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동란’ 등의 이름으로 흔히 불려오던 1950~1953년간의 전쟁을 요즘은 ‘한국전쟁’이라고 많이 부른다. 나도 그 이름을 쓰겠다. 이 전쟁에 대한 너무나 편파적인 냉전기의 시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 전쟁이 ‘소련의 야욕’을 받든 ‘북한 괴뢰’의 도발이었다는 설명에 의문만 제기해도 반공법, 보안법으로 잡아넣는 환경 속에서 한국인들은 긴 시간을 지냈다. 미국 사정은 한국보다는 나았지만, 1970년대까지 미국인의(한국계 미국인 포함) 연구가 이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시각을 시도하는 연구를 하려면 자료와 연구비를 구하기 힘든 정도의 제약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70년대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내부 비판이 강해지고 베트남에서 굴욕적 패배를 겪으면서 베트남전쟁과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후반의 비밀문서 중 30년 비공개의 엄중한 자료들이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되면서 자료도 확충되었다. 이 시도의 가장 뚜렷한 성과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소련 해체에 따라 소련 문서도 활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한국에서도 군사독재 종식으로 연구 활동에 대한 억압이 사라져 한국전쟁 및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관한 의욕적 연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 분야가 역사학계에 자리 잡은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은 분단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줄거리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의 하나다.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세 달, 아직 시작 단계에서 전쟁의 원인을 논한다는 것이 성급한 짓이지만, 작업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내 접근 방향을 한 차례 제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초기 미군정의 극심한 폭력성을 어제 서술하고 보니, 전쟁의 원인을 미국 쪽에서 찾고 있는 내 작업가설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느껴졌다. 아직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1945년 10월 말의 상황으로부터 전쟁 발발까지 56개월의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중에는 전쟁에 더 큰 작용을 할 요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 2개월간의 미군정은 분단과 전쟁의 개연성을 늘리는 쪽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여러 관점이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펴냄) 제1장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36-81쪽)에 개관되어 있다. 크게 ‘내인론’과 ‘외인론’ 이 구분되어 있고, 외인론은 미국 책임론과 소련 책임론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인론이란 한국인들 사이의 불화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탁통치의 필요성과 관련해 제기되는 ‘자치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저희들끼리 놔둬도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싸움박질을 할 판이었고, 미국과 소련의 존재는 그 싸움박질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작용한 부차적 요소라는 것이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격렬한 항쟁이 내인론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나는 이 격렬한 항쟁이라는 것이 외부의 작용으로 빚어진 피상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적어도 그 실마리는 잡았다고 생각한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대립 개념 자체가 해방 당시 일반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는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박태균의 위 책 55-60쪽에서 내인론 비판의 근거로 소개한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에 비해 훨씬 사회주의적인 여러 정책노선이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극우 역할을 맡은 한민당조차 공식적 정강-정책에서는 이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 식민통치에 억눌려 왔던 민족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여러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개인과 집단에 따라 어느 원리에 얼마만큼 큰 비중을 두느냐 편차가 있었지만, 그 원리들이 절대적으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절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가를 따로 세우지 않고도,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대다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길을 찾아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범위에 드는 사람들을 ‘중도파’로 나는 범칭한다.


어느 당과 어느 당 사이는 샛강이고 또 다른 어느 당과 사이는 한강이란 말이 나돈 일이 있는데, 이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좌익이고 우익이고) 사이는 모두 샛강이었다. 모든 한국인이 식민지시대에 비해 빈곤과 폭력의 위협을 덜 받는, 그리고 한국인의 뭉쳐진 힘으로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중도파가 공유하는 지상과제였다. ‘합의’라는 기준에서 해방 당시의 한국인은 훌륭한 ‘자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도파의 공유 과제를 외면하는 소수의 극단파가 있었고, 그들이 극좌와 극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도파 안의 여러 파벌 사이에 비하면 중도파와 극단파 사이는 한강보다도 더 먼 거리였다. 중도파를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가 민족주의였는데, 여러 경향 극단파의 첫 번째 공통점은 민족주의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민족주의가 궁극적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에서 풀려나는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거의 모든 한국인의 합의를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전제 위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제 원리가 원활하게 절충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외면한다는 것은 다른 특정한 믿음이나 이해관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태도였으므로 나는 이를 ‘극단파’로 범칭하는 것이다.


극단파는 소수였다. 상황을 주도할 입장이 아니라 눈치 보며 적응에 바쁠 입장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에 특권을 누리던 한국인 집단에게 엄청난 기회를 미군정이 만들어주었다. 특권을 포기하기는커녕 일본인 상전들이 누리던 더 높은 등급의 특권으로 진화할 기회였다. 미군정은 해방 전 일본인의 권력을 그 바로 밑에 있던 한국인 집단에게 승계시킨 것이다.


좌익에서도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은 소수였다. 서구의 좌파 안에서도 ‘정통적’ 공산주의자들이 소수파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도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이 과거의 친일 세력을 극우파로 키워내자 이에 대한 반발로 극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것은 다시 극우파의 역할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중도파 안에서 좌익과 우익은 대화를 통해 건설적 타협이 가능했다. 그런데 미군정의 극우파 양성과 이에 따른 극좌파의 득세는 대화의 조건을 파괴했다. 돈과 주먹이 사회를 휩쓰는 상황에서 대화를 위한 노력은 흑백론으로 배척당했다. 오죽하면 김구가 ‘빨갱이’로 몰리기까지 했겠는가!


앞으로 계속 더듬어 나가겠지만, 내 작업가설에서 내인론은 일단 배제한다. 그 가장 큰 근거인 좌익-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 자체가 외세의 작용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한국의 우익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폭력이 판치고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을 야기한 것이 그 역할이었다.


박태균은 위 책 77-81쪽에서 외인론에 대한 비판을 소개했는데, 직접적 비판이 아니라 정황론 수준이다. 오스트리아와 베트남도 분할 점령이나 분단을 겪었는데, 왜 유독 한국에서만 분단이 고착되었는가, 같은 국제적 상황 속에서 다른 결과를 맞았다면 외인론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 비교가 부적절하다고 보는 의견을 간단히 붙인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중앙, 당시의 문명국들이 일상적으로 관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4개 연합국이 분할 점령했다. 남한의 미군정처럼 점령군이 야만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독일로부터 오스트리아의 분리를 선언하며 세워진 레너 정부가 연합국들의 승인을 받고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점령군의 역할은 감시에 한정되고 오스트리아 정치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는 스스로 패전국이라는 죄책감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연합국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로부터 해방된 나라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베트남이 한국과 다른 점 하나는 한국에서 해방공간에 민족주의가 탄압받고 몰락한 것과 달리 베트남 민족주의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호치민을 통해 공산주의와 결탁한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베트남 남부에도 민족주의는 살아 있었다. 1960년경 남한의 반 이승만 운동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기조로 한 것과 비교하면 같은 때 남베트남의 반 고 딘 디엠 운동은 민족주의를 기조로 한 것이었다.


베트남에서는 1954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주의 운동이 진행되었고, 그 후에 개입한 미국은 남한에서처럼 극우세력을 강고하게 키워 민족주의를 배제할 기회가 없었다. 남한도 남베트남도 초기의 부패 독재가 무너진 후 군사정권이 들어섰지만, 베트남 군사정권은 남한 군사정권과 비교할 만한 지지 기반을 만들지 못했다. 1974년까지 전쟁을 버텨낸 것은 미국의 군사력이었을 뿐, 베트남인의 적극적 지지가 거의 없었다.


남한에는 베트남과 달리 분단 고착을 원하는 세력이 큰 정치적 역할을 지금까지 맡아 오고 있다. 일반 국민 사이에도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계속 살펴나가겠다.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한국인의 결함이 아니라 외세의 작용에 있음을 조금이라도 더 밝혀 “엽전은 안돼.” 하는 자기비하에서 벗어날 근거를 찾고 싶은 마음을 솔직히 밝힌다.


Posted by 문천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방침에 “in due course”라는 부사구가 들어 있다. “적절한 시기에”라고 흔히 번역되는데, 꽤 적절한 번역이기는 하지만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땅히 거칠 과정을 거쳐서”라 하는 편이 정확성에서는 낫겠다. 요컨대 ‘바로’, ‘그대로’ 독립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마땅히 거칠 과정’이란 독립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 조건이 어떤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식민지였던 한국이 독립국으로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이 필요했다. 내적 조건은 국가체제를 내부 요소들이 지탱할 수 있는 ‘자립 능력’이고, 외적 조건은 지나친 외부 압력이 작용하지 않을 안정된 ‘국제관계’다.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자립 능력이 다소 미흡해도 국제관계가 순조롭다면 허약한 국가체제라도 일단 세워놓은 다음 서서히 강화시켜 나갈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반면 험악한 국제관계 속에서는 아무리 강한 자립 능력으로도 위험을 피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관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변화의 핵심은 미-소 대립관계의 형성에 있었다. 두 나라 군대에 분할 점령된 한국은 열악한 외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자립 능력을 가지고도 다수 주민의 염원을 충족시키는 안정된 국가체제의 수립을 어렵게 하는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는 상황에 한국은 놓여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자립 능력’이 늘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여파로 후세 사람들도 내적 조건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당시 여러 정파와 지도자들의 전술전략, 판단력과 실행력, 나아가 도덕성까지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내적 조건의 충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이다.


후세 사람의 편리한 위치에서 개관하자면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불러온 1차 변수는 외적 조건이었다. 내적 조건은 그 종속변수였다. 미-소 대결의 추세가 통일국가 형성의 내부 욕구를 단순히 억누른 것이 아니라, 내적 조건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두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작용한 것이다. 한국의 미래 결정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지 않는 억압 요인이 일본의 의지로부터 두 나라의 의지로 바뀐 것이다.


두 나라의 의지가 작용했지만, 문제를 먼저 일으킨 것은 미국이었다. 초기 단계에서 소련은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이후 한국에 대한 소련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미국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 초기의 점령정책에서 이 차이를 확인해 두는 것이 이후 상황의 이해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지방행정에 대한 태도에서 점령정책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주민의 생활과 활동에 직접 닿는 영역이고, 점령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과정을 살피기 좋은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미군의 경우 제주도까지 전술적 배치를 끝내는 데 11월 10일까지 두 달의 시간이 걸렸고, 군정을 위한 전문적 훈련을 조금이라도 받은 ‘군정 중대(MG teams)’가 완전히 배치되는 데는 이듬해 1월 14일까지 다시 두 달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동안에는 미군의 개입이 없거나 불완전한 상태에서 지방행정이 현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65년 전의 오늘 북조선 5도행정국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위에서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짜여 올라온 조직이었다.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주민들이 만든 인민위원회가 각도 인민위원회로 묶이고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110명의 대표가 참석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체제의 표준화를 결정했다. 그 시점까지 각도 인민위원회는 서울의 인민공화국 중앙에 귀속하는 것으로 보고 북한 지역을 통합하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이후 미군정의 인공 부정 방침이 확실해짐에 따라 잠정적 통합조직으로 5도행정국을 만든 것이었다.


일본 항복 보름 후인 8월 말까지 건준에 145개 지방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중 몇 개는 건준 본부의 요원들이 연고지를 찾아가 결성을 도와주었지만, 대부분은 자생적 자치조직이 자발적으로 건준에 연락을 취한 것이고 건준 본부와 실질적 관계도 별로 없었다. 자생적 자치조직은 38선 남북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졌고, 9월 초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대부분 ‘인민위원회’라는 간판을 달면서 인공 중앙과의 연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인민위원회가 있는 것을 알자 이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480쪽 한 대목에서 이 방침이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8월 30일의 한 보고는 8월 24일에 함흥에 진주함에 있어서 소련군 사령관과 함경남도 도지사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정치적 장래가 결정될 때까지 소련군은 기존 정부 및 행정체제를 통하여 행정을 수행할 것이다 (...) 공안을 해치거나 파괴시키는 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거나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후의 보고는 소련이 함흥 인민위원회의 존재를 발견하자, 즉시 일본인들을 축출하고 행정을 위원회에 넘겨주었다고 말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예상 외로 빨랐기 때문에 점령정책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소련군도 미군과 마찬가지였다. 함흥에 진주해서 바로 발표한 방침은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점령군이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봐줄 능력이 없는 바에야 어떤 조직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민위원회가 있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일본 기구를 폐기하고 인민위원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해방 열흘 후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력을 갖췄으면 얼마나 갖췄겠는가. 능률로 따진다면 수십 년간 운영되어 온 일본 통치기구가 더 나았을 것이다. 식민지 상태의 청산을 점령군의 지상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택한 것이다.


인민위원회에게 권한과 책임을 적극적으로 맡기는 소련군의 방침으로 인해 북한 지역의 인민위원회 결성과 발전이 촉진되었다. 소련군 진주 후 두 달이 지난 10월 말까지는 북한 전역의 경찰 활동과 지방행정이 인민위원회에 장악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소련군은 인민위원회 조직의 상층부에 좌익의 존재가 어느 정도 포함되도록 제한된 수준의 영향력만 행사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주도권을 존중했다.


악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민족주의자들을 앞세워 인민위원회를 키워놓은 다음 공산주의자들이 그 결실을 가로채도록 책략을 부린 것으로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점령 초기의 소련군은 그런 책략을 구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책략이라 하더라도, 민족주의자들의 염원이 표출될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건설적인 책략이라 할 것이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전면적으로 탄압했다. 미군의 배치가 불완전한 단계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용인되었다. 북한에서처럼 점령군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데도 남한 거의 전역에 군 단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얼마 동안이라도 상당 수준의 경찰과 행정 기능을 수행했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본격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인민위원회 파괴가 미군정의 가장 큰 업무가 되었고, 점령군 병력이 부족하다고 하지가 노상 징징댄 것도 억지로 만들어낸 이 업무 때문이었다. 북한 점령군이 아직 조직이 미비한 주민과 손잡고 일본인과 친일파의 저항을 분쇄하는 작업을 끝낸 시점에서 남한 점령군은 일본이 키워놓은 경찰력을 앞세워 어느 정도 조직이 갖춰진 주민을 억압하는 일에 몰두한 것이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제9장 “지방인민위원회의 운명”(373-437쪽)에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그중 전라남도 해남군의 경우를 예시를 위해 인용한다. (386-388쪽, 정확성을 위해 인용 내용은 원서에서 직접 번역함)


해남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의문의 여지없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활발한 정치조직이었다.” 위원회는 그 지역을 모든 층위에서 통제하고 있었고, 식민지 통치기구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을 위원회의 지시 하에 일하게 하고 있었다. 위원회는 지역의 버스 서비스와 군청의 김 양식 사업, 그리고 21개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45 (군정)중대는 12월 초에 해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해남 군수로 정식 발령했다. (...)

1946년 초 미군은 이들 4개 군에 ‘구조조정’을 행할 결정을 내렸다. (...)

해남에서는 12월 말 (전라남)도 경찰이 인민위원회 지도자 19명을 체포했다. 1월 19일경 인민위원회 경찰서장과 그 휘하의 38명이 광주에서 파견된 특별경찰 38명으로 대체되었다. 2월에서 3월까지 해남에서 소요사태가 있었고, 더 많은 체포가 뒤따랐다. 3월 말 시점에서 해남군의 경찰력은 85명이었다. 유치장에는 50명이 갇혀 있었는데, 그중 14명의 혐의는 ‘경관 사칭’이었다.


남한의 방방곡곡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각 지역 주민들이 점령군의 도움 없이라도 식민 통치체제를 대치할 자치조직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역 특성이나 우연한 조건에 따라 자치조직은 다소 급진적 성격이 되기도 하고 온건한 성격이 되기도 했다.


해방 직후 경찰은 위축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숨어 있었다. 9월 초 미군이 진주할 무렵 한국인 경찰관의 출근율은 30%도 안 되었다고 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이들의 출근을 독려해 경찰력을 복원시키고 그것을 앞세워 인민위원회를 격파했다. 군정하의 남한은 식민지시대보다도 더 지독한 경찰사회가 되었다. 인민위원회 경찰 39명으로 질서가 유지되던 해남에 몇 달 후 85명 경찰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민심에 역행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치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어떤 악조건 아래서도 잘 꾸려나갈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호조건 위에서도 죽을 쑬 만큼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군정과 같은 조건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자치 능력이라도 제대로 발현되고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방행정만이 아니라 중앙정치도 민심을 역행하는 방향으로 미군정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적 요소에 대한 민중의 염원을 조금이라도 반영하는 정치세력은 미군정-한민당 복합체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극좌파를 제외한 한국인은 미군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군정 당국자들은 대다수 한국인을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에 대한 일반 한국인의 신뢰는 갈수록 떨어져갔다.


Posted by 문천


점령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국가의 권력자나 책임자의 경우 같은 엄밀한 규정이 없었다. 과도적인 역할이고 무력에 의존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자체 운영에 있어서도 소련군 같은 사회주의 군대처럼 정치적 원리를 중시하지 않았으므로 일반사회를 다스리는 군정에 있어서는 정치적 감각에 더욱 큰 맹점이 있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하지의 정치 고문으로 파견된 국무성 관리들이 있었다. 이들의 역할이 적어도 점령 초기에는 하지의 정치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 고문 메럴 베닝호프가 진주 직후(9월 15일) 국무성으로 보낸 첫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197쪽에서 재인용)


“정치정세에 있어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요소는 서울의 보다 나이들고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보수분자 수백 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위하여 봉사하긴 했으나 그러한 오점은 결국 없어질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임시정부’의 귀환을 지지하고 있으며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아마도 최대의 한인집단일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인의 재산을 당장 몰수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잘 훈련된 선동자들이 우리 지역에 혼란을 초래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한인들이 미국을 거부하고 소련의 ‘자유’와 지배를 바라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주한 미군은 수적으로 부족하여 지배지역을 급속히 확장할 수 없으므로 남한은 이러한 행동을 하기에 비옥한 토양을 이루고 있다.”


위 글에서는 친일 배경을 가진 보수세력, 즉 한민당 주류와의 밀착 방침을 밝혔고, 아래 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강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크기 때문에 친일파 보수세력과 밀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 위협은 분명히 과장된 것이다. “일본인의 재산을 당장 몰수하자”는 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공통된 요구였고, 한민당조차 동조한 주장이었다.


중경 임시정부는 일본인 재산 몰수를 넘어 ‘토지 국유화’를 표방하고 있었다. 베닝호프의 눈에는 극단적 공산주의로 보였을 것이다. 베닝호프는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소수 세력 외의 한국인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고문의 조언이라면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주일 후 베닝호프의 보고서에는 당시 미군정의 관점이 더욱 구체화되어 있다. (같은 책 198-199쪽에서 재인용)


“한편에는 이른바 민주적 혹은 보수적 집단이 있다. 이들의 구성원들 중에는 미국에서든지 아니면 한국에 있는 미국계 선교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전문적 및 교육계의 지도자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의 목적과 정책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를 결의를 보이고 있으며, 그들은 이승만 박사와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의 조기 귀국을 거의 만장일치로 희망하고 있다.”


“급진파들은 그들의 민주적 반대파보다 잘 조직된 것 같아 보인다. (...) 그들의 홍보자료들은 배후에 명확한 강령이 있으며 아마도 훈련된 노선이 있는 것 같다. 이 조직의 천재적 인도자는 여운형이다. (...) 그러나 그의 정치이념이 기독교에서 공산주의로 변한 것이 명백하므로, 현재 인민은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다수 인민의 지지를 주장하는 보다 덜 호전적인 보수분자들은 자기보호와 자신들의 반공적이며 친민주주의적인 신념을 위하여 부득이 조직을 구성했다. 급진파들은 (...) 보다 잘 조직되었으며 보다 요란스러웠다. 진짜 공산주의자(소련의)의 침투 성격과 정도는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상당한 정도일 것이다.”


베닝호프의 ‘민주주의’ 인식 방법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급진파’의 대립 개념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입장을 자임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종전 후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자세가 미국 정계와 군부에서 형성되고 있었고, 이것이 냉전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주의 일체를 스탈린주의와 연루시켜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베닝호프의 편파적 시각에 “단순한 군인”인 하지와 아놀드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남한에서 냉전을 앞당겨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체제에 대한 성찰 없는 믿음과 다른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은 냉전의 핵심 요소였다.


친일에서 친미로 옮겨간 일부 세력만을 자기네 ‘편’으로 받아들이고 일반 민중을 불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와 똑같은 통치 자세였다. 이런 자세에서는 남한에 미국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국가를 우선 세운 다음 군사력으로 북한을 통합하자는 내용으로 짐작되는 이승만의 제안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1943년 말의 카이로회담 무렵부터 미 국무성에서 구상해 온 연합국 공동참여의 신탁통치안이 그 창안자인 루스벨트가 없는 이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맥아더를 위시한 동아시아 지역 군정 담당자들이 보기에 일본 항복은 미국 원자탄의 힘으로 얻어낸 것이었고, 지금도 원자탄은 소련의 손발을 묶어놓는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등 다른 연합국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인 이 때, 구시대의 유물인 신탁통치안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길로 보였다.


한국의 군정 담당자들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미국식 민주주의’의 좁은 뜻으로 해석해서 일반 민중의 염원을 외면한 오만은 인종주의적 우월감과 함께 원자탄의 힘에 대한 믿음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반년간은 미국을 더 괴롭힐 것으로 예상되던 일본제국을 불과 일주일 만에 무릎을 꿇렸으니. 소련이고 나발이고, 이제 힘으로는 미국의 상대가 없다는 자신감이 미국 사회, 특히 미국 군부에 팽배했다.


빈센트 극동국장이 한국 신탁통치 방침을 발표한 1주일 후인 10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해군기념일 연설에서 미국의 군사적 사명 4개조와 외교원칙 12개조를 발표했다. 연합국과의 협력관계를 강조한 이 연설은 루스벨트의 다자주의-국제주의가 전후 상황에서도 계속 유효하다는 내용이었다. 빈센트의 발언에 대한 포괄적 확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며칠 후 남한 군정장관 아놀드는 신탁통치가 미국의 방침이 아님이 틀림없다고 기자들을 상대로 확언하고 있었다.


(問) 지난 20일 미국의 극동국장은 조선을 신탁통치국가로 할 의사를 말하였는데 무슨 정보라도 들어 왔는가? 또 미국독단으로 그런 말 할 수 있을까?

(答) 나도 제군이 쓴 신문기사를 보고서야 비로서 알았다. 신탁통치운동은 결국 조선사람의 손에 달린 문제다. 속히 독립하느냐가 조선 사람의 손에 달린 이상 조선 사람의 책임은 크다고 할 것이다. 군정청은 조선의 정부다.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다. 조선 사람이 공동전선을 펼치고 이 정부에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그만치 빠를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인이 이제부터 자주독립국가로서 충분히 걸어 갈 수 있다는 힘을 세계에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신탁국가니 무어니 하는 걱정을 하기 전에 먼저 조선민족이 대동단결하여 하나의 힘을 뭉치는데 매진하기 바란다.

또 극동국장 빈센트 씨의 말은 단지 개인의 의사에 지나지 않는 줄 믿는다. 그분의 말이 미국정부의 방침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식은 묵살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개인의 말을 가지고 경솔하게 침소봉대하여 민중을 흥분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월 31일에 하지를 만난 송진우가 한국인들에게 전해달라고 하지가 부탁했다는 이야기 중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커밍스는 다른 자료들과 대조하여 하지의 발언이 왜곡되지 않은 것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커밍스 위 책 285-286쪽)


“신탁통치를 운운하나 이것은 극동부장 1개인의 의견이요. 그 사람이 조선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사람이 결속하여 독립할 만한 힘을 배우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 38도 이남의 조선인이 내 말대로 일심협력하여 민족일치를 배우면 그것은 즉시 해결될 일이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0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연말의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 후 조작된 오보로 인해 반탁운동이 혼란스럽게 펼쳐질 때, 하지는 한민당-동아일보 측의 왜곡을 뒷받침해 혼란을 부채질했다.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왜곡이었다.


하지는 이 왜곡 내용을 그대로 믿었던 모양이다. 1월 23일에 스탈린이 해리먼 미국 대사를 불러 왜곡에 대해 항의하고 25일에 타스통신이 3상회담의 진상을 발표한 직후인 27일 국무성에서 타스통신의 보도 내용이 맞다는 사실을 하지에게 확인해 주자 그는 바로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만류에 못 이겨 2월 2일 사표를 철회하면서 하지는 분노에 찬 전보를 국무성으로 보냈다. “1월 27일의 메시지는 국무성이 여러 주 전에 본 사령부에 보냈어야 할 정보를 포함하고 암시하였다. (...) 타스 성명이 전적으로 진실이라는 확인은 내게 전혀 새로운 소식이다.” 운운의 내용을 담은 전보였다. 3상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한국 관련 정책노선을 주둔군 사령관인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불평이다.


커밍스는 위의 책 296쪽 이하 “톡톡히 망신당한 하지”라는 제목의 섹션에서 하지가 3상회담 이전에 충분한 통보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가 알고 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미국 정부에서 알려주는 방침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미군정의 권력을 운용한 것이었다.


하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놀드를 비롯한 그의 보좌관과 고문들이 다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군정 담당자들이 한국을 망치려는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짓이 아니었다. 무식하고 게을러서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것일 뿐이다.


정말 오래된 문제다. "주여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