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란드와 러시아 국경 위에 한 마을이 있었다. 아직 '국가' 개념이 엄밀하지 않던 시절, 이 마을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긴 세월을 지냈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고 정확한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측량기사들이 파견되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마을사람들이 다가가 물었다.

"우리 마을이 어느 나란가요?"

"국경에서 폴란드 쪽으로 백 미터쯤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을사람들이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기사들이 물었다.

"폴란드 쪽이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좋은가요?"

"아니, 몰라서 물어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러시아 겨울을 겪지 않게 되었잖아요?"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빚, 5천 년의 역사>(2011)에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어머니에게 들은 우스개라고 적은 이야기다. 나는 '운동가'를 좀 미심쩍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2011)의 주역으로 꼽히는 그의 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유작인 <The Dawn of Everything> (2021, 데이비드 웽그로우와 공저)을 보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참신한 관점을 탄탄하게 서술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고, 유머감각도 편안하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淸平樂"  (6) 2020.09.07
"1등이면서 꼬래비"  (0) 2020.09.05
Robertson Davies, Kurt Vonnegut...  (0) 2018.12.20
"殮"  (1) 2018.12.16
"옛날 노인, 범 안 잡은 사람 없어"  (0) 2018.12.02
Posted by 문천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에서 개방을 대표하는 것이 경제특구다. 1979년에 최초의 특구로 지정된 것은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샤먼(廈門)과 산터우(汕頭)의 네 곳이었고,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14개 지역이 추가된 것은 5년 후의 일이다.

 

최초의 4개 특구 중 선전과 주하이는 홍콩, 마카오와 연계된 곳이다. 그런데 동남해안의 샤먼과 산터우는? 상하이나 톈진에 비해 중국의 산업구조에서 비중이 훨씬 작은 이 도시들이 먼저 특구로 지정된 까닭은 동남아 화교사회와의 관계에 있었다.

 

 

남해안에서 그친 중화제국의 확장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농업의 확장에 따른 이주였다. 황하 유역에서 출범한 중국의 농업문명은 춘추-전국시대에 장강 유역으로, 남북조시대 이후 중국 남해안으로 넓혀진 데 이어 10세기경부터 동남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교역의 확장에 따른 이주도 10세기경 시작되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남아시아(인도), 서남아시아(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항로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맡는 중국인 집단들이 나타난 것이다. 15세기 초 정화(鄭和)의 항해 때 이 집단들의 존재가 확인된다.

 

정화 함대는 남양(남중국해-인도양) 교역을 조공무역 형태로 정리하려 했다. 제국의 해양 방면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 명나라가 이 길을 포기하자 교역은 밀무역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확대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집단이 자리 잡았다.

 

16세기에 중국의 은() 수입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진 밀무역은 왜구의 형태로 나타났고 타이완의 정성공(鄭成功) 세력으로 이어졌다. 1680년대 타이완 평정 후 밀무역 세력은 동남아 각지로 퍼져나갔다. 여러 가지로 나타난 동남아 중국인 집단의 모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 18-19세기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公司共和國, Kongsi Republic)’이다.

 

공사회사의 뜻으로 지금은 쓰는 말이지만, 화교사회에서는 조직의 뜻으로 쓰였다. 혈연이나 지연의 모임을 회관(會館)’이라 했고 그중 규모가 큰 것을 공사라 했다.

 

 

유럽인을 놀라게 한 민주적 공사(公司)공화국

 

이슬람은 8세기부터 동남아 지역에 알려졌으나 이슬람 통치의 확산은 1400년경 말라카 술탄국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교역의 확대가 그 배경이었고, 대부분 술탄국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화 함대가 동남아 이슬람화를 촉진했다는 학설이 흥미롭다. 정화가 팔렘방에서 무슬림인 시진경(施進卿)에게 힘을 몰아준 일이 떠오른다.

 

술탄국들도, 16세기부터 이 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도, 교역로에 관계되는 항구와 해안지대에만 관심을 쏟았다.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보르네오의 내륙은 늦게까지 오지로 남아있었다. 유럽인들은 이곳을 식인종이 우글대는 최악의 야만지대로 상상했다.

 

18세기에 보르네오 내륙의 금광과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지역 술탄들이 중국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광산을 중심으로 농지를 개간해 경제적 자립성을 확보하면서 인근 술탄국과의 교섭을 통해 정치적 자립성도 키워나갔다. 이슬람의 통치개념은 영토가 아니라 인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술탄국의 양보가 어렵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보르네오 내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유럽인들에게 이 공사들의 존재가 놀라운 현상이었다. 각급 지도자를 선거로 뽑는 민주적정치방식을 이 야만지대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 사이에 서부 보르네오에는 국가조직에 가까운 중국인 공사가 여럿 나타났다. 자료가 그중 잘 남아있는 란팡공사(蘭芳公司, 1777-1884)를 보면 정치 수준이 당시 어느 국가에 못지않았다. 란팡공사는 1822-24, 1850-54, 1884-85, 세 차례 전쟁 끝에 해체되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보르네오(남부) 지배가 완성되었다.

 

 

교목을 휘감는 덩굴처럼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변방의 영주들>(1995)에서 화교사회의 특징 하나를 시선을 피하는 능력(invisibility)”으로 꼽는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동남아에서 기존 세력을 격파하고 지배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화교사회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유럽세력의 통치 아래 화교사회는 계속해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우리 속담을 시그레이브가 들었다면 크게 공감했을 것 같다.

 

화교들은 교목을 휘감는 덩굴처럼 현지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은밀히 실력을 키웠다. 정복하러 온 유럽인의 눈에는 쓰러트릴 대상으로 왕과 술탄들만 보였다. 화교들은 새 지배세력을 휘감고 자기네 생태를 이어갔다.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들은 화교사회가 직접 정치권력을 운용한 예외적 사례다. 워낙 오지라서 휘감고 기댈 교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제특구 중 푸젠성의 샤먼과 광둥-푸젠 경계의 산터우는 가장 많은 화교를 내보낸 지역의 중심도시다. 이 도시들이 자리한 동남해안 지역은 송나라 때 마치 식민지처럼 개발된 곳이었고, 서방 교역이 활발하던 원나라 때는 번영을 누리다가, -청 시대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손발이 묶인 곳이다.

 

-청 시대에 동남 지역 사람들은 공식적 출세의 길이 좁았다.(조선시대 서북인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들은 역량을 밀무역 등 법외(法外)사업에 쏟았다. 국내에 살면서도 국가체제와 거리를 두고 자기네 질서체제를 병행했다. 해외에서 좋은 활동-생활 조건을 누릴 길이 있으면 주저없이 떠났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이 해외 화교에게 중요한 자산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무조건 충성하거나 목숨 걸고 저항하는 대신 이용할 기회를 찾되 손해의 위험을 피하는 냉정한 자세. 중화제국을 상대로 다듬어 온 이 유연한 자세가 동남아 화교가 현지 권력을(토착세력이든 식민세력이든) 상대하는 기본자세가 되었다.

 

 

화교의 나라싱가포르 번영의 비결

 

싱가포르가 화교사회 번영의 대표적 현장이 된 것은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활발한 시기에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적도 부근 말레이반도 끝의 이 섬에(서울과 비슷한 면적) 영국동인도회사 기지가 설립될 때(1819) 인구는 백여 명에 불과했다. 싱가포르를 둘러싼 말레이시아 인구의 중국계 비율이 약 22%인 데 비해 싱가포르는 약 75%화교의 나라.

 

영국 지배 아래 싱가포르의 성장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교통의 요지라서 대영제국의 자원이 투입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영국이 물러날 때 말라야연방에 참여했다가(1963) 2년 후 연방에서 쫓겨나 진짜 독립을 강요당한 후, 자원도 없고 배경도 없는 이 도시가 세계적 지상낙원으로 발전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싱가포르 번영의 원인으로 빠트릴 수 없는 것 하나가 리콴유(1923-2015)의 지도력이다. 독립 전의 자치 단계부터 31년간(1959-90) 수상직을 지키는 동안 외부 평가가 크게 엇갈린 인물이다. 경제적 성공은 찬양을 받았지만 권위주의적통치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바로 이 엇갈림 속에 성공의 진짜 원인이 있었던 것 아닐까. 리콴유의 노선은 화교사회의 실용주의를 대표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든 민주주의든 특정 관념의 지배를 꺼리는 실용주의다. 독립 대신 말라야연방에 참여하려 애쓴 것도, 4개 공용어(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영어) 중 영어를 대표공용어로 삼은 것도, 모두 이 실용주의의 표현이다.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용주의다. 마이클 소니가 중국 동남해안 지역의 사회사를 다룬 <통치를 받는 재간 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에 짝을 맞춘 제목이다. 두 책 모두 국가를 대하는 인민의 탄력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개혁개방기의 중국에 싱가포르가 준 도움에는 자본 유입만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실용주의적 가르침도 있었을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Dayak_people#/media/File:Tari_Hudoq.jpg 보르네오 원주민 다야크족의 탈춤.

 

https://en.wikipedia.org/wiki/Lee_Kuan_Yew#/media/File:Lee_Kuan_Yew_Cohen.jpg 윌리엄 코언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리콴유(2000). 1990년 수상직 퇴임 후 그의 명망이 더 높아진 것은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약화 때문일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Jewel_Changi_Airport#/media/File:JewelSingaporeVortex1.jpg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시세이도 삼림계곡(2019 준공). 공간설계의 끝판왕이라 할 이 시설이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https://en.wikipedia.org/wiki/Singapore#/media/File:KITLV_-_103763_-_Chinese_and_Malaysian_women_at_Singapore_-_circa_1890.tif 싱가포르의 중국인-말레이인-인도인 여성이 함께 찍은 1890년경의 사진. 싱가포르에서 721일은 종족 화합의 날이다.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2PU22679S55VL&keywords=being+governed&qid=1684117426&sprefix=being%2520governed%2Caps%2C265&sr=8-1

https://www.amazon.com/Art-Being-Governed-Everyday-Politics/dp/0691197245/ref=sr_1_2?crid=2PU22679S55VL&keywords=being+governed&qid=1684117487&sprefix=being%2520governed%2Caps%2C265&sr=8-2 <통치를 피하는 재간><통치를 받는 재간>. 국가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연구동향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Posted by 문천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란 말은 19세기 초부터 쓰였으나 그 가리키는 범위는 들쑥날쑥했다. 냉전 종식 후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역할이 자라남에 따라 아세안 10개국의 영역을 가리키는 뜻이 분명해졌다. 유엔 통계국에서 세계를 20개 남짓 지역으로 나누는 지역통계 기준(geoscheme)에도 그 무렵부터 자리 잡았다.

 

유엔 통계국 기준에는 아시아의 다섯 개 지역이 들어있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라 할 수 있는 시베리아는 유럽국 러시아의 영역이다.)

 

동아시아-한자문명, 남아시아-힌두문명, 서아시아-이슬람문명, 중앙아시아-유목문화가 바로 떠오르는 데 비해 동남아시아의 역사-문화적 통합성은 일견 분명하지 않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강력한 정치조직의 역사도 없고, 종교의 분포도 복잡하다.

 

 

중화제국의 확장, 바다로 이어지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는 중국(동아시아)과 인도(남아시아) 사이의 지역이다. 양쪽 모두 동남아보다 문명이 일찍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인도차이나란 이름이 붙기도 했고, 16세기 서양인의 진출 전에 인도 및 중국과 접촉이 많았다.

 

10세기 이전의 중국이 동남아와 직접 마주친 것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남월(南越, 북베트남)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교역을 원하는 세력이 조공 명목으로 보내는 공물이 쓸 만하면 받아들이는 일이 단속적으로 있었고, 중국 쪽에서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

 

남송 때인 1225년에 나온 조여괄(趙汝适)<제번지(諸蕃志)>가 달라진 사정을 보여준다. 조여괄이 천주(泉州) 시박사(市舶司, 교역 감독 관서)를 담당하는 동안 모은 정보를 묶은 이 책에는 가까운 동남아는 물론, 이슬람세계 서쪽 끝 모로코에 관한 정보까지 들어있다. 중화제국이 대륙의 남해안까지 꽉꽉 채우고 바다로 넘쳐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원나라 때(1271-1368) 교역의 꾸준한 증가에 몽골제국의 구조 문제가 겹쳐져 해상활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원나라는 서쪽의 일칸국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육로가 적대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 해로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를 떠날 때 일칸국으로 공주를 시집보내는 배를 탔다. 쿠빌라이칸의 일본(1274, 1281)과 자바(1291) 정복 시도도 있었다.

 

쿠빌라이칸 이후 원나라의 쇠퇴에 따라 국가사업으로서 해상활동의 발전은 막혔으나 민간 활동은 계속 확대된 사실을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화제국의 확장이 해양 방면으로 이어질지 여부가 결정되는 고비였다.

 

 

해적의 이름으로 나타난 화교집단

 

정화 함대의 활동(1405-33)은 동남아에 관한 많은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중 흥미로운 것 하나가 제1차 항해(1405-07)에 나타나는 수마트라섬 팔렘방(三佛齊)해적진조의(陳祖義)에 관한 것이다.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팔렘방에 들렀을 때는 진조의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길에 들렀을 때 그의 귀순이 거짓이라 판정해서 토벌하고, 그를 고발한 시진경(施進卿)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했다. 시진경은 (그 아들딸까지) 현지에서 ()’ 노릇을 했다.

 

수백 척의 배로 넓은 해역을 누비면서 1만여 척 배를 덮쳤다느니, 토벌 때 5천 명을 죽였다느니, 진조의에 관한 기록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당수 중국인이 동남아 지역에 흘러나와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광둥(廣東) 출신의 진조의나 항저우(杭州) 출신 시진경처럼 중국 남해안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시진경이 무슬림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남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토착종교가 내륙에는 널리 자리 잡고 있고 항구를 중심으로 해안지역에 이슬람교가 확산되고 있었다. 정화가 팔렘방에 두 번째 들렀을 때는 이슬람화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경쟁자 중 무슬림인 시진경을 밀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것 아닐까? (함대 간부 중에도 정화를 위시해서 무슬림이 많았다.)

 

 

중세없이 근대를 맞은 동남아시아

 

15세기까지 동남아 지역의 수출품은 향료, 광물, 동식물 등 천연상품뿐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곳은 내륙의 강 유역 몇 곳에 불과했고 제조업도 빈약했다. 교역활동이 늘어나고 유럽인이 진출하면서 16세기에 항구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던 내륙의 농업지대도 해안의 상업지대에 식량 등 생필품을 공급하면서 생산력과 인구를 늘려나갔다.

 

확고한 중세적 체제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적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동남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럽세력의 일방적 침략을 당한 아프리카와 달리 동남아에서는 여러 방면 문명세력이 엇갈리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동남아의 변화는 외부의 작용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 되기도 했다. 중국사를 공부해 온 내게 화교사회의 성격과 역할이 들여다볼수록 흥미롭다. 근대중국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존재로 서양에만 주목을 쏟아 왔지만 실제로는 남양(南洋)의 역할도 만만찮았다. 홍명희(1888-1968)가 청년 시절의 몇 해를(1914-17) 남양에서 지낸 데도 까닭이 있을 것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농업 방면과 상업 방면에서 이뤄졌다. 농민의 이주가 장기간에 걸쳐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 반면 상인들의 이주는 송나라 이후 빠르게 늘어나 조직활동으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팔렘방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집단들을 찾아내 활용하려 하였으나 그 후 명나라가 원양항해를 포기하면서 이들은 밀무역의 주체가 되었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행해진 곳에서는 화교가 준-지배계층이 되기도 했다. 동남아에는 유럽인의 이주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화교들이 기술인력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우수한 조직력으로 상업과 제조업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현지인과 유럽인 양쪽의 미움을 받는 일이 많아 종종 박해를 겪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화교사회의 역량이 본국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펼쳐졌다. 쑨원(孫文)의 민국혁명을 지원하고 개혁개방기 외자 유치에 호응하는 등 잘 알려진 일들도 있지만, -청대에 중국, 특히 남중국의 사회와 경제에 끼친 영향은 앞으로 밝혀질 것이 많다.

 

 

동남아시아는 세계화의 선진지역

 

동아시아에서 바라보는 내게는 동남아의 변화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남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등 다른 지역에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근대라는 시대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문명권의 흐름이 뒤얽혀 가장 다양한 현상을 빚어낸 현장이 동남아이기 때문이다.

 

세바스천 콘래드의 <‘글로벌 히스토리란 무엇인가?>(2016)를 읽고 있다. 콘래드는 글로벌의 의미가 연구의 대상(무엇을 바라보느냐?)보다 연구자의 시각(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음을 역설한다. 종래의 월드 히스토리가 여러 지역 역사의 물리적 집합에 그친 것과 달리 글로벌 히스토리는 유기적 결합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월드 히스토리글로벌 히스토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까 잠깐 고민하다가 둘 다 세계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세계를 물리적 집합체로 보느냐, 유기적 결합체로 보느냐 하는 세계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에서 라시드 앗 딘의 <집사>세계사의 출발점으로 꼽았지만 세계사는 사마천과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역사학의 탄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버전이 한 차례 바뀐 것일 뿐이다.

 

근대는 국가주의의 시대였다. ‘세계화의 첫 번째 의미가 국경의 힘이 줄어드는 데 있다. 동남아는 국경의 힘이 약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세계화의 선진지역이었다. 아세안이 유럽연합 버금가는 중요한 지역연합으로 일어설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동남아 역사의 연구가 종래 부진했던 것은 국가주의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에는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고하고 연구 수행에 국가의 지원이 중요하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연구 성과가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 것은 국가주의의 힘이 빠지고 세계화의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세계사의 새 업그레이딩을 위해 동남아 역사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Masjid_Tua_Wapauwe.jpg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제일 많은(23천만 명) 나라지만 13세기에야 전파되기 시작했다. 말루쿠섬의 와파우웨 모스크(1414)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모스크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Sultan_Omar_Ali_Saifuddin_Mosque_02.jpg 1959년에 완공된 브루네이의 오마르 알리 사우푸딘 모스크

 

https://en.wikipedia.org/wiki/Buddhism_in_Southeast_Asia#/media/File:Maitreya_Komering_Srivijaya_Side.JPG 수마트라섬에서 출토된 스리비자야 시대의 미륵불상.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은 인도에서 십여 년 체류한 후 귀로에 스리비자야에서 8년간 불경을 번역했다. 7세기 말 인도, 동남아, 중국 사이의 교류 상황을 그의 행적에서 알아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Ming2.jpg 1590년경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Sangley)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Sangelys,_detail_from_Carta_Hydrographica_y_Chorographica_de_las_Yslas_Filipinas_(1734).jpg 1734년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Mestizos_Sangley_y_Chino_by_Justiano_Asuncion.jpg 1841년경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 모습.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