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업 진행하면서 글읽기를 전보다 더 적극적이랄까, 새로운 맛으로 즐기는 구석이 생겼습니다. 종래의 글읽기 기준으로는 재미없이, 의무적으로 읽었을 만한 연구 성과를 읽으면서 상상 외로 알뜰한 맛을 울거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아주 좋은 읽을거리가 왔네요. 주문하려고 하는 것을 <프레시안>에서 주선해 주겠다고 하더니 민음사에서 김희진님이 보내줬습니다. 받자마자 50쪽가량 읽고 옆에 밀어 놓았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기억'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는 분이 그 이해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요리해 낸 책, 영양가도 특급이고 맛도 특급입니다. <해방일기>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들께 바탕으로 삼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 몇 권을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놓고 틈나는 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영역까지 다루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해방 후 상황을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세밀한 윤곽까지 잡아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윌리엄 스툭, <한국전쟁의 국제사>(푸른역사)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출판)
션즈화,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Posted by 문천


3-1운동을 계기로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심화되면서 ‘독립’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발전했다. 그 전에는 대한제국의 복벽을 바라는 생각이 독립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이제 대한민국을 내걸며 ‘민국’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일단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이 갈라진다. 왕정 한 가지는 철폐하더라도 그 밖의 측면에서는 망국 이전의 질서 체제를 최대한 복원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였고, 망국 이전과 전혀 다른 질서 체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진보주의였다.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지만 개항기 이후의 제반 조건 변화를 수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고, 진보주의는 의욕적이지만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전환기에는 양자 간의 절충을 통해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로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진행방법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진보주의자들에게 유력한 선택 대상이었다. 사회 현실을 면밀히 살피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민족 통치의 문제점 외에 자본주의 모순이 식민 통치 아래 뚜렷해지고 있었다. 산업노동자 인구가 크지 않은 상태에서 계급 분화가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농업 분야에서 그에 접근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가는 농장 경영 형태, 특히 일본인 지주의 농업 경영이 전통시대의 소작제도에 그런 대로 남아 있던 공동체 의식을 완전히 깨뜨렸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 국가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빚어낸다는,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함께 해결한다는 목적의식이 진보적 민족주의의 주류로 떠올랐다.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도 합리적인 입장이었다. 조선의 망국 원인이 일본의 야욕과 조선 자체의 약점 양쪽에 있다면 조선의 구체제를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조선의 약점을 고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이 길어지면서 구체제 복원의 꿈이 흐려져 가는 반면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은 더욱 짙어졌다.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식민 통치를 현실로 인정하는 추세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반면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화는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해외 독립운동에서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사회민주주의’가 유력한 표준으로 세워졌다.


이런 상황을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사회운동은 농민-노동자의 계급 각성운동이자 일제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운동에 의해 폭넓은 민중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 논자는 독립운동에서 내세운 독립 이유가, 한국의 유구한 독립 역사를 들고 그 때문에 한국은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소극적 감정적 방면에서 일보 나아가, 최대 다수의 민중의 행복을 향수하여야 한다는 보편적 이성적 논리로 전환되어 경제적 방면으로부터 관찰[철?]해나가게 되었다고 인식하였는데, 사회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한 방향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89쪽)


그런데 1920년대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자라남과 함께 그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큰 변수가 두드러지게 된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한국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소련이나 코민테른의 지침에 매인 활동 양상을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나는 쓰겠다.) 사회주의는 당시 한국에서 이상주의적 성격의 사상 조류였고 행동 양식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성공을 구체적 모델로 하고 그 지원과 지침에 따라 현실적 힘을 키우려는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일반적인 이상주의적 성격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전에(10월 5일) 소개한 아버지 일기에 나오는 “(좌익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이 이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련의 성공에서 ‘입증’된 ‘공식’에 얽매여 현실을 고압적으로 재단하는 추세다. 이 공식의 실행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고, 인민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궁극적 정당성에 대한 신앙 차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9월 29일) 분단이 정치‘꾼’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치‘꾼’이란 현실정치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올 동기는 오른쪽에도 있고 왼쪽에도 있다. 오른쪽에는 자기네 이익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고, 왼쪽에는 혁명의 확신 앞에 다른 모든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정치 상황을 고찰함에 있어서 좌익과 우익을 먼저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말하는 정치‘꾼’들은 극좌나 극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좌우의 구분보다 ‘꾼’들의 집단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극좌와 극우의 행태에는 공통점이 너무 많다. 그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자의 신념이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꾼’들의 이기적 행동을 현실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의미 있는 정치활동과 구분해서 보는 관점을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세워보고자 한다.


‘사이비(似而非)’가 ‘비(非)’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한 공자 말씀이 딱 들어맞는 대목 같다. 극우는 우익에게 독(毒)이었고 극좌는 좌익에게 독이었다. 좌익과 우익은 상호간의 긴장관계를 통해 정치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인데, 극좌와 극우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 생산적 긴장관계를 교란, 또는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사회주의 얘기를 꺼낸 것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첫 대면이 65년 전 오늘 개성에서였기 때문이니, 우익 얘기는 미뤄두고 좌익 쪽 얘기부터 하겠다.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최강의 실력자 박헌영과 해방 후 새로운 상황에서 떠오르는 별이던 김일성 사이의 관계는 향후 10년간 한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교육과 선전 속에 한국인들은 살아 왔지만, 1945년 당시의 김일성은 박헌영 같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박헌영이 좌익 내의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김일성은 백 명 안팎의 유격대를 이끌고 상황에 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온 현실 속의 지도자였다. 박헌영이 뛰어난 이론가로서, 순수한 혁명투쟁가로서, 정통 공산주의 지도력을 소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 반면 김일성은 항일투쟁가로서의 명망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신뢰를 모았다.


개성 회담 이후 박헌영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는 앞으로 진행 단계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박헌영 중심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체제를 파악하기 위해 소위 ‘8월 테제’를 한 차례 검토할 필요가 있다. 8월 19일 또는 20일에 박헌영이 작성하여 공산당 재건준비위에 제출했다가 9월 20일 조선공산당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이 테제가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준거가 되었다. 일간 8월 테제를 중심으로 해방 후 공산당의 움직임을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예상보다 빠른 일본 항복 소식에 김구는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고 한다. <백범일지>(배경식 풀고 보탬, 너머북스 펴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605-606쪽)


그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국내에 침투시켜 주요 지점에서 각종 공작을 전개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무전으로 연락하여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해 두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계획을 한번 실행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했으니, 진실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걱정할 일을 잊지 않는 김구의 지도자다운 냉철함에 탄복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에 우리 민족이 공헌한 바 없이 ‘주어진 해방’이었기에 자주독립의 길을 잘 찾지 못한 결과에 비추어보면 김구의 통탄에서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항복 시점에서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라는 표현은 좀 너무했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몇 달 아니라 몇 해의 시간이 더 있다 해서 우리가 일본 패퇴의 주역이 될 수 있었겠는가? 보조적이고 부수적인 역할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광복군이 그렇게 항쟁의 시간을 더 가진다면 그 동안 인민의 고통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일이란 말인가?


일본의 항복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민족의 역할이 충분치 못해 아쉽다면 그 시점부터라도 역할을 늘리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일이었다. 해방 시점에서 그때까지의 성적에 따라 상장 받을 사람들 상장 받고 끝나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지도자도 민중도 이제부터 할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다니, 일본인들이나 할 소리였다. 과장을 넘어 본질을 뒤집을 정도로 이상한 표현이다.


해방을 맞이하는 김구의 자세에서 파당적 입장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족의 역할이 작았음보다 임정의 역할, 한독당의 역할, 자신의 역할이 작았음을 아쉬워한 말로 보는 것이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일단 기뻐해 놓고 나서 할 일을 생각해야 할 텐데, 그 동안 준비해 온 광복군 제2지대의 작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만 아쉬워하는 것이다.


물론 더 큰 눈으로 본다면 임정과 한독당,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입장이 든든할수록 민족에 대한 공헌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공변된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민족을 앞세우는 입장이라면 일본의 항복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광복군의 작전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임정은 보다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 권한까지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김구 자신이 생각해도 임정은 개선장군 행세를 할 실적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본 항복 후의 상황에서도 임정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 하나가 일본군 포로 중 조선인 장병을 편입시키는 광복군 확대 시도였다.


8월 11일에 소개한 일반명령 1호의 한 조항에 “(만주를 제외한)중국, 대만과 북위 16도 이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장개석 장군에게 항복한다.”고 되어 있다. 장개석이 항복받은 백여만 일본군 중 조선인은 10만 정도로 추정되었다.


임정 수뇌부는 장개석 정부의 협조로 이 10만 병력을 넘겨받아 광복군으로 편성, 보무당당하게 귀국하고 싶었다. 그런 조직력만 과시할 수 있다면 미군과 소련군도 무시할 수 없고 국내의 어떤 반대세력도 감히 도전하지 못할 위세를 갖추게 될 것이었다.


이 시도는 몽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병준은 <사학연구> 제55-56합집호에 게재된 논문 “1945~4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내 조직과 활동”에 그 결말을 이렇게 적었다.


광복군의 일본군 내 한적사병 인수를 통한 확군과 잠편지대(暫編支隊) 설치 구상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연합국의 전후 한반도 처리방침에 따라 임시정부가 승인되지 않았고, 이 연장선에서 광복군 역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국민당 측도 자국 영토 내에서 타국의 군사 활동 내지 군대 육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중국 측의 이러한 광복군 처리 방침은 이미 1945년 말에 확정된 것이었다. 종전 직후 중국 측은 한인교포와 한적사병 처리 문제에 관한 법률(韓僑韓俘處理辦法)을 제정했다. (...)

즉 이 판법의 핵심은 첫째 일본 패망 이전 중국의 승인을 받은 광복군만을 승인한다. 둘째 한국교포와 한적사병은 모두 집중관리해 본국으로 송환한다. 셋째 한적사병의 편입 등을 통한 광복군의 확군 등은 금지한다는 점이었다. 중국 측이 이러한 조치를 내리게 된 주된 이유는 일본군 무장해제와 본국송환이라는 연합국의 일반적 전쟁포로 처리방침과 임정-광복군 불승인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으로 중국 내 한인들에 대한 적대의식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881-882쪽)


1932년 4월의 윤봉길 의거 이후 장개석은 김구를 내내 호의적으로 대했다. 김구가 귀국할 때도 20만 달러의 거액을 제공했다. 그 규모로 볼 때, 그리고 3명의 무전사 및 무전기와 함께 이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로 볼 때, 이것은 개인적 전별금이 아니라 정치자금이었다. 장개석은 김구와 임정이 고맙고 좋아서보다 이용가치가 있어서 우대한 것이다. 일본이 패퇴한 아시아에서 중국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기를 장개석은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장개석이 김구와 임정의 힘을 키워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포로를 빼돌린다는 것은 미-영-소 등 연합국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짓이었고, 항복 직전까지 (일부는 심지어 그 이후까지) 중국인을 괴롭혀 온 일본군 장병들을 그 혈통만을 이유로 풀어주는 것을 중국인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광복군은 만주군 장교 박정희를 포함해 수천 명의 포로를 편입시키는 형식까지 취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선인 포로 인수를 통한 광복군 확군 다음으로 임시정부가 시도한 것은 만주 거주 조선인 집단에 영향력을 키우려는 ‘만주계획’이었다. 김구는 8월 18일 임정 화북대표부를 통해 동북특파공작원 파견을 결정했고, 파견된 공작원 최태산은 9월 12일 심양에 임정 동북대표부를 설치했다. 동북대표부는 국민당 정부의 동북행영과 연명으로 이런 위압적인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정병준 위 논문 884쪽에서 재인용)


一. 동북지구에 있는 모든 한국민족은 현재의 각 결사 및 정치조직 등을 완전 해산한다. 동북 한교가 필요로 하는 결사 혹은 조직 및 기타 정치기구는 때에 따라 반드시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거쳐 중앙정부 당국의 공인을 얻은 후 그를 조직한다.

一. 민주적으로 조직된 동북 각 지구 한교민회를 위해선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경유해 중앙정부 당국의 인정을 얻은 후 조직하도록 준허한다.

一. 한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제외한 결사 혹은 기타 단체조직은 동북한교민의 행위를 대표하지 못한다.


국민당 정부와의 밀착관계를 이용해 만주의 조선인 집단을 임정 세력기반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소련군 점령 지역이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가지고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장개석에게 받은 20만 달러를 국내에 반입하지 않은 것이 미군정의 제약 때문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중국에서 계속 시도할 사업을 위해 남겨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내에 들어가서는 충분한 정치자금을 제공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귀국 무렵까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11월 하순까지 늦춰진 경위를 세밀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개인 자격의 귀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이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28쪽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이 늦어진 것은 잘 알려진 바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하는 임정 측과 개인자격으로서의 입국을 주장하는 미군정 측과의 갈등 탓이었다. 임정요인들 가운데 특히 ‘법통’을 내세우던 이들은 김구-조완구-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계열이었다. 학병 출신으로 8-15 뒤 상해에서 같은 고향 사람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 그의 비서를 지냈던 황용주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김원봉-장건상 같은 이들은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을 통해 대체로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는 현실에서 더구나 국내외 각 정파가 서로 자기 목소리를 외치는 현실 아래 중경임시정부가 전민족적 의사를 집약-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논리를 폈다.

(오늘 이야기에 집중적으로 이용한 논문을 보내준 정병준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