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 당시 연합국들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행한다는 합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계획이 구체화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점령은 신탁통치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분할 점령 단계에서 지역 별로 정부 조직을 만드는 것은 점령군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며, 분할을 분단으로 고착시키는 길이었다. 한국 분단의 책임을 놓고 미국과 소련 어느쪽이 점령지역의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섰느냐를 따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단독정부 못지않게 분단 고착을 지향하는 조치가 단독군대 설립이다. 미군정은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946년 초 하지가 김석원에게 경비대 참여를 권하면서 “경비대는 (...) 정부가 수립될 경우 국군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34쪽) 이 “국군”이 통일국가의 국군을 말한 것인지, 분단국가의 국군을 말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일본군 장교 출신을 주축으로 경비대를 만든 것을 보면 민족국가의 국군을 지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분단 건국 후 이 경비대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군대는 미국의 영향력을 한국에 작용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경비대를 만들 때는 그런 의미로 중시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력으로 남한 사회의 통제가 충분치 못해서 그 보조수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질서 유지의 일선 책임을 인민위원회에 맡긴 반면 남한의 미군정은 경찰력에 의지하려 했다. 경찰을 지휘하는 일본인들의 역할을 미군이 넘겨받으면 해방 전과 같은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해방 전 경찰의 간부직을 채우고 있던 수만 명 일본인의 역할을 대신할 능력이 미군에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경찰의 과거 역할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 때문에 미군 진주 당시 한국인 경찰관의 80%가 출근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억지로 불러내고도 웬만한 자리에는 경찰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이 동행해야 할 지경이었다.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 경찰이 동원되는 요즈음과는 반대 상황이었다.


미군 배치가 끝나지 않은 해방 후 몇 달 동안의 권력 공백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치안조직 중에는 군사적 성격을 가진 것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9월 17일 이혁기가 앞장서 만든 국군준비대였다. 10월 15일 경찰과 미군이 남원 인민위원회를 탄압할 때 국군준비대 지부가 항쟁 주체로 나선 일을 보면 국군준비대는 지방조직을 갖추고 인공과 연결되어 있던 단체였다.


11월 9일에는 기존 군사조직을 통합하는 ‘전국군사준비위원회’ 결성 발표가 있었다. 이름의 ‘준비’라는 말이나 부위원장 임시대리 이혁기의 이름으로 보아 국군준비대가 중심이 된 움직임 같다. 이 위원회의 이름은 다시 보이지 않고, 12월 26-27일 국군준비대 대회에는 재경 대원 약 300명과 지방 대표 161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월 17일자, 11월 9일자, 12월 26일자 각 기사 참조)


이런 군사조직이 미군정에게는 당연히 눈엣가시였다. 하지는 10월 하순 경찰 총수로 내정되어 있던 조병옥에게 군사조직 해체를 지시했는데, 조병옥은 이 지시를 거부하며 미군정이 공식적 군사기구를 만들어 기존 군사조직들을 흡수하도록 건의했다. 11월 13일 28호 법령으로 군사국을 설치한 것은 조병옥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법령 제28호

第1條 국방사령부의 설치

朝鮮의 종국의 독립을 준비하며 세계국가에 의하여 조선의 주권과 대권의 보호, 안전에 필요한 병력을 급속히 준비하며, 민관안녕의 유지와 민간의 무질서에 대하여 민권을 옹호하는 민간경찰기관의 보조 及 종교 언론의 자유, 재산권을 유지하며 필요한 육해군의 소집, 조직, 훈련, 준비를 시작하며, 국민의 정부혁명을 보호키 위하여 玆에 조선군정청국방사령부를 설치함.

第2條 군무국의 창설 及 육해군부의 설치

조선정부군무국을 정부의 국으로서 창설함. 군무국내에 육군부 해군부를 設置함. 현존 경무국, 군무국은 국방군사령부의 감독지휘 하에 置함.

第3條 경찰군사기관의 금지

여하한 자와 단체라도 여하한 종류의 경찰, 육해군 군사활동의 소집, 훈련, 조직, 준비 及 경무, 군무국의 관할에 속하는 행동을 행사치 못함.

단 국방사령관 혹은 국방사령관이 인정한 其 권리부여 대행기관의 서면인가를 得할 시는 제외함.

第4條 벌칙

本令의 조규에 위반한 자는 군정재판에 의하여 처벌함.

第5條 시행기일

本令은 1945年 11月 13日 오전 0시부터 유효함.

1945年 11月 13日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군정청법령 제28호 1945년 11월 13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조병옥(1894~1960)은 당대의 대표적 친미파였다. 천안 출생으로 선교사 학교인 공주영명학교와 숭실-배재-연희를 거쳐 1914~1925년간 미국에 유학,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과 조선일보에 재직했고 두 차례 옥고를 겪었으며, 1940년대에는 광산업을 경영하며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비협조의 길을 지켰다고 한다.


한민당 주류 세력으로는 비교적 깨끗한 이력서를 가진 데다 미국을 잘 알고, 마침 어린 시절 영명학교에서 함께 놀던 선교사 아들 윌리엄스 소령이 하지 사령관의 고문으로 있던 덕분에 미군정-한민당 유착관계의 핵심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군정청 경무국장으로 정식 임명된 것은 이듬해 1월 13일의 일이지만, 10월 20일경부터 실질적으로 경무국장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경무국장으로서 조병옥은 극단적 좌익 탄압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1월 14일 성북서 서장이 이승만이 머물던 돈암장 경호를 충실히 하지 않는다고 "공산당원인 까닭에 이박사의 사저를 경호하지 않았다"며 질책, 유치장에 넣으라고 호령해서 물의를 일으킨 것이 단적인 예의 하나다.


같은 날 더 재미있는 일도 하나 벌인 것이 있었다. 좌익과 싸우기도 바쁜 판에 식당 주인들에게까지 달려들었다가 성북서장 질책 사건까지 겹쳐 일시 군정청에서 파면까지 당했다.


경기도 趙경찰부장은 지난 14일 오후 1시 明月館, 國一館, 松竹園, 東明館의 각 경영자를 불러 놓고

1) 온돌을 마루방으로 고치고 탁자와 의자를 사용하여 조선식을 폐지하고 서양식으로 할 것

2) 요리 또한 재래식을 폐지하고 서양식으로 하되 고기 닭 스프 등 몇 종으로 간단히 할 것

3) 이상 두 가지를 3일 이내로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요리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국일관 주인 金政勳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찰부장으로부터 (略) 군들은 이상의 두 가지 명령에 절대 복종치 않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받은 후 서로 협의하였으나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고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첨부하여 16일 정오경 경찰부장에게 제출하였다.

가) 10여 년간 장식 기구 기타 제반설비를 조선식 본위로 구성한 것이므로 급속한 개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 요리도 조선식 본위로 하여 제반기구와 요리사 종업원까지 모두 이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므로 시급히 서양요리를 만들 수 없다.

다) 손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대중의 요망과 경향에 순응치 않을 수 없다.

라) 조선식 요리는 민족적 역사적 특징이다. 따라서 이를 발달시키는 데 우리의 사명도 있다.

마) 적당한 장소와 건물에서 새로이 서양식 요리를 만들라면 이 명령에 성심으로 응하겠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군정기 극우파의 총아 조병옥이 이승만 경호를 위해 어떤 정성을 쏟았는지, 당대 최고의 요정들이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당시 극우파의 속성에 대해 약간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Posted by 문천

11월 5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나올 때는 미군정이 그들의 귀국을 주선한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고,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을 모두들 기대했다. 김구의 특사 5인이 5일에 이승만을 방문해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7일자 <중앙신문>에 보도되었고, 임정 요인 30여 명의 “10일 내 귀국”을 이승만이 기자단에게 언명했다는 사실이 6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11월 10일 이전이라는 뜻인지 그 시점부터 10일 이내라는 뜻인지는 기사 문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귀국을 앞둔 김구의 담화도 7일자 <자유신문>에 실렸다.


[重慶5日發 中央社國際]한국임시정부주석 金九는 5일 귀국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 및 美, 英, 蘇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긴밀히 할 것과 선거에 의한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데 있다. 또 나는 조선의 여하한 분할에 대하여도 허용할 수 없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0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6일자 <중앙신문>에는 임정 환국에 대한 이승만과 송진우, 그리고 이관술의 소감이 실렸다.


◊ 李承晩

“금월 10일 이전에 귀국하기로 된 것만은 사실인데 임시정부가 정식승인을 받지 않은 관계상 金九씨도 물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일 것이다. 또 그들이 금후 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도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물론 그 취지에는 찬성할 줄 믿는다.”

◊ 韓國民主黨 宋鎭禹

“오래동안 기대하던 임시정부주석 金九선생을 위시하여 정부요인 34인이 중경을 떠나 금일 상해에 도착하여 잠시 체재한 후 불일내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회가 깊은 바이다. 해외에서 수십년간 꾸준히 광복의 날을 찾고자 악전고투해 온 위대한 혁명가를 맞이한 우리 태도는 간단히 말하면 허심탄회하게 그이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환국하는 그 분들은 내 생각 같아서는 여러 가지 사정도 있어 정식정부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격으로 오는 것으로 보는데 결국은 개인이라 할지라도 정부의 수뇌부가 오게 되는 만큼 이를 맞이하는 우리는 정부를 맞이하는 심경이어야 할 것이다. 吾黨으로서는 원래가 임시정부를 절대지지하고 있음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 방침에 변화는 없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절대지지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즉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다. 현재 釀成되고 있는 민족통일전선결성운동은 매우 반가운 일이나 임시정부에 대하여 여하한 형식이건 무엇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다. 吾黨의 거취에 대하여서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없는 한 자진하여 해산할 의사는 없다.”

◊ 朝鮮共産黨 李觀述

“수십개 성상을 두고 해외에서 조국해방전선에 투쟁해 나온 선배제씨의 귀국에 제하여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0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공산당의 이관술이 임정 요인들에 대한 개인 차원의 경의를 표하면서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은 좌익의 일반적 입장이었다. 사회주의 원리를 중시하는 좌익으로서는 김구가 좌익을 적대해 온 경력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해외의 독립운동보다 국내의 노농운동이 더 존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승만이 짤막한 논평에서 임정 요인들의 “개인 자격”을 강조한 것은 그의 상투수법이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권위는 임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임정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더 확실한 근거를 임정에 두고 있던 김구 등 요인들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 자격을 강조함으로써 임정 권위로부터의 혜택을 자신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없도록 애쓴 것이었다.


송진우의 ‘절대 지지’ 논평은 한민당의 기존 노선 그대로다. 그런데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라는 한 마디가 그 속셈을 드러내는 것 같다. 임정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 예상되던 ‘민족통일전선’을 한민당은 드러내 반대하지는 못하면서도 실제로는 반대하던 속셈이다. 송진우는 한민당이 어떤 수단으로든 임정에 영향을 끼쳐 민족통일전선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이다.


임박한 임정의 귀국에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정의 지도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임정이 과연 어떤 역량과 노선을 가지고 나타날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0일자 <자유신문>의 아래 기사는 긴장감을 크게 증폭시켰을 것이다.


大韓民國臨時政府特派事務局 發表

1) 重慶에 外交辨事處 設置

우리 임시정부는 金九主席을 수반으로 목하 환국의 도정에 있는 바 중경에는 정부환국 후에 사무 처리를 위하여 특히 大韓民國臨時政府 外交辨事處를 설치하고 朴贊翊(南坡)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2) 광복군의 확대편성

제국주의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세계대전에 당당히 싸워 그 위훈을 세계에 알려 금번 우리 민족해방독립에 길을 열은 우리 광복군이 불원 환국하게 되었다. 환국을 앞두고 우리 정부에서는 李靑天將軍의 지휘 하에 다음의 확대편성과 맹훈련이 진행 중에 있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은 그 규모를 확장하여 대륙방면, 南洋비루마方面 等 태평양전에 被迫 출전한 학병, 지원병, 징병 등 韓籍軍人들을 흡수하기로 되어 특히 蔣介石將軍은 일본총사령부에 대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동시에 전부 광복군으로 편입하라는 명령을 쫓아 한적군인은 전부 이미 광복군편입을 완료하였다. 이리하여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은 다음과 같다.

第1支隊(重慶) 支隊長 李集中

第2支隊(西安) 支隊長 李範奭

第3支隊(開封) 支隊長 金學奎

第4支隊(南京) 編成中

國內支隊(京城) 司令 吳光成

그리고 우리 광복군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南京, 上海, 西安, 開封 4개처에 광복군훈련소를 설치하고 목하 귀국을 앞두고 주야 맹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0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이란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미-소 양군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병력을 임정이 몰고 들어온단다!


그런데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24일 기자회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 光復軍은 언제 귀국하나?

(답) 시기가 상조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日軍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규합하여 조직과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총사령부도 중경에 있다. 총세는 약 1만이 된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2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일자 보도에서 “이미 대전에 출전”했다는 것은 일본군으로 출전했다는 말인가?


임정이 5일 상해로 나올 때 미군정은 이미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 후 보름 남짓 귀국이 늦어진 것이 정부 자격의 귀국을 주장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정부 자격이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임정의 누구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통할 수 없는 주장에 매달려 귀국을 늦춘 것은 임정 쪽 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이 광복군의 확장 시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후원과 지지를 받아 온 임정은 마지막 큰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전역(대만 포함)과 동남아 상당 지역에서 일본군 항복 접수를 맡은 장개석 군대가 조선인 포로들을 임정에 넘겨주기를 바란 것이다. 조선인 포로의 수가 20만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 이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11월 5일 상해 도착 후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새로 편성된 ‘광복군’ 병력을 시찰하기 바빴다. 그러나 포로를 그렇게 대거 빼돌리는 것은 장개석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를 면하기 위해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광복군에 접선한 일부 장병(박정희도 그런 경우로 보인다.)이 형식적으로라도 편입되었을 뿐, 부대를 따라 정식으로 항복한 포로들은 건드릴 수 없었다. 장개석은 장래 한국과의 관계와 관련해 임정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래서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20만 포로를 빼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정은 이청천, 이범석 등 광복군 요인들에게 포로 획득 사업을 맡겨 중국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26년간 지키고 쌓아온 임정의 권위와 가치는 민족주의의 깃발로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종전에 따른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도덕적 권위를 넘는 현실적 힘을 확보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했다. 그 도덕적 권위에 손상이 되는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

 

스무 살에 잃었던 나라를 35년이 지난 이제 되찾게 되는가? 일본이 앞으로 몇 달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독일이 패망했다는 소식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온 세상을 휩쓸 것 같던 독일과 일본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눈앞이 캄캄했던 것이 4년 전이었던가? 그 기세등등하던 독일을 거꾸러트린 연합국들을 일본 혼자 어떻게 상대해 내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과연 나라를 되찾는 것이 맞는가? 연전에 연합국 수반들이 카이로에 모여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고 결정했다는 데 우리는 희망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연합국에만 믿고 매달릴 수 있는 일일까? 영국은 일본, 독일보다 더한 제국주의 국가였고, 미국도 필리핀 지배를 보면 말과 행동이 똑같지 않은 것 같다. 소련도 코민테른의 그 동안 행각이 석연치 않다. 인민해방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권도에 치우치고 폭력을 숭상하는 태도가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대로 믿을 만한 것이 중국뿐인 듯하다. 중국은 그 힘이 넘칠 때도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중국이 조선을 영토 안에 끌어넣으려는 야욕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모자라 명색이 연합국이지, 연합국 사이에서 언권이 그리 클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라를 내 힘으로 되찾지 못하고 남이 되찾아 준다는 것이 정말로 되찾는 것일 수 있을까? 내가 내 나라를 ‘가졌다’는 것은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권리만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 가진 사람은 나라에 대한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가지는 것이다. 나라를 내 노력으로 되찾는다면 그 과정에서부터 나라에 대한 내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해방을 선물처럼 가져다줄 때, 우리가 나라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6년 전 감옥에서 나와 해방의 희망을 떠올릴 때부터 나는 이 문제가 걱정되었다. 그때 희망을 떠올린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신간회가 좌절된 후 독립의 희망을 잃고 있다가 일본이 중일전쟁을 터뜨린 것을 보고 일본제국이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조선을 집어삼킨 그 야욕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한없이 키워가는 것을 보면, 당장은 비록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도 파탄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단재 선생 뒤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오십 나이에 스스로 추스르기도 힘든 이 몸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변변찮으나마 분수에 맞는 길을 찾자 생각하고 역사 공부에 매달려 왔다.


역사 공부. 그렇다. 누구에게나 자기 하는 일이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역사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어떤 사업이든 생각과 행동의 양면이 합쳐져서 의미를 가지고 성과를 이루는 것이다. 독립 사업의 생각 측면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보다 역사 공부다. 그래서 단재 선생께서도 역사 공부에 그토록 공을 들이셨던 것이 아닌가.


나라 잃고 삼십여 년을 지내는 동안 조선 사람들의 조선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흐려져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조선 백성의 절반 이상이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인이었던 청년과 소년이다. 교육을 많이 받고 중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일본어를 많이 쓰지 않을 수 없고, 그중에는 스스로를 ‘황국 신민’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 해방을 몇 달 안의 일로 내다보고 있지만, 6년 전 해방의 희망을 떠올릴 때는 해방이 6~7년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올 것 아니겠냐는 정도의 막연한 희망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외부 활동을 삼가고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조선일보> 일할 때도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여가에 틈틈이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해방이 되기는 되리라는 확신이 들자, 다른 일에 쓸 시간이 아깝게 되었다.


금년 내에 해방을 맞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이 나라를 어느 길로 끌고 나가자고 나서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길로 향할지를 올바르게 정하려면 우리가 어디로부터 어떤 길을 거쳐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와 함께 어떤 약점이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모르는 채로 남이 하는 양만 보고 그럴싸한 길을 고른다면 일본의 꽁무니에서 다른 이의 꽁무니로 옮겨가는 데 그치게 된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내 공부가 너무 부족하다. 십여 년간 단재 선생을 바라보며 공부의 길을 찾아 왔지만, 이제 그분만 바라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분은 해방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위 차원의 진로를 생각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당면한 현실로 다가오는 이제, 새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선생께서 내놓으신 ‘민족주의’가 해방의 그날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해방되는 바로 그날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애벌레에게는 애벌레의 원리가 있고 나비에게는 나비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아! 선생께서 아직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신민족주의’의 길도 앞장서서 헤쳐 주셨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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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독자 아닌 책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너머 여러분과 의논하다가 매달 정리하는 글을 한 꼭지씩 만들어 넣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글을 어떤 형태로 만들까, 궁리하다가 민세 안재홍 선생이 한 달 한 달을 맞을 때 어떤 상념을 품고 있었을지 가상적으로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괜찮은 길이 될지, 여러분 의견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