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 강영선 선생이 전화를 줬다. 박성준 선생님이 김 선생 한 번 보고 싶으시다는데 찾아뵙지 않겠냐고. 사람 안 보고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박 선생님은 기회 있다면 꼭 뵙고 싶은 분이다. 바로 쫓아나가고 싶었지만 <해방일기> 첫 책 준비가 긴박한데다 어머니가 병원 계셔서 틈 내기가 힘들었다. 며칠 전에야(12일) 찾아뵐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맙다고 하신다. 나와 내 어버지께. 전쟁 때 그 부모님이 북쪽으로 가셨는데, 박 선생님은 동생과 함께 그 이태 전부터 서울의 부모님과 떨어져 고향에서 지내고 있다가 그대로 생이별이 되었다고. 아버지의 일기 <역사앞에서>를 보고 그 생이별의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실감나게 이해가 되었다고 하신다. 요즘 <해방일기>도 상황 이해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말씀해 주신다.
나도 선생님이 꼭 뵙고 싶은 분이었다고 화답했다. 근년 들어 예전의 오만한 마음을 벗어던지고 일과 생활의 새로운 자세를 다듬으면서,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고, 그런 면에서 선생님 같은 분께 배우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씀드렸다. 표현을 아끼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내 말씀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바로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았다.
강 선생과 셋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서원으로 돌아와서는 둘이 얘기하도록 강 선생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커피 한 잔(참 맛있었다!) 나누며 선생님의 개인적인 일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일과 공부에 대한 내 생각도 이모저모 말씀드렸다. 세 시가 넘어 일어날 만한 시간이 되었을 때 지금까지보다 조금 긴장된 태도로 길담 사업에 관한 말씀을 꺼내신다. 나도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하시려는 눈치기에 앞질러 갔다. 힘도 없는 사람이 여유도 없는 형편이지만, 힘껏, 형편껏, 길담 일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눈치로 보건대, 형식적인 참여 부탁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능력에 대한 기대감보다, 어떤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사람됨에 대한 믿음 위에서, 꼭 무슨 일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길담의 일을 함께 찾아보자는 부탁으로 느껴졌다. 아마 내게 대해서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어느 분에게도 그런 열린 방식으로 연대를 청하시는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앞으로 화요일 오후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을 경우 길담서원에 들러 책 구경도 하고 커피 한 잔씩 사먹으려 한다. 그 동안 너무 세상과의 접점이 없이 지냈는데, 길담 같은 접점이라면 큰 부담감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글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형편이 맞아 거기서 마주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더욱 좋고. 좋은 접점을 마련해준 박 선생님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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