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 14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주석, 부주석, 총리와 14개 부장 등 정부 부서를 발표했습니다. 웬만한 분들 이름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올려놓은 것 같던데, 인공의 모체인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이끌던 선생님 함자가 발표에 빠진 것을 보면 불참여의 뜻을 아주 분명히 하신 모양입니다.

 

인공은 해방된 조선의 임시정부 역할을 지향하는 것인데, 선생님은 중경 임시정부(임정)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인공 수립에 반대하셨지요. 인공을 추진하는 이들은 중경 임정이 해외 먼 곳에 고립되어 있어서 정부 역할에 한계가 너무 크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일리가 없지 않은 지적이지요. 선생님이 임정의 역할을 특별히 중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준을 함께 이끌던 여운형 선생은 26년 전 임정 수립에 참여까지 한 분인데도 임정을 선생님처럼 중시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안재홍 : 요 전날 얘기한 것처럼 몽양은 좌익 입장, 나는 우익 입장에서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이 같아도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몽양도 임정의 역할을 일체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임정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지적 비판’과 ‘비판적 지지’의 차이 정도로 생각합니다.

 

한 달 전 맞은 ‘해방’은 해방일 뿐이지, ‘독립’이 아닙니다. 독립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 본격적 독립운동의 출발점입니다. 일본의 방해가 없어져 독립운동이 제대로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부터의 독립운동을 어떤 기준으로 펼쳐나갈지 막연한 점이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전통 중에서 가장 뚜렷한 흐름을 골라 지금부터의 모색을 위한 표준으로 삼는 것이 가장 혼란의 위험을 줄이면서 훌륭한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길입니다.

 

임정의 가장 큰 가치는 26년간 ‘독립’의 깃발을 한결같이 지켜온 데 있습니다. 그 사이에 내부적으로는 대립과 혼란, 침체의 고비들이 있었어도, 대외적으로는 그 깃발을 접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깃발을 지키며 살아 있어준 것, 그것이 어느 다른 독립운동과도 다른 임정의 큰 공로입니다.

 

국내에서도 독립을 위한 여러 형태의 노력과 투쟁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때문에 뚜렷한 형체를 키울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은 국내에서 더 풍성하게 발굴되겠지만, 틀이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 얻을 수 없는 요긴한 가치를 임정의 틀이 가졌다는 사실에는 몽양도 동의합니다.

 

지금의 임정 구성도 아주 훌륭합니다. 김구 주석의 반공 성향에 좌익에서 의구심을 품는다고 합니다만, 임정이 중국 국민당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상황에 말미암은 것으로 봅니다. 그곳의 국-공 대립기에는 임정이 좌익을 배척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후 국-공 합작기에는 임정에서도 좌우합작이 이뤄져 좌익에서 존경할 만한 분들도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요.

 

김기협 : 선생님이 보름 전 건준을 떠날 때 건준에서 인공 수립이 진행되고 있었죠. 선생님은 임정을 이제부터 독립운동의 틀로 삼기 바라는데, 인공이란 틀을 따로 준비한다는 것이 혼란을 불러오는 길로 여겼을 것을 이해합니다. 어쩌다가 건준이 그런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까? 여운형 선생은 임정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는 것 아닌가요?

 

안재홍 : 임정에 대해 몽양과 나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건준의 실권을 장악한 좌익 인사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고, 끝까지 막으려던 부서 조직까지 해치우는 데는 그분도 너무 화가 나서 직무집행 거부까지 했죠. 인공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놓고 실제 사업은 건준을 통해 진행하는 선까지 그는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 조직을 만들고 현실성도 없고 타당성도 없는 명단으로 보직을 채운 것은 정말 너무했어요. 인공 수립을 주도한 좌익은 인공을 진심으로 받드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투쟁도구로 여기는 것이며, 그 진의는 건준의 좌우통합 목적을 좌절시킴으로써 정국을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가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9월 10일 내 입장을 밝힌 성명서의 한 대목을 되풀이하겠습니다.

 

“건준은 정강을 가진 정당도 아니요, 그 운영자 자신들을 위한 조각본부도 아니요, 따라서 다년간 해외에서 해방운동에 진췌하여 오던 혁명전사들의 지도적 집결체인 해외정권과 대립되는 존재도 아닌 것이다. 또 그 일시 당면한 임무로써 국내질서의 자주적 유지와 대중생활의 확보와 및 신국가 건설의 기술적인 주비로서 각 방면의 전문적인 대책과 연구와 자료자재의 보관관리에 관한 공작 등등이다. 즉 사상 기술 방면에 걸치어 엄숙과감한 실천을 요하는 것이다. 나는 이 굳은 일념에서 총총 20일간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 의도와는 배치되는 결과로 됨에서 나는 단연히 인책 면퇴 부위원장의 자리를 떠났다.”

 

이 뜻이 꺾인 것은 표면상 좌익 인사들의 극단적 행동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익 인사들의 비협조에 있었습니다. 건준의 실패에는 몽양보다 내 책임이 더 컸죠. 우익 인사들이 어느 정도 호응만 해줬어도 건준이 그리 쉽게 좌익의 극단노선에 휩쓸리지는 않았을 텐데.

 

김기협 : 선생님은 우익에서 가장 큰 존경과 신뢰를 모으는 인물의 한 분이죠. 선생님 주장이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호응이 약했나요?

 

안재홍 : 존경까지는 몰라도 신뢰라면 과분할 정도로 많이 받죠. 지금까지도 확실히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건준의 좌익 편향을 막기 위해 우익 문호를 넓히도록 부위원장 권한을 남용하다시피 하고 몽양도 그것을 용인해 줬는데.

 

한민당은 건준과 인공 공격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화해와 타협을 주장하는 우리 국민당과 경쟁하는 입장이죠.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많은 선배, 동지들이 한민당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럴싸한 명분에 일시 현혹될 수는 있어도, 실제 행동을 보면 명확한 판단을 하게 되죠. 한민당이 결성되기도 전인 9월 8일의 발기인 성명서. 건준과 인공을 혹독하게 비난한 문서에 한민당의 본색이 드러나 있습니다.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야만스럽고 저열한 표현을 보고 이 정당이 과연 정치의 발전을 바라는 정당인지 정치의 파괴를 꾀하는 정당인지 판단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성명서를 보고 발기인에서 빠져나간 분들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꾹 참고 눌러앉아 한민당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리라 이해합니다. 한민당의 주류라 할 만한, 식민지시대에 괜찮은 위치를 누리던 사람들의 향배가 민족의 장래에 큰 관건입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각종 각급의 경영 경험을 가진 이 사람들이 건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인적자원이에요.

 

이 아까운 사람들이 민족 단합을 등지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한국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미군정이 그런 쪽으로 여건을 만들어 줄까봐 걱정입니다. 지금 미군정은 일본 통치체제를 그대로 되살리고 사람만 일본인 대신 미군과 한국인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영어를 잘하는 한민당 사람들이 거기 바짝 달라붙고 있고요. 이런 길로는 식민지체제의 억압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염원에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국가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 이런 상황 속에서 망가져 갈 것이 무엇보다 걱정입니다. 좌익의 인재들은 새 국가의 정신이 되고 우익의 인재들은 그 육체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믿고 어울리지 못할 때,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김기협 : 임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한민당은 선생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지만 한민당이 ‘절대 지지’를 부르짖는 데 반해 선생님의 ‘영입보강론(迎入補强論)’은 ‘비판적 지지’랄까, 임정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감을 줍니다. 이 차이를 설명해 주시지요.

 

안재홍 : 나는 지금의 임정이 26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진용과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어느 조직도 완전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 지지’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를 ‘절대 지지’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임정에게는 독립건국의 주체로서 크나큰 역사적 역할이 지워져 있습니다. 임정 밖의 사람들이 그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주체를 세우려 한다면 건국사업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 됩니다. 임정을 영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임정 구성원만으로는 역할에 한계가 있습니다. 임정은 보강되어야 합니다.

 

임정이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 여부는 임정의 현 요원들 손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념에서는 자신감을 갖되 실력에서는 오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국사업의 노선을 명확히 밝혀주면서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임정의 역할에 대한 민족의 기대감을 확인해서 임정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것이 내 할 일입니다.

 

그분들이 한민당의 ‘절대 지지’에 현혹되지 않기 바랍니다. 그 ‘절대 지지’에는 임정의 자신감을 지나치게 키워 다른 독립운동 세력, 특히 좌익을 경시하는 오만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 이제 본격적 단계의 출발점에 있는 것과 같이 임정의 지금까지 사업도 이제 완결되어 과일을 따먹는 단계가 아니라 지금부터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준비였다는 인식을 그분들도 가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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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중의 미군 제24군단은 방금 북위 38도 이남 각지에 진주 중인데 지난 12日과 15日에 총독과 총독부 각 수뇌부를 전부 해임시켰다.

 

이에 대하여 미군보도책임자 헤이워드 중좌는 15日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今 15日附 미군최고지휘관 하지 중장은 지난 12日 前 總督 阿部信行과 前 警察局長 西廣忠男 해임에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총독부 내 각 국장을 해임시켰다. 政務總監 遠藤柳作, 財務局長 永田直昌, 鑛工局長 鹽田正洪, 農商局長 白石光治郞, 法務局長 早田福藏, 學務局長 武永憲樹, 遞信局長 伊藤泰吉, 交通局長 小林泰一”

 

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9일에 항복을 받고 군정을 선포한 뒤 12일에 총독과 경찰국장을 해임하고 15일에 국장급 이상을 해임했다. 해임된 간부들은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아직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일본인 축출을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니까.


서방 연합국들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진주하면서도 ‘점령’이 아니라 ‘해방’을 표방했다. 소련이 동유럽 국가들에 진주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북에 대해서도 그랬다. ‘해방’이라면 진주하는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되기 때문에 주민들의 협조를 바랄 수 있다.


그런데 이남에서 미군은 ‘점령’(occupying force)을 표방했다. 일본 및 독일 진주에서와 같은 자세였다. 주민을 적대시하고 협조를 기대하지 않는 자세였다.


표현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점령의 자세였다. 남한 점령에 1개 군단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 중이던 군단을 보냈고, 그 지휘관에게 점령군 사령관을 맡긴 것이다. 군단장 하지 중장은 13일 기자회견 기사에 보이는 것처럼 자신이 외교관 아닌 군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인과 외교관 사이에 정치가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정치감각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하지에게 정치적 목적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식 민주주의로 한국을 이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독선적이라면 독선적인 이 목적을 실현할 효과적인 방법은 별로 보여주지 않았다. 목표를 내거는 데 만족하고 실제로는 점령군의 통제력 유지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의 공산주의 혐오가 군정 노선에 작용했다고 본 연구자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념이 아니라 취향 문제일 뿐이었다. 미국제일주의가 하지에게는 이념이라면 이념이었다. 그가 정말 반공 ‘이념’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그토록 꾸준히 군정을 이끌 수가 없었을 것이다.


11일의 기자회견에서 하지는 9일자 맥아더 포고문을 군정 기본노선으로 제시했다. 남한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하지의 신분은 ‘최고지휘관(Supreme Commander)’ 맥아더의 대리인이었다. 맥아더의 3개 포고문 중 가장 기본적이고 광범위한 내용의 제1호를 옮겨놓는다.


◊ 포고 제1호

 

조선주민에게 포고함

 

태평양미국육군 최고지휘관으로서 左記와 如히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서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戰捷軍은 本日 북위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

 

오랜 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及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이로부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同地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함에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左記와 如히 포고함.

 

第1條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실행함.

 

第2條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과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인은 有給無給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別命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任할사.

 

第3條 주민은 본관 及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卽速히 복종할 사.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第4條 주민의 소유권은 此를 존중함. 주민은 본관의 別命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할 사.

 

第5條 군정기간 中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公語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 간에 해석 및 정의가 불명 또는 不同이 生한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

 

第6條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及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明記함.

 

右포고함

 

1945年 9月 7日

 

於 橫濱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포고문 첫 줄에서 미군이 조선의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고, 그 밖의 내용도 점령군의 통치에 순응하라는 것이며, 제2호 포고문에서는 ‘사형’까지 들먹이며 복종을 강요했다.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미군이 조선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대신해서 통치하러 들어온 것이었다. 9월 9일에 소개한 소련군 사령관의 포고문과는 개념이 다른 것이었다.


남한을 ‘통치’하러 온 것이라면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더 가까이 느끼고 믿은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터지게 싸우던 것은 지난 일이고, 조선 통치의 후임자로서 인수인계를 받는 입장 아닌가. 통치의 노하우를 넘겨주는 것이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의 일본 통치에 대한 반항적 자세는 자기네 통치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통치’라도 수준 높은 통치라면 피통치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따른다. 일본의 통치도 무단통치보다는 ‘문화정책’이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런데 맥아더의 조선 통치 개념은 일본의 무단통치 수준이었고, 하지 사령부에는 이 개념의 현실 적용 방법을 향상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북한에서 소련군은 조선인들에게 행정권과 경찰권을 열심히 넘겨주고 있었다. 설령 속으로는 통제와 조종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주민들의 역할을 키워주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은 주민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고 일본인에게서 통치자의 역할만 넘겨받고 있었다.


그러니 일본인의 도움이 요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치자의 입장에 도전할 염려가 없는 일본인에게 최대한 도움을 받고, 일본인들이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놓은 통치기구를 소중하게 물려받아야 했다. 일본인들이 부득이 귀국한 뒤에는 일본 통치를 돕던 한국인들의 도움을 물려받았다. 일본 통치체제를 온존하는 것은 ‘점령군’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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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학교를 휴직하고 1985년 상반기를 케임브리지의 니덤연구소(동아시아 과학-기술-의학사 연구소)에서 지낸 것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학부 시절부터 공부해 온 중국역법사에서 가톨릭 동양선교사 쪽으로 연구 방향을 바꿔 이후 문명사 공부에 매달리게 된 출발점도 그곳에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다른 환경 속에 살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1월 어느 날 아침 연구소를 찾아가 벨을 눌렀을 때,(당시 니덤연구소는 주택가 안에 있는 3층 일반주택 하나를 쓰고 있었다.) 그레고리가 나와 문을 열어주고 활짝 웃으며 "Oh, you are Professor Orun, aren't you?" 말을 건네오던 장면을.

 

휴게실로 안내해 주면서 그레고리는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연신 싱글댔다. 몇 주일 전 니덤 박사에게 보낸 내 편지를 모두 둘러봤다는 것이다. 그 편지에 약간 비친 유머감각이 보통 접해온 엄숙하기만 한 동아시아 학자들과 달라 보여서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는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그래서 문 열어줄 때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니덤 박사에게 처음 편지를 보낼 때 이름을 "Orun Kihyup Kim"으로 적고 그 옆에 "金基協"이라고 붙여 적었다. 한자를 아는 분이니까. 그런데 그분이 답장에서, "Kihyup Kim"이 한자 이름과 대응되는 것을 알겠는데, "Orun"이 무엇이냐, 신분을 표시하는 타이틀이냐,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임의로 만든 퍼스트네임이며, 한국어에서 "나이든 분"이란 뜻의 "어른"을 음역한 것이라고 답장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선생님처럼 진짜 나이든 분(당시 84세)께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할 상황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은 후회됩니다." 이 말이 재미있다고 커피브레이크 때 꺼내서 연구소 식구들에게 두루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조그만 접촉 때문에 연구소 식구들은 나를 "말 통하는 사람"으로 여겨주었고, 덕분에 말도 관습도 익숙지 못한 내가 그곳 생활과 활동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특히 같은 나이또래인 그레고리와 프란체스카는 아주 편안하게 어울려 지냈다.

 

서로서로를 속속들이 알 만큼 되었을 때 두 사람이 내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해 준 것이 있다. 그 하나는 내가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 모든 면에서 멀쩡한 문화인처럼 보이는 내가 음악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인이라면 음악에도 꼭 관심이 있어야 하나?" 내게는 생소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틀림없는 지적이고, 그 지적 덕분에 음악에 관심을 키우게 되지는 못했지만, 내게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은 자각하게 되었다.

 

음악 문제는 둘 중 누가 지적해준 것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또 하나 문제는 프란체스카가 지적해 준 것이 분명하다. 당시 독신이던 프란체스카는 가정을 가진 그레고리보다 나랑 시간을 많이 함께 하면서 개인적인 문제까지 털어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내 성격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인간관계에서 불필요한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black anger"라는 표현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지적이 참 절실하게 들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쉽게 분노를 일으키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별로 가지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대로 분노의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었고, 남들보다 더 쉽게 더 많이 분노하는 경향은 정의감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미화하곤 했다. 더러 턱도 없이 화를 낸 경우는 단순한 실수로 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체적 경향을 놓고 "이유 없는 분노"를 지적해 주는 데 쉽게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은 익숙지 못한 다른 문화권에 적응해 가는 자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처럼 나 자신을 새로운 눈길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 1985년 영국 체류의 큰 효과 하나였다.

 

치료법이 완전하지 않은 증세라도 일단 진단을 제대로 받아놓으면 어떻게든 완화시키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보다. 그 후로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불가피한 분노인가, 이렇게까지 분노할 일 맞는가, 한 번씩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무척 온화한 사람으로 보이게까지 되었다. 여러 사람 앉은 자리에서 아직 낯이 덜 익은 분이 내 "부드럽고 너그러운" 인상을 이야기하면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쿡쿡대기 바쁘다. "아직 덜 겪어봤군!"

 

글을 통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온화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다. 글은 정제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글이 거짓된 것은 아니다. 身과 言에 따라붙는 가변적 감정이 書와 判에서는 쉽게 배제될 뿐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통한 자기표현에 치중하며 오래 지내다 보니 일상적 현실에서도 가변적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적게 되었다.

 

겉보기로는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되어 가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의 "분노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엄격한 태도를 취할 때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더 책임감을 느끼는 관계이므로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데 합당한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엄격한 정도가 지나쳐 관계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면?

 

며칠 전에 적은 홍석현과의 관계에도 그런 고비가 있었다. 2002년 말 내가 연변으로 떠날 때 이후 얼굴을 안 보고 지내면서도 간간이 메일은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지나 "이 친구에게 메일을 그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의 답장을 꽤 오래 받아보지 못하고, 중앙일보의 색갈이 조선일보 뺨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분노 속에서 그와의 관계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끊었던 친구가 1년 전 꿈에 불쑥 나타나고 그를 계기로 그를 다시 보게 되면서 과거 어느 때 못지않게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어찌된 조화인지 알 수 없다. 알 수는 없어도 좋은 조화니까 반갑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생각할 때, 내가 관계를 끊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문제 때문에 더 큰 관계의 가치를 덮어버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격의 길에서는 가치있는 자원이라도 진격 목표에 맞지 않으면 쉽게 버릴 수 있다. 그런 자원의 가치가 퇴각의 길에서는 크게 아쉬울 수도 있겠다. 포기했던 관계들도 이제 다시 돌아봐야겠다. 꿈에 불쑥 나타나주는 조화를 기다릴 것 없이 내가 조화를 만드는 길도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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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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