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헌트는 18세기 말 유럽 혁명기를 연구한 책에 <인권 발명의 역사>(Inventing Human Rights: a History, 2007)란 제목을 붙였다. “발명이란 말은 홉스봄의 <전통의 발명>(1993)을 떠올려 준다. 불변의 진실로 여겨 온 대상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재해석한다는 뜻을 담은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21세기 상황에서는 근대세계에서 인권을 절대시해 온 시각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남용의 위험을 피하고 인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거품을 빼야 하는 것이다. (재산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인권의 다른 측면을 위협하는 문제가 오-남용의 대표적인 예다.) 미국 독립과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갓 태어난 인권의 미숙한 모습들을 돌아보며 거품과 본질을 가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헌트의 책이다.

 

사람대접을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했나?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정확한 이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다. 인간시민이 따로 나올까? 행위의 주체로서 적극적 권리를 가진 시민과 보호받을 소극적 권리만을 가진 인간을 별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참정권이 대표적인 적극적 권리다. 참정권의 범위가 변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인권을 누릴 모든 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했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초기 참정권 제한의 여러 기준 가운데 제일 먼저 주목받은 것은 종교였다. 영국에서는 가톨릭이, 프랑스에서는 개신교인이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기독교인인 유대인은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종교의 자유가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전에 루이 16세의 관용 칙령”(1787)이 나와 있었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참정권 상호 배제는 오래가지 않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유대인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종교 다음으로 주목을 끈 기준은 재산이었다. 미국 독립 때 간판 구호 하나가 대표 없이 세금 없다!”였다. 뒤집어 말하면 세금이 없으면 대표도 필요없다는 말이다. 재산 기준의 철폐는 백여 년에 걸쳐 더디게 진행되었다.

 

지금 사람에게는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따져보면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금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이 사회 운영에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금 안 내는 사람들도 인간으로서 소극적 권리는 누리지만 시민의 적극적 권리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다.

 

주변부에서 도입이 시작된 여성참정권

 

종교나 재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철폐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기준이 성별이다. 대혁명 당시 일각에서 여성참정권 주장이 나왔지만 공론화되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주권국가 아닌 식민지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조금씩 채택되기 시작했다.

 

1869-70년 미국의 준주(territory; 아직 주-state-로 편제되지 않은 새로운 영토의 임시 행정조직) 와이오밍과 유타에서 여성참정권이 채택되었다. 아일오브맨(1881), 뉴질랜드(1893), 남오스트레일리아(1894) 등 영국 식민지들이 뒤를 이었고, 유럽 본토에서는 러시아의 대공국이던 핀란드가 1906년 대열에 합류했다.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도입된 것은 중심부와 본국보다 사회경제적 변화가 빨랐기 때문이다. 저개발지역의 유입 인구 중에는 독신 남성 비율이 높고 독신 남성은 정책 선택에서 빠른 변화를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1860년대 와이오밍의 독신 남성들은 원주민(인디언)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선호했다. 이런 투기세력의 과잉 대표를 막기 위해 가정을 꾸리는 보수적인사람들이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여성참정권 도입은 1913년 노르웨이를 필두로 1919년 독일까지 대다수 유럽국에서 이뤄졌고 1920년 미국이 뒤를 따랐다. 뒤처졌던 영국과 프랑스에도 1928년과 1944년에 도입되었고, 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953년 유엔총회에서는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었다.

 

1910년대 여성참정권 확산은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은 두 측면에서 여성참정권 도입의 필요를 제기했다. 한편으로는 여성 인력 동원을 위해서였다. 가정 안에 묶여 있던 여성의 역할이 생산활동과 사회 운영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편 평화운동의 발전이 여성참정권을 불러냈다. 극도로 참혹해진 전쟁 양상 앞에서 국가는 이 전쟁을 끝으로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고, 그 약속의 가장 확실한 표현 하나가 여성참정권 도입이었다.

 

재산, 성별... 이제는 연령 기준이 숙제

 

아직까지 가장 많은 사람의 참정권을 가로막고 있는 기준이 연령이다. 2차대전 종전 당시 대부분 국가의 선거권 연령 기준은 20세였고 1970년대부터 하향이 시작되어 지금은 대부분 18세다. 16세까지 내려간 나라들도 있다.

 

선거 연령의 하향 추세 속에 1986년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연령 제한을 아예 없애고 갓난아기까지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다. 이 주장에 호응하는 참정권 확장 운동을 데미니 투표권(Demeny voting)’이라 한다.

 

갓난아기까지?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백여 년 전에는 여성참정권도 엉뚱하게 들렸던 사실을 기억하자. 상황에 따라 온갖 제한이 있다가 서서히 풀려온 것이 민주주의 발전과정이고, 아직껏 풀리지 않고 남아있는 큰 숙제가 연령 문제다.

 

환경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데미니 투표권을 지지한다. 열 살 어린이에게는 정책 선택에서 자원 절약과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 50년 후의 생활조건을 생각해야 하니까. 반면 70대 노인에게는 먼 장래보다 당장의 비용과 불편이 더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 사회 노령화 문제가 겹쳐진다. 한국은 2000년경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기고(고령화사회) 지금은 20%(고령사회) 바라보고 있다. 사회 노령화는 생산인구 비율의 감소와 함께 미래에 대한 관점이 좁아지는 문제를 가져온다. 목전의 득실에 얽매이는 경향의 연령층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참정권 시행을 위해서는 영-유아의 대리투표가 필요한 만큼(데미니는 부모가 반 표씩 행사할 것을 제안했다.) 직접선거 원리에 저촉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참정권의 보편성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다. 많은 부모가 대리투표 행사를 위해 자녀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숙고할 것을 기대한다면, 그 자체가 정치에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20세기의 평화와 21세기의 평화

 

정치의 첫째 기능이 자원 배분의 결정이다. 21세기의 우리는 자원의 가치를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개발된 자원만을 배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미개발 자원은 무한한 것이라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되지 않은 천연상태의 자원이 더 소중한 것이 되고 있다.

 

20세기 사람들은 지구를 이용할 자원의 일부로 보았다. 지구의 자원을 소진하고 나면 더 많은 자원을 찾아 우주로 나갈 것을 꿈꿨다. 19697월 어느 날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을 때, 머잖아 항구적 기지가 만들어질 것을 사람들은 기대했다. 곧이어 화성에도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뿐인 지구를 절감하고 있다.

 

20세기의 위기는 세계대전으로 나타났고, 21세기의 위기는 환경과 자원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백 년 전 위기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지금 위기는 인간사회와 외부(로 여겨 온) 환경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과거의 평화는 인간사회 안에서 싸움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평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더 크게 걸려있다. 20세기 초에 여성참정권을 불러낸 것도, 백년이 지난 이제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똑같이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이다.

 

헌트는 인권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 또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권의 발전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고정된 이념의 실현을 향한 외길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인간사회의 진로를 조정해 나가는 부단한 노력일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nette_Rankin#/media/File:Jeannette_Rankin,_Bain_News_Service,_facing_front.jpg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자네트 랭킨(1880-1973). 여성참정권 도입 전인 1916년 미국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하원에 입성했으나 이듬해 대 독일 선전포고 반대로 시련을 겪었고 1940년 하원에 재입성했으나 이듬해 대 일본 선전포고에 반대한 유일한 의원으로 극심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1960년대 반전운동에 상징적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https://www.amazon.com/Inventing-Human-Rights-Lynn-Hunt/dp/0393331997/ref=sr_1_1?crid=FQNX5AP66N7C&keywords=inventing+human+rights+lynn+hunt&qid=1687958825&sprefix=inventing+human%2Caps%2C270&sr=8-1&asin=0393331997&revisionId=&format=4&depth=1 린 헌트는 <인권 발명의 역사>에서 인권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볼 것을 역설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Suffrage#/media/File:SPD-Plakat_1919.jpg 1919년 여성참정권이 갓 도입된 독일의 선거 벽보. “권리도 똑같이, 의무도 똑같이!” 구호가 적혀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uffrage#/media/File:Anti_Suffrage_Postcard_c.1908_03.jpg 1908년경 여권 반대 주장을 담은 영국 엽서. 여권운동가를 못 생기고 성질 고약한 여편네들로 보던 반대자들 시각이 담겨 있다.

 

 
Posted by 문천

 

 

 

중국 법률에 화교(華僑)’국외에 거주하는 중국 공민으로 규정되어 있다. (中华人民共和国归侨侨眷权益保护法 / 200010월 시행)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외적화인(外籍華人)’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통용되는 화교의 개념은 국적을 막론하고 중국인의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국적이 생활과 활동의 현실적 조건인 만큼 그 취득 여부를 정체성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대적 국적제도가 자리 잡기 이전 역사 속의 화교를 고찰하는 데는 국적의 기준이 의미가 없다. 사실 화교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 중국 밖의 중국인은 흔히 당인(唐人)’이나 한인(漢人)’이란 이름으로 통했다.

 

 

우리가 아는 화교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바이두백과> “화교(华侨)‘ 조에는 화교 이주의 연혁이 4개 단계로 나뉘어 있다.

 

1: -송 시대(618-1270). 교역의 발전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거주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총인구는 1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2: --청 시대(1271-1840). 교역의 증가에 따라 더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진출, 여러 지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총인구는 10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3: 아편전쟁 이후(1841-1949). 청 왕조가 혼란에 빠지면서 인구의 해외유출이 격증하는 가운데 동남아의 경제개발이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 화교 인구는 1천만 명을 넘어섰다.

4: 1949년 이후. 화교 인구는 4천만 명 선까지 늘어났고, 아직도 동남아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미국, 캐나다,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 서양 지역의 비중도 크게 자라났다.

 

이 연혁에서 화교집단의 팽창 속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기와 제2기에는 화교집단의 규모가 10배로 커지는 데 6백 년 전후의 시간이 걸린 반면 제3기에는 백여 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1기와 제2기가 끝날 때 중국 인구에 대한 화교의 비율은 0.1~0.2% 수준이었는데 제3기가 끝날 때는 2%를 넘어서 있었고 지금은 3% 선에 도달해 있다.

 

2기까지(아편전쟁 이전) 동남아 화교 중 다수는 현지인과 결혼해 혼혈 자손을 남겼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친숙한 이 후손 집단이 오랫동안 화교사회의 주축이었다. 19세기에 신규 이민이 격증하면서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서서히 약화해 오던 이주민사회의 중국성(中國性)’이 거꾸로 강화되는 계기였다.

 

중국의 수출품 중 상업적-정치적 가치가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배마다 화물 외에 부지런한 일꾼 수백 명을 소중한 수입품으로 싣고 온다. 그들은 쿨리나 막노동으로 시작하지만 검소하게 살며 부지런히 일해 약간의 재산을 모은 다음 장사에 투자해 조심스레 키운다. 많은 사람이 나중에는 자기 사업을 가지고 상당한 금액을 중국의 친척들에게 매년 보낼 수 있게 된다.“(스탬포드 래플즈 <자바의 역사> . 필립 큔 <타인들 속의 중국인>에서 재인용)

 

싱가포르 창립자로 이름을 남긴 래플즈(1781-1826)1816년에 낸 책의 이런 대목을 보면 제3기 이주 양상은 <바이두백과>의 구획보다 훨씬 일찍 시작된 것 같다. 1819년 설립된 싱가포르가 화교의 나라로 발전하는 데는 영국인들의 이런 인식이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본국과 부쩍 가까워진 근대 화교

 

화교사회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며 중력 법칙이 떠오르는 대목들이 있다. 우선,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점. 화교사회의 중국성이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는 것은 중국의 질량이 워낙 크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인력이 줄어드는 제곱 반비례(inverse square)’의 원리다. 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실질적 거리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라 줄어들면서 교민사회와 본국 사이의 인력이 커진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동남아 화교 중 본국에 다니는 사람은 상인과 선원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태평천국의 난 등 전란으로 인한 집단이주가 늘어나고 중국의 개항에 따라 왕래가 쉬워졌다. 3(아편전쟁 이후)의 신규 이주자들은 앞선 이주자들에 비해 생활방식을 잘 바꾸지 않았고, 본국의 일에 관심도 많았다.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위기 심화에 따라 동남아 화교들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비해 인력과 자금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쑨원(孫文, 1866-1925)이 혁명운동을 위한 지원을 화교사회에서 찾게 된 상황이다.

 

 

동남아 화교에게 유연성을 배운 쑨원(孫文)

 

위인전을 섭렵하던 어린 시절 전혀 위인답지 않아 보이던 인물 하나가 쑨원이었다.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인간적 존경심은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삼민주의도 보편타당성을 가진 정치사상은 아니고, 뜻이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민생(民生)’을 놓고 공산당 쪽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국민당 쪽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사상도 만주족 배척 등 초기의 배타적 종족주의에서 중화민족건설의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5족협화(五族協和)’ 수준이었다. ‘다민족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의 가치는 그 완결성이 아니라 유연성에 있다. 그 유연성은 입력 소스가 다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쑨원은 소년 시절을 하와이에서 지냈고 일본에서 여러 해 체류했으며,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고 동남아를 아홉 차례나 방문했다. 국내의 활동 지역도 변화가 가장 빠르던 광저우-홍콩 일대였다. 서로 다른 정치적 수요가 제기되고 있던 여러 곳에서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는 동안 그 시대의 정치적 과제를 폭넓게 수렴한 결과가 삼민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민권사상에서 유연성이 두드러진다. 쑨원은 민권을 백성의 권리인 정권(政權)’과 국가의 권리인 치권(治權)’의 결합으로 보았다. ‘정권만을 내세우는 근대 민주주의 풍조와 달리 치권을 나란히 내세운 데서 서양에 맹종하지 않는 현실감각을 느낀다. ‘권위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도 여기서 배운 바가 있었을 것이다.

 

 

21세기의 화교는 중국에게 어떤 존재?

 

우리가 대개 떠올리는 화교의 모습은 19세기 후반에 빚어진 것이다. 그 이전의 해외 중국인들은 중국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의 관심은 거대한 제국보다 자기 고향, 자기 친족에게만 쏠려 있었다.

 

중화제국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노백성(老百姓)이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막강한 존재였다. 그 힘을 어떻게 피해가고 어떻게 이용할 지만이 노백성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걱정해줄 필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열강의 침략에 앞서 내부의 구조적 문제들이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필립 큔은 <타인들 속의 중국인>(2008)에서 18-19세기 해외 이주의 급증을 그보다 더 큰 국내 이주의 증가에서 파생된 현상으로 해석한다. 쓰촨성 인구가 1722230만 명에서 1776660만 명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340만 명의 이주민이 유입한 사실을 예로 든다. 여러 지역 출신 이주민들이 어울린 쓰촨에서는 비밀결사의 큰 역할 등 화교사회의 특징적 현상들이 앞서서 나타났다.

 

19세기에 빚어진 화교의 모습이 지금 다시 바뀌고 있다. 이주 제4(1949년 이후)의 초기에는 중국의 국제적 고립 때문에 해외 이주가 극히 적었다. 1980년대 이후 해외 이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주요 대상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다. 미국의 중국인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 1882) 19세기 말 이래 서방국의 중국 이민 거부 정책도 이 무렵까지는 철회되어 있었다.

 

새 이민집단의 주축도 재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로 바뀌었다. 지금 중국 인구의 3% 수준인 화교의 문화적-경제적 역량은 인구 비율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교통-통신 수단이 발전하고 중국어가 통일되어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화교에게는 중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이 있고, 현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1900년대에 쑨원의 혁명노선이 화교 민심의 수렴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지금의 중국 지도자들도 국내 민심 못지않게 화교 민심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Commercant_chinois_Hanoi_2.jpg 1885년경 하노이의 화교 상인. 중국 내 상인의 모습과 아무 차이가 없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Old_Indonesian_Peng_family.jpg 후베이성 출신 화교 2-3세대의 가족사진(1967). 초기 화교는 노동력을 가진 남자들이 혼자 나가는 일이 많았던 반면 후기 화교는 온 가족이 함께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Chung#/media/File:President_Arthur_Chung.jpg 1853-79년의 기간 중 영국령 기아나에 수송된 14,000명의 쿨리는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이동한 남중국 인구의 일부였다. 그 후손의 하나인 아서 충(1918-2008)은 기아나 독립 후 첫 대통령으로(1970-80) 아시아 밖의 첫 중국계 국가원수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Map_of_the_Chinese_Diaspora_in_the_World.svg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Chinese_Diaspora_By_Country.png 국가별 중국계 인구 규모.

 

https://en.wikipedia.org/wiki/Chinatown#/media/File:Chinatown_manhattan_2009.JPG 뉴욕시의 9개 차이나타운 중 가장 큰 곳이 맨해튼에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natown#/media/File:Lane_of_Chinatown_(6760133489).jpg 멜버른의 차이나타운. 1901년부터 중국인 이주를 봉쇄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白濠)주의정책은 1949-73년 기간 중 점진적으로 철회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un_Yat-sen#/media/File:Sun_Yat-sen_and_Chiang_Kai-shek.jpg 쑨원과 장제스. 쑨원은 이 청년이 자기 동서가 될 줄 몰랐다.

 

https://en.wikipedia.org/wiki/Sun_Yat-sen#/media/File:Sun_and_Soong_in_Kobe.jpg 1924년 쑹칭링과 함께 일본 고베를 방문한 쑨원. 쑨원은 1905년 요코하마에서 결혼했던 오츠키 가오루(1888-1970)를 다시 찾지 않았으나 오츠키의 외손자가 2011년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백주년 기념식에 특별히 초대받았다.

 

 

 
Posted by 문천

 

풀란드와 러시아 국경 위에 한 마을이 있었다. 아직 '국가' 개념이 엄밀하지 않던 시절, 이 마을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긴 세월을 지냈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고 정확한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측량기사들이 파견되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마을사람들이 다가가 물었다.

"우리 마을이 어느 나란가요?"

"국경에서 폴란드 쪽으로 백 미터쯤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을사람들이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기사들이 물었다.

"폴란드 쪽이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좋은가요?"

"아니, 몰라서 물어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러시아 겨울을 겪지 않게 되었잖아요?"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빚, 5천 년의 역사>(2011)에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어머니에게 들은 우스개라고 적은 이야기다. 나는 '운동가'를 좀 미심쩍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2011)의 주역으로 꼽히는 그의 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유작인 <The Dawn of Everything> (2021, 데이비드 웽그로우와 공저)을 보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참신한 관점을 탄탄하게 서술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고, 유머감각도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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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