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군무부장 金若山은 18일 義烈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조선의열단이니 의열청년회니 의열동지회니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는 옛 朝鮮義烈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열단은 1915년 해외에 있는 대한독립단, 조선혁명단, 신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가 조직한 것으로 그후 조선민족혁명단이 되었다가 다시 1945년에 발전적으로 해소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새의 것은 그 때의 것과 성질도 다르며 그 당시의 관계자들은 이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5. 12. 20)


식민지시대의 항일투쟁 중 가장 적극적인 방법을 취한 것이 의열단의 테러전술이었다. 1919년 11월 김원봉(약산)을 단장으로 결성된 의열단은 단순한 행동대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 측면에서도 항일투쟁의 한 첨단 역할을 맡은 중요한 조직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효과적 질서 수립에 실패하자 조직폭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는데, 의열단의 명성에 의탁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의열단의 원조 김원봉이 해명에 나선 것이다.


11월 20-22일의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둘러싸고 조직폭력의 양상이 기사화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전국 인민위원이 모인 회장인 서울시 경운정 천도교 대강당에는 대회 첫날인 20일에 돌연히 수상한 청년 일당이 손에 장작가지를 들고 습격하였지만 미연에 경비대원에게 발견되어 미군 헌병의 제지로 그들을 놓쳐버린 사실이 있어서 이 대회의 진행을 방해하려는 단체의 폭력행위가 폭로되었었다. 그런데 대회 제2일인 21일에도 또한 폭련단의 습격이 있었는데 그 중 폭한 11명이 경비원과 미군헌병대의 손에 체포되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들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는 정당의 정체도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날 오전 10시반경 대회가 개최되어 진행되려 하는 때에 회장 남쪽 담을 뛰어넘어 회장에 침입하려는 괴한이 있는 것을 경비대원이 발견 체포하였는데 그자는 강원도 洪川에 원적을 둔 安東洙(23)라는 자인 것이 판명되어 곧 미 헌병에게 인도하고 취조한 결과 그자의 자백에 의하여 그 배후의 일당을 알게 되었다. 안동수는 17일에 일당 열 명과 함께 元山서 상경한 것인데 그들 열 명은 원산에서 해산물상을 하는 韓承基(28)에게 인솔되어 상경하여 서울시 觀水町에 있는 전 일인 경영의 和光敎團 안에 있는 觀水部隊라고 하는 청년대에 소속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19일에 이르러서 전기 韓承基의 명령으로 서울시 수송정 太古寺에 가서 그곳에서 朝鮮建國靑年會本部 위원장 崔泓銖, 부위원장 吳炳喆에게 인사를 하게 되고 비로소 20일에 개최되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파괴하여 그 회를 진행치 못하게 하여야 될 것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약 300명이 일단이 되어 일인당 50원씩의 돈의 배당을 받은 후 전기와 같이 20일 오후 1시 대회의 첫날이 개최되는 시간을 기해서 폭력행동을 할려고 하였는데 회장의 경비가 엄중하여 성공이 되지 않겠으므로 길가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집어들고 난입하려고 하다가 제지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2일인 21일에 재거할 것을 약속하고서 당일에는 보다 더 계획적으로 하기 위하여 흰 마스크와 흰 장갑으로 대원임을 표하고 미리 준비하였던 흉기를 가지고서 300명이 5,6명씩 떼를 지어 각각 방향을 나누어서 회장을 포위 습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안동수는 자백하였는데 역시 이 날 체포된 폭력단 중에서 일본유학생으로 중앙대학 법과생이라는 崔瑞得(23) 韓炯采 양인의 자백으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 양인은 지난 8월 2일에 귀국 상경하여 전기 위원장 부위원장 외에 組織部長 朴世東, 調査部長 金敏洙, 外事部長 李營斗, 書記長 金熙公인데 동회의 전체를 책임운영하기는 부위원장 오병철이며 서기장 김희공은 과거 일본제국 아래 만주국에서 토벌대에 가담하여 일본육군대위로 있었다 한다.

그리고 동회의 산하에 유학생회가 가입하였었으므로 최서득, 한형채의 양인도 가입하게 된 것이며 서울시내에는 마포부대, 관수부대라 하여 지역적으로 나누어서 지부가 설치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번에 대표자대회를 깨트리자는 데에는 조선건국청년회를 통해서 전기 원산 출신의 韓承基와 모 정당과의 사이에 밀의가 되어서 이번 운동자금으로 40만원을 모 정당에서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그 중 4만원을 전기 부위원장 吳炳喆을 경유하여 韓承基에게 지불하였다 한다.

체포된 11명은 보안서에 유치중이며 그 배후조사를 진행하게 될 터인데 이 같은 반동의 폭력은 일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자유신문> 1945. 11. 22)


7백 명이 모이는 집회를 분쇄하기 위해 흉기를 준비한 3백 명을 동원하고 현금 50원씩을 나눠줬다고 한다. “모 정당”의 이름을 밝혀놓지 않았지만, 사실 밝혀놓을 필요도 없다. 이 대회를 깨뜨리는 비용으로 40만원을 내놓을 세력이 따로 누가 있겠는가. 인공 측의 개최 비용은 그 몇 분의 일도 안 되었을 것이다. 압도적인 자금력을 가진 세력이 폭력을 정치판에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민당 측의 파괴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군정청이 예상 외로 대회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군정 당국자들은 이 대표자대회에서 ‘인민공화국’ 호칭 등 몇 가지 문제가 처리된 후 좌익도 모스크바 외상회담 전에 독촉에 참여하기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대회를 극력 보호한 것이었다.


11월 23일에는 20여 개 단체 연명으로 “악덕 기자에게 경고함”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표자대회 파괴 공작이 실패하고 공작의 배후가 밝혀지는 데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백색테러’치고는 아직 조직 수준이 낮아 보인다. 행동대 몇 명이 잡혀 들어갔다 해서 위 기사에 나타난 것처럼 돈 문제까지 낱낱이 드러나서야 ‘공작’이란 이름이 부끄럽다.


그러나 폭력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폭력조직의 수준도 발전하게 되어 있었다. 12월 21일 결성된 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은 몇 달 후 대한민주청년동맹(민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우익 폭력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우익 폭력에 어떤 사람들이 동원되었는가? 1930년생으로 평양에서 자라고 1946년 8월 단신 월남한 채병률의 회고에서 그 전형적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서울에 와서도 돈이 없으니까 막막하잖아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찹쌀떡, 메밀묵, 아이스케키 장사, 그리고 서울역과 염천교 앞에서 담배꽁초 주워 까서 팔고, 공책장사, 연필장사, 양초장사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

지금 장충동 부근에 그 당시 이북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많이 모이니까 이북학련 천막을 쳐줬어요. 그때부터 반공투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북에서 넘어온 어른들은 서북청년회, 학생들은 이북학련회. 우리의 활동은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행동부대로서의 역할이었어요. 예를 들어, 그 당시에는 남로당이니 뭐니 다 합법정당이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이 우리에게 지도를 갖다 주고는 어디어디 있는 놈들이 악질 빨갱이들이니까 가서 혼 좀 내주라고 했어요. 그러면 밤에 가서 숨었다가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거예요. 패다가 우리도 힘이 달리면 뒤지게 맞고요. (<8-15의 기억>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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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Winter is the time for stars. As I gaze into the night sky, I turn into a naked tree facing the biting wind.

 

Winter is the time we look back on the year past, and also look forward to the coming spring. Standing under a tree in a winter night, my mind is sewing leaves of stars to the bare twigs.

 

[Shenzi]

 

 

The less you have on you, the better your sight will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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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1월 29일 몽양심포지움에서 발표할 내용을 정리해 보내고 난 뒤에 이어지는 생각이 많다. 자료집에 수록되는 내용은 간단하게 발표하고 이어지는 생각을 많이 내놓아야 할 듯.

 

 

1. 냉전이 닥쳐오는 상황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국을 너무 낙관했다는 "판단 오류"의 의미를 너무 크게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1935년 6월의 글에서 "세계화"를 내다본 것은 큰 흐름을 정확하게 읽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냉전은 세계화의 큰 흐름에 대한 반동의 역류일 뿐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반동의 역류로서 비슷한 사례로 19세기 초반의 "비엔나체제"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대의 흐름은 국민국가 발전의 방향이었다. 비엔나체제는 그 흐름이 겉으로 솟아나오는 것을 막았지만 저류(底流)는 막을 수 없었다. 미-소의 힘이 세계화의 흐름이 크게 나타나는 것을 막았지만 비동맹주의 제3세계에서는 계속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닌가. 지금 ASEAN의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그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지. 우리 사회는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이 흐름에 둔감했던 것이 아닐지. (여기서 말하는 "세계화"는 물론 냉전 종식 후의 경제적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정부"를 향한 정치적 세계화다.)

 

2. "과거 청산"과 관련하여 사회의 "신진대사"라는 관점이 떠오른다. 수구세력이 장악했거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는 사회유동성이 줄어들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신진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가 오래 쌓이면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오래 쌓여 있었을수록 과격한 방식이 제기된다. 심할 경우 배설물 배출로 해결되지 않고 신체 부위를 절제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일제의 강압 아래 모순이 다년간 축적되어 있던 해방 때는 과격한 방식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민족반역자 집단을 넘어 有産-有識 계층 전체가 "친일" 척결의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 계층의 재활용 가능 범위를 확보하자는 것이 안재홍의 주장이었다. 민족 정기의 확립을 위해서는 "처단"과 "포용"의 두 측면이 함께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신진대사의 관점에서 타당함이 분명하다. 이북의 포용 없는 처단이 어떤 문제를 불러왔는지도 살필 여지가 있다. 처단-포용의 양면적 접근이 이남에서 좌절된 1차적 원인은 미군정의 친일-친미파 보호와 육성에 있었다.

 

진행 중인 "적폐 청산", 그리고 언젠가 닥칠 "친미 척결"에도 신진대사의 관점을 적용시켜야 현실적 성공 가능성도 높이고 바람직한 효과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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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