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하러 남양에?

 

홍명희(1888-1968)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 3년간 남양(싱가포르 등)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 회고 중에도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뿐,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지냈는지 정색하고 밝힌 내용이 별로 없다.

 

27세에서 30세까지, 누구의 인생에서나 매우 중요한 시기다. 홍명희에게는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910년 초 4년간의 일본 유학을 중도에 접고 귀국했고, 몇 달 후 조선 망국에 이어 부친 홍범식(1871-1910)의 자결을 겪었다.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2년 후 탈상하자마자 중국으로 떠난 것은 복국(復國)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말년에 자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 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비장한 각오로 중국을 향했던 홍명희가 6년 후 귀국할 때까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남양이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갔던 이 청년이 남양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넘어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명희에게 특별한 사람이던 신규식

 

홍명희의 남양 행은 신규식(1880-1922)의 권유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신이 홍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신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잡지의 조사(弔詞) 청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보여준다. 1922101일자 <동명>에는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홍명희가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가 조사 대신 실렸다.

 

대한제국 무관이던 신규식은 합방 후 자결 시도에 실패하고 중국으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쑨원을 위시한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길을 연 최대의 공로자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온 홍명희를 아들처럼 대했다. 순국의 뜻을 함께했던 인물의 아들에게서 뛰어난 천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청년을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서 남양 행을 권했을 것이다.

 

자결 시도 때 한쪽 눈 시력을 잃고 애꾸란 뜻의 예관(睨觀)이란 아호를 쓴 신규식은 아호와 달리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실력 양성이 외적 타도보다 독립운동의 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홍명희에게 남양 행을 권했다면 중국혁명을 지원한 화교사회와 같은 역할을 맡을 한교(韓僑)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홍명희는 남양에서 3년을 지내고 상하이에 돌아왔다가 곧 귀국했다. 남양 사업은 포기했으나 실력 양성의 길은 한결같이 지켰다. 귀국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신간회였고, 신간회가 좌절된 후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1918년 귀국은 해외 무장항쟁보다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였다. 귀국 후 신간회 등 조직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임꺽정> 집필은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했던 최선의 독립운동이라고 그는 자임했다.

 

 

신규식의 남양

 

신규식이 남양을 바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규식이 생각한 남양은 당시 중국인들이 화교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남양이었다. (“남양이란 말부터 중국에서 바라본 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대부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에서 인구의 4-5%를 점하는 화교는 준 지배계급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많은 인력을 현지에 데려올 수 없던 유럽인 지배자들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갖고 원주민과 유리된 정체성을 가진 화교집단을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남양 화교 인구는 19세기 초의 1백만 명 선에서 19세기 말 1천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자리 잡던 기간이었다. 유럽인 지배 아래 화교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현지 민중의 미움받이가 되기도 했다. 화교 박해 사태는 대개 식민지배 체제 아래 일어났다. 식민지배가 없을 때는 이주자들이 단순히 적응에 전념했으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화교집단의 호가호위(狐假虎威)’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래 남양 화교는 국가정체성이 약한 집단이었다. 중국인 정체성을 지키더라도 출신 지역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것이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었다. 19세기를 지나며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유럽인 지배자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서 본국의 뒷받침을 아쉬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보는 변법(變法)’과 국가체제의 교체를 바라보는 혁명두 갈래로 갈라졌다. 애초에 국가의식이 취약하던 화교사회는 혁명 쪽으로 치우쳤고, 본국의 조류가 무술변법(1898) 실패 후 혁명으로 기울자 혁명파의 지원 기지로 떠올랐다. 쑨원은 1903년 이후 아홉 차례나 남양을 방문하며 지원을 호소했고, 신규식이 가입한 동맹회는 그 지원의 통로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왜 홍명희는 남양을 포기했나?

 

홍명희가 깊이 존경하던 신규식의 권유를 따르지 못하고 남양 사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밝혀진 이유가 없으나, 신이 전해 듣던 남양 사정과 홍이 직접 겪으며 파악한 남양 사정 사이의 간격을 추측할 수 있다.

 

남양에 관한 신규식의 정보는 동맹회에서 얻은 것이었다. 혁명의 지원 기지로서 화교사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동맹회의 관점에서 현지 원주민은 지배-교화의 대상인 미개한 존재였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식민지배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화교사회와 비슷한 성격의 한교사회를 동남아에 건설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을 위한 유력한 방략이 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생각할 만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재력가들도 있었고 무력을 양성할 인적 자원도 있었다. 원주민과 유럽인들을 상대하는 데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못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살아보면서는 신규식의 막연한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주민도 차츰 근대문명에 적응하며 민족주의를 일으킬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교가 누려온 틈새가 그대로 한교에게까지 보장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교와의 이해관계 충돌도 동맹회의 도움만으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목표로 하는 한교사회설계의 구조적 어려움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본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현지 식민지배자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하면서 원주민에게 가해자가 되는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화교와 협력관계는 어느 선까지 가능할 것인가?

 

 

남양문명을 상상한다.

 

홍명희가 남양을 전전하던 때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 사정이 많이 연구되고 알려졌다. 대략 지금의 동남아다. 유엔 통계국에서 세계를 20개 남짓으로 나누는 통계 기준지역(geoscheme) 중 아시아 5개 지역의 하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와 함께)

 

많은 연구성과가 쌓여 왔는데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백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요컨대 외래문명(중국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유럽문명)의 정복(또는 감화) 대상으로 보는 타자화시각이다. 유럽인도 중국인도 이 지역에서 얻을 물질적 이득만 생각했지, 이 지역의 경험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을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교섭 상대로부터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상대를 타자아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상적 기준이 문명이다. 문명을 갖지 못한 미개인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우선 감화(또는 정복)를 통해 문명인으로 만들어놓아야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제 시작하는 작업은 남양문명개념의 설정에 목표를 둔 것이다. 근년의 연구성과 중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은데, 아직 제대로 묶여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역사학 방면의 역할이 필요한 단계라 생각되어 시도에 나설 마음이 들었다.

 

남양(南洋)”이란 말을 앞세우는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중국사 중심으로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남양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고찰의 주축으로 삼을 것이므로 중국의 남양인식에 출발점을 두려는 것이다.

 

또 하나 까닭은 남양문명의 배경으로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에 주목하는 데 있다. 동남아를 중심으로 태평양과 인도양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어족의 존재는 19세기 중에 유럽 언어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언어의 공유는 문명권 성립의 핵심 조건이다. 이 어족의 분포 상황 위에서 남양문명의 존재를 더듬어보려 한다.

 

(중국에서는 ‘Austronesia’를 직역한 남도南島란 말을 쓴다. 그러나 ‘-nesia’는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고 은 동양, 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이므로 남양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남양사>란 가제의 새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랑캐의  역사>를 마무리한 후 "근대국가" 집필은 다음 작업의 방향을 찾는 모색 단계였고, 이제 방향을 정해 2-3년간 진행하려 합니다. 블로그 올리기도 좀 잦아질 듯.)

 

Posted by 문천

 

어린 시절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으로, 국민당정부 타이완을 자유중국으로 부를 때, 타이완이 중국의 중심부인 줄로 알았다. 역사 공부를 시작한 후 타이완이 중국 중심부에서 얼마나 먼 곳이었나 확인하면서 놀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펑후(澎湖)군도가 타이완보다 무려 4백년 앞서 중국 행정체계에 편입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놀랐다. 타이완해협(180킬로미터 폭) 중 타이완 쪽 가까이(50킬로미터 거리) 있어서 타이완의 부속도서처럼 보이는 펑후는 원나라 초(1281) 강절행성(江浙行省) 동안현(同安縣) 관할에 들어갔다. 대만부(臺灣府) 설치는 1684년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aiwan_Strait#/media/File:Taiwan_relief_location_map.jpg 타이완해협. 타이완섬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곳도 펑후군도와 마주보는 지역이었다.

 

타이완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중국인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징검다리 노릇을 한 류구열도와 달리 배후에 망망대해밖에 없는 타이완의 외진 위치가 지적된다. 하지만 펑후보다도 오래 방치된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남양문명의 최후 보루 타이완?

 

푸젠, 광둥 등 중국 남해안의 한화(漢化)는 남송시대(11271279)에 급속히 진행되고, 이어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가 시작되었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항해 때는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서 중국인 이주민 집단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초까지 타이완 이주는 미미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타이난(臺南) 부근에 거점을 만들 때(1624)도 중국인 정착지가 거의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Fort_Zeelandia_(Taiwan)#/media/File:Atlas_Blaeu-Van_der_Hem_-_Taioan.jpg 젤란디아 요새(安平古堡)를 그린 당시의 수채화

https://en.wikipedia.org/wiki/Fort_Zeelandia_(Taiwan)#/media/File:DSCF9396.jpg 젤란디아 요새 유적. 바타비아(자바)에서 벽돌을 실어왔다고 한다.

 

타이완의 한화(漢化)가 늦었던 이유를 지도에 나타나는 객관적 조건들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고유한 특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주민이 한화를 거부하는 특별히 강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남양(南洋)문명의 존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 개념은 19세기에 확립되었다. 언어의 공유가 문명권 형성의 중요한 조건인데도 남양문명개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협한 문명관 때문이었다. 문명의 표준은 유럽문명에 있었고, 다른 문명권의 존재도 그 잣대에 따라 판정받았다.

 

한화에 대한 타이완의 저항력을 남양문명 전통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이완 원주민은 남양어의 가장 오랜 형태를 지켜온 집단이다. 육지세력이 농업 발전을 통해 큰 힘을 키우기 전에는 남양인이 도서지역만이 아니라 대륙의 해안지역에도 널리 자리 잡고 있었다. 물러나는 남양세력이 끝까지 버틴 곳이 타이완이었다.

 

21세기 들어 유전자 연구 등을 통해 남양인의 모습을 찾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남양문명을 논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장래의 숙제로 남겨둔다.

 

 

해적의 본분에 투철했던 정지룡

 

1662년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세력의 네덜란드인 축출 때 타이완의 중국인 이주민은 약 5만 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식량 생산 등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주를 장려한 결과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해적의 진면목을 보여준 인물이다. 초년에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어를 익히고 일본에 가서 해적이 된 후 그의 강점 하나는 네덜란드인과의 소통 능력이었다. 1628년 명나라에 귀순한 후에도 해적 노릇을 계속하면서 명 조정과 네덜란드인, 그리고 해적집단, 3개 세력 사이의 줄타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청나라에 항복한(1646) 것도 또 한 차례 줄타기 시도였을까? 북경 함락(1644) 후 남경에 세워진 남명(南明) 조정은 이듬해 남경 함락 후 푸젠으로 옮겨왔다. 지역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정지룡은 조정의 최고 예우를 받았으나(황제가 정지룡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성공이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콕싱가(Koxinga, 國姓爺)’란 별명이 생겼다.) 조정 수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조정이 무너진 직후 청나라에 귀순했다. 아들 정성공은 항쟁을 계속했다.

 

부자간에 귀순-항쟁의 다른 길을 걸은 데 뭔가 속셈이 있었지 않았나 의심이 든다. 명나라 귀순 때도 속셈이 있었는데, 이번 귀순이라고 달랐겠는가? 아버지의 측근들이 아들 곁에 남아 군사력을 지켜준 사실도 이런 의심을 뒷받침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Zheng_Zhilong#/media/File:Portrait_of_Zheng_Zhilong_by_Katsushika_Hokusai.jpg 정지룡의 모습을 그린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의 우키요에(浮世畵)

https://en.wikipedia.org/wiki/Koxinga#/media/File:The_Portrait_of_Koxinga.jpg 정성공 초상

 

당장 맞설 수 없는 청나라의 힘 앞에서 정지룡은 자신을 인질로 제공하면서 아들이 세력을 지키게 하여 시간을 두고 협상할 길을 열어놓은 것 같다. 그의 처형은 15년 후(1661) 정성공이 타이완을 점거해 독립을 지킬 뜻을 분명히 한 때였다.

 

 

외부의 억압은 내부 대립을 불러온다.

 

정씨 세력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에는 수시로 충돌도 있었으나 오랫동안 협력관계가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씨 세력이 군사비 조달을 위해 네덜란드인과 분점하던 교역 사업의 지분을 늘릴 필요가 생겼고 대륙을 벗어난 근거지 확보도 필요하게 되어 네덜란드인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https://en.wikipedia.org/wiki/Koxinga#/media/File:Koxinga_territory.jpg 정씨 세력의 점거 지역과 영향권. 상당기간 점거한 지역이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씨 세력이 동녕국(東寧國)을 세우며 명나라 회복을 외친 것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구호였다. 이것이 청나라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져 1683년 평정될 때까지 이주민이 1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청나라가 평정 후 대만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1895년까지 청나라 치하에서 타이완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늘어났고, 1945년까지 일본 통치 기간을 통해 약 600만 명에 이르렀다. 현재 약 2335만 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원주민은 2.38%를 점하는 약 57만 명으로 파악되고, 95% 이상을 점하는 한족은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본성인은 1945년 이전부터 살아온 집안이고 외성인은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백여만 명 집단과 그 자손이다.

 

본성인 내에도 갈등이 심한 집단들이 있었다. 푸젠 출신 혹로인(福佬人, 인구 70%)과 광둥 출신 학까인(客家人, 15%)은 청나라와 일본 통치 아래 치열한 상쟁을 이어 왔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이 2-28사건(1947) 이래 본성인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면서 외성-본성 대립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Huang_Rong-can#/media/File:228_by_Li_Jun.jpg 이 판화를 남긴 황룽찬(黃榮燦, 1920-1952)처럼 외성인 중에도 2-28사건에 분노한 사람이 많았다. 그의 처형 후 진보적 미술인 여럿이 타이완을 떠났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이후 모든 층위에서 인구집단 간의 갈등이 완화되었다. 독재정치가 사회 내 대립을 격화시키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오랜 억압체제를 벗어난 타이완인이 자기 정체성과 자기 미래를 숙고할 수 있는 모처럼의 환경을 맞았다.

 

 

일본어도 관화도 쓰지 않은 타이완사람

 

청나라-일본제국-국민당정권의 지배를 연이어 겪는 동안 지배자를 대한 타이완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린셴탕(林獻堂, 1881-1956)을 살펴볼 만하다. 위세 높은 타이완 5대 가문의 으뜸 우펑(霧峰) 린씨의 가주(家主)로서 타이완 민간 권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일본 당국은 린셴탕을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 항일을 삼가면서도 친일에까지 나서지는 않았음을 일본어를 익히지 않은 사실이 말해준다.

 

린이 존경하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무장항쟁보다 실력 양성에 힘쓸 것을 린에게 권했다고 한다. 그 후 린의 정치적 자세는 이 권유에 부합한다. 정치보다 문화사업에 힘을 쏟고, 지방의회 설치와 자치권 획득 등 일본제국 내의 타이완 발전을 추구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n_Hsien-tang#/media/File:%E8%87%BA%E7%81%A3%E6%96%87%E5%8C%96%E8%88%87%E6%B0%91%E4%B8%BB%E9%81%8B%E5%8B%95%E9%A0%98%E8%A2%96%E6%9E%97%E7%8D%BB%E5%A0%82_Lin_Hsien-tang,_Leader_of_Taiwanese_Culture_and_Democracy_Movement.jpg 민족이나 독립을 말하지 않고 문화민주만을 추구했던 린셴탕

https://en.wikipedia.org/wiki/Liang_Qichao#/media/File:Liang_Qichao_portrait.jpg 량치차오는 무술변법(1898) 실패 후 일본에서 지내며 정치의 변혁보다 문화의 양성을 중시하는 입장에 섰다.

 

이런 온건노선마저 중-일전쟁 발발(1937)로 좌절된 후 린셴탕이 중국을 바라보게 된 것은 보통화(普通話)를 배우기 시작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종전 후 국민당에 가입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정권이 본성인을 참혹하게 탄압한 2-28사건 후 공직을 벗어나려 애쓰다가 1949년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가서 7년 후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통치에 대해서나 국민당 통치에 대해서나 린셴탕의 태도는 쿨한느낌을 준다.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를 타이완인의 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을까? 동남아시아인의 국가 기피증을 그린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남양문명의 존재를 상상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https://en.wikipedia.org/wiki/Taiwanese_indigenous_peoples#/media/File:08.15_%E7%B8%BD%E7%B5%B1%E5%87%BA%E5%B8%AD%E3%80%8C2016%E4%B8%89%E5%9C%B0%E9%96%80%E9%84%89%E8%81%AF%E5%90%88%E6%94%B6%E7%A9%AB%E7%A5%AD%E3%80%8D_(28706865630).jpg 원주민 축제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2016). 원주민은 타이완 인구의 2.38%로 공식 집계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평야지대 원주민은 장기간의 한화를 통해 한족이 되었고 혼혈 자손도 한족이 되었다. 푸젠-광둥 출신 한족이주민의 혈통에도 남양인유전자가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타이완인 85%가 원주민 혈통을 가졌다는 유전자 연구가 연전 발표되어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다.

 

Taiwanese indigenous peoples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Indigenous peoples of Taiwan Taiwanese indigenous peoples, also known as Native Taiwanese, Formosan peoples, Austronesian Taiwanese,[2][3] Yuanzhumin or Gaoshan people, and formerly as Taiwanese aborigines, are the ind

en.wikipedia.org

 

Posted by 문천

 

규슈(면적 약 36,782 평방킬로미터)와 타이완(35,808 평방킬로미터)은 세계에서 37번째, 39번째로 큰 섬이다. 두 섬 사이를 동북-서남으로 잇는 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수백 개 섬이 류구(琉球)열도다. 이 섬들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약 4,642 평방킬로미터다.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Islands#/media/File:Location_of_the_Ryukyu_Islands.JPG 류구열도. 규슈에 가까운 쪽부터 오스미, 도카라, 아마미, (이상 가고시마현, 이하 오키나와현)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야마 군도가 늘어서 있고 동쪽과 서쪽 떨어진 곳에 다이토와 센카쿠 군도가 있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 류구의 존재는 7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알려졌다. 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타이완(臺灣)’이란 이름은 17세기에야 확정되었다.

 

<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류구를 ()류구, 타이완을 ()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류구가 타이완보다 앞서 나타난 까닭

 

류구의 역사의 무대 등장이 타이완보다 빠른 까닭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아직 못 봤다. 추측컨대 한반도와 일본 남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문명권의 7세기경 성립에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7-9세기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항로 변천에서 알아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Islands#/media/File:Kentoshi_route.png 7-9세기 중 일본의 견당사 항로

 

630-665년의 기간에는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가는 항로였다. 백제가 멸망 전에 왜()의 중국 왕래를 도와주던 상황을 보여준다. 702-752년에는 류구 항로를 이용하다가 773-838년에는 규슈 연안에서 닝보(寧波) 방면으로 곧장 건너가는 항로로 바뀌었다. 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7-8세기에 류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커지던 상황이 <일본서기(日本書紀)>(720)<속일본기(続日本紀)>(797)에 나타나 있다. 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

 

타이완이 해양문명권에 머물러 있던 반면 류구는 대륙문명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일찍 알려진 것이다. 타이완이 머물러 있던 해양문명권을 중국에서는 남도(南島)’ 문명이라 부른다. 서쪽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하와이와 이스터섬까지 태평양-동남아-인도양 일대에 널리 분포된 어족(語族) 이름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를 번역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남양(南洋)”으로 쓰겠다. (‘-nesia’는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다. ‘()’은 동양, 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다.)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이 마주친 곳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peoples#/media/File:Austronesia_with_hypothetical_greatest_expansion_extent_(Blench,_2009)_01.png 로저 블렌치의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2009)에는 남양어족의 지금 분포 지역(청색)과 최대 확장기의 분포 지역(녹색)이 표시되어 있다.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가 남양어족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확인되어 있다. 타이완은 이 어족 분포 지역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선 위에 있다. 이 어족이 타이완으로부터 확산해 나간 것이라면, 왜 한 쪽 방향으로만 확산해 나갔는지 의문이 따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해양문명인 남양문명이 대륙문명에 밀려난 결과다. 남양어의 지금 분포 지역은 거의 모두 섬들이다. 블렌치가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 애초에는 대륙의 해안지대까지 자리 잡고 있다가 대륙문명의 압력이 강해지는 데 따라 밀려난 것이다. (남중국 선사유적의 유전자 채취 연구를 통해 남양인이 꽤 깊숙한 내륙까지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 밝혀지고 있다.)

 

류구열도는 물론 규슈 남부까지 한때는 남양문명권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블렌치는 본다. 류구의 존재가 중국과 일본에 알려지는 7세기경이 갈림길이었다. 대륙세력의 생산력 발전이 해양세력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였다. 대륙문명권의 경제적-문화적 영향이 커지는 데 따라 류구인의 사용 언어가 남양어에서 대륙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 다음으로 남양문명이 널리 공유한 요소는 항해술이다.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디자인의 배들이 일찍부터 만들어져 남양문명의 확산과 광대한 해역의 교역활동에 이용되고 중국의 정크선(junk)을 비롯한 많은 선박 형태의 모델이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vessels#/media/File:Parao_postcard_from_the_Philippines_(1940).jpg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crab claw sail)은 소형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outrigger)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 필리핀 엽서(1940)에 그려진 오스트로네시아 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갖춰져 있다.

 

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 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안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 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일 사이에서 번영을 누린 류구왕국

 

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 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

 

류구열도 중 오키나와현에 속한 것은 남쪽의 절반이다. 북쪽 절반은 사쓰난(薩南, 사쓰마의 남쪽이란 뜻) 제도라 하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11-15세기 중에 규슈 영주들의 확장 노력이 미친 것이 사쓰난의 범위였다. 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三山)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

 

오키나와섬은 면적이 약 1199 평방킬로미터,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 중산, 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이 떠오른다. 그중 중산이 강성해져서 1429년까지 경쟁자들을 물리쳤는데, 이미 류구왕으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1422) ‘()’이란 성을 하사받고(1428) 있었다.

 

류구국은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웠다. 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자료에는 “閩人三十六姓”이라 했는데, ‘姓’이 ‘가구’보다 큰 규모였을지도 모른다.)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 아래 류구국은 조공국의 특혜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1609년 사쓰마번()의 류구 정벌은 임진왜란 때의 비협조를 빌미로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금알이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

 

구메무라(久米村)는 홍무제가 보내준 36가구로 출발한 동네라 하는데, 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은 구메무라 주민들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

 

1609년 정벌에 항복한 왕과 신하들이 사쓰마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받았을 때 단 한 명 거부하고 처형당한 대신이 있었다. 구메무라 출신이었고, 이름도 중국식인 정동(鄭迵)으로 전해진다. 류구 조정 내의 친일-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

 

류구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정벌 후 일본 측의 조치가 말해준다. 잡아간 왕과 신하들을 2년 후 돌려보내고 구메무라를 오히려 더 키워주었다. 사쓰마에 정복당한 사실을 명나라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애를 썼다. 거위를 잡아먹는 대신 계속 황금알을 낳도록 키우려는 것이었다.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이중성을 중국에서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 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7-19세기를 통해 류구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후반의 격변 속에 류구의 이중성은 가치를 잃었다. 1872년 일본이 류구국을 합병, ‘류큐()을 선포할 때 청나라는 제 앞 가리기 바빴다. 1874년에는 일본군이 타이완에 출병했다.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인수십 명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이었다. 1879년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할 때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상당수 류구인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뿐이고 류구국왕은 류큐번주를 거쳐 일본국 귀족에 편입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Islands#/media/File:Ryukyu_Kingdoms_of_Sanzan_era.jpg 14세기 삼산시대의 오키나와섬.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Islands#/media/File:%E4%B8%87%E5%9B%BD%E6%9D%A5%E6%9C%9D%E5%9B%BE_(Liu-Kyu_delegates_in_Peking_in_1761).jpg 북경의 류구국 사절단 모습(1761).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Kingdom#/media/File:Ryukyu_Tribute_Ship_Folding_Screen_Kyoto_University_Museum.png 류구국 사절단 선대(1830년경).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Kingdom#/media/File:Ryukyu_1832.JPG 에도(江戶)의 류구국 사절단(1832). 악대를 포함해 98인으로 구성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huri_Castle#/media/File:%E9%A6%96%E9%87%8C%E5%9F%8E%E5%9F%8E%E5%A3%81%E3%81%8B%E3%82%89%E6%B5%B7%E6%96%B9%E5%90%91%E3%82%92%E6%9C%9B%E3%82%80_-_panoramio.jpg 류구국 왕궁 슈리(首里)성에서 나하(那覇)시를 내려다보는 풍경.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Kingdom#/media/File:Huang_Qing_Zhigong_Tu_-_012.jpg

https://en.wikipedia.org/wiki/Ryukyu_Kingdom#/media/File:Huang_Qing_Zhigong_Tu_-_011.jpg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 1769년경)에 그려진 류구인의 모습.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