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나올 때는 미군정이 그들의 귀국을 주선한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고,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을 모두들 기대했다. 김구의 특사 5인이 5일에 이승만을 방문해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7일자 <중앙신문>에 보도되었고, 임정 요인 30여 명의 “10일 내 귀국”을 이승만이 기자단에게 언명했다는 사실이 6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11월 10일 이전이라는 뜻인지 그 시점부터 10일 이내라는 뜻인지는 기사 문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귀국을 앞둔 김구의 담화도 7일자 <자유신문>에 실렸다.


[重慶5日發 中央社國際]한국임시정부주석 金九는 5일 귀국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국 및 美, 英, 蘇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긴밀히 할 것과 선거에 의한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데 있다. 또 나는 조선의 여하한 분할에 대하여도 허용할 수 없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0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6일자 <중앙신문>에는 임정 환국에 대한 이승만과 송진우, 그리고 이관술의 소감이 실렸다.


◊ 李承晩

“금월 10일 이전에 귀국하기로 된 것만은 사실인데 임시정부가 정식승인을 받지 않은 관계상 金九씨도 물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일 것이다. 또 그들이 금후 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도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물론 그 취지에는 찬성할 줄 믿는다.”

◊ 韓國民主黨 宋鎭禹

“오래동안 기대하던 임시정부주석 金九선생을 위시하여 정부요인 34인이 중경을 떠나 금일 상해에 도착하여 잠시 체재한 후 불일내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회가 깊은 바이다. 해외에서 수십년간 꾸준히 광복의 날을 찾고자 악전고투해 온 위대한 혁명가를 맞이한 우리 태도는 간단히 말하면 허심탄회하게 그이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환국하는 그 분들은 내 생각 같아서는 여러 가지 사정도 있어 정식정부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격으로 오는 것으로 보는데 결국은 개인이라 할지라도 정부의 수뇌부가 오게 되는 만큼 이를 맞이하는 우리는 정부를 맞이하는 심경이어야 할 것이다. 吾黨으로서는 원래가 임시정부를 절대지지하고 있음으로 환국한 후에도 그 방침에 변화는 없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절대지지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 즉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다. 현재 釀成되고 있는 민족통일전선결성운동은 매우 반가운 일이나 임시정부에 대하여 여하한 형식이건 무엇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다. 吾黨의 거취에 대하여서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없는 한 자진하여 해산할 의사는 없다.”

◊ 朝鮮共産黨 李觀述

“수십개 성상을 두고 해외에서 조국해방전선에 투쟁해 나온 선배제씨의 귀국에 제하여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앞으로 我黨이 이들을 여하히 맞이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는 누차 성명한 바와 같이 해외에 기존한 정권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그들을 개인의 자격으로 맞아들이려 하며 그들에게 대한 요망은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정권수립을 위하여 達觀的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0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공산당의 이관술이 임정 요인들에 대한 개인 차원의 경의를 표하면서도 “무조건하고 맞아 받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은 좌익의 일반적 입장이었다. 사회주의 원리를 중시하는 좌익으로서는 김구가 좌익을 적대해 온 경력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해외의 독립운동보다 국내의 노농운동이 더 존중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승만이 짤막한 논평에서 임정 요인들의 “개인 자격”을 강조한 것은 그의 상투수법이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권위는 임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임정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보다 더 확실한 근거를 임정에 두고 있던 김구 등 요인들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 자격을 강조함으로써 임정 권위로부터의 혜택을 자신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없도록 애쓴 것이었다.


송진우의 ‘절대 지지’ 논평은 한민당의 기존 노선 그대로다. 그런데 “다만 吾黨으로서는 적당한 기회에 국내사정에 鑑하여 수시로 진언할 일은 있을 것”이라는 한 마디가 그 속셈을 드러내는 것 같다. 임정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 예상되던 ‘민족통일전선’을 한민당은 드러내 반대하지는 못하면서도 실제로는 반대하던 속셈이다. 송진우는 한민당이 어떤 수단으로든 임정에 영향을 끼쳐 민족통일전선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이다.


임박한 임정의 귀국에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정의 지도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임정이 과연 어떤 역량과 노선을 가지고 나타날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0일자 <자유신문>의 아래 기사는 긴장감을 크게 증폭시켰을 것이다.


大韓民國臨時政府特派事務局 發表

1) 重慶에 外交辨事處 設置

우리 임시정부는 金九主席을 수반으로 목하 환국의 도정에 있는 바 중경에는 정부환국 후에 사무 처리를 위하여 특히 大韓民國臨時政府 外交辨事處를 설치하고 朴贊翊(南坡)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2) 광복군의 확대편성

제국주의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세계대전에 당당히 싸워 그 위훈을 세계에 알려 금번 우리 민족해방독립에 길을 열은 우리 광복군이 불원 환국하게 되었다. 환국을 앞두고 우리 정부에서는 李靑天將軍의 지휘 하에 다음의 확대편성과 맹훈련이 진행 중에 있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은 그 규모를 확장하여 대륙방면, 南洋비루마方面 等 태평양전에 被迫 출전한 학병, 지원병, 징병 등 韓籍軍人들을 흡수하기로 되어 특히 蔣介石將軍은 일본총사령부에 대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동시에 전부 광복군으로 편입하라는 명령을 쫓아 한적군인은 전부 이미 광복군편입을 완료하였다. 이리하여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은 다음과 같다.

第1支隊(重慶) 支隊長 李集中

第2支隊(西安) 支隊長 李範奭

第3支隊(開封) 支隊長 金學奎

第4支隊(南京) 編成中

國內支隊(京城) 司令 吳光成

그리고 우리 광복군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南京, 上海, 西安, 開封 4개처에 광복군훈련소를 설치하고 목하 귀국을 앞두고 주야 맹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0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다! “이미 대전에 출전하였던 광복군”이란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미-소 양군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병력을 임정이 몰고 들어온단다!


그런데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24일 기자회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 光復軍은 언제 귀국하나?

(답) 시기가 상조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日軍의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규합하여 조직과 훈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총사령부도 중경에 있다. 총세는 약 1만이 된다.

중앙신문 1945년 11월 2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0일자 보도에서 “이미 대전에 출전”했다는 것은 일본군으로 출전했다는 말인가?


임정이 5일 상해로 나올 때 미군정은 이미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 후 보름 남짓 귀국이 늦어진 것이 정부 자격의 귀국을 주장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정부 자격이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임정의 누구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통할 수 없는 주장에 매달려 귀국을 늦춘 것은 임정 쪽 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이 광복군의 확장 시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후원과 지지를 받아 온 임정은 마지막 큰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만주를 제외한 중국 전역(대만 포함)과 동남아 상당 지역에서 일본군 항복 접수를 맡은 장개석 군대가 조선인 포로들을 임정에 넘겨주기를 바란 것이다. 조선인 포로의 수가 20만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총세 20만을 넘는 우리 정부 정규군”이란 이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11월 5일 상해 도착 후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새로 편성된 ‘광복군’ 병력을 시찰하기 바빴다. 그러나 포로를 그렇게 대거 빼돌리는 것은 장개석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포로를 면하기 위해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광복군에 접선한 일부 장병(박정희도 그런 경우로 보인다.)이 형식적으로라도 편입되었을 뿐, 부대를 따라 정식으로 항복한 포로들은 건드릴 수 없었다. 장개석은 장래 한국과의 관계와 관련해 임정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래서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20만 포로를 빼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정은 이청천, 이범석 등 광복군 요인들에게 포로 획득 사업을 맡겨 중국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26년간 지키고 쌓아온 임정의 권위와 가치는 민족주의의 깃발로서 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종전에 따른 급격한 변화 속에서 도덕적 권위를 넘는 현실적 힘을 확보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했다. 그 도덕적 권위에 손상이 되는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

 

스무 살에 잃었던 나라를 35년이 지난 이제 되찾게 되는가? 일본이 앞으로 몇 달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독일이 패망했다는 소식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온 세상을 휩쓸 것 같던 독일과 일본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눈앞이 캄캄했던 것이 4년 전이었던가? 그 기세등등하던 독일을 거꾸러트린 연합국들을 일본 혼자 어떻게 상대해 내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과연 나라를 되찾는 것이 맞는가? 연전에 연합국 수반들이 카이로에 모여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고 결정했다는 데 우리는 희망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연합국에만 믿고 매달릴 수 있는 일일까? 영국은 일본, 독일보다 더한 제국주의 국가였고, 미국도 필리핀 지배를 보면 말과 행동이 똑같지 않은 것 같다. 소련도 코민테른의 그 동안 행각이 석연치 않다. 인민해방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권도에 치우치고 폭력을 숭상하는 태도가 제국주의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대로 믿을 만한 것이 중국뿐인 듯하다. 중국은 그 힘이 넘칠 때도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중국이 조선을 영토 안에 끌어넣으려는 야욕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 스스로를 지킬 힘도 모자라 명색이 연합국이지, 연합국 사이에서 언권이 그리 클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라를 내 힘으로 되찾지 못하고 남이 되찾아 준다는 것이 정말로 되찾는 것일 수 있을까? 내가 내 나라를 ‘가졌다’는 것은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권리만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 가진 사람은 나라에 대한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가지는 것이다. 나라를 내 노력으로 되찾는다면 그 과정에서부터 나라에 대한 내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해방을 선물처럼 가져다줄 때, 우리가 나라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6년 전 감옥에서 나와 해방의 희망을 떠올릴 때부터 나는 이 문제가 걱정되었다. 그때 희망을 떠올린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신간회가 좌절된 후 독립의 희망을 잃고 있다가 일본이 중일전쟁을 터뜨린 것을 보고 일본제국이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조선을 집어삼킨 그 야욕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한없이 키워가는 것을 보면, 당장은 비록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도 파탄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단재 선생 뒤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오십 나이에 스스로 추스르기도 힘든 이 몸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변변찮으나마 분수에 맞는 길을 찾자 생각하고 역사 공부에 매달려 왔다.


역사 공부. 그렇다. 누구에게나 자기 하는 일이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겠지만, 공부를 할수록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역사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어떤 사업이든 생각과 행동의 양면이 합쳐져서 의미를 가지고 성과를 이루는 것이다. 독립 사업의 생각 측면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보다 역사 공부다. 그래서 단재 선생께서도 역사 공부에 그토록 공을 들이셨던 것이 아닌가.


나라 잃고 삼십여 년을 지내는 동안 조선 사람들의 조선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흐려져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조선 백성의 절반 이상이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인이었던 청년과 소년이다. 교육을 많이 받고 중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일본어를 많이 쓰지 않을 수 없고, 그중에는 스스로를 ‘황국 신민’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 해방을 몇 달 안의 일로 내다보고 있지만, 6년 전 해방의 희망을 떠올릴 때는 해방이 6~7년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올 것 아니겠냐는 정도의 막연한 희망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외부 활동을 삼가고 역사 공부에 매달렸다. <조선일보> 일할 때도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여가에 틈틈이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해방이 되기는 되리라는 확신이 들자, 다른 일에 쓸 시간이 아깝게 되었다.


금년 내에 해방을 맞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이 나라를 어느 길로 끌고 나가자고 나서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길로 향할지를 올바르게 정하려면 우리가 어디로부터 어떤 길을 거쳐 이 자리에 와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 민족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와 함께 어떤 약점이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모르는 채로 남이 하는 양만 보고 그럴싸한 길을 고른다면 일본의 꽁무니에서 다른 이의 꽁무니로 옮겨가는 데 그치게 된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바빠진다. 내 공부가 너무 부족하다. 십여 년간 단재 선생을 바라보며 공부의 길을 찾아 왔지만, 이제 그분만 바라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분은 해방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위 차원의 진로를 생각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당면한 현실로 다가오는 이제, 새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선생께서 내놓으신 ‘민족주의’가 해방의 그날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해방되는 바로 그날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필요하게 된다. 애벌레에게는 애벌레의 원리가 있고 나비에게는 나비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아! 선생께서 아직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신민족주의’의 길도 앞장서서 헤쳐 주셨을 텐데!


--------------------------------------------------------------

연재 독자 아닌 책 독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너머 여러분과 의논하다가 매달 정리하는 글을 한 꼭지씩 만들어 넣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글을 어떤 형태로 만들까, 궁리하다가 민세 안재홍 선생이 한 달 한 달을 맞을 때 어떤 상념을 품고 있었을지 가상적으로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괜찮은 길이 될지, 여러분 의견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Posted by 문천

 

하지는 여러 차례 발언과 성명에서 ‘민주주의’를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뜻으로 썼다. ‘민주주의’란 그에게 정의와 진리를 뜻하는 말이었으며, 그것이 미국식 자본주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31일 송진우에게 하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첫 번 왔을 때 조선인이 전부 반민주주의화한 줄 알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진상을 알고 보니 전 민중은 모두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찬성하더라.”


일본인 관리와 군인들은 진주 전의 하지 사령부에 좌익의 위협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과 한국인 사이가 불편해야만 입장이 편해질 일본인들이 미 군부의 좌익 혐오증을 겨냥해 이간질을 시도할 동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하지에게 모든 한국인이 빨갱이로 보였을 것이다. 가장 덜 빨간 한민당조차 8대 정책 노선 중에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와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 들어 있었으니 정말 믿을 놈 없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민당 사람들과 접해 보니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소수 “무뢰한, 허무주의자, 파괴주의자”만 배제하면 ‘민주주의’를 한국 땅에 옮겨 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극우파의 눈에 자기네 외의 모든 사람이 좌파로 보인다는 것은 오늘날도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만 여러 해 살아오던 하지에게 정의와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국인이 싫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을 것이다. 정의와 진리를 가르쳐줄 사명감을 느꼈을 것이다. 점령 초기 하지의 한국 상황 파악을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펴냄) 255쪽에 이렇게 그렸다.


9월에는 인민공화국이 사소한 문제 정도로 보일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그 보수적 반대파를 미군이 지원해 주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점령군이 지방으로 퍼져 나가 보고를 보내기 시작하자 군정 당국자들의 눈에 인민공화국의 영향력 범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인민공화국은 전국을 채우는 강력한 조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서울에서 말다툼으로 소일하는 ‘돈에 밝은’ 노인네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하지는 서울의 위태로운 상황을 낭떠러지 가에 서 있는 것 같다느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활화산을 깔고 앉은 것 같다느니 하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했다. 인민공화국이 “모든 층위에서 정부로 조직된” 반면 한민당은 “대부분 지역에서 조직을 못 갖췄거나 갖췄더라도 빈약한” 상태이며, 민중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정보를 하지는 받고 있었다. “군정청의 개입 없이는 (인민공화국 외의) 어떤 정당도 세력을 키울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었다. (필자의 재번역)


민주주의란 주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의 ‘민주주의’는 정의와 진리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와 진리,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그래서 그는 대다수 한국인을 상대로 투쟁에 나서야 했다.


커밍스가 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라 한 의미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공 중앙이 지방을 향해 발휘하는 힘은 크지 않았다. 자치조직 결성을 촉구하는 지침을 내보낼 뿐이지, 조직의 운영 노선은커녕 조직의 표준적 방법조차 정해주지 않았다. 인민위원회 활동이 자유롭던 북한 지역에서는 10월 8~10일에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열어 조직방법을 표준화했으나, 남한 지역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도 단위 인민위원회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전술부대와 군정팀 배치가 완료되기까지 몇 달 동안 남한 대부분 지역은 권력 공백 상태에 있었다. 각도 지사와 경찰부장 자리에 일본인들이 그대로 앉아 있든, 미군 장교로 대치되었든, 식민지시대 같은 통제력이 없는 상태에서 식민통치 기구 말단부와 주민 자치조직이 다양한 형태의 관계로 어울려 있었다. 주민 자치조직이 식민지 체제를 벗어나 중앙과 연결을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인공뿐이었고, 그것이 인공의 ‘영향력’이었다. 커밍스도 위 책 259쪽에서 11월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때까지 “서울에 있는 인공 지도자들은 지방에서의 운동 범위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밑으로부터의 조직 분위기는 노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11월 5~6일의 결성대회를 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위원회를 만들어 경영권을 넘겨받고 있었다. 이 위원회들이 그 동안 노동조합 형태로 체제를 정비한 결과 전국 조직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었다.


전평 결성 직후인 11월 16일의 군정청 광공국 비망록을 보면 실무자들은 상황을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은 곳에서 일본인 소유자들을 축출하고 경영권을 장악한 노동자위원회는 일방적 탄압보다는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통해 통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정한 대표성을 가진 조합을 함양함으로써 그저 이전 주인들을 쫓아내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공장 재개를 위한 확고한 계획을 가지지 못한 무책임한 선동분자들을 솎아내는 방향의 군정청 정책(이 바람직하다.) (...) 미군은 모든 노동자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로 이뤄졌다는 결론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집단이란 것이 대부분 알고 보면 상당히 온건한 것이었다. (커밍스 위 책 262쪽, 필자 재번역)


그런데도 하지는 ‘무뢰한’, ‘파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의 모든 자치적 노력을 매도했다. 그의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미군정 성과가 미흡한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계속 과장한 것도 같다. 정병준이 <우남 이승만 연구> 10-12장에서 지적한 바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에 도전하는 의지도 작용했을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비망록의 작성자는 “모든 노동자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로 이뤄졌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군정 간부들의 경향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유대로 노동조합을 함양하는 노력을 미군정이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비약된 결론에 대한 간부들의 집착이 흔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 동안 전평은 좌익의 지도하에 조직과 활동을 펼쳐나갔고, 머지않아 좌익의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으로 활약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