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군정장관의 10일 기자회견 발표문이 보도되었다. 핵심 부분만 발췌해 놓는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군정관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서 행정 각 방면에 있어서 절대의 지배력과 권위를 가지었다. 자천자임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 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或種의 보안대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률에 저촉치 아니하고 유치하나마 성의껏 행동을 하였다면 이제는 해체하고 각기 직장으로 돌아가 過冬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과 주택을 확보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국내에는 정당한 직업과 공정한 급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의 노무력은 반드시 過冬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괴뢰극의 막후에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 있어 어리석게도 조선정부의 정당한 행정사무의 일부분일지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맹연각성하여 현실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출을 당연 정지하여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아놀드 소장은 중부지방을 점령한 7사단 사단장이라서 군정장관에 임명된 것이지, 군정에 특기가 있었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발표문은 참 심했다. 13일자 <자유신문>은 이에 대한 각계 인물들의 논평을 게재했다. 여러 입장 인물들의 논평을 꽤 고르게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대개는 중립적 입장으로 이해되지만 더러 한민당 계열과 좌익 계열의 성향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중립적 입장으로 보이는 논평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 國民黨首 安在鴻 談

나는 이 발표를 읽고 措辭가 왕왕 정당성을 잃고 激越한 데 지나지 않은 느낌을 가졌다. 우리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하면서 일본제국주의 타도에 절대한 공헌을 하였고 조선민족해방 대업에도 최대한 원조를 하는 하나로써 그들에게 최대한 경의와 감사를 가지는 터이므로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싶으나 발표된 것이 사실이라면 심대한 유감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아놀드 장관의 진의를 들어 보는 것이 타당할 줄 안다. 한편으로는 8月 15日 이후 서울거리 각처에 나타난 삐라, 포스터 등에 허다한 야비한 문구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아놀드 씨에게 경고를 하는 동시에 조선인 자신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 朝鮮語學會 李克魯 談

점잖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언사가 저열하다는 것은 유감이다. 개인끼리도 잘못이 있으면 정당하게 타일르는 것이 옳다. 이 발표문이 가져오는 영향은 그만두고 장관 개인의 체면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 佛敎界 金法麟 談

최고의 정치책임자로 언론이나 정치운동에 대해서 이러한 비천한 언사를 한 것은 유감된 일이다. 정치활동 언론활동을 오히려 저지하는 결과가 나타날까 두려워 한다.


◊ 中央試驗所長 安東赫 談

이때까지의 정당의 활동은 미숙한 점이 없지도 않으나 어느 정당이고 고의의 야심 야망을 가지고 행동했다고 보는 것은 가혹하다.

정치적 조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방법에 있어서 부적당한 조치가 있을 수는 있으나 나라를 근심하고 나라를 세우려는 숙의은 분명하다. 군정당국도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여 공정한 다수의 여론을 경청하여 처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天主敎 盧主敎 談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今朝 귀임한 까닭에 게재된 발표를 보지 못했습니다. 풍문으로 듣기는 군정하에는 다른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로 게재되었더라고 했는데 내용에 그렇게 온당치 않은 문구가 많았으면 실로 유감된 일이올시다.

외국과 사물을 처리할 때는 항상 외국어라는 개재물이 있기 때문에 감정과 의사의 표현이 완전치 못하게 되는데 이 장관의 발표도 번역이 잘못되지 않았을까요.


◊ 朝鮮基督敎合同敎團 任英彬 牧師 談

나도 오늘 아침 신문에서 장관의 발표문을 읽고 매우 유감스럽게 여겼습니다. 내용은 저촉할 바가 아닌 줄로 압니다마는 남의 인격을 모욕하는 어구가 많은 것은 조선사람으로는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天文學者 李源喆 談

제가 연구하는 범위 외의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마는 괴뢰극이니 사기한이니 하는 문자 이외에는 얼마든지 좋은 문구가 있을 줄로 압니다. 이는 염두에도 생각치 못할 사실이외다.


◊ 辯護士 趙鎭滿 談

문제의 발표는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이라 하니 公事文書 중에 가장 정중하고 평정하며 온아하고 위엄 있는 문언을 쓸 법령의 일종이다.

쉽게 말하면 점잖은 어린이 점잖게 타이르는 훈계 말씀이라 일반민중이 비열하다고 보며 감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문언을 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로 피하여 왔으며 또 피해야 할 것이다. 근래 나치법령 중에 국민의 감정을 선동시키기에 흡흡하여 타당치 못한 문서를 쓴 실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추종할 선례가 못된다. 破廉恥 至極한 강도살인자에게 대한 유죄판결문조차 비열한 용어비유를 삼가왔으며 또 삼가여야 할 것은 우리 법률가의 상식이어늘 하물며 일반민중행동의 준칙이 될 법령의 일이요. 문제의 발표는 군정장관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통틀어 고백한 솔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용어 그 비유는 우리의 상식에 벗어나는 혐의가 없지 않다.

이러한 용어 이러한 비유를 쓰지 않고도 넉넉히 소기한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를 理路整然하고 점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平正’ 두자는 우리 일상생활의 기준이 될 뿐 아니라 또 爲文의 준칙이다. 군정에 발표된 一介 武弁의 문서라 하여 관용할 수 있을까 심히 의심된다.

발표가 요구한 데 대하여는 상당한 논의가 있을 만한 것이요 우리 법률가로서 소견도 있지만 다음 적당한 기회로 민다.


◊ YMCA 具滋玉 談

우리가 서로 단합을 못하고 찧고 까불어서 결국 이런 말을 듣게 된 듯한데 하여간 유감된 일이라 하겠다. 모쪼록 자유로이 건국사업에 열심히 일을 하여 나가면 자연히 이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또 번역관계로 문자상 다소의 착오가 생긴 지도 모르겠다.


◊ 韓美協會長 李勳求 談

군정장관의 원문을 보고 싶을 만큼 이번 발표의 내용은 유감되는 점이 많다 하겠다. 장관 자신이 그러한 원문을 집필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혹시 번역이 잘못되지나 않았나 한다. 하여간 그들은 우리들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최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니까 심금을 서로 울릴 수 있을 만큼 이곳 사정을 잘 이해시키고 서로 협조해서 그러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同德女學校長 趙東植 談

교육자인 나는 불편부당임을 먼저 말한다. 연합군이 우리 해방을 위하여 힘써 온 것은 감사하며 또한 이번 조선에 군정을 시행한 것도 우리 정부의 성립을 도웁기 위한 것으로 믿음으로 거듭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살펴 볼 때에 지도층에 있는 각 정당이 타당 타도를 위하여 비열한 수단으로 임하는 당이 있음을 볼 때에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그럼으로 나는 금일의 아놀드 장관의 성명을 읽고 군정장관에게 다음의 한마디를 충고하고 싶다. 즉 장관은 조선을 위하는 고마운 입장에서 어떠한 당파 혹은 어떠한 개인 또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주공정한 비판과 조밀한 조사에 의하여 행위하여 주기 바란다.


◊ 歐美學習 李重熙 談

군정장관으로서의 문구로 보아 좀 과도한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원만하고 정중한 언사가 있을 뻔도 한 일이었다. 이 문제와는 틀리나 가로에서 방황하는 민중이 하루바삐 집에 들어가서 그 직장을 지키면 자연 군정청에서도 우리를 신용하게 되고 이러한 불미한 발표문도 없으리라고 믿는다.


한민당 입장으로 보이는 논평은 아놀드의 망언의 원인이 건준과 인공의 잘못에 있다는 물귀신 작전을 특징으로 한다. 다만 김병로와 소완규의 논평은 중립에 가까운 것이어서 김성수와 임영신의 철저한 잡아떼기와는 차이가 있다. 이 시점에서 한민당의 스펙트럼이 아직 주류 중심으로 좁혀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 韓國民主黨 金炳魯 談

일부 신문업자에게 책임이 있을지 모르나 사회의 공기인 소중한 우리사회의 일반 신문을 가리켜서 우미경솔 운운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

여러분 신문뿐 아니라 나로써도 매우 섭섭한 일이다. 사기한이란 말은 과도한 말인 듯하나 이러한 말을 듣게 된 원인이 那邊에 있는가 먼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이런 저런 말을 듣게 된 것은 매우 유감된 사실이라 하겠다.

각기 自重加餐하여 앞으로 그네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저열한 언사를 내지 않도록 함이 선결문제이다.


◊ 軍政廳顧問 金性洙 談

신문에 게재된 군정장관의 발표문을 채 읽지 못했음으로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고문관이 된 우리로서는 그동안 1차 회담이 있었고 그때 미가라든지 기타 다른 문제에 관해서 회담을 했을 뿐 이번 문제는 전연 발언되지 않았음으로 그 시비를 말할 수 없다.


◊ 女子國民黨 任永信 談

신문을 통하여 장관의 발표문을 읽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발표문을 하게까지 된 동기를 오히려 나는 반문하고자 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군정장관으로서 왜 그러한 발표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발표의 형식이 다소 과격한 감정적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발표가 있었다는 것만 같지 못할 줄 압니다. 이러한 발표를 볼 때에 나 자신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달았으며 우리는 피차 자중해야만 할 줄 압니다.


◊ 町總代代表 蘇完奎 談

적어도 책임자인 대미국군정장관으로서의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에 있어 과격하다고 본다. 더구나 신문기자에 대하여 우매이니 하는 말은 천만부당한 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呂運亨 氏는 좌우간 군정장관의 고문인데도 불구하고 이분을 지적하여 저열한 문구로 운운한 것은 이해키 어려운 점이라 하겠다.


직설적인 분노 표명은 좌익 쪽 논설로 보인다.


◊ 文建委員長 林和 談

놀라운 글이다. 세계대국 가운데 일국의 대변자의 담화로서 믿기 어려운 저열한 글이다. 근간 가두에 나 붙었든 저열한 삐라에서도 우리는 이만치 저열한 예를 본 일이 없다. 나는 이 글이 아놀드 장군 자신의 손으로 된 것이라고는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카이로선언과 하지장군의 선언에서 우리의 정치적 자유와 독립이 보장되어 있고 조선의 政體는 우리 인민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미국을 위시한 모든 민주주의국가의 정치적 상식이 되어 있다.

우리 인민의 의사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그것을 우리 인민의 정부라고 생각할 때에 여기에 간섭할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또 민주주의의 정치원칙이다. 비록 우리를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해방해 준 미국과 소련일 지라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카이로 선언과 하지장군의 언명이 우리의 이러한 의견과 결코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 않는다. 거듭 말하거니와 인민공화국에 대한 발언권은 우리 인민의 자유의사에서만 존재한다.


◊ 評論家 李源朝 談

인민공화국의 찬부는 우리 인민의 자유의사로 결정될 것이고 어떠한 외부세력이나 지시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데모크라시의 방법인 때문에서다. 연합국은 우리 자주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앞으로 그러할 것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감사와 신뢰의 念에는 추호도 변동이 없다. 그러나 이번 아少將의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로 보면 우리가 신뢰하고 희망하는 정도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만약 인민의 의사로 결정된 인민공화국을 이렇게까지 모욕하고 능멸한다면 이것은 나을까. 각 정당에까지 간섭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문을 통하여 모욕적 언사는 단순한 동족애만으로서도 앉아 듣기에 불쾌하다. 우리가 신뢰하는 군정장관의 □기가 결코 이러하지 않을 것을 믿음으로 이것은 혹시 오해가 아닌가 의심한다.

하여간 군정관에게 요청할 것은 광범한 언로를 열어 가장 조선을 사랑한 지도여론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랄 따름이다.


인공 인민위원회는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昨日 아놀드 군정장관의 발표는 우리에게 대한 몰이해이며 조선민족에게 대한 모욕이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조선인 자신의 비열한 자기모독과 왜곡된 보고에 기인한 것임을 생각할 때 민족적 치욕을 느끼며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며 조선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국제조약에 근거를 둘 뿐 아니라 우리의 정당한 권리이며 신성한 의무이다. 이것은 군정과 절대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군 행정을 방해하려는 의사는 우리에게 추호도 없다는 것을 明言한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조선에 해방의 길을 열어 준 연합군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든지 감사하여 마지않으며 더구나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조선에 주둔한 미·소 양군의 은혜가 막대함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다. 우리는 38도라는 부자연한 장벽으로 생긴 남북의 차별을 전연 무시한다. 38도 이남의 조선정부 운운하지만 조선의 정부는 전조선의 정부이어야 하며 조선의 문제는 전체로서 제기되고 해결되어야 하며 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오직 조선민족 자신의 손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천이니 참칭이니 연극이니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오, 조선인 자신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적 능력을 표명함에 불과하다.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미군 상륙 이전의 기존사실이며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1946年 3月 1日을 기하여 소집되는 것은 제1차 인민대표대회의 결의에 의하는 것이다. 신국가가 건설되려 할 때 인민의 총의를 모아야 하는 것은 국제헌장의 정신이며 규정이다. 이를 위하여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집이 당연한 것이며 또한 최신의 방도라고 확신한다. 자유는 인민의 신성한 권리의 주장이며 행사이다.

일본제국주의의 기구를 그대로 殘置하며 일본제국주의 赤狗輩의 跳梁을 허용하면서 심지어는 일본제국주의 군경의 무장이 해제되지 못한 이때에 조선인에게 직장으로 돌아가라든가 물가의 조절이 없이 직장에서 過冬 준비를 하라든가 하는 것은 緣木求魚에 不外하다. 이러한 태도와 방법으로 조선 문제에 임한다면 군정당국은 상당한 시련에 봉착할 것이다. 조선의 실정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조사와 정확한 보고를 기초로 한 공정한 판단이 있기를 충고하여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안재홍의 논평에서 “서울거리 각처에 나타난 삐라, 포스터 등에 허다한 야비한 문구”라 한 것과 인공 담화에 “조선인 자신의 비열한 자기모독과 왜곡된 보고”라 한 것이 무엇일까. 건준과 인공에 대한 지독한 비방 선전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놀드의 저열한 표현의 배경이 되었다면 건준과 인공의 오류 지적을 넘어서는 원색적 비방이었던 모양이다.


누가 그런 흑색선전을 펼치고 있었을까. 그 시점까지 발표된 공식 문서 중 가장 저열한 표현으로 건준을 비방한 것이 9월 8일 한민당 발기인 일동 명의의 성명서였다. 한민당의 정책노선에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그 어떤 정책의 잘못보다도 파렴치한 전술의 채용이 한국 정치에 더 큰 폐해를 남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폐해가 지금까지도 남아있지 않은가.


Posted by 문천
이번 작업 진행하면서 글읽기를 전보다 더 적극적이랄까, 새로운 맛으로 즐기는 구석이 생겼습니다. 종래의 글읽기 기준으로는 재미없이, 의무적으로 읽었을 만한 연구 성과를 읽으면서 상상 외로 알뜰한 맛을 울거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아주 좋은 읽을거리가 왔네요. 주문하려고 하는 것을 <프레시안>에서 주선해 주겠다고 하더니 민음사에서 김희진님이 보내줬습니다. 받자마자 50쪽가량 읽고 옆에 밀어 놓았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기억'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는 분이 그 이해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억을 요리해 낸 책, 영양가도 특급이고 맛도 특급입니다. <해방일기>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들께 바탕으로 삼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 몇 권을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놓고 틈나는 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영역까지 다루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해방 후 상황을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세밀한 윤곽까지 잡아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윌리엄 스툭, <한국전쟁의 국제사>(푸른역사)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출판)
션즈화,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선인)

Posted by 문천


3-1운동을 계기로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심화되면서 ‘독립’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발전했다. 그 전에는 대한제국의 복벽을 바라는 생각이 독립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이제 대한민국을 내걸며 ‘민국’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일단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이 갈라진다. 왕정 한 가지는 철폐하더라도 그 밖의 측면에서는 망국 이전의 질서 체제를 최대한 복원하려는 것이 보수주의였고, 망국 이전과 전혀 다른 질서 체제를 도입하려는 것이 진보주의였다.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지만 개항기 이후의 제반 조건 변화를 수용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었고, 진보주의는 의욕적이지만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전환기에는 양자 간의 절충을 통해 점진적, 단계적으로 진로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진행방법이다.


사회주의가 당시 진보주의자들에게 유력한 선택 대상이었다. 사회 현실을 면밀히 살피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민족 통치의 문제점 외에 자본주의 모순이 식민 통치 아래 뚜렷해지고 있었다. 산업노동자 인구가 크지 않은 상태에서 계급 분화가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농업 분야에서 그에 접근하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가는 농장 경영 형태, 특히 일본인 지주의 농업 경영이 전통시대의 소작제도에 그런 대로 남아 있던 공동체 의식을 완전히 깨뜨렸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 국가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빚어낸다는,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함께 해결한다는 목적의식이 진보적 민족주의의 주류로 떠올랐다.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도 합리적인 입장이었다. 조선의 망국 원인이 일본의 야욕과 조선 자체의 약점 양쪽에 있다면 조선의 구체제를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조선의 약점을 고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이 길어지면서 구체제 복원의 꿈이 흐려져 가는 반면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은 더욱 짙어졌다.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식민 통치를 현실로 인정하는 추세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 반면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화는 체제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해외 독립운동에서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의미의 ‘사회민주주의’가 유력한 표준으로 세워졌다.


이런 상황을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사회운동은 농민-노동자의 계급 각성운동이자 일제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운동에 의해 폭넓은 민중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 논자는 독립운동에서 내세운 독립 이유가, 한국의 유구한 독립 역사를 들고 그 때문에 한국은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소극적 감정적 방면에서 일보 나아가, 최대 다수의 민중의 행복을 향수하여야 한다는 보편적 이성적 논리로 전환되어 경제적 방면으로부터 관찰[철?]해나가게 되었다고 인식하였는데, 사회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중요한 방향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89쪽)


그런데 1920년대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자라남과 함께 그 안에서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큰 변수가 두드러지게 된다.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한국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소련이나 코민테른의 지침에 매인 활동 양상을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나는 쓰겠다.) 사회주의는 당시 한국에서 이상주의적 성격의 사상 조류였고 행동 양식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성공을 구체적 모델로 하고 그 지원과 지침에 따라 현실적 힘을 키우려는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일반적인 이상주의적 성격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전에(10월 5일) 소개한 아버지 일기에 나오는 “(좌익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이 이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련의 성공에서 ‘입증’된 ‘공식’에 얽매여 현실을 고압적으로 재단하는 추세다. 이 공식의 실행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고, 인민의 희생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궁극적 정당성에 대한 신앙 차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주에(9월 29일) 분단이 정치‘꾼’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치‘꾼’이란 현실정치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올 동기는 오른쪽에도 있고 왼쪽에도 있다. 오른쪽에는 자기네 이익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광분하는 사람들이 있고, 왼쪽에는 혁명의 확신 앞에 다른 모든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정치 상황을 고찰함에 있어서 좌익과 우익을 먼저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말하는 정치‘꾼’들은 극좌나 극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좌우의 구분보다 ‘꾼’들의 집단을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극좌와 극우의 행태에는 공통점이 너무 많다. 그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자의 신념이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꾼’들의 이기적 행동을 현실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의미 있는 정치활동과 구분해서 보는 관점을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세워보고자 한다.


‘사이비(似而非)’가 ‘비(非)’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한 공자 말씀이 딱 들어맞는 대목 같다. 극우는 우익에게 독(毒)이었고 극좌는 좌익에게 독이었다. 좌익과 우익은 상호간의 긴장관계를 통해 정치의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인데, 극좌와 극우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 생산적 긴장관계를 교란, 또는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사회주의 얘기를 꺼낸 것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첫 대면이 65년 전 오늘 개성에서였기 때문이니, 우익 얘기는 미뤄두고 좌익 쪽 얘기부터 하겠다.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최강의 실력자 박헌영과 해방 후 새로운 상황에서 떠오르는 별이던 김일성 사이의 관계는 향후 10년간 한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교육과 선전 속에 한국인들은 살아 왔지만, 1945년 당시의 김일성은 박헌영 같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박헌영이 좌익 내의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김일성은 백 명 안팎의 유격대를 이끌고 상황에 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온 현실 속의 지도자였다. 박헌영이 뛰어난 이론가로서, 순수한 혁명투쟁가로서, 정통 공산주의 지도력을 소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 반면 김일성은 항일투쟁가로서의 명망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신뢰를 모았다.


개성 회담 이후 박헌영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는 앞으로 진행 단계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박헌영 중심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체제를 파악하기 위해 소위 ‘8월 테제’를 한 차례 검토할 필요가 있다. 8월 19일 또는 20일에 박헌영이 작성하여 공산당 재건준비위에 제출했다가 9월 20일 조선공산당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이 테제가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준거가 되었다. 일간 8월 테제를 중심으로 해방 후 공산당의 움직임을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