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공부 정리를 위해 <오랑캐의 역사> 작업을 하다가 새 작업의 필요가 떠올랐다. 근대사 영역의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역사 공부의 목적이 현실의 이해에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앞 시대의 연구라도 근대사에 대한 함의를 밝히는 것이 정리의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새 작업의 필요를 떠올리며 국가를 주제로 삼을 생각을 했다. 다른 시대를 공부해 온 사람이 근대사를 살펴보려면 통시대적 의미의 주제를 앞세워야 할 것이고,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국가의 역할이 컸다. 그렇게 오랜 국가의 경험을 가진 나라가 근대세계에서 국가실패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https://en.wikipedia.org/wiki/Terracotta_Army#/media/File:Terracota_warriors_002.jpg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방대하고 치밀한 국가조직을 보여주는 병마용(兵馬踊) 유적. 1갱에서만 6천여 개 인형이 출토되었다.

 

국가제도의 밑바닥을 헤쳐볼 마음이 들면서 동남아로 눈길이 간다. 이 지역의 국가 경험에는 다른 어느 지역과도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국가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기에 적합한 무대로 보인다.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

 

제임스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이 그런 참에 눈에 띄었다. 스콧이 고찰하는 조미아(Zomia)는 동남아 대륙부의 안쪽 산악지대, 그리고 비슷한 자연조건이 이어지는 중국 서남부와 인도 동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힘이 약하던 지역이다.

 

이곳을 단순히 미개지역으로 보던 통념에 스콧은 이의를 제기한다. ‘미개라면 발전하지 못한상태란 말인데, 못하기보다는 않은측면을 보자는 것이다. 집약농업의 생산력, 국가조직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싫어서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을 휩쓴 사회진화론은 인종주의 등 파생된 문제들 때문에 비판을 받았으나 그 핵심 명제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여러 가지 발전단계에 관한 생각이 그렇다. 모든 변화의 흐름에 불가역적 법칙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Colonial_Boundaries_in_Southeast_Asia.jpg 19세기 말 동남아에서 샴(태국) 외에는 모두 유럽인의 식민지였다.

 

발전론자들은 결과를 중시한다. 집약농업과 국가조직을 채택한 사회들과 그러지 않은(또는 못한) 사회들이 나란히 있다면 후자의 사회들은 우승열패의 법칙으로 도태되어 전체적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콧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문명 자체를 완성된 결과가 아닌 진행 중인 과정으로 본다. 과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축적된 경험이 문명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로의존성이 작동한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화가 늦었던 남양인의 경험이 국가의 역할이 줄어드는 탈-근대 단계에서는 중요한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세계에서만 절대적이었던 국가

 

체계적 역사서술의 출현에는 국가의 역할이 컸다. 역사서술이라는 활동 자체가 국가가 보장하는 환경 속에서 이뤄지는 한 탐구와 서술의 중심을 국가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민족국가가 역사학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준 덕분에 세워진 근대역사학은 민족(국가)의 역사로 출발했다.

 

인류의 생활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꾼 사건으로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과 근대 산업혁명이 꼽힌다. 농업혁명을 계기로 국가조직과 문자 사용의 확산이 함께 진행되었으니 농업세력과 국가가 그 이후 역사의 주역을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peoples#/media/File:Beinan_Taitung_Taiwan_Aboriginal-Stilt-House-01.jpg 타이완 원주민의 원두막집. 손쉬운 재료로 며칠이면 내 집 마련이 가능한 곳에서는 국가조직을 뒷받침할 정주(定住)사회의 형성이 어려웠다. 그 점에서 유목민의 천막(yurt, ger)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연의 움직임만으로 역사의 드라마가 구성되지 않는다. 산업혁명이 불러일으킨 전면적 변화 속에서 주변부의 복선(伏線)에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정치사에 집중하던 역사학이 사회사, 문화사, 생활사 등 소홀히 다뤄지던 영역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보는 통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데이비드 스니스는 <머리 없는 국가 The Headless State>(2007)에서 유목세계의 국가 역할을 작게 보는 관점을 내놓았다. 정치조직의 본체는 분권화된 귀족층에 있고 국가 차원의 거대조직은 상황에 따라 덧씌워지는 껍데기일 뿐이었다는 관점이다.

 

농업세계 사람들은 유목세계에서도 국가가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와 마주친 유목민들이 국가체제를 모방하기도 했다. 통일된 진한(秦漢)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흉노제국이 그렇다. 그러나 이런 그림자 제국은 대외관계를 위한 장치일 뿐, 국가체제의 내부조직이 농업세계처럼 구축된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은 농업세력과 접촉을 통해 국가체제의 강점을 인식하고 모방하기도 했으나 그 모방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환경의 차이와 그에 따른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근대 이전 초원지대의 국가 경험은 농업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국가는 운명 아닌 하나의 옵션

 

농업혁명은 농업의 지배가 아니라 농업의 발생을 뜻하는 것이다. 온대지역의 큰 강 유역에서 출발한 농업문명이 주변의 건조지대, 산악지대, 해양지대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그 후 길게 펼쳐졌다.

 

건조지대의 유목활동이 그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온 현상이다. 유목민은 특화된 생산물을 농업사회에 제공하면서 곡식, 직물 등을 공급받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밀고 당기기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스콧은 조미아 산악지대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어난 현상을 보여준다. 지역 주민들이 자연조건과 외부 압력 사이에서 움직여 온 길은 발전을 향한 외길이 아니었다. 강 유역의 벼농사 사회를 발판으로 국가들이 만들어지지만, 대다수 주민은 국가와 비-국가 영역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국가에 속해 있어도 국가를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옵션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스콧은 통치를 피하는 재간으로 표현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ddy_field#/media/File:Terrace_field_yunnan_china_edit.jpg

https://en.wikipedia.org/wiki/Paddy_field#/media/File:Battad_Rice_Terraces,_Banaue_Ifugao.jpg 중국 윈난성과 필리핀 루손섬의 다락논은 동남아 지역에 전파된 전형적 집약농업 형태다.

 

조미아에서 국가가 주민을 장악하기 힘들었던 것은 농업이 압도적 생산양식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업기술로는 집약적 정착농업을 채용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았다. 국가의 규모가 클 수 없었고 거기 매여있던 농민도 마음만 먹으면 국가의 통제 밖에서 화전을 일굴 만한 곳으로 쉽게 달아날 수 있었다.

 

동남아 해양지대는 집약농업의 채용이 더 힘든 조건이었다. 기원전 1500년경 이후 남양인이 이 해역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두 가지 기술조건 덕분이었다. 하나는 화전농법과 벼의 직파(直播) 등 초보적 농업기술로 채집 단계에 있던 원주민의 생산력을 압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항해술로 생산력이 더 우월한 대륙세력의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통치를 피하는 재간받는 재간

 

군호(軍戶) 제도를 중심으로 명나라 동남해안 지역 사회사를 연구한 마이클 소니의 <통치를 받는 재간 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스콧의 2009년 책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그러나 소니는 자기가 살핀 지역 주민들은 스콧의 조미아 주민들처럼 통치를 피하는옵션을 갖지 못했다고 거리를 둔다.

https://www.amazon.com/Art-Being-Governed-Everyday-Politics/dp/0691197245/ref=sr_1_1?crid=2FBFBFRVMLSXX&keywords=The+Art+of+Being+Governed&qid=1704338114&sprefix=the+art+of+being+governed%2Caps%2C268&sr=8-1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31K7MAHGYAZRG&keywords=the+art+of+not+being+governed+by+james+scott&qid=1704338183&sprefix=The+Art+of+Being+Governed%2Caps%2C269&sr=8-1 <통치를 받는 재간><통치를 피하는 재간> 표지.

 

과연 그럴까? “재간(art)”이란 말이 중요하다. 주민이 국가를 이념으로 대하기보다 자기 이득을 위해 재간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두 지역에서 국가의 힘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주어진 국가의 힘에 그냥 굴복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위해 노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통치를 받는 재간도 본질적으로는 통치를 피하는 재간의 한 모습이다.

 

자기 이득을 위한 피지배자의 소소한 노력을 소니는 일상정치(everyday politics)’라 부른다. 그는 일상정치가 명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정 아래 푸젠(福建) 지역의 현상을 하나의 예로 제시한다. 그런데 푸젠 지역은 송나라 이후에야 중화제국의 통치가 확립된 곳이다. 제국의 틀이 먼저 자리 잡힌 지역들에 비해 일상정치의 힘이 특별히 강하지 않았을까?

 

중국 서남부 광시-윈난-구이저우(廣西-雲南-貴州) 일대는 아직도 한화(漢化)가 적게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푸젠 지역은 그보다 한 발짝 앞서서 한화가 진행된 곳이다. 12세기 이전에 중국 남해안에서 한화가 확실했던 곳은 광둥(廣東)의 주강(珠江) 중류 유역 등 몇 군데 조그만 구역들뿐이었다.

 

남중국 일대의 사회적-문화적 조건에는 한화 이전의 전통이 아직도 짙게 깔려 있다. 동남아 지역과 연결되는 전통이다. 동남아 화교의 민국혁명 지원, 공산군 대장정에서 남방 학까(客家)족의 역할, 모두 국가를 이념아닌 재간으로 대하던 전통의 복류(伏流)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이 접하는 언어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근대언어학이 발전했고, 비교언어학이 그 중요한 분야로 나타났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럽 언어들과 비슷한 특성이 많이 발견된 사실이 제일 먼저 관심을 끌었다. 이 방향 연구가 쌓여 19세기 초에 어족(語族, language family)’ 개념이 세워졌다.

 

인도-유럽어족을 필두로 여러 어족의 존재가 확인되고 체계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중 매우 특이한 어족 하나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남양어족)이었다. 분포 영역이 가장 넓었다. 인도양과 태평양 대부분을 포괄하는 이 영역의 동쪽 끝 이스터섬(서경 109)과 서쪽 끝 마다가스카르(동경 47) 사이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절반이 넘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languages#/media/File:Austroneske_jazyky.jpg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의 분포 지역. 그 사용 인구는 4억 명 가까이 된다.

 

진화론이 유행하던 19세기 유럽에서 넓은 분포는 강한 힘의 증거였다. 인도-유럽어족은 인도, 페르시아, 유럽 등 구성원의 면면이 이 통념에 부합했다. 그런데 남양어족은? 남양인은 그 시대의 열패자(劣敗者)’였다. 정치-군사적으로뿐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침략을 당하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종교조차 볼 만한 것은 모두 외래종교였다.

 

남양어 사용권을 하나의 독자적 문명권으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명세력이라면 지금 당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내세울 만한 경력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남양인은 문자기록조차 변변찮은, 따라서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양어 팽창의 진원지는 타이완

 

유럽 발 근대문명에 대한 회의감이 짙어지면서 문명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근대적 상황에 대한 적응력만을 기준으로 문명의 자격을 따질 때는 유럽 기독교문명이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오래된 문명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상대주의 관점이 일반적이다.

 

그래도 문명의 자격에 대한 암묵적 합의는 유지되고 있다. 독자적 역사서술을 갖지 못하고 수백 년간 모든 면에서 정복과 침략의 대상으로 지낸 남양인의 세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본다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남양문명의 존재를 잘라 부정할 근거도 찾기 어렵다. 그 넓은 언어 전파가 문명의 힘 없이 가능했겠는가? 넓은 영역에서 긴 기간에 걸쳐 특정 계열 언어의 사용 범위를 확장한 어떤 힘이 있었다면 그 힘이 곧 문명의 힘아니겠는가.

 

남양어 팽창(Austronesian Expansion)’은 남양어 사용권 확장의 속도가 특별히 빨랐던 현상이다. 기원전 1500-1000년경에 타이완에서 출발해 동남아 일대에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남양어 사용자의 절대다수가 동남아 일대에 살고 있다.

 

타이완을 남양어 팽창의 출발점으로 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타이완 원주민 언어에 팽창기 이후의 문명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 남양어에 나타나는 비교적 늦게 발생한 개념들(도구, 작물, 가축의 이름 등)이 타이완 언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또 하나 이유는 어족 분화 첫 단계의 흔적이 타이완에서만 확인된다는 데 있다. 남양어족의 제1차 하위분류를 몇 갈래로 할지는 아직도 이설이 분분하지만, 타이완 밖의 모든 남양어가 하나의 갈래(Malayo-Polynesian)에 속하고 다른 갈래들은 모두 타이완 안에만 존재한다는 시각에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한다. 타이완에서 제1차 분화가 일어난 다음 그중 한 갈래가 외부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시각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languages#/media/File:Formosan_languages_en.svg 타이완 원주민 언어의 분포. 남양 일대에 널리 퍼져나간 말레이-폴리네시아어는 작은 부속도서 한 곳에만 남아있다.

 

 

아열대 도서지역에 적합한 생활양식

 

남양어 팽창기의 상황에 생각을 모아본다. 신석기문명의 확산으로 농업의 발전이 빠르던 시기였다. 농업이 약하던 해양세력 남양인이 농업 발전의 주체인 대륙세력에게 밀려나는 그림이 얼른 떠오른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그림이 아닌 것 같다.

 

남양인에게도 농업이 있었고 그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농업에서 나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여러 섬으로 가져갔고, 거기서 얻은 생산력이 먼저 자리 잡고 살던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는 힘이 되었다.

 

다만 남양인의 농업과 대륙세력의 농업 사이에 성격 차이가 있었다. 대륙세력은 수리-관개를 통한 집약농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해안과 도서 지역 자연조건은 이에 적합지 않았다. 남양인은 집약도 낮은 농업과 어로-채집의 병행으로 주어진 자연조건에 적합한 생활양식을 키워냈고, 그 생산력이 어로-채집에만 의존하던 도서 지역 원주민보다는 우월했다. 그래서 대륙에서 밀려나며 해양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sh-and-burn#/media/File:An_example_of_slash_and_burn_agriculture_practice_Thailand.jpg 타일랜드 치앙마이 부근의 화전(火田). 집약화 이전 초기 농업의 전형적 형태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Fishing#/media/File:Fishing_tools_stone_age_SPMZ.jpg 낚시와 작살이 신석기시대 고기잡이의 대표적 도구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Fishing#/media/File:Fishing_Woman.jpg 아쌈 지역의 전통적인 고기잡이 대나무 체. 선사시대부터 쓰였음직한 재료와 형태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며 또 하나 수수께끼의 해답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동서로 멀리까지 퍼져나가면서 왜 가까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수수께끼다. 뉴질랜드에는 꽤 늦게(1250년경) 들어갔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정착한 흔적이 없다.

 

남양인이 도서 지역에 전파한 농작물은 벼와 구근류 등 열대-아열대 작물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농업에 적합한 동남부)와 뉴질랜드는 온대 지역이다. 어쩌다 그런 곳에 발길이 닿아도 열대 지역에서 가져간 작물의 경작으로 원주민보다 유리한 조건을 누릴 수 없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 , Guns, Germs, and Steel>(1997)에서 농업문명 전파가 남북 방향보다 기후조건이 비슷한 동서 방향으로 진행되는 원리를 밝혔다.

 

그리고 남양인의 큰 강점이 항해능력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이나 큰 섬)보다 작은 섬에서 큰 상대적 이득을 누렸을 것이다. (뉴기니섬에도 남양인의 정착이 적었다.) 통나무배나 뗏목으로 가까운 곳을 겨우 건너다니던 신석기시대에 남양인은 돛과 아웃리거(outrigger)를 장착한 배로 큰 바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각(船殼)의 판자를 못을 쓰지 않고 밧줄로 묶어 엮는 독특한 조선술은 금속기가 보급되기 전에 개발된 기술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Outrigger#/media/File:COLLECTIE_TROPENMUSEUM_Reli%C3%ABf_op_de_Borobudur_TMnr_20025669.jpg 자바섬 보로부두르 사원에 부조로 새겨진 아웃리거 장착 선박

https://en.wikipedia.org/wiki/Crab_claw_sail#/media/File:Atlas_pittoresque_pl_096.jpg 피지섬의 배 그림(1846). 게집개돛(crab-claw sail)은 단순한 구조로 높은 효용성을 제공한 남양인의 뛰어난 발명품이었다.

 

 

남중국도 동남아의 일부였을까?

 

열대-아열대 지역의 섬들. 농업 발전이 빠르던 온대 지역에서 밀려난 남양인을 위한 최적의 틈새였다. 집약농업의 발전이 아직 아열대 지역에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주어진 이 틈새는 대륙세력의 계속된 농업기술과 정치조직 발전에 따라 꾸준히 줄어들었다.

 

동남아의 남양어 사용이 해양부(Insular Southeast Asia, 말레이반도 포함)에 집중해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어느 시기에는 대륙부(Mainland Southeast Asia)에도 널리 분포해 있다가 대륙 농업문명의 압력 증대에 밀려난 것이다.

 

동남아 대륙부와 기후와 지형 등 자연조건이 비슷한 중국 남해안 일대의 상황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이 지역에도 어느 시기에 남양인이 살고 있다가 한화(漢化)의 긴 역사를 통해 그 흔적이 지워진 것은 아닐까? 해협 양쪽에 살던 남양인 집단 중 한쪽은 사라지고 한쪽만 남은 것이 타이완 원주민 아닐까?

 

최근 량저(良渚)문화 유적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왔다. 량저문화는 기원전 3400-2250년 기간에 장강(長江) 하구 일대에 분포했던 신석기문화로 1936년 발견된 량저 유적을 비롯해 수십 개 유적이 발굴되었다. 성곽 형태와 부장품의 내용 등을 근거로 중국에서 국가 형태의 완성에 가장 앞섰던 신석기시대 문화로 주목받아 왔다.

https://en.wikipedia.org/wiki/Liangzhu_culture#/media/File:Model_of_Liangzhu_Ancient_City_01_2013-10.JPG 량저 유적(성곽 포함)의 모형

https://en.wikipedia.org/wiki/Liangzhu_culture#/media/File:Neolithic_pottery_dou,_Liangzhu_Culture,_Zhejiang,_1955.jpg 량저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

 

장강 유역 여러 유적에서 채취된 인간 유전자 분석 연구가 2007년 시작되었다. 량저문화 유적의 시료에서 “Haplogroup O1-M119” 유형 Y-염색체 빈도가 높게 나타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 유형 염색체의 존재는 동남아의 남양인 및 크라-다이(Kra-Dai)인과 가까운 혈연관계를 시사한다.

 

관련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서 머잖아 더 많은 연구결과가 기대되는데, 남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가까운 관계가 많이 밝혀질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남중국 고대사에서(어쩌면 중세사까지) 중국사보다 남양사의 맥락으로 읽을 측면을 많이 찾게 될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6790

 

Posted by 문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121816480282579 

 

이 책은 연구서이면서 또한 교양서다. 저자는 연구서를 목적으로 집필한 것인데 독자 대다수는 교양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구서는 독자의 연구활동에 활용되는 생산재’, 교양서는 독자의 만족을 위한 소비재성격을 가진다.)

 

연구서가 교양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세계적 추세를 디지털혁명이 더욱 촉진하고 있다. 연구논문과 연구서 등 연구문헌은 지면 인쇄보다 디지털 형태로 옮겨가고 있다. 적은 비용으로 수요자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되고, 번역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라 다른 언어권 연구자들의l 이용이 쉽게 되어가고 있다. (사전류와 연구자료가 디지털 형태로 넘어가는 뒤를 연구문헌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책의 공간은 교양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현대사는 현실과의 관련성으로 일반인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에 연구서라 해도 교양서로 받아들이기 쉽다. 정 교수는 이 수요에 잘 부응해 온 연구자인데 나는 그가 교양서 측면을 더 중시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교양서로서 <1945년 해방 직후사>에 관한 의견을 내놓는다.

 

 

1. 맥락을 중시할 필요

 

교양서는 연구서에 비해 맥락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 패전 직후 몇 달 동안 한국에서 벌어진 상황이 이 책의 주제인데, 내부 진행만이 아니라 국제적 맥락을 살피는 것이 주제의 이해를 위해 불가결한 작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이 측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커밍스의 1986년 책 하나만이 보인다.

 

넓은 범위의 맥락을 살피는 일은 기존 연구의 검토를 통해 이뤄진다. 사료를 직접 검토해야 연구의 자격이 있다는 학계 통념을 현대사 연구자들은 앞장서서 벗어나야 한다. ‘현대라는 시대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넓은 연관관계 위에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사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보기에 연관관계의 제시가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 몇 가지를 예시한다.

 

 

카이로선언의 의미

 

조선의 전후 독립에 대한 국제적 합의의 증거로 카이로선언이 이 책에서도 제시된다. 그러나 그 합의가 얼마나 탄탄한 것이었는지, 이 선언의 증거가치가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 선언에만 의지해서는 아전인수의 굴레에 묶일 위험이 있다.

 

194311월에 열린 카이로회담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반격 자세를 가다듬기 위한 목적으로, 유럽 방면 작전을 논한 직후의 테헤란회담과 별도로 아시아 방면 작전을 논한 회담이었다. 작전회의 성격의 회담에서 나온 선언인 만큼 국제법적 구속력이 약했다.

 

카이로회담 직전의 4개 모스크바선언 중 오스트리아선언을 카이로의 한국 관계 선언 내용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선언은 각각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해체에 목적을 둔 것인데, 오스트리아선언에는 오스트리아 독립을 명시하면서도 조건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 독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 되며, 최종적 (전후) 처리에는 자신의 해방에 대한 자신의 공헌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독일에 저항하고 연합국에 협력해야 독립을 쉽게 해준다는 노골적 협박이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에도 같은 조건이 암묵적으로 붙어 있었다고 봐야겠다. (특히 “in due course”란 대목에) 오스트리아는 결국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

 

 

미국의 국제주의와 국가주의

 

미국은 “American exceptionalism”, “America first” 등으로 표현되는 국가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윌슨과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는 세계대전이라는 비상상태 아래서만 현실정치에 제기될 수 있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윌슨이 제창한 국제연맹을 외면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국가주의 회귀는 루스벨트의 부재 때문에 더 급격했다. 그 과정에서 주목되는 인물이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이다.

 

루스벨트의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번즈는 갑자기 대통령이 된 트루먼에게 전폭적 신임을 받고 국무장관에 임명되어 전후 처리에 앞장섰다.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번즈였다고 한다.) 트루먼은 몇 달 후부터 번즈의 노선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나 번즈는 1947년 초까지 국무부를 지켰고, ‘트루먼 독트린은 번즈의 사임 직후에 나왔다. 매카시즘 소동이 국무부를 첫 번째 과녁으로 삼은 사실도 이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번즈의 국무부가 루스벨트 사후 2년 가까이 국제주의의 보루로 남아있는 동안 국방부는 국가주의의 흐름을 탔다. 종전 후 당연한 국방예산과 병력의 감소를 억제하려는 일부 군인들의 의지가 국가주의 회귀의 동력이 되었고, 그 대표적 인물이 맥아더였다. 군정사령관 하지가 이승만을 극진히 대한 것도 신탁통치안 번복에 올인한 것도 군 편제상 직속 상관인 맥아더와의 관계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할 일이다.

 

 

소련, 중국, 일본의 상황

 

주변 여러 나라의 상황에도 이 책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파악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일본의 경우, 옥쇄의 각오만으로 종전을 맞았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관점이다. 총독부도 비밀리에 정보를 획득하고 대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무능-무책임이다.

 

저자는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증언에 입각한 모리타의 1964년 책 내용 중 “815일 시점에서 한반도 분단을 일본 내무성과 총독부가 인지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76) 단언하는데, 의문이 남는다. 분단점령 방침이 공식적으로 확정되기 전이라도 항복 조건의 비밀교섭 과정에서 거론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항복 당시에는 말할 수 없던 것을 전범재판과 미군정이 끝난 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많았을 것이다.

 

중국은 미--소와 함께 연합국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전쟁에 대한 공헌은 작았다. 게다가 장개석 정권은 다른 연합국의 심한 불신을 받았다.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충칭을 떠난 후 상하이에서 몇 주일 지체한 것은 장개석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인접한 연합국 중국이 한국 문제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이 김구와 임정계 몰락의 배경이 되었다. 장개석의 중국이 처해 있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 본토에 대해서도 지분을 (최소한 홋카이도라도) 요구할 것으로 미국 관계자들이 예상했던 소련이 38선을 받아들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8-15 당시에 이미 조선 진주를 시작하고 있었던 소련이 북조선 점령으로 만족한 것은 엄청난 양보였다. 얼마 후 소련은 전략적 가치가 큰 이란에서도 쉽게 물러났고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혁명에도 냉담했다. 동유럽에 대한 스탈린의 병적인 집착을 빼고는 당시 소련의 아시아 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

 

 

2. ‘실증추론의 영역

 

역사 연구에는 실증이 중시된다. 그런데 실증의 ()’에는 실제(實際)’충실(充實)’의 두 가지 뜻이 엇갈린다. “있는 그대로의 뜻도 되고 의미가 깊은의 뜻도 되는 것이다. 랑케의 표어로 통하는 “wie es eigentlich gewesen ist”의 해석에도 “eigentlich”실제로로 해석하는 통설에 반대해 본질적으로로 이해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실증의 의미가 무엇이든, “실증되지 않은 사실은 배척한다는 식의 배타적 실증주의에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실증이 이뤄지는 데는 일정한 현실적-기술적 조건이 필요하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선별한다면 현재의 권력이 과거의 실상을 왜곡시키는 길이 열린다. 이 위험을 피하는 데 추론의 역할이 있다.

 

왜곡의 의도가 없더라도 안전을 위해 실증주의의 방패 뒤에 숨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 불만을 느끼는 몇 가지 사례를 예시한다.

 

 

조선 인민의 열망

 

해방 당시 조선 인민의 열망이 독립에 있었고, 나아가 민주국가 건설에 있었다는 견해에는 오늘의 조건에 따라 재단된 측면이 있다. 인민의 마음에 기쁨 못지않게 두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해방 당일의 적막한 거리 풍경이 말해준다.

 

1946813<동아일보>에 소개된 군정청 여론국의 조사 결과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설문의 4개 선택지에 대한 응답자 8453명의 선택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 자본주의 1189(14%)

() 사회주의 6037(70%)

() 공산주의 574(7%)

() 모릅니다 653(8%)

 

이 조사 결과를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응답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로 의미가 제한된다. 독립 열망의 표현에도 독립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열망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악질 친일파만이 아니라 독립의 의미를 정말 깊이 생각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어느 당당한 민족주의자 못지않게 최남선 같은 변절자에게서 얻을 교훈이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조선은행권 거액 발권

 

조선총독부는 98일 미군 진주 전에 약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해방 전 화폐량의 55-70%로 추정되는 거액이다. 인쇄 자체부터 벅차 징발된 민간 인쇄소에 평판(平板)을 보내 인쇄를 맡겼고, 정판사 위폐사건도 그런 평판 때문에 일어났다.

 

이 거액의 행방이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김계조 사건, 박흥식 사건 때 500만 원, 1000만 원의 출처가 빙산의 일각처럼 밝혀졌을 뿐이다. 상당 부분이 한민당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은 분명하다. 집회의 인원 동원,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자금 제공 등 당원들의 주머닛돈으로 보기 힘든 돈이 많이 움직였다.

 

일상생활에 쓰이지 않는 고액권(100)으로 발행되었으므로 얼마동안은 뭉칫돈으로 쌓여 있다가 서서히 풀려나오기 시작했는데, 19464월 미군정의 양성화 조치가 눈에 띈다. 인쇄 품질이 나빠서 상인들이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붉은 돈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조선은행이 보장하게 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화폐라면 위폐인데, 그 유통을 군정청이 보장해준 것이다. 군정청 관계자들의 몫은 얼마였을까. (송남헌의 회고 중 19466월 하지가 김규식에게 줬다고 하는 6백만 원도 군정청 공식 예산은 아니었을 것 같다.)

 

이 돈이 한민당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맡았을 것은 밝혀진 윤곽만으로 충분히 추정되고, 민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일이다. 그 구명을 위해 실증에 그치지 않고 추론까지 동원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중도의 역할

 

위에 언급한 19468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70%의 찬성을 받은 사회주의는 곧 중도 민심의 표현이다. 자본주의-공산주의의 극단을 꺼리는 민심이었다.

 

중도노선의 바탕은 민족주의였다. 정치체제의 선택은 민족주의와 다른 층위의 문제이므로 부차적 과제로 미뤄두고 민족국가 수립을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우익=민족주의등식은 극우파의 참칭이었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 성향을 침소봉대한 극우파의 모략으로 인해 민족주의는 남한에서 제 자리를 잃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이 인민위원회 구성에 민족주의 세력과 좌익의 합작을 유도한 데는 중도노선의 존중이 있었다. 좌익의 집권은 소련군이 허용한 자치권 위에서 서서히 (토지개혁의 성과 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반면 미군은 장기간의 군정을 통해 민심의 자연스러운 발전과 표현을 가로막았다. 분단에 임해 많은 민족주의자가 이북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해방일기 4> 머리말에 중도노선에 대한 내 생각 적은 것을 옮겨놓는다.

반면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이북과 같은)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좌우합작을 통해 역할을 스스로 만들러 나선 것이었다.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승자가 써준 역사의 장벽을 넘어 과거의 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실증의 기준을 최대한 늘려서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아무리 많이 남아있더라도 논리에 맞지 않는 우익=민족주의등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저자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

 

나는 전통시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30년 전부터 제도권 학계를 벗어나 공부하다 보니 현대사에 마음이 많이 가고 그쪽 글도 많이 쓰게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현대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서 역사학의 길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현상을 연구하더라도 그 의미가 현대사를 통해 확인된다는 생각이다.

 

현대사 연구 성과가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물 성격을 띠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시대 연구의 성과도 교양물 성격이 더 강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현대사 쪽은 연구 자체부터 좋은 교양물 만드는 목적의식을 앞세우기 바란다.

 

정병준 교수의 책들 중에는 문제의식과 서술방법 모두 교양서의 성격을 잘 갖춘 것이 많다. 이번 책은 그 점에서 오히려 다소 물러선 것 같아 아쉽다. 학계의 제도적 관행에서 슬슬 풀려나 자기 틀을 세울 만한 시점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아쉽다.

 

불원간 몇 주일 시간을 내 이 책을 확실한 교양서로 만드는 리메이킹 작업을 하면 좋겠다. 그런 작업은 단순한 독자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장차의 연구계획을 세우고 다듬는 데도 유용한 발판이 될 것이다. 교양서는 저자와 편집자의 합작물이라는 점에서, 편집자의 더 적극적인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