가진 자에게로 굽어지기 마련이니까.

유교적 정치 원리는 경쟁이 격화되던 춘추전국시대에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국시대까지 현실 정치에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유교가 한나라가 안정된 후에 정치를 지배하게 된 것은 제국의 질서가 경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유교정치는 경쟁에 몰두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국내 질서 유지만으로 국가의 기능이 충분하던 상황을 벗어나는 세계적 변화의 한 모퉁이가 드러난 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외국과의 전쟁은 200여 년 동안 없었지만, 국외 상황은 계속 변해 가고 있었다. 전쟁 당시나 직후에는 배경 문제까지 인식하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변화에의 적응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가정 하에 조선 후기의 정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2010. 3. 10. 14:43
어제 저녁 오랜만에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에 초청받아 나갔다. 언론계 등 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매달 한 권씩 책을 읽고 저자를 초청해 토론을 벌이는 자리에 내가 <밖에서 본 한국사>를 업고 나간 것이다. 지난 연말부터 작업이 벅차 모든 초청을 사양하고 있는데, 이 모임은 너무 좋은 피드백 기회가 될 것 같아 예외로 한 것이다.

연락을 해준 김 선생이 몇 해 전 가까운 몇 분 모인 자리에서 마주친 일이 있는 분이고, 그 외에는 모두 초면이었다. 초면이라도 성화나마 미리 받들던 분은 '독설'로 일세를 풍미하는 고재열 기자. 이야기를 나누며 "역시..."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하는 내용보다 그 방식이 정말 감명깊은 것이었다. 강약, 완급의 조절이 자유자재한 그 재주는 타고난 품성과 깊은 연마가 합쳐진 작품 같다. 담론을 발전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재주다.

기대했던 대로 여러분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듣고 좋은 자극도 많이 받았다. 자기 분야의 첨단에서 각자 활약하기도 바쁜 분들이 이렇게 꾸준히 공부의 길을 함께 지켜나간다는 것부터 존경스러운 일이고, 다년간 그 길을 지키면서 각자의 내공도 든든해졌을 것은 물론, 토론 분위기도 매우 활달하다.

활달한 분위기 속에 화제가 천방지축으로 오가다가, 문득 어느 분이 물었다. 내가 '노빠'로 통하는 까닭이 뭐냐고. 글쎄, 이 양반은 작년 내내 내가 <프레시안>에 쓴 글을 별로 안 본 분인가보다, 생각하며 "제가 노빠 맞거든요?" 대답하고 보니 싱겁다. 그래서 덧붙였다. "노빠뿐이 아녜요. 저는 유빠이기도 하답니다." 이건 역시 자극성이 있다. 내 글을 빠삭하게 살펴본 바 있는 김 선생까지 뜻밖이란 표정을 짓는다.

어쩌다가 그런 이상한 게 되셨냐는 당연한 질문에 나는 사실대로 고지식하게 답변을 했는데, 온 좌중이 기막힌 우스개라도 들었다는 듯이 폭소를 터뜨린다. 그 고지식한 답변인즉, 유 선생의 따뜻한 인간성에 내가 반했다는 것이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유 선생의 능력만이 아니라 인품까지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조차도 '인간성'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 아주 광범하고도 강고한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언론의 보도만이 아니라 유 선생 자신의 글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유 선생의 모습에는 내가 크게 느끼는 그의 "따뜻한 인간성"이 잘 비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그의 인간성에 반하게 된 것은 98년 1년간 <삼성그룹사> 작업을 함께 하면서였다. 이제 기업사도 주례사 스타일을 벗어나 냉정한 반성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내 주장이 마침 IMF 사태 속에서 통한 덕분에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용역을 따냈는데, 역사학 쪽의 나랑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제학자로 독일에서 막 돌아온 유 선생이 걸렸다. 여담으로, 우리의 연구 결과물은 사장되고 말았다. 삼성 측이 그것을 좀 제대로 받아들였으면 지금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얘기를 얼마 전 유 선생과 나눈 일도 있다.

유 선생의 프로젝트 수행 능력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배려 자세에서 나는 더욱 큰 감명을 받았다. 함께 일한 배 선생, 송 선생도 나에게서보다 그에게서 더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1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내가 유 선생 만나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능력보다 그의 인품 때문이고, 그 인품의 다른 면보다 바닥에 깔린 따뜻함 때문이다. 뜨거운 사람은 아니다. 그 따뜻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두루 깔려 있어서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편일 것이다.

좌중의 여러분들이 유 선생의 '인간성' 얘기에 너무나 황당해 하는 기색이기에 떠오르는 대로 몇 주일 전 유 선생과 나누던 얘기 한 토막을 소개했다. 박정희 시대 고급관료들의 자세를 유 선생이 높이 평가한 얘기였다. 복지 분야 정책 발달 과정을 볼 때 계급이나 당파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자세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유 선생의 얘기는 그 시대를 부정적인 눈으로만 보던 내게는 일단 뜻밖이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면 비판보다 평가를 앞세우고자 하는 유 선생의 자세가 이 세상을 아끼는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깨달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얘기를 듣고는 좌중에서도 다시 생각해 볼 면이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았다.

정치인으로서 유 선생의 역할에 대해 막연한 기대는 많이 가지만, 확실하게 바라는 마음은 없다. 그의 정책노선을 얼마만큼 지지하게 될지 확실한 판단도 없다. 그냥 사람 자체가 허턱 좋을 뿐인지라,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안 들고 그저 구경할 뿐이다. 이러면 유빠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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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