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3. 16:00

아내가 한 열흘 계속해서 12시간 근무를 하는 중에 하루 겨우 쉬는 날인데, 나는 오늘 아니면 또 여러 날 어머니 가 뵙기 힘들다. 혼자 다녀오려는데, 자기는 두 달 가까이 뵙지 못했다고 따라 나서 준다. 좀 쉬어야 하지 않냐 했더니 자기한테 운전만 시키지 않으면 된다고.


마침 볕이 좋고 포근하기에 현관 앞 테라스에 모시고 나와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었다. 직접 닿는 햇볕과 바람을 정말 좋아하신다. 순간순간을 즐기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말씀도 많이 안 하신다. 햇볕과 바람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표정의 섬세한 변화를 일으키다가 한 마디씩 불쑥 꺼내거나 드리는 말씀에 대꾸하실 때는 말한다는 행위 자체도 즐거움으로 누리시는 듯하다.


잠깐 구름 끝자락이 해를 가렸을 때, “햇볕이 들어갔네요. 선선하지 않으세요? 이제 들어가실까요?” 했더니 “괜찮다. 이건 이것대로 좋구나.” 하며 편안한 웃음이 얼굴에 넘치신다. 해가 좀 기울고 나서 모시고 홀에 들어오니 텔레비전에 국악 공연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편안하게 구경하신다. “저게 어디냐?” 한 차례 물으시기에 “비원 같네요.”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관람을 즐기신다.


잠시 후 아내가 좀 쉬라고 권하기에 어머니 침대에 잠깐 눕는다고 누웠는데, 아내가 깨워 일어나 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 식탁에 앉아 계신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왔다. 오늘은 모시고 앉은 시간이 너무 짧아서인지 조금 서운한 기색을 보이셨지만, 나도 좀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서둘러 떠났다. 아내도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


너무 큰일을 벌여 놨다. <<프레시안>>에 <해방일기> 연재를 시작한 지 4개월째인데, 어떤 식으로 써 나갈지 아직도 생각할 점이 많다.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전력을 집중해야 좀 편안하게 일을 해나갈 틀이 잡힐 것 같다.


이곳에 모셔놓고 16개월간 찾아뵐 때마다 방문기를 적던 습관이 한 달 전에 끊어졌다. 10월 14일과 11월 3일 방문기를 쓰지 못했다. 책으로 묶어 낼 방침을 세운 것 때문에 생각이 복잡한 것도 한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다. 만족스럽게 글을 풀어낼 만한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 안 된다. 기운이 모자라면 문장 하나하나가 꼬여버린다.


정말로 제일 큰 이유는 방문기를 적을 동기가 이제 전처럼 절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2년 전 병원 계실 때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예상외의 회복 기미를 보이시는 데 고무되어 미국의 형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어머니 모습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 후 어머니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회복에 찬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왔다. 출판 방침을 세우고 글을 모아보니 원고지 1,300매 분량이나 된다.


‘일기’는 우리 집 전통이 되었다. 아버지 전쟁일기가 <역사앞에서>로 출간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니 ‘육아일기’도 오래 전에 조금 본 기억으로 가치가 큰 기록 같은데 쓰러지신 후 소지품 정리하면서 찾지 못했다. 내 ‘시병일기’가 그 전통을 잇는 셈인데, 게다가 역사평론 작업까지 <해방일기>란 이름으로 하고 있다.


‘일기’란 것이 원래 제 일기 자기가 쓰는 것인데, 육아일기는 아이들 일기를 어머니가 써주는 셈이고, 시병일기는 어버이 일기를 자식이 써드리는 셈이다.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는 상대를 보살펴주면서 적는 기록이다. 아버지 전쟁일기도 그분 개인의 일기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한 기록이었는데, 전란에 휩쓸려 사회의 올바른 기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나서서 적으신 것이었다.


학교 들어가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 인생 사는 아이의 육아일기를 어머니가 써준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시병일기도 어머니가 독립적인 생활을 못하시는 상황에서 적던 것이다. 요양원 가셔서도 생활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시병일기 쓰던 습관을 이어서 방문기를 계속 써 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좀 실없는 짓이란 느낌이 든다.


요즘도 어머니 모시고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다. 삶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많이 확인받을 수 있고, 더러 새로운 깨우침도 얻는다. 그러면 됐지, 그걸 적어서 뭘 하나. 그분은 이제 내가 대변해 드리지 않아도 당신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며 지내신다. 어머니 상황이 궁금하면 내 글 읽을 필요 없이 찾아가 뵈면 되고, 잘 아는 분들 같으면 전화만 드려도 된다.


2008년 11월 24일 시병일기를 시작하던 첫 대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많이 맑아지신 것 같다. 영양상태, 혈액순환 등 건강의 기본조건이 안정되신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큰 회복을 바랄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 달 되었나? MRI 뇌 촬영을 한 후 한 선생도 ‘뇌가 쪼그라드신다’는 표현으로, 뇌 세포의 신진대사가 거의 막힌 본격적 노쇠현상이니 이제 더 다른 검사를 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체념을 권했었다.


그래도 좋아지신 상태가 1주일 가까이 유지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사람 못 알아보시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상태를 반시간도 유지하지 못하시던 분이 눈알을 또록또록 움직이시고, 주변의 배려를 느낄 때는 입술을 오므려 웃음도 띠신다.”


그 시점에서 나는 어머니가 당신 인생을 다시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떠나실 날을 앞두고 괴로움이 덜하신 것,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는 것이 고맙고 반가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와 휠체어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주변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베풀어주며 지내고 계시다. 세종너싱홈 직원들의 억지 공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든 어머니 얼굴을 몇 초만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생각하면, 떠날 날을 앞두지 않고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물이 절반 담긴 그릇을 보며 “절반 밖에 없군!” 할 수도 있고 “절반이나 있네!”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떠날 날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할 때 “언제고 만회할 길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었다. 수십 년 동안 불효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떠나실 날 앞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게 되면서 다른 일도 생활도 정성껏 하게 되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떠날 날 앞두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청개구리 중에도 이 미련한 청개구리 깨우쳐주느라고,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늘 좋아하시는 이 노래 오늘 불러드릴 때는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송아지, 송아지, 멍청송아지

엄마소도 멍청소, 엄마 닮았네.

강아지, 강아지, 신통강아지

엄마개도 신통개, 엄마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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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얼마 전 <민세 안재홍 선집>(7책, 지식산업사 펴냄)을 구해 틈틈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해방공간 내내 중요한 행위자의 하나이면서도 꾸준한 관찰자의 위치를 지킨 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따금 그분과의 가상적 대화를 통해 그분의 관점에서도 벗어나지 않으리라 판단되는 범위 안에서 제 관점을 내놓는 서술방법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김기협 : 선생님이 이끄는 국민당에서 며칠 전 성명서로 ‘해당(解黨)’ 용의를 밝혔습니다. “민족전선의 전면적 완전 통일정당의 결성이 진취된다면”이란 조건이기는 하지만, 국민당처럼 큰 정당이 해당 용의를 밝힌다는 데서 결연한 의지를 느낍니다. 정당 난립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운형 선생을 위원장으로 인민당이 결성되었지요. 해방 당일부터 건준을 두 분이 함께 이끌던 것이 석 달도 안 된 일입니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인공 수립을 앞두고 건준을 떠나 국민당을 이끌어 왔고, 여 선생은 건준과 인공을 계속 대표해 오다가 이제 정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건준에서 두 분 선생님은 깊은 신뢰를 나눴고, 선생님이 건준을 떠나면서도 그 신뢰는 변함없다고 하셨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 선생이 이끄는 좌익정당 인민당에 대해 우익정당 국민당 지도자로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지요?


안재홍 : 세간에서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기에 바쁘지만, 여 선생과 나 사이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취향의 차이가 조금 있더라도 막중한 건국 대업 앞에서는 그 차이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 선생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내가 말하는 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을 좇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 선생과 나만이 아니라 지금 이 나라의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해방’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인의 억압 대신 조선인의 억압을 받는다고 해방이 됩니까?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억압체제의 철폐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인권을 받드는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충실히 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적용해야 합니다.

모두 같은 마음인데도 이런저런 오해 때문에 힘을 제대로 합치기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좌익과 우익 사이의 불신이죠. 초년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해 온 여 선생은 좌익에서 성망이 있는 분이고, 나는 신간회와 물산장려 운동 등을 우익 인사들과 함께 하면서 꽤 많은 신뢰를 나눠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건준을 함께 할 때 좌우익을 둘이 분담해서 건준 참여를 설득하기로 한 것이었죠.

지금은 자주 만나 서로 확인하지는 않지만 그 역할 분담은 끝없이 계속되는 일입니다. 전에는 건준 안에서 하던 일을 이제 그 밖에서 하게 된 것일 뿐이죠. 사소한 이해관계나 오해 때문에 민족의 대의를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살피는 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건준의 이름으로든, 인민당과 국민당의 이름으로든.


김기협 : 지금 인민당 만드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 선생을 지도자로 모셔온 이들이죠. 그들이 해방 전부터 ‘건국동맹’이란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도 여 선생과 뜻을 함께 해 왔는데, 왜 건국동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나요?


안재홍 : 그런 조직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가입했을 텐데, 난 몰랐어요. 나는 여 선생과 의기투합하는 줄 알았는데, 내 짝사랑이었나?

해방 전 몇 해 동안 여 선생과 자주 만나며 거리낌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지냈어요. 그분이 내게 그런 일을 감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아마 해방 후 활동을 하려니까 주변 분들이 작은 모임 있었던 것을 좀 과대포장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분도 그런 일에는 좀 대범한 편이라서...


김기협 : 선생님께서는 인민당에 있는 어느 분 못지않게 여 선생의 마음을 잘 아는 분입니다. 인민당을 통해 여 선생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안재홍 : 아까도 말했듯이 좌익의 설득입니다. 민족의 깃발을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설득이지요.

좌익 사상에는 민족을 소홀히 할 요소가 있습니다. 계급관계를 극단적으로 중시해서 민족, 가족 등 다른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사례를 각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죠.

여 선생과 나는 그 관점을 아주 틀린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시의성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의 용어를 써서, 지금은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중시되는 상황입니다. 민족주의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당면의 지상과제이고, 계급 문제는 일단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 놓은 다음 서서히 극복해 나갈 장기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시 그들의 용어로, 지금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김기협 : 선생님의 ‘신민족주의’ 담론이 바로 민족주의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기 위한 노력이군요. 기존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요?


안재홍 : 내게 민족주의의 의미를 깊이 일깨워준 단재 선생께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말씀했죠. 외람되지만 나는 이것이 식민지 상태 민족주의의 역사관이고, 독립민족의 민족주의는 이와 달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년 전 출옥 후 대외활동을 아예 없애다시피 줄여버리고 역사 공부에 매달려 지냈습니다. 중일전쟁의 양상을 보며 일본의 패망을 필지(必至)의 일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패망하면 민족이 독립할 텐데, 그때를 위해 민족주의 사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단재 선생의 민족주의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관계만을 본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전체 인류 사이의 관계가 없습니다. 지배민족인 일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독립이 되면 우리 민족이 전체 인류, 다른 모든 민족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투쟁만이 아니라 협조의 관계, 경쟁의 관계도 맺게 됩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다양한 대외관계 속에서 민족의 입장을 적절히 세우기 위해 역사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기협 : 독립민족의 민족주의가 식민지시대보다 포용성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해방 시점에서는 어땠을지요. 당시 민족정기 수립의 실패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쉬워하면서 무엇보다 친일파에 대한 단호한 처단이 안 된 사실을 통탄합니다. 그 시점에서는 포용성과 유연성보다 추상같은 민족주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 그렇게들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실패한다면 투쟁성과 선명성의 부족이 아니라 포용성과 유연성의 부족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흑백론에는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만을 구분하는 흑백론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양심적인 일본인과 비양심적인 조선인에게 어떤 자리가 주어집니까? 매국적 친일파까지 우리 민족이라고 끌어안으면서 선량한 일본인까지 적이라고 박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친일파를 어느 범위로 규정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큰 문제입니다. 표 나게 심한 친일 행위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수십 년 지속되는 식민지 상태에서 나름대로 선량한 자세를 지켜온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통치에 협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고급 직종에 종사한 사람들,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이 애매한 문제 때문에 불신이 생깁니다. 좌익에서는 친일파를 넓게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교육 수준과 재산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최대한 배제하면 진정한 인민 주권의 낙토가 앞당겨 이뤄질 것으로 믿으니까요. 이로 인해 유산계층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갖게 됩니다. 좌익이 주도권을 쥐면 죄 없는 사람들까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선배, 동지들을 포함해 식자층의 많은 사람들이 한민당에 몰리는 것도 이 의구심 때문입니다. 원칙은 국민당의 것이 옳지만 현실에 대처하는 힘이 한민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덕분에 한민당은 군정청과의 유착관계에 더 힘을 가지게 되고, 좌익은 좌익대로 불안감과 적개심을 더욱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김구 주석 이하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목마르게 기다려 온 것도 이 까닭입니다. 민족주의의 최고 권위인 임정과 김 주석이 민족주의의 기준, 친일파 처리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주면 불필요한 불신을 제거하고 적대감의 악순환을 막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임정과 김 주석의 권위를 빌리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기 바랍니다. 교육과 재산을 많이 누린 사람들은 적극적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식민통치의 혜택을 누린 사실을 인정하고 특권을 양보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겠지요. 또, 구체적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반성하고 민족사회를 위해 봉사할 자세를 보인다면 용납할 수 있겠지요. 과거의 행적보다 현재의 자세를 중시하며 화합의 폭을 최대한 늘리는 길, 이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찾는 길이고, 내 ‘신민족주의’도 여기에 보탬이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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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 선생을 이 작업에 끌어들이고 싶어서 매월 한 차례씩 그분 말씀 듣는 식으로 글을 꾸며볼까 하고 며칠 전 샘플을 만들어봤죠. 그런데 신통치 않게들 보시는지 댓글을 안 달아 주시고, "무슨 수필 쓰슈?" 하는 야지밖에 없네요.
그래서 아쉽지만 그 시도를 포기하고 새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것도 좋게들 봐주실 것 같지 않아서 아예 여러분 의견 듣지도 않고 <프레시안>에 보내 버렸어요. 이렇게 여러분을 믿지 못하게 되다니, 슬픕니다. ㅠㅠ

Posted by 문천

 

사십년이란 긴 동안 우리 농민의 피를 빼앗고 살을 깎아 오던 동양척식회사도 해방과 함께 착취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명칭도 新朝鮮會社라고 변경하여 조선농촌의 재건과 조선을 복리시키는 기관으로 새 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회사의 전 재산은 군정청관리로 되어 일본인 직원 967명도 전부 파면하고 조선 사람의 손으로 강력하고 자유로운 독립 신조선을 건설하는데 전력을 경주할 터이라고 한다.

중앙신문, 매일신보 1945년 11월 11일, 1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식민지배의 ‘첨병’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은 첨병보다 ‘주체’로 볼 측면이 많다. 총독부에 버금가는 대지주로서 동척의 경제적 역할도 엄청난 것이었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사회구조 변화에 대한 동척의 영향력이었다.


식민지시대를 통해 조금 줄어들기는 했어도 농업은 해방 때까지 조선의 산업에서 압도적 비중을 지키고 있었다. 주민 대다수는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고 있었다. 왕조시대부터 계속된 일이지만, 식민통치는 그 실제 양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식민지시대 농업과 농촌의 변화에 관해 많은 연구가 쌓여 왔고, 이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 나로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으나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착취’의 양적 고찰보다 ‘소유’ 개념의 질적 변화가 더 부각되기 바란다는 점이다. 근대적 ‘사유권’ 도입이 일으킨 변화를 매우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도 사유권은 확장되고 있었다. ‘중세사회 해체’ 현상의 핵심 요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권의 대상이 아무리 늘어나도 농지의 ‘왕토(王土)’ 관념만은 사유권의 적용을 거부하며 전통적 농업사회의 마지막 보루로 버티고 있었다.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 대지주라 할지라도 그 땅을 경작하는 ‘소민(小民)’의 권익을 묵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작인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고, 관행 이상으로 지대율을 높일 수도 없었다.


지주의 소유권은 소작인의 경작권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유권과 경작권이 이렇게 어울리는 관계를 통해 지주 역시 ‘농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동척을 앞세운 식민통치는 농업공동체를 깨뜨리고 농지 소유권을 절대화했다.


동척 출범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1만7천여 정보의 농지를 출자했는데,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20년대에는 전국 경작지의 3분의 1인 9만7천여 정보로 늘어났다. 이 증가의 대부분은 매입으로 이뤄진 것이지만 여기에도 소유권 개념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로운 절대적 소유권이 전통적 지주 소유권보다 더 높은 수익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농지의 경제적 가치를 높임으로써 종래의 지주들이 동척에 땅을 파는 추세를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1931년 생으로 익산 농촌에서 살던 윤성남의 회고는 이런 추세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를 했지 일본 사람에게는 안 팔았어요. 그러니까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경우보다 가격을 더 쳐줬어요. 어떤 경우에는 30퍼센트까지 더 줬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그 논을 사서 일본 농장에 합친 다음에도 원래 주인이 필요할 때까지 농사를 그냥 지어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주들은 조선 사람한테 논을 팔면 제값도 못 받는 반면 일본 사람한테 팔면 돈을 더 받고 나서도 2, 3년이고 무료로 지어먹으니까 일본 사람들한테 팔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다들 일본 놈들한테 논을 팔다보니까 어느 정도 자기들 계획한 양이 찼어요. 그 다음부터는 조선 사람들끼리 거래하는 금액보다도 더 낮은 가격에 땅을 사들였어요. 파는 사람도 낮게 팔았어요. 왜? 그냥 지어먹을 수 있으니까. (문제안 외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09-210쪽)


절대적 소유권은 어떻게 수익성을 높일 수 있었나? 경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소작인을 마음대로 잘라 가며 지대율을 마음껏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 원리가 도입된 것이다.


왕조시대 지주의 횡포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지만, 이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경작권이 존중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주의 ‘이윤 극대화’에 적합한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소작인들이 경작권에 매달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자유시장 원리를 도입하니 노동력 공급이 넘칠 수밖에 없고, 수확의 절반을 마지노선으로 지키고 있던 지대율은 7할을 넘어 8할까지 치솟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수 소작인들이 경작권을 잃고 유랑의 길에 올랐다.


1921년 생으로 김제 동진농장 소작인으로 있었던 최재순은 ‘근대화’된 농장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소작료가 얼마라고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모심을 때부터, 가꾸고 베어서 타작할 때까지 전부 공동작업을 했기 때문에 수확을 끝내고 똑같이 나눴어요. 거기서 소작료 빼고, 농사짓는 동안에 생활용품이나 비료니 사다 쓴 빚을 모두 제하고, 또 ‘수세’라는 물값도 걷어갔어요. 그렇게 딱딱 계산하고 나면 논 한 자락에서 나는 쌀만치도 남는 게 없이 다 가져갔지요.

그럼 농민들은 뭘 먹고 살겠어요? 죽어라고 농사지어봤자 한 가마도 가져오지 못하는데. 그러니까 이제 모두 다 같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니까, 타작할 때 슬슬 돌아다니면서 땅을 흩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위를 지푸라기로 살짝 덮어놓았다가 타작을 끝내고 다 거둬간 뒤에 바닥에 있는 낟알들을 쓸어 담아 말려서 1년 내내 두고 먹었어요. 물론 감독하는 사람들도 농사짓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다 굶어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모른 척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문제안 외 같은 책 216쪽)


해방 후 신조선회사로 개편될 때(몇 달 후 ‘신한공사’로 이름을 바꾼다.) 동척의 소유 경지는 전체 농지의 12.3%에 달했으며 이를 경작하는 농가는 58만7974호로 전체농가 217만 2435호의 27.1%였다고 한다.(<위키백과> “동양척식”조) 1920년대 이후 불하를 통해 소유 경지를 줄여 왔는데, 불하받은 개인과 회사들은 이를 절대적 소유권에 입각한 농장 형태로 경영했다. 뿐만 아니라 김성수 집안 같은 기존 지주들도 농장 형태를 채용해 부를 늘렸으니 해방 당시 한국 농지의 대충 절반은 동척 스타일 농장으로 경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작권을 묵살하는 자유시장 원리는 그밖의 지주들에게도 많이 파급되었을 것이다.


해방 후 대다수 한국인이 사회주의 원리의 도입을 바라고, 그중에서도 토지 소유제도의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넓고 깊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인구의 근 80%가 농촌에 거주하는 상황에서 도시 중산층이라도 농촌에 배경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농촌에 배경을 가진 것은 자본가 집단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당시 한국인 자본의 대부분이 지주자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상공업 분야 자본가들도 지주자본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형태의 토지개혁이든 해방과 토지개혁을 직결시키는 일반 민심이 그들에게는 자본가 위상에 대한 위협이었다. 구체적 친일 경력에 관계없이 구체제에 집착하는 반동적 경향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고, 이 경향이 한민당의 배경이 되었다.


‘동양척식회사’를 ‘신조선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 직원들을 파면한 것은 간판과 외장을 바꾼 것일 뿐이다. 동척의 구조와 기능은 그대로 남긴 것이다. 한민당조차 민심을 외면하지 못해 9월 6일의 발기회에서 정책 8개조의 하나로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내세웠던 것인데, 미군정은 민심을 직시할 뜻을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