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년간 동남아시아 역사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참고할 연구성과가 근년 역사인류학 분야에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처럼 국가의 역할이 약했던 지역의 역사에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을 세우는 데 전통적 역사학보다 유리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폭넓은 역사서술을 시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 역사에 “남양사”란 이름을 거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뜻입니다. 중국 외에도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끼친 여러 문명권이 있었지만, 최근 수백 년간 중국과의 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진 것으로 봅니다. 이 중점 때문에 동남아시아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제한될 수도 있지만, 초점을 분명히 해주는 이득이 더 크리라 생각합니다.

 

이 연재에는 월간중앙에 연재한 〈오랑캐의 역사〉(2019.11-2022.3) 및 중앙일보에 연재한 〈근대화 뒤집기〉(2022.1-2024.2)와 겹치는 내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도입부 몇 회는 〈근대화 뒤집기〉 마무리 부분을 손봐서 올리는 내용이 많겠습니다. 〈남양사〉 서술을 온전하게 하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자기 표절’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355

Posted by 문천

 

 

문명 전파가 남북보다 동서 방향으로 쉽게 이뤄지는 경향을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 , Guns, Germs and Steel>(1997)에서 설명했다. 문명의 바탕이 농업에 있고, 농업기술은 비슷한 기후대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griculture#/media/File:Centres_of_origin_and_spread_of_agriculture.svg 농업의 발생 지역과 초기의 전파 방향. (뉴기니에서 농업이 독자적으로 발생한 사실은 최근에 밝혀졌다.)

 

유라시아대륙의 역사가 동서의 축을 따라 동아시아권-인도권-이슬람권-기독교권으로 대략 구분되어 진행된 것도 이 까닭이다. 크게는 동양과 서양이 대비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끊임없이 동서 방향으로 밀고 당긴 데 비해 남북 방향의 교섭은 호흡이 길었다.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문명의 시간-사건의 시간의 구별이 이런 차이를 말한 것 아닐까. 기본 특성을 공유하는 문명들 사이의 교섭이 일상적으로 이뤄진 반면 문명의 틀이 크게 다른 지역들 사이에는 규모가 큰 변화가 서서히 진행된 것이다.

 

 

농업문명의 변방, 남양(南洋)과 북막(北漠)

 

일련의 농업문명이 자리 잡은 온대 지역의 남쪽과 북쪽에서 인간 활동에 꽤 적합한 조건을 동남아 도서 지역과 내륙 초원지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지역은 농업문명의 변방이라는 기본조건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른 조건들도 가졌다.

 

건조-한냉 기후의 초원지대는 농업과 상호보완 관계의 생산양식으로 유목을 발전시켰다. 이 상호보완 관계 때문에 유목민은 농경세력과 접촉과 충돌이 많았다. 반면 도서 지역 주민들은 농경세력과 상호의존도가 작아서 교섭이 적었다. 충돌도 적었다.

 

남양(南洋)과 북막(北漠) 사이의 이 차이가 언어의 분포에도 나타난다. 남양에서는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이 인도양에서 태평양에 걸쳐 압도적이다. 북방에도 이와 비슷한 광역 언어체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 위에 우랄-알타이(Ural-Altaic) 어족19세기 중엽부터 제안되었으나 치밀한 연구의 진행에 따라 학설로서 힘을 잃었다.

 

남양에 비해 북방 초원의 언어 분포가 복잡한 것은 여러 농경세력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이다. 유목세력들 사이보다 인근 농경세력과의 관계가 더 큰 작용을 하면서 초원지대의 문화 구성이 복잡해진 것이다. 기원전 9세기~2세기에 동유럽에서 시베리아까지 퍼졌던 스키타이문화 이후로는 초원지대에 그만큼 널리 퍼져나간 문화현상이 다시 없었다.

 

 

유목민의 기마술과 남양인의 항해술

 

생산력 발전이 빠른 농경세력 앞에 초원의 유목민과 동남아 주민들이 자기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이 기동력이었다. 유목민의 기동력은 기마술로, 남양인의 기동력은 항해술로 나타났다.

 

유목이란 생산양식 자체가 기마술 덕분에 가능했다. 농경지대 확장에 따라 자연조건이 척박한 곳으로 밀려난 목축 활동이 기마술을 활용해 규모의 경제를 이룬 생산양식이 유목이다. 식물자원을 키우는 농업과 동물자원을 키우는 유목은 상호보완 관계이면서, 또한 자연자원을(토지) 놓고 다투는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접촉과 충돌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Bit_(horse)#/media/File:Cr%C3%A2ne_cheval.jpg 말의 사역에 필수적 요소인 재갈은 기원전 3500-3000년경 중앙아시아의 보타이문화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갈을 물린 자리가 말의 두개골 이빨 사이에 남아있다.

 

대륙인이 강, 호수와 해안을 겨우 항행할 때 남양인은 차원이 다른 항해술을 일상생활을 통해 발전시켰다. 10세기경까지는 남양인이 원양항해를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장거리교역이 자라남에 따라 대륙세력의 조선술과 항해술도 발전을 시작했으나 13세기까지도 남양인의 우위가 지켜진 사실을 쿠빌라이칸의 자바 원정(1283) 실패가 보여준다.

https://en.wikipedia.org/wiki/Djong_(ship)#/media/File:Situs_civitatis_Bantam_et_Navium_Insulae_Iauae_delineatio.jpg 자바 선박의 1610년 그림. 자바 선박을 (jong)’이라 하는데, 중국 선박을 정크(junk)’라 하는 것도 기술과 함께 넘겨받은 이름이다.

 

남양과 대륙 사이 교역은 문명 초기부터 조금씩 생겨났다. 처음에는 향료 등 남양의 원료와 도자기, 금속제품 등 대륙의 공산품이 간간이 전달되며 서로에게 사치품으로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역이 지속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고 교역량과 품목이 늘어났다. 교역의 수요는 시장 규모가 커진 대륙 쪽에서 더 빨리 자라났고, 그에 따라 대륙세력이 교역의 중심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다.

 

 

유럽인의 정복과 중국인의 침투

 

15세기에 이르러 대륙세력의 해상활동 능력이 남양인을 압도하게 된 상황을 정화(鄭和) 함대가(1405-1433) 보여주었다. 남양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운 위에 대륙의 경제력과 조직력을 동원한 결과였다. 그리고 16세기 들어서는 포르투갈을 필두로 전투력을 앞세운 유럽세력이 인도양을 휘젓기 시작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treasure_ship#/media/File:Nanjing_Treasure_Boat_-_P1070978.JPG 난징 조선소 유적에 세워진 정화 함대 선박의 모형.

 

내가 본 책 중 동남아 역사를 가장 넓고 깊게 다룬 것이 앤서니 리드의 <통상(通商)시대의 동남아시아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2, 1988, 1993)였다. 리드가 말하는 통상시대란 대륙세력이 남양 해역에 대거 진입한 시대였다.

 

이 시기 남양에 진입한 대륙세력에 중국인과 유럽인의 두 갈래가 있었다. 중국인의 진출이 본국의 해금(海禁)정책 때문에 살금살금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반면 유럽인의 진출은 본국의 지원 아래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럽인이 공식적 권력을 장악하는 정복과 중국인이 실질적 중간권력을 형성하는 침투가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동남아 근대사에서 유럽세력의 정복 활동만큼 주목받지 못하던 중국인의 침투 현상에 최근 연구자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멜리사 매콜리는 <머나먼 바닷길 Distant Shores: Colonial Encounters on China’s Maritine Frontier>(2021)에서 중국 동남해안 차오저우(潮州) 사람들의 동남아 활동 영역을 차오저우 해상왕국(Maritime Chaozhou)”이라 부른다. 공식적 식민지는 아니라도 실질적인 식민활동의 의미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역사를 넘어

 

차오저우 해상왕국의 구성에 매콜리가 접착제로 쓰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공간성(trans-localism)’-시간성(trans-temporalism)’이다.

 

-공간성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빠른 근대세계에서 널리 나타난 개념이다. 차오저우에서 벌어진 상황이 홍콩, 상하이와 동남아 각지에 파장을 일으키는 일, 그리고 각지의 차오저우인 디아스포라에서 일어난 변화가 고향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계속된 것을 저자는 확인한다.

 

이에 비해 통-시간성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1869-73년 기간의 참혹한 청향(淸鄕)’ 사태가 그 후 차오저우 지역과 타지 차오저우인 집단의 폭력성과 이어지는 원리를 저자는 -시간성으로 설명한다. 여러 곳에서 차오저우방(潮州幇)’이 폭력조직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상황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주는 심증은 되지만, 역사학도에게는 물증이 아쉽다.

 

남양의 역사, 특히 남중국과 동남아의 관계를 살핌에 있어서 매콜리의 -시간성이 중요한 문제로 계속 떠오를 것 같다. 물증이 심증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는 종래 역사기록의 편향성에서 흔히 파생된다. 기록자의 의식을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후세 연구자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근대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기록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가장 큰 기준이 국가에 있었다. 국가의 존재가 역사기록 생산의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이 대륙에 비해 취약했던 남양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는 물증 아닌 심증이라도 중시할 필요가 있겠다. 적어도 고찰의 출발점을 찾아내는 데는 꼭 필요할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다음 연재를 예고합니다.

 

“근대화 뒤집기” 연재를 28회로 마칩니다. ‘근대’라는 시대의 의미를 힘닿는 대로 뒤집어가며 살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과연 ‘근대’가 역사의 종착역인지 확인하는 일을 50년 역사 공부의 마무리로 삼은 것은 “역사의 종말”을 믿지 않는 제 역사관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 온 제도인데, 근대에 이르러 다른 모든 제도를 압도하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국가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도덕관이 근대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국가의 역할 퇴조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주의 도덕관이 아직 버티고 있어서 인류사회를 안정보다 불안정으로 몰고 가는 위험 요인이 되었습니다. “국가 이후”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 이후”의 전망에 “국가 이전”이 참고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남양사”를 공부하려 합니다. 국가 중심의 동양사, 서양사가 지배해 온 역사의 무대에 국가의 역할이 작았던 남양사를 함께 올려놓음으로써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역사관의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3월 2일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합니다.

 

Posted by 문천

 

 

중국사 공부 정리를 위해 <오랑캐의 역사> 작업을 하다가 새 작업의 필요가 떠올랐다. 근대사 영역의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역사 공부의 목적이 현실의 이해에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앞 시대의 연구라도 근대사에 대한 함의를 밝히는 것이 정리의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새 작업의 필요를 떠올리며 국가를 주제로 삼을 생각을 했다. 다른 시대를 공부해 온 사람이 근대사를 살펴보려면 통시대적 의미의 주제를 앞세워야 할 것이고,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국가의 역할이 컸다. 그렇게 오랜 국가의 경험을 가진 나라가 근대세계에서 국가실패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https://en.wikipedia.org/wiki/Terracotta_Army#/media/File:Terracota_warriors_002.jpg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방대하고 치밀한 국가조직을 보여주는 병마용(兵馬踊) 유적. 1갱에서만 6천여 개 인형이 출토되었다.

 

국가제도의 밑바닥을 헤쳐볼 마음이 들면서 동남아로 눈길이 간다. 이 지역의 국가 경험에는 다른 어느 지역과도 다른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국가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기에 적합한 무대로 보인다.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

 

제임스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이 그런 참에 눈에 띄었다. 스콧이 고찰하는 조미아(Zomia)는 동남아 대륙부의 안쪽 산악지대, 그리고 비슷한 자연조건이 이어지는 중국 서남부와 인도 동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힘이 약하던 지역이다.

 

이곳을 단순히 미개지역으로 보던 통념에 스콧은 이의를 제기한다. ‘미개라면 발전하지 못한상태란 말인데, 못하기보다는 않은측면을 보자는 것이다. 집약농업의 생산력, 국가조직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싫어서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을 휩쓴 사회진화론은 인종주의 등 파생된 문제들 때문에 비판을 받았으나 그 핵심 명제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여러 가지 발전단계에 관한 생각이 그렇다. 모든 변화의 흐름에 불가역적 법칙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Colonial_Boundaries_in_Southeast_Asia.jpg 19세기 말 동남아에서 샴(태국) 외에는 모두 유럽인의 식민지였다.

 

발전론자들은 결과를 중시한다. 집약농업과 국가조직을 채택한 사회들과 그러지 않은(또는 못한) 사회들이 나란히 있다면 후자의 사회들은 우승열패의 법칙으로 도태되어 전체적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콧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문명 자체를 완성된 결과가 아닌 진행 중인 과정으로 본다. 과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축적된 경험이 문명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로의존성이 작동한다. 그렇게 본다면 근대화가 늦었던 남양인의 경험이 국가의 역할이 줄어드는 탈-근대 단계에서는 중요한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세계에서만 절대적이었던 국가

 

체계적 역사서술의 출현에는 국가의 역할이 컸다. 역사서술이라는 활동 자체가 국가가 보장하는 환경 속에서 이뤄지는 한 탐구와 서술의 중심을 국가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민족국가가 역사학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준 덕분에 세워진 근대역사학은 민족(국가)의 역사로 출발했다.

 

인류의 생활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꾼 사건으로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과 근대 산업혁명이 꼽힌다. 농업혁명을 계기로 국가조직과 문자 사용의 확산이 함께 진행되었으니 농업세력과 국가가 그 이후 역사의 주역을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peoples#/media/File:Beinan_Taitung_Taiwan_Aboriginal-Stilt-House-01.jpg 타이완 원주민의 원두막집. 손쉬운 재료로 며칠이면 내 집 마련이 가능한 곳에서는 국가조직을 뒷받침할 정주(定住)사회의 형성이 어려웠다. 그 점에서 유목민의 천막(yurt, ger)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연의 움직임만으로 역사의 드라마가 구성되지 않는다. 산업혁명이 불러일으킨 전면적 변화 속에서 주변부의 복선(伏線)에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정치사에 집중하던 역사학이 사회사, 문화사, 생활사 등 소홀히 다뤄지던 영역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보는 통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데이비드 스니스는 <머리 없는 국가 The Headless State>(2007)에서 유목세계의 국가 역할을 작게 보는 관점을 내놓았다. 정치조직의 본체는 분권화된 귀족층에 있고 국가 차원의 거대조직은 상황에 따라 덧씌워지는 껍데기일 뿐이었다는 관점이다.

 

농업세계 사람들은 유목세계에서도 국가가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와 마주친 유목민들이 국가체제를 모방하기도 했다. 통일된 진한(秦漢)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흉노제국이 그렇다. 그러나 이런 그림자 제국은 대외관계를 위한 장치일 뿐, 국가체제의 내부조직이 농업세계처럼 구축된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은 농업세력과 접촉을 통해 국가체제의 강점을 인식하고 모방하기도 했으나 그 모방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환경의 차이와 그에 따른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근대 이전 초원지대의 국가 경험은 농업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국가는 운명 아닌 하나의 옵션

 

농업혁명은 농업의 지배가 아니라 농업의 발생을 뜻하는 것이다. 온대지역의 큰 강 유역에서 출발한 농업문명이 주변의 건조지대, 산악지대, 해양지대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그 후 길게 펼쳐졌다.

 

건조지대의 유목활동이 그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온 현상이다. 유목민은 특화된 생산물을 농업사회에 제공하면서 곡식, 직물 등을 공급받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밀고 당기기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스콧은 조미아 산악지대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어난 현상을 보여준다. 지역 주민들이 자연조건과 외부 압력 사이에서 움직여 온 길은 발전을 향한 외길이 아니었다. 강 유역의 벼농사 사회를 발판으로 국가들이 만들어지지만, 대다수 주민은 국가와 비-국가 영역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국가에 속해 있어도 국가를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옵션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스콧은 통치를 피하는 재간으로 표현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ddy_field#/media/File:Terrace_field_yunnan_china_edit.jpg

https://en.wikipedia.org/wiki/Paddy_field#/media/File:Battad_Rice_Terraces,_Banaue_Ifugao.jpg 중국 윈난성과 필리핀 루손섬의 다락논은 동남아 지역에 전파된 전형적 집약농업 형태다.

 

조미아에서 국가가 주민을 장악하기 힘들었던 것은 농업이 압도적 생산양식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업기술로는 집약적 정착농업을 채용할 수 있는 범위가 좁았다. 국가의 규모가 클 수 없었고 거기 매여있던 농민도 마음만 먹으면 국가의 통제 밖에서 화전을 일굴 만한 곳으로 쉽게 달아날 수 있었다.

 

동남아 해양지대는 집약농업의 채용이 더 힘든 조건이었다. 기원전 1500년경 이후 남양인이 이 해역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두 가지 기술조건 덕분이었다. 하나는 화전농법과 벼의 직파(直播) 등 초보적 농업기술로 채집 단계에 있던 원주민의 생산력을 압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항해술로 생산력이 더 우월한 대륙세력의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통치를 피하는 재간받는 재간

 

군호(軍戶) 제도를 중심으로 명나라 동남해안 지역 사회사를 연구한 마이클 소니의 <통치를 받는 재간 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스콧의 2009년 책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그러나 소니는 자기가 살핀 지역 주민들은 스콧의 조미아 주민들처럼 통치를 피하는옵션을 갖지 못했다고 거리를 둔다.

https://www.amazon.com/Art-Being-Governed-Everyday-Politics/dp/0691197245/ref=sr_1_1?crid=2FBFBFRVMLSXX&keywords=The+Art+of+Being+Governed&qid=1704338114&sprefix=the+art+of+being+governed%2Caps%2C268&sr=8-1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31K7MAHGYAZRG&keywords=the+art+of+not+being+governed+by+james+scott&qid=1704338183&sprefix=The+Art+of+Being+Governed%2Caps%2C269&sr=8-1 <통치를 받는 재간><통치를 피하는 재간> 표지.

 

과연 그럴까? “재간(art)”이란 말이 중요하다. 주민이 국가를 이념으로 대하기보다 자기 이득을 위해 재간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두 지역에서 국가의 힘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주어진 국가의 힘에 그냥 굴복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위해 노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통치를 받는 재간도 본질적으로는 통치를 피하는 재간의 한 모습이다.

 

자기 이득을 위한 피지배자의 소소한 노력을 소니는 일상정치(everyday politics)’라 부른다. 그는 일상정치가 명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정 아래 푸젠(福建) 지역의 현상을 하나의 예로 제시한다. 그런데 푸젠 지역은 송나라 이후에야 중화제국의 통치가 확립된 곳이다. 제국의 틀이 먼저 자리 잡힌 지역들에 비해 일상정치의 힘이 특별히 강하지 않았을까?

 

중국 서남부 광시-윈난-구이저우(廣西-雲南-貴州) 일대는 아직도 한화(漢化)가 적게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푸젠 지역은 그보다 한 발짝 앞서서 한화가 진행된 곳이다. 12세기 이전에 중국 남해안에서 한화가 확실했던 곳은 광둥(廣東)의 주강(珠江) 중류 유역 등 몇 군데 조그만 구역들뿐이었다.

 

남중국 일대의 사회적-문화적 조건에는 한화 이전의 전통이 아직도 짙게 깔려 있다. 동남아 지역과 연결되는 전통이다. 동남아 화교의 민국혁명 지원, 공산군 대장정에서 남방 학까(客家)족의 역할, 모두 국가를 이념아닌 재간으로 대하던 전통의 복류(伏流)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