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선생님이 이끄는 국민당에서 며칠 전 성명서로 ‘해당(解黨)’ 용의를 밝혔습니다. “민족전선의 전면적 완전 통일정당의 결성이 진취된다면”이란 조건이기는 하지만, 국민당처럼 큰 정당이 해당 용의를 밝힌다는 데서 결연한 의지를 느낍니다. 정당 난립을 걱정하는 시민들도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운형 선생을 위원장으로 인민당이 결성되었지요. 해방 당일부터 건준을 두 분이 함께 이끌던 것이 석 달도 안 된 일입니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인공 수립을 앞두고 건준을 떠나 국민당을 이끌어 왔고, 여 선생은 건준과 인공을 계속 대표해 오다가 이제 정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건준에서 두 분 선생님은 깊은 신뢰를 나눴고, 선생님이 건준을 떠나면서도 그 신뢰는 변함없다고 하셨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 선생이 이끄는 좌익정당 인민당에 대해 우익정당 국민당 지도자로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지요?


안재홍 : 세간에서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기에 바쁘지만, 여 선생과 나 사이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취향의 차이가 조금 있더라도 막중한 건국 대업 앞에서는 그 차이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 선생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내가 말하는 신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을 좇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 선생과 나만이 아니라 지금 이 나라의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해방’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인의 억압 대신 조선인의 억압을 받는다고 해방이 됩니까?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억압체제의 철폐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인권을 받드는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충실히 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적용해야 합니다.

모두 같은 마음인데도 이런저런 오해 때문에 힘을 제대로 합치기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좌익과 우익 사이의 불신이죠. 초년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해 온 여 선생은 좌익에서 성망이 있는 분이고, 나는 신간회와 물산장려 운동 등을 우익 인사들과 함께 하면서 꽤 많은 신뢰를 나눠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건준을 함께 할 때 좌우익을 둘이 분담해서 건준 참여를 설득하기로 한 것이었죠.

지금은 자주 만나 서로 확인하지는 않지만 그 역할 분담은 끝없이 계속되는 일입니다. 전에는 건준 안에서 하던 일을 이제 그 밖에서 하게 된 것일 뿐이죠. 사소한 이해관계나 오해 때문에 민족의 대의를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살피는 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건준의 이름으로든, 인민당과 국민당의 이름으로든.


김기협 : 지금 인민당 만드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 선생을 지도자로 모셔온 이들이죠. 그들이 해방 전부터 ‘건국동맹’이란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도 여 선생과 뜻을 함께 해 왔는데, 왜 건국동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나요?


안재홍 : 그런 조직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가입했을 텐데, 난 몰랐어요. 나는 여 선생과 의기투합하는 줄 알았는데, 내 짝사랑이었나?

해방 전 몇 해 동안 여 선생과 자주 만나며 거리낌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지냈어요. 그분이 내게 그런 일을 감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아마 해방 후 활동을 하려니까 주변 분들이 작은 모임 있었던 것을 좀 과대포장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분도 그런 일에는 좀 대범한 편이라서...


김기협 : 선생님께서는 인민당에 있는 어느 분 못지않게 여 선생의 마음을 잘 아는 분입니다. 인민당을 통해 여 선생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안재홍 : 아까도 말했듯이 좌익의 설득입니다. 민족 대의를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설득이지요.

좌익 사상에는 민족을 소홀히 할 요소가 있습니다. 계급관계를 극단적으로 중시해서 민족, 가족 등 다른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사례를 각국 공산주의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죠.

여 선생과 나는 그 관점을 아주 틀린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시의성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의 용어를 써서, 지금은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중시되는 상황입니다. 민족주의의 표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당면의 지상과제이고, 계급 문제는 일단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 놓은 다음 서서히 극복해 나갈 장기적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시 그들의 용어로, 지금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김기협 : 선생님의 ‘신민족주의’ 담론이 바로 민족주의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기 위한 노력이군요. 기존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요?


안재홍 : 내게 민족주의의 의미를 깊이 일깨워준 단재 선생께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말씀했죠. 외람되지만 나는 이것이 식민지 상태 민족주의의 역사관이고, 독립민족의 민족주의는 이와 달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년 전 출옥 후 대외활동을 아예 없애다시피 줄여버리고 역사 공부에 매달려 지냈습니다. 중일전쟁의 양상을 보며 일본의 패망을 필지(必至)의 일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패망하면 민족이 독립할 텐데, 그때를 위해 민족주의 사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단재 선생의 민족주의는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관계만을 본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전체 인류 사이의 관계가 없습니다. 지배민족인 일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독립이 되면 우리 민족이 전체 인류, 다른 모든 민족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투쟁만이 아니라 협조의 관계, 경쟁의 관계도 맺게 됩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다양한 대외관계 속에서 민족의 입장을 적절히 세우기 위해 역사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기협 : 독립민족의 민족주의가 식민지시대보다 포용성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해방 시점에서는 어땠을지요. 당시 민족정기 수립의 실패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쉬워하면서 무엇보다 친일파에 대한 단호한 처단이 안 된 사실을 통탄합니다. 그 시점에서는 포용성과 유연성보다 추상같은 민족주의가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 그렇게들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실패한다면 투쟁성과 선명성의 부족이 아니라 포용성과 유연성의 부족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흑백론에는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만을 구분하는 흑백론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양심적인 일본인과 비양심적인 조선인에게 어떤 자리가 주어집니까? 매국적 친일파까지 우리 민족이라고 끌어안으면서 선량한 일본인까지 적이라고 박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친일파를 어느 범위로 규정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말 큰 문제입니다. 표 나게 심한 친일 행위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수십 년 지속되는 식민지 상태에서 나름대로 선량한 자세를 지켜온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통치에 협조한 측면이 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고급 직종에 종사한 사람들,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이 애매한 문제 때문에 불신이 생깁니다. 좌익에서는 친일파를 넓게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교육 수준과 재산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최대한 배제하면 진정한 인민 주권의 낙토가 앞당겨 이뤄질 것으로 믿으니까요. 이로 인해 유산계층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갖게 됩니다. 좌익이 주도권을 쥐면 죄 없는 사람들까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선배, 동지들을 포함해 식자층의 많은 사람들이 한민당에 몰리는 것도 이 의구심 때문입니다. 원칙은 국민당의 것이 옳지만 현실에 대처하는 힘이 한민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덕분에 한민당은 군정청과의 유착관계에 더 힘을 가지게 되고, 좌익은 좌익대로 불안감과 적개심을 더욱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김구 주석 이하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목마르게 기다려 온 것도 이 까닭입니다. 민족주의의 최고 권위인 임정과 김 주석이 민족주의의 표준, 친일파 처리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주면 불필요한 불신을 제거하고 적대감의 악순환을 막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임정과 김 주석의 권위를 빌리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기 바랍니다. 교육과 재산을 많이 누린 사람들은 적극적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식민통치의 혜택을 누린 사실을 인정하고 특권을 양보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겠지요. 또, 구체적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반성하고 민족사회를 위해 봉사할 자세를 보인다면 용납할 수 있겠지요. 과거의 행적보다 현재의 자세를 중시하며 화합의 폭을 최대한 늘리는 길, 이것이 여 선생과 내가 함께 찾는 길이고, 내 ‘신민족주의’도 여기에 보탬이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 선생님 말씀 고맙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으면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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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두 분 모시기로 하고 생각하니, 허구한 날 만나면 얻어먹기만 하던 분들에게 모처럼 내가 대접하는 자리를 가진다는 사실이 엄청 대견하구먼. 그 생각을 하니, 혹시 자네도 형편이 맞는다면 가근하게 여길 분들과 자리를 함께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따라 드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대놓고 얻어먹던 세 분께 한꺼번에 답례하는 '1타 3피'의 자리가 될 텐데... 이런 자리 놓치면 내게 밥 한 끼 얻어먹을 기회를 다시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시게. 꽤 특색있는 "한반도 평화의 밤"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며칠 전 홍석현 회장에게 보낸 메일의 한 대목이다. 윤여준 선생과 조광 선생을 청하는 자리를 만들어놓고 보니 홍 회장 생각이 났던 것이다. 두 분은 내 공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쓰일 길을 권해주신 분들인데 마침 홍 회장과도 두어 달 전 그의 <한반도 평화 만들기>가 나온 이래 그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눠 오던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에 두 분 선생님 모시는 자리는 문자대로 표현한다면 내가 '二父之子' 되는 자리다. 지난 겨울 입교 생각을 떠올리고 천주교인 지인 중 대부님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얻을 만한 분으로 윤 선생을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계씨인 여익을 통해 응락의 뜻을 받아놓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입교를 연기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들은 조 선생이 "일단 입교해 놓고 보세요." 강경하게 권하는 바람에 그분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바로 입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달 견진 준비를 시작하면서 견진대부를 세례대부와 별도로 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견진대부로는 윤 선생님을 모시면 어떨까 조 선생께 의논을 드리니, 크게 기뻐하신다. 대자 교육에 어려움을 느끼고 계셨던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다.

 

그래서 윤 선생께 부탁을 드리게 되었는데 부탁 드리는 자세를 한껏 정중하게 하고 싶었다. 댁으로 찾아뵙는 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요새 풍속으로는 부담만 드리는 일 같다. 그래서 근사한 식사 대접이라도 한 차례 하기로 작정을 했다.

 

그런 작정을 하고 보니 큰 대부님 모시는 자리에 작은 대부님도 함께 하면 두 분 다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분께 타진해 보니 과연, 서로 만날 일을 너무나 반가워하는 바람에 바쁜 분들인데도 일정이 쉽게 잡혔다. 그리고 나서는 홍 회장까지 욕심이 났는데, 그까지 맞출 수는 없었다. 위의 메일 보내고 바로 답장이 와서 "무척 땡기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 날 다른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두 분께 경의를 전해 달라며 자기가 나중에 자리를 한 번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 자리는 내 "1타 3피" 자리가 되지 않을 거다. 나는 돈 쓰는 일에 한 차례 넘어 시도할 생각이 없다.

 

윤여준 선생. 통할 만한 이들과 얘기 중에도 그분이 등장하면 "책사"로 고정된 이미지에 마주친다. 나 자신 그분과 교류하기 전에는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지내면서 내 마음속의 그분 모습은 반대편으로 옮겨갔다. 그분의 능력보다 그분의 성실성을 더 크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지지 연설에서 그 성실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는데도 그런 표현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그 연설에 나타난 성심조차 재주로 꾸며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윤 선생을 "성심의 인간"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것 볼 것 없이 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내게 잘해줘서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득될 것이 꼬물도 없다. 그분이 간절하게 바라는 "민족사회의 더 나은 장래"에 내가 공헌할 밑천이 있다고 봐서 내게 '플랫폼'을 만들어주려고 공을 들인 것이다. 그분과의 접촉을 통해 내가 그분의 헌신성을 전수받지는 못했지만, 그 성심을 아낄 줄 아는 감화는 받았다.

 

그리고 조광 선생. 지난 겨울 그분을 찾아간 것은 연구활동 복귀를 위한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침 그때 품기 시작하고 있던 입교 생각이 그분의 열렬한 호응을 받아 대부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입교 후에는 민족화해 사업 참여를 열성적으로 권해주고 있다. 그분도 윤 선생과 마찬가지로 내 공부가 민족 문제 해결에 공헌할 잠재적 가치를 크게 봐주는 것이다. 두 분이 공유하는 뜻이 크기 때문에 이번 주 만남을 기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홍 회장. "한반도 평화"에 관한 그와의 대화가 자꾸 종교, 영성 쪽으로 흘러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다. 나는 근년에 이르러서야 문명의 흐름이 종교를 되찾는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고, 입교의 마음도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홍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래 종교의 역할에 대한 내 생각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싸한 일이기도 하지만.

 

두 분 대부님, 참 배울 게 많은 분들이다. 지식보다 심성에서. 그런 곁에서 모습을 새로 드러내고 있는 홍 회장에게도 날이 갈수록 배우고 싶은 마음이 늘어난다. 우리 사회를 아끼는 마음을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잘 키워온 분들이고 그 뜻이 잘 표현되도록 돕는 일에 마음이 끌린다. '1타 3피'의 꿈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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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하지가 ‘민주주의’를 미국식 민주주의 내지 자본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실은 여러 차례 발언에 나타나지만, 그래도 언론 자유가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라는 점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착 직후인 9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맥아더의) 포고를 銘記하라!” 하는 고압적 메시지에 붙여 언론 자유를 언급했을 것이다.


“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 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 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 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12일)


신문이 몇 가지 안 될 때였다. 해방 전 간행되고 있던 신문은 국문의 <매일신보>와 일본어의 <경성일보>뿐이었다. 둘 다 총독부 기관지였다. 그리고 미군 진주에 임박해 엉성하나마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와 <서울타임스>, 그리고 <조선인민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10월 23~24일 전조선신문기자대회에 24개사 대표가 모이고 연말까지 40종 이상의 신문이 나오기에 이른 데는 미군정의 언론 자유 보장 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해방 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언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이라도 말기의 전쟁기를 말하는 것이지, 1930년대 이전과 비교한다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미군정의 ‘언론 자유 보장’이 허울뿐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11월 10일의 <매일신보> 정간 조치였다.


총독부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과 기업체의 운영을 한국인 종업원들이 ‘노동자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 넘겨받는 ‘자주관리 운동’이 널리 펼쳐지고 있었다. 매일신보사는 자주관리 운동의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해방 직후부터 총독부 기관지의 구태에서 벗어나 국내 최대의 신문으로서 ‘정론지’의 위상을 추구하고 있었다. <매일신보>가 건준-인공을 지지한 점이나 기자들 중에 좌익이 많았다는 점으로 <매일신보> 자체의 좌경화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극단적 편향성을 보인 일이 없었다.


동업 每日新報는 돌연히 10일 오후 아놀드군정장관의 명령으로 정간처분을 받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통신망으로나 또 인원구성으로나 해방해서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매진하고 있는 오늘 조선의 권위 있는 보도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다 해야만 하고 무거운 책임이 있는 터임으로 이 기관의 존재와 금후의 발전에 대하여는 일반민중이 큰 관심을 가지고 그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 만큼 이번 정간된 것은 사회 각층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이다.

(...) 11일 오후 4시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종로2정목의 조선통신사에서 긴급상임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결과 언론자유의 확보라는 언론계 전체의 과제로 이 문제를 취급하기로 하고 대표 5명을 군정청에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하는 동시에 강력한 진언을 하기로 되었다. 이에 따라 대표위원들은 12일 오전 군정청보도부로 뉴맨 대좌와 녹 소좌를 방문하고 이 사건에 관한 전말을 듣는 동시에 하루 빨리 신문이 발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 날의 회견에서 판명된 것은 10일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정간을 명령했던 것이다. 사실은 매일신보사의 곤란한 현하의 재정 상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임시로 정간을 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이후 매일신보의 재정 상태가 넉넉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재정 상태를 조사하는 때문에 정간을 시킨다는 것은 양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군정당국에서는 언론을 탄압함은 결코 아니라고 언명했다. (...) (중앙신문 1945년 11월 13일)

 

당시 사람들은 <매일신보>가 군정청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결정적 사례가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보도였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라며 자신의 인공 비난 발언의 보도를 요구했다. 모든 신문이 이 발언에 비판을 곁들이더라도 1면에 보도했는데, <매일신보>만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언을 비판하는 사설만 내보냈다.


‘요구’가 어떻게 ‘명령’의 성질을 가질 수 있을까? ‘명령’이 아니니까 언론 자유 침해는 아니면서 실제로는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을 아놀드는 원했다. 우리가 군대에서 익힌 “박으라면 박아!” 정신은 한국 군대만의 것이 아니었다.


11월 10일이라는 날자가 말해주는 것이 또 있다. 아놀드 망언에서 꼭 한 달이다. 미군 지휘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인내는 한 달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아놀드는 군자가 아닌 모양이다.


물론 <매일신문> 정간이 아놀드 일개인의 명예와 복수를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10월 초순 미군정이 매일신문사 접수를 시도하다가 자치위원회에게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뭔가 어떻게 해야 할 신문이라는 공감대가 있던 터에 아놀드의 분노가 지렛대가 되었을 것이다.


며칠 후 아놀드는 신문기자회 위원장과의 회견에서 <매일신보>에 대한 태도를 밝혔다.


(略) 13일 신문기자회위원장 李鍾模가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한 시간 반이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한 결과 아놀드 군정장관은 (...) 시급히 매신을 계속 발행할 수 있도록 힘 쓸 것과 일 당파나 일 개인에게 이 기관을 주지 않겠다는 것을 공약했다. 여기서 매신의 재출발은 불일 중 실현될 것으로 믿어졌다.

그런데 14일에 이르러 재건 도중에 있는 조선일보가 군정청의 명령으로 매일신보의 관리를 맞게 되었고 동시에 조선일보를 매신 공장에서 인쇄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런데 15일의 군정청 발표로 보면 조선일보는 매일신보 공장에서 인쇄하지만 매신 공장을 접수하는 것은 아니요 일방 매일신보는 재조직하려고 당분간 정간하고 있다는 것과 한 신문사 공장에서 두 신문을 발행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놀드 장관이 언명하였다. 이로써 보면 매일신보는 금후에 반드시 속간될 것이요 또 그렇게 되면 매신 공장에서는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의 두 가지 신문이 인쇄될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번에 군정청에서는 조선일보는 현재 매일신보 공장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간하게 하고 동아일보는 현재 경성일보 공장을 이용하도록 결정 발표하였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이러한 조치를 하고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매일신보의 정간은 동사를 재조직하기 위하여 당분간 발간을 정지시킨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 (중앙신문 1945년 11월 16일)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자기 소유가 아닌 당시 최고의 인쇄시설을 쓰며 11월 23일과 12월 1일 재창간하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11월 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속간되었다. <매일신보>의 정간과 제호 변경은 재창간하는 두 신문의 경쟁자를 약화시켜 주는 효과도 가져왔다.


당시 수많은 신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낸 것을 놓고 “언론은 정치투쟁의 격렬함을 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선봉에 서는 당파지로서 갈등을 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강준만의 논평은(<한국현대사산책 1> 158쪽) 미디어학자답게 예리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대중성이 강한 <매일신보>는 중도적 입장을 지켰다. <매일신보>가 제호를 바꿔 영향력이 줄어들고 <동아일보> 같은 극우 신문이 영향력을 늘리면서 당파지 성향이 강화된 것이니, 미군정 언론정책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월 23일 전조선신문기자대회 선언문에서 정치색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언론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원리의 적용 범위와 방법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색깔론’은 괜찮지만 ‘흑백론’이 문제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문이 흔히 불편부당을 말하나 이것은 흑백을 흑백으로써 가리어 추호도 왜곡치 않는 것만이 진정한 불편부당인 것을 확신한다.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적어도 이러한 전 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우리는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함을 선언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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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