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당은 9월 8일의 발기인 성명서에서 건준과 인공에 극렬한 비난과 비방을 퍼부은 이래 인공 타도를 지상과제로 삼았다. 한민당의 당시 총무 조병옥이 1959년에 낸 회고록에서도 건준과 인공을 거세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사업이었다고 밝혔다 한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67쪽) 서중석은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이 한민당에게 미군 진주 1개월 만에 쟁취한 최초의 개가였으며, 이 망언의 문투가 9월 8일 한민당 성명서와 흡사한 점으로 보아 양자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같은 책 259쪽)


한민당의 건준-인공 비난에는 애매모호한 도덕적 내용들도 있지만, 비교적 구체적인 것은 일본인의 사주에 따른 친일파의 획책이라는 주장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공산주의자의 망동이라는 주장이다.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데도 이런 모순된 주장을 한 것은 “논리고 나발이고” 하는 남한 극우파의 선구자답기도 하고, 자본가 집단답게 노이즈 마케팅 기법을 선진적으로 도입한 것 같기도 하다.


소련의 지령까지는 아니더라도 건준-인공의 주도권을 좌익이 장악한 것은 사실이므로 공산주의자의 망동이란 주장은 그렇다 치고, 일본인의 사주 운운 한 것은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에게 치안 유지 부탁을 받은 사실을 빌미로 삼은 것 같다. 한민당의 이 주장을 아놀드 등 군정 당국자들이 받아들인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서중석은 그들이 정말로 곧이들은 것이 아니라 정략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 추측했다. (같은 책 268쪽)


건준-인공을 적대하는 명분을 한민당은 임정 추대로 내세웠다. 임정 추대는 한민당만이 아니라 국민당을 이끌던 안재홍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임정을 대하는 한민당과 국민당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민당은 ‘임정 절대주의’였다. 10월 5일 여러 정당 사람들이 모여 대동단결 방안을 논의한 모임이 있었는데 한민당 총무 백관수는 그 날 중에 성명을 내어 인공 해소를 전제로 참석했을 뿐이며 그 전제가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그 회의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10월 19일에도 정당통일운동의 모임 초청에 한민당만이 불응하면서 수석총무 송진우가 임정을 절대 지지한다는 전제 없는 회담에는 참석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해당 날자 신문) 임정 절대 지지를 기화로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안재홍은 임정을 그렇게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8월 16일 건준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임정 추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건준과 임정이 협력할 수 있는 관계로 본 것이다. 임정을 뼈대로 과도정부를 세우더라도 중경의 임정 그대로는 안 될 것이니, 그를 보완하는 역할을 건준이 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9월 초 건준이 단독으로 인공을 수립하려 하자 건준을 떠난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절대화해서 다른 가치들을 억누르고 배제한다면 좋은 길이 될 수 없다. 흔히 ‘~주의’라는 말이 이런 현상을 보여준다. ‘권위’는 사회 질서를 위해 좋은 가치를 가진 것이지만 ‘권위주의’는 곤란하다. ‘국가’와 ‘국가주의’도 그렇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좋은 점을 기리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완전무결한 사람처럼 무조건 떠받드는 데는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한민당이 임정을 떠받드는 데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민당에게는 돈이 있었고, 미군정을 구워삶을 재간이 있었다. 그러나 인민의 지지를 모을 명분이 없었다. 한민당 주류는 식민지시대의 사회경제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고, 그 안에서 자기네 위치만 일본인들이 비운 자리를 채우며 상향조정되기를 바랐다. 당시의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인기를 끌 수 없는 노선이었다.


식민지시대의 한국인은 전체적으로 일본인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중에도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누리는 소수의 계층이 있었다. 상대적 우위의 계층은 체제 변화를 꺼릴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이 계층에서는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체제의 공정성과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제 원리에 입각한 안정된 민족국가 건설을 원했다. 도입하고 싶어 하는 사회주의 원리의 범위와 비중에 다소의 편차가 있었지만, 합의 범위에 비해 이 편차는 작은 것이어서 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조정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중도파의 기반이었고, 재산 수준과 교육 수준이 낮은 대다수 민중도 더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이 정도의 체제 변화에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대적 우위 정도가 아니라 식민지 상황에서 오히려 특혜와 특권을 누린 친일파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일체의 사회주의 원리에 반대했다. 제대로 된 민족국가가 이뤄진다면 특혜와 특권의 유지는커녕 처벌과 탄압의 위험에 처할 이 집단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도 등질 용의가 있었다. 이 집단이 극우파의 핵심이었다.


‘중산층’이라고 부를 만한 상대적 우위 계층과 친일파 집단 사이의 경계는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중산층 구성원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면 극우파에 동조할 수 있었고,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면 중도파를 지지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난 기쁨이 사회를 휩쓴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는 중산층 구성원들도 상당한 폭의 체제 변화를 기대하며 중도파 입장에서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친일파 중심의 극우파에 동조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극우 노선의 한민당 주류는 사회주의 원리를 포함하는 정강-정책을 내세워 민심에 영합하는 시늉을 하면서 임정 절대 지지를 표방했다.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현혹되어 한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은 친일파 배제와 처단을 주장하되, 그 범위를 최소화함으로써 민족의 통합 역량을 최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친일의 혐의가 다소 있는 사람들이라도 출범 당시 한민당이 표방한 노선이라면 함께 하고자 한 것이었다.


1년 후 토지정책 등을 놓고 한민당 주류가 애초 표방한 노선을 팽개치며 극우 본색을 드러내자 당의 와해에 가까운 대거 탈당 사태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동안에 상당한 범위의 중산층이 극심한 혼란에 불안감을 느끼고 한민당에 동조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기반을 확장할 시간을 번 셈이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임정 요인들이 귀국한 뒤에는 한민당의 ‘절대 지지’에도 진정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된다. 임정의 귀국이 늦어지는 만큼 그 점에 있어서도 한민당이 시간을 번 셈이다. 임정 귀국이 왜 그렇게 늦어졌던 것인가?


11월 4일 임정 요원들은 중경 출발을 앞두고 장개석의 송별연을 받고 있었다.


과거 8년간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온 한국임시정부는 5일 중경 발 귀국하기로 되었는데 蔣介石 主席은 4일 임시정부주석 金九이하 수뇌부를 초청하여 송별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격려 연설을 하였다.

“조선이 독립치 못하게 되면 중국의 독립도 완성치 못하며 동아 及 세계의 평화도 확보치 못할 것이다. 全 東亞 民族의 독립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조선의 혁명가는 이 역사적 사명 완수에 전력을 다할 것을 우리들은 희망한다. 또 우리 國民黨도 역시 조선독립에 전력을 다하여 원조할 터이다.”

그런데 金九, 外務部長 趙素昻, 宣傳部長 嚴恒燮 외 30명의 임시정부요인은 5일 상오 7시 수송기 2기에 분승하고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로 가서 다시 미국기에 바꾸어 탄 후 경성으로 향할 예정이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0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 일행은 11월 5일 상해로 옮기지만, 거기서도 보름 이상 지체하다가 김구 등 1진이 11월 23일에, 그리고 김원봉 등 2진이 12월 2일에 귀국하게 된다. 임정 귀국의 지연이 미군의 비협조 때문이라고 설명되는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광복군 확장 시도, 장개석과의 협력관계 발전 등 임정이 중요시한 사업을 위해 스스로 귀국을 늦춘 측면도 꽤 있었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
재작년 여름에 맡아 작년 가을에 번역을 끝내주기까지도 제 작업 일정에 밀려 시간을 많이 끌었었는데, 그 후에는 돌베개와 조성웅 선생의 일정에 밀려 이제야 나왔군요.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만족도는 매우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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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중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일반의 긴장과 주의를 환기시켜 오던 민정장관 프레스콧 대좌의 방송은 30일 오후 7시 20분부터 10분 동안 서울 중앙방송국으로부터 방송되었는데 일반이 다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라디오 앞에 귀를 기울였던 우리들에게 결국 들려 온 것은 이 날 부로 발표되는 일반법령 제19호의 설명이었다. 이 법령을 발표하게 된 이유는 조선이 매우 경제상으로 치안상으로 위기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1) 노동자의 보호 (2) 야미물가의 취체 (3) 공중의 안녕 질서 (4) 언론자유 출판자유를 위한 각 신문기관의 등록 등의 조항을 내세운 것이다.

(...) 미국은 조선에 주둔 하자마자 즉시 일본이 전쟁 수행을 위하여 조선이 기근 쇠약해지기까지 조선에서 식량 기타 생활필수품을 고갈시킨 사실을 발견하였다. 조선 안의 소비품생산은 거의 정지되었다. 관청공금은 전반적으로 私消되어 있다. 통화는 고의적으로 팽창시켰다. 미군은 즉시 치안을 유지하고 조선인의 복리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압수한 재산은 조선을 위하여 보관되어 있고 기근이 있는 지방에는 식량을 운반 보급하였다.

(...) 조선의 재원은 다년간 일본의 착취를 당했고 조선인은 압박을 받아 부유하고 진취적인 민족이 향락하는 행복한 생활을 못해 왔다. 그리고 이 겨울에 당면할 광범위의 영양부족 질병 기타 고난을 방지할만한 물품을 조선인의 손으로 산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체에서는 조선인의 부를 독점하자는 생각을 갖고 노동자로 하여금 직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며 학동으로 하여금 복교치 못하게 하며 농부로 하여금 자기네의 소출을 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이러한 형편이 조선 안에 비상사태를 재래하게 되었다. 조선인의 복리를 보장하고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국내에 있는 공장과 원료와 노무자를 적당히 이용한다면 이러한 곤란은 극복하리라고 믿는다. 그런고로 대중에게 유해한 모든 조건을 배제하기 위하여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비상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잠정적 수단으로 이 필요를 느끼지 않는 때는 원상회복을 시키려 한다.

(하략)

매일신보 1945년 11월 01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월 30일 ‘국가적 비상시기 선언’이 미군정 법령 19호로 나온 것은 군정 당국자들이 군정 시행의 어려움을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인식한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려움을 느끼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의 아이큐를 비롯해 미군정 당국자들의 자질과 태도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느끼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문제로만 볼 일이 아니다. 도쿄의 맥아더는 하지와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교양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극동에서 일으킨 문제는 하지가 한반도에서 일으킨 문제와 근본적으로 같은 틀이었다. 미국 군부의 일반적 특성에서 생각할 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의 군인정신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구호의 하나가 “하면 된다(Can Do)”이다. 좀 어설프게나마 한국 군대에서도 배워온 구호다. 맥아더, 하지, 아놀드의 행적 중 기막힌 대목마다 ‘하면 된다’ 정신이 느껴진다. 20세기 초에 맹위를 떨친 테일러리즘, 즉 기술만능주의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에서 번창했는데, 미국에서도 다른 어떤 분야보다 군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냉전이 미국의 군국주의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주장을 본 일이 있다. 마이클 셰리의 <전쟁의 그림자 속에 In the Shadow of War>에서였다. 1996년에 나온 이 책에서 셰리는 냉전의 종식이 미국의 군비축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예견했다. 서방 진영 결속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이 퇴화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이 더더욱 군사력 과시의 필요를 느끼게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미국의 국가 성격을 꿰뚫어본 탁견이다.


미국의 군국주의를 꽃피운 것이 원자탄 투하로 절정에 이른 제2차 세계대전 승리였다. 그 직후의 미국 군부는 국제관계의 해결 능력에 대해 국무성을 업신여길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전의 다변주의(국제주의)를 지키고 있던 국무성 정책을 이적행위로 몰아붙이고 국무성 관리들에게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붙인 매카시즘의 동력도 다른 어디보다 군부의 자신감과 일방주의(국가주의)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10-12장(427-576쪽)에서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이승만의 활동을 개관함에 있어서 미국 국무성과 극동 지역 점령군 사이의 정책상의 갈등이 하나의 기조로 제시되어 있다. 이 갈등은 1947년 4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이 다변주의를 공식 폐기하고 냉전체제를 선포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혀주는 사례로서 한국사만이 아니라 미국사 연구에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10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난 시점부터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회담이 열릴 때까지 맥아더-하지 측이 국무성의 신탁통치안에 대항한 흔적은 그 자체로도 역력하다. 정병준은 회의록과 편지 등 이승만 자신의 발언과 기록을 통해 이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1945년 11월 초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두 달 전 서울에 들어올 때 하지는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의지도 역량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도움만 약간 받으면 한국인들이 일본에 복종한 것처럼 미군에게 복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일본군보다 더 강한 미군에게 한국인들이 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제국 체제보다 우월한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도 한국인이 불만을 가진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 체제에서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던 집단이 하지 식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에 친연성을 보이면서 한민당이란 이름으로 접근해 온 것이 하지의 구상에는 딱 맞는 호재였다. 이 집단은 물러가는 일본인 통치자들을 대신할 인적 자원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집단을 고문단으로 받아들여 군정청과의 지속적 접점을 만들고 경찰 등 식민통치 기구들을 이 집단에게 맡겼다.


그런데 한민당의 득세가 곧바로 여러 층위에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은 한민당의 극단적 선전에 군정 당국자들이 말려든 결과였는데, 중도파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문제점을 이 망언에 대한 각계의 논평을 통해서도 바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인민위원회의 협조가 어떤 성과를 이루고 있는지 알려지면서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측면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경제적 측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한민당을 간판으로 한 재산가 집단은 미군정에 대한 영향력을 두 방향으로 활용했다. 하나는 친일파 처단의 압력을 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인이 남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는 것, 특히 재산권을 늘리는 것이었다. ‘적산’ 취득에 매달린 한국인들을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송진우에게 하면서 그들이 송진우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인지 하지가 알고 있었을까?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가 결성되고 있었다. 결성 단계에서 전평은 상향식 조직이었다. 공산당의 지도력이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단계에서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 욕구가 분출된 것이었다. 재산가들의 탐욕을 비호하는 미군정 정책이 조직 욕구의 형성에 크게 작용했다. 많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본인에게서 경영권을 넘겨받아 노동자위원회를 통해 운영하고 있던 것을 미군정이 탄압함으로써 조직운동의 필요성을 촉발한 것이다.


“어떤 단체에서는 조선인의 부를 독점하자는 생각을 갖고 노동자로 하여금 직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며 학동으로 하여금 복교치 못하게 하며 농부로 하여금 자기네의 소출을 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이것이 이 시점에서 미군정 당국자들의 상황 인식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