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는 여러 차례 발언과 성명에서 ‘민주주의’를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뜻으로 썼다. ‘민주주의’란 그에게 정의와 진리를 뜻하는 말이었으며, 그것이 미국식 자본주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31일 송진우에게 하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첫 번 왔을 때 조선인이 전부 반민주주의화한 줄 알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진상을 알고 보니 전 민중은 모두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찬성하더라.”


일본인 관리와 군인들은 진주 전의 하지 사령부에 좌익의 위협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과 한국인 사이가 불편해야만 입장이 편해질 일본인들이 미 군부의 좌익 혐오증을 겨냥해 이간질을 시도할 동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하지에게 모든 한국인이 빨갱이로 보였을 것이다. 가장 덜 빨간 한민당조차 8대 정책 노선 중에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와 “토지 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 들어 있었으니 정말 믿을 놈 없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민당 사람들과 접해 보니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소수 “무뢰한, 허무주의자, 파괴주의자”만 배제하면 ‘민주주의’를 한국 땅에 옮겨 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극우파의 눈에 자기네 외의 모든 사람이 좌파로 보인다는 것은 오늘날도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만 여러 해 살아오던 하지에게 정의와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국인이 싫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을 것이다. 정의와 진리를 가르쳐줄 사명감을 느꼈을 것이다. 점령 초기 하지의 한국 상황 파악을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펴냄) 255쪽에 이렇게 그렸다.


9월에는 인민공화국이 사소한 문제 정도로 보일 수 있었다. 서울에 있는 그 보수적 반대파를 미군이 지원해 주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점령군이 지방으로 퍼져 나가 보고를 보내기 시작하자 군정 당국자들의 눈에 인민공화국의 영향력 범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인민공화국은 전국을 채우는 강력한 조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서울에서 말다툼으로 소일하는 ‘돈에 밝은’ 노인네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하지는 서울의 위태로운 상황을 낭떠러지 가에 서 있는 것 같다느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활화산을 깔고 앉은 것 같다느니 하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했다. 인민공화국이 “모든 층위에서 정부로 조직된” 반면 한민당은 “대부분 지역에서 조직을 못 갖췄거나 갖췄더라도 빈약한” 상태이며, 민중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정보를 하지는 받고 있었다. “군정청의 개입 없이는 (인민공화국 외의) 어떤 정당도 세력을 키울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었다. (필자의 재번역)


민주주의란 주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의 ‘민주주의’는 정의와 진리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와 진리,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그래서 그는 대다수 한국인을 상대로 투쟁에 나서야 했다.


커밍스가 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라 한 의미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공 중앙이 지방을 향해 발휘하는 힘은 크지 않았다. 자치조직 결성을 촉구하는 지침을 내보낼 뿐이지, 조직의 운영 노선은커녕 조직의 표준적 방법조차 정해주지 않았다. 인민위원회 활동이 자유롭던 북한 지역에서는 10월 8~10일에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열어 조직방법을 표준화했으나, 남한 지역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도 단위 인민위원회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전술부대와 군정팀 배치가 완료되기까지 몇 달 동안 남한 대부분 지역은 권력 공백 상태에 있었다. 각도 지사와 경찰부장 자리에 일본인들이 그대로 앉아 있든, 미군 장교로 대치되었든, 식민지시대 같은 통제력이 없는 상태에서 식민통치 기구 말단부와 주민 자치조직이 다양한 형태의 관계로 어울려 있었다. 주민 자치조직이 식민지 체제를 벗어나 중앙과 연결을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인공뿐이었고, 그것이 인공의 ‘영향력’이었다. 커밍스도 위 책 259쪽에서 11월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때까지 “서울에 있는 인공 지도자들은 지방에서의 운동 범위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밑으로부터의 조직 분위기는 노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11월 5~6일의 결성대회를 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위원회를 만들어 경영권을 넘겨받고 있었다. 이 위원회들이 그 동안 노동조합 형태로 체제를 정비한 결과 전국 조직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었다.


전평 결성 직후인 11월 16일의 군정청 광공국 비망록을 보면 실무자들은 상황을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많은 곳에서 일본인 소유자들을 축출하고 경영권을 장악한 노동자위원회는 일방적 탄압보다는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통해 통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정한 대표성을 가진 조합을 함양함으로써 그저 이전 주인들을 쫓아내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공장 재개를 위한 확고한 계획을 가지지 못한 무책임한 선동분자들을 솎아내는 방향의 군정청 정책(이 바람직하다.) (...) 미군은 모든 노동자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로 이뤄졌다는 결론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집단이란 것이 대부분 알고 보면 상당히 온건한 것이었다. (커밍스 위 책 262쪽, 필자 재번역)


그런데도 하지는 ‘무뢰한’, ‘파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의 모든 자치적 노력을 매도했다. 그의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미군정 성과가 미흡한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계속 과장한 것도 같다. 정병준이 <우남 이승만 연구> 10-12장에서 지적한 바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에 도전하는 의지도 작용했을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비망록의 작성자는 “모든 노동자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로 이뤄졌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군정 간부들의 경향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유대로 노동조합을 함양하는 노력을 미군정이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비약된 결론에 대한 간부들의 집착이 흔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 동안 전평은 좌익의 지도하에 조직과 활동을 펼쳐나갔고, 머지않아 좌익의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으로 활약하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