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부터 왕겅우(1930- ) 교수의 글을 읽으며 글쓰기의 의욕을 잃고 있습니다. 내가 공부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 방향으로 좋은 글을 워낙 많이 남겼기 때문입니다. 당분간은 국내 독자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이분 글을 번역해 이곳에 올리겠습니다. 이분은 세 권의 회고록을 썼는데, 그중 두 권을 번역한 것은 몇 달 전 글항아리ㅔ서 <집 아닌 곳에서>와 <있는 곳이 집>이란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서양에서 중국학은 유럽 고전학 중 동방(Orient)”으로 인식한 영역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출발점을 동방학적 중국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중국 학자들은 그것을 한학(漢學)의 근대적 형태로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가 늘어나면서 중국학은 더 넓은 범위의 중국 연구로 자라났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단계가 떠오르고 있는 것은 중국의 부상에 따라 그 문명의 유산을 진보의 근대적 관념과 융합함으로써 현대세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중국학이란 말이 더 넓은 범위의 학술활동을 포괄하는 복합적 중국학으로 나아가는 큰 변화의 필요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복합성은 네 개 큰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첫째, 문화적 배경과 국적이 다른 많은 학자들의 작업이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고전 한학에 여러 지적 전통이 어울려 중국학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셋째, 여러 학술분야의 원리들이 중국학 연구에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넷째, 복합성을 갖게 된 새 중국학은 중국의 장래 발전에 도움이 되면서, 또한 맥락을 벗어나 선전에 활용되는 등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 길을 걸으며 중국학의 복합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연구자들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개념과 방법론을 받아들여 중국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고 오래된 문명에서 출발한 한 인구집단이 혁명적 변화를 수용하며 필요한 모든 방면에서 진보를 추구하러 나서게 된 과정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Understanding Orientalist Sinology / 동방학적 중국학의 이해

 

1954년 내가 런던으로 공부하러 갈 때 최고의 중국학 연구자들은 모두 유럽인이었고 유럽인 학자들이 인정해 준 몇몇 일본인 학자가 끼어 있었죠. 싱가포르에서 나는 중국학 연구자들의 글을 읽으며 중국 기록에서 발굴한 자료를 통해 인도와 중국 사이 지역의 역사를 그려내는 그 능력에 탄복했습니다. 그 중국학은 고전학에서 발전해 나온 동방학의 연장선 위에서 유럽 제국주의 세력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었습니다.

 

동방학적 중국학은 언어학과 문헌학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중국학 연구자 중에는 유라시아대륙의 다른 문화와 민족들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수천 년에 걸친 다양한 문헌과 유물을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지나학(支那學)”이란 이름으로 중국학의 한 몫을 맡았습니다. 그중에는 유럽 학자들과 함께 북아시아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반면 중국 학자들은 외부 학자들의 연구를 받아들이는 데 늦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번역을 통해 유럽과 일본 학자들의 성과에 접하면서 외부 연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중국 학자들과 외부 학자들 사이의 상호이해와 협력에 장애가 된 동방학적 중국학의 기본 전제들이 있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문명에 대한 찬탄은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찬탄 대신 죽음의 문턱에 선 한 문명에 대한 연민에 초점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중국학 연구자들은 중국 문화의 급속한 타락의 원인을 궁금해하며 중국의 문학과 예술 유산을 찬미하고 중국의 오래된 미덕들이 무너져가는 것을 슬퍼했습니다.

 

역사의 순환을 믿던 다수 중국인에게는 청나라의 쇠퇴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네 문명 자체의 붕괴 위험을 알아챈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학자들은 동방학적 중국학에 기본적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국학(國學)”이라 부른 그들의 중국 연구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찾아 닥쳐올 상황에 대비하자는 취지였습니다.

 

Posted by 문천

 

 

2008년에 낸 <밖에서 본 한국사>는 한국사 전체를 조감한 책이지만 개설서나 통사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룬 30여 개 주제 중에 내가 연구했다고 할 만한 것은 몇 안 된다. 대부분은 교양수준의 이해였다.

 

중국사로 공부를 시작해 문명교섭사를 연구하면서 역사를 비교적 넓게살펴온 나는 한국사 연구자가 아니라도 한국사 연구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책을 썼다. “밖에서 본다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진다. 한반도 외부와의 관계에 비중을 둔다는 의미가 있고, 한국사학계 밖에서 내는 의견이라는 의미가 있다.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엉뚱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면 기존 연구를 어느 정도는 파악해야 한다. 나는 1991년 완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기존 연구가 대략 파악이 되어 있는 사전이라고 본 것이다.

 

그 후 2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이 책에서 제시한 방향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반응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온 데이비드 로빈슨의 <무너지는 몽골제국 앞의 고려 Korea and the Fall of the Mongol Empire>(2022)를 읽으며 <밖에서 본 한국사>에 실었던 글 역사에게 외면당한 영웅 공민왕을 다시 돌아본다.

 

 

공민왕을 인격파탄자로 몰아버린 이유

 

그 글에서 나는 공민왕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를 제기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초기에 작성된 공민왕의 시대에 대한 역사기록에는 곡필이 많았다.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확인할 필요 때문에 고려 말기의 국왕 중 왕 노릇을 열심히 했던 공민왕을 폄훼한 대목이 많았다. 내가 그를 영웅으로 내세운 것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공민왕의 왕 노릇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원나라와의 관계다. 백여 년에 걸친 이른바 몽골간섭기가 끝나갈 때였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1년 무렵 원나라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인 장강 유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었고, 1368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버리고 새외(塞外)의 상도(上都)로 물러가기에 이른다. -명 교체가 확정된 시점이다.

 

-명 교체의 의미를 당시 고려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몽골 간섭기같은 용어에 나타나는 현대인의 애국심이다. “몽골 지배기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기간에 고려 세자는 대도의 황제 친위대에서 소년기를 지낸 후 몽골 황족 왕비를 모시고 돌아와 즉위했다. 대도에서 세자와 함께 지내던 귀족들이 따라와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를 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상황에 익숙한 현대인은 원-명 교체를 명-청 교체와 비슷한 틀로 보기 쉬운데, 전혀 다른 틀이었다. -청 교체에 적응하는 데는 의리(義理)” 같은 상층부의 관념적 변화만이 필요했다. 반면 원-명 교체에는 고려 사회의 전면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조선 초기 기록에 나타난 공민왕의 성적 취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명 교체에 대한 공민왕의 나름 능동적인 자세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조선 왕조교체의 정당성을 어떻게 설명하나? 메시지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려우니 메신저를 인격파탄자로 몰아버리는 것이 손쉬운 길이었다.

 

 

왜 연구서가 교양서가 되기 힘들까?

 

조선 초기 기록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러면 공민왕의 실제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작업이 필요한가? 로빈슨은 그 방향을 찾아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로빈슨의 책 참고서목에는 2010년대에 나온 몇 사람(정동훈, 이명미, 윤은숙 등)의 논문이 여러 편 표시되어 있다. (2022년에 나온 책이므로 2020년대에 더 나온 논문도 있을 것이다.) 몇 편은 찾아 읽고 싶다. 일단 유의하는 사실은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연구가 쌓인 연구자 중에 머잖아 단행본도 내는 이가 있기를 기대하지만, 국내에서 일반 독자를 위한 고급교양서 성격의 연구서가 쉽게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선, 연구서 내기보다 학술논문 여러 편 쓰는 편이 재계약에도(연구점수) 연구비 확보에도 일반적으로 유리한 길이라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를 넓게 보지 못하는 역사학계의 풍토에 있다. 학위논문 작성 때 나 자신 절감한 문제다. 동양사 전공으로 학위과정을 밟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서학(西學)을 묶어서 논문 계획을 세웠다가 학과장 승인을 받지 못했다. 동양사 전공자가 국내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서학의 범위 안에서 논문을 썼다.

 

구분된 영역 안에서만 연구하고 논문 쓰고 자리도 만드는 한국 역사학계의 풍토는 문자 그대로 봉건(封建)” 체제다. 각자 자기 영지 내에서만 활동한다. 모든 지역 사이의 모든 관계가 확장-심화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런 체제에는 생산성이 없다. 열심히 작업하는 연구자들도 세계화된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연구서를 쓰기가 몹시 어려운 조건이다.

 

 

로빈슨의 키워드 동맹불확실성의 시대

 

로빈슨의 책은 조선 초 학자-관료들이 쳐놓은 연막을 뚫고 공민왕의 실제 모습에 접근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의 원인이 밖에서 본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려-원 관계를 동맹(alliance)” 관계로 보는 시각이 하나의 예다. 고려 안에서볼 때는 이분법적인 조공-책봉 관계에 집착하기 쉽다. 이 집착을 벗어나 원나라의 세계체제 안에서 동맹의 넓은 스펙트럼을 이해해야 고려-원 관계의 실제 의미도 파악할 수 있다.

 

즉위 6년차인 1356년 공민왕은 기철(奇轍,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 등 친원세력의 중심인물들을 반란죄로 처형한 데 이어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원나라 영토를 침공하고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단했다. 조공-책봉의 관계로 보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런데 원나라가 양보할 것을 양보한 후 관계가 회복되었다. 1363년 원 황제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책봉했을 때도 공민왕은 덕흥군이 몰고 온 군대를 물리친 다음 원나라와 관계를 계속했다. 1368년 원나라가 중원에서 물러난 뒤에도 관계가 계속되었다.

 

관계의 성격이 크게 바뀌면서도 관계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것을 조공-책봉의 흑백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원나라가 흥기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세력과 맺어 온 다양한 형태의 동맹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이해되는 일이다.

 

로빈슨이 당시 시대상을 변화와 불확실성의 시대로 묘사한 것도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정상 상태(normal state) 아닌 패러다임 전환의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몇 세대가 지나도 큰 틀이 바뀌지 않는 안정된 체제가 아니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유동적 상태에서 많은 참여자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흥망이 갈리는 상황이다. 로빈슨이 그려주는 공민왕의 진로는 수시로 조정해 나가는 지그재그 행로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수구세력

 

로빈슨의 책을 읽으며 동맹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두 개 키워드가 특별히 각인되는 것은 공민왕의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걸친 원나라의 체제는 종래 중국의 왕조들이 관할하던 영역을 넘어 유라시아대륙의 절반을 포괄하는 세계체제였다. 14세기 후반은 이 세계체제가 무너져가는 시기였다.

 

1351년 공민왕 즉위 때까지 몽골 지배기 백년 동안 고려 지배층은 이 체제에 묶여 있으면서 또한 이 체제에 의지하며 지냈다. 모든 정책, 모든 행동이 원 황제의 호오(好惡)에 따라 결정되었다. 황제의 사위인 국왕의 권위가 황제의 처남인 기철에게 위협받기에 이른 것은 이 의존도가 한계를 넘긴 것으로, 몽골 체제가 정상 상태를 벗어난 하나의 신호로 볼 수 있다.

 

동맹의 관점에서 본다면 백년 동안 원나라는 절대적 주도권을 가진 맹주였다. 그런데 이제 자기편을 보호할 힘도 항거하는 자를 응징할 힘도 떨어졌다. 남중국의 반란세력을 발본색원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타협적인 정책으로 넘어간다. 1356년 이후 공민왕 역시 원나라와 동맹 관계를 회복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중국 반란세력과도 독자적인 관계를 맺는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절대적이던 동맹 관계가 상대화한 것이다.

 

1374년 공민왕을 죽인 것이 친원(親元)”세력이라고 하는데, 이 세력이 의지할 원나라는 사라져 버린 뒤였다. 요동 등지에 남아 있던 원나라 귀족 출신 세력들도 초원으로 물러난 북원(北元)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 세력이 되어 있었다. “친원수구(守舊)”의 간판이었다. 조그만 힘을 가지고 조그만 이익을 위해 움직인 이 세력이 고려 멸망의 하수인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반세기간의 냉전체제는 근현대 세계사에서 드물었던 안정된 세계체제였고 미국은 많은 동맹국의 절대적 맹주로서 체제를 이끌었다. 그 체제가 해체될 때 나온 역사의 종말이야기는 접어들고 있던 불확실성의 시대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몽골 세계체제의 해체기에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인들의 고뇌에서 배울 것이 많다.

 

Posted by 문천

 

 

유시민 선생은 직업을 작가로 내세운다. 특정 장르에 집중하는 전업작가가 아니라 아무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란 뜻의 작가다. 글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도 만들어내고 운동도 만들어내고 정당도 만들어내는 작가다. 결국 무직과 비슷한 뜻이다. 직업을 안 가진 무직자로서 직업을 못 가진 무직자와 혼동을 피해 작가란 말을 쓰는 것 같다.

 

유 선생이 독일에서 귀국한 얼마 후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Bildung>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인성기 역, 2001, 들녘)으로 번역 출판되는 데 매우 큰 관심을 보이던 생각이 난다. 그 책에 추천사도 썼다.

 

그의 자유인 기질에서 나온 관심으로 이해했다. 독일 유학에서 석사학위만 취득한 후 박사과정을 밟지 않은 것도 전문화의 틀에 매이지 않으려는 기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문 연구를 위한 능력과 소양을 잘 갖춘 사람이 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진다면 새로운 차원의 지적 성취를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맨이란 말이 있다. 여러 방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직업이 전문화된 근대세계에서는 지식인의 활동이 좁은 영역에 묶이는 경향이 있다. 여러 방면에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신기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근대와 직접 대비되는 시대가 바로 직전의 르네상스 시기였기 때문에 르네상스 맨이란 말이 나왔지만, 지식인의 다방면 활동은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 현상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학인(學人)이나 선비에게도 다방면 활동이 보통이었다. 때를 만나면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고 때가 지나가면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선비의 자세로 통했다. 학문의 내용도 관념의 영역에서 실용적 분야까지 걸친 사람들이 실학파만이 아니었다.

 

내가 유 선생과 어울리기 좋아한 것은 그가 역사에 관해서도 좋은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역사가로 여긴다. 사실(史實)을 따지는 역사학자와 구별되는, 사론(史論)을 펼치는 역사가로 보는 것이다. 그 자신은 아니라고 잡아떼지만, 그만큼 역사 공부를 하고 역사에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역사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은 현재나 미래를 생각할 때도 역사를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유 선생이 어떤 일을 하든 그 바닥에 어떤 역사의식이 깔려 있는지 늘 흥미로웠다. 어느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돕는 길을 택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으나 곧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판단에 작용한 역사의식을 생각하면서였다.

 

 

유 선생이 나를 찾는 일은 별로 없고 내가 그의 서재 부근에 갈 때 들르곤 했다. 그와 잡담 나누기가 즐겁고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국 사태가 터진 후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관심이 전혀 없는 일에 그는 마치 뭐에 씌인 사람처럼 집착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연설 들을 흥이 나지 않아 뜸하게 몇 해 지나다 보니 기억 속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즘 그가 티브이 화면에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극단적인 주장을 쏟아내는 중에도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재미있다. “합리주의에도 여러 갈래와 여러 층위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극단적 합리주의는 이성만을 지식의 근거로 인정하고 경험의 역할을 부정한다. 반면 이성의 우선적 역할을 주장하되 경험의 역할도 인정하는 온건한 합리주의가 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17세기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양립하는 온건한 합리주의였는데, 18-19세기에 극단적 합리주의가 득세하면서 경험주의와의 대립을 과장했다고 하는 근래의 견해가 흥미롭다.

 

여러 집단의 정치적 성향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ABC론이나 정권 필패론처럼 일반인의 경험적 감각을 벗어나는 주장에 유 선생은 합리적 근거를 힘껏 갖다붙인다. 그가 합리주의자라는 사실은 그대로인데, 어떤 종류의 합리주의자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에릭 홉스봄의 근현대사 4부작이 나온 시간 터울이 흥미롭다.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 세 권이 십여 년 간격으로 나왔는데 마지막 권 <극단의 시대>(1994) 7년 만에 나왔다. 다룬 기간(1914-1991)이 끝난 불과 3년 후였다.

 

앞의 세 권이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구체적 키워드를 들고 나온 것과 달리 마지막 권에서 내세운 극단은 추상적 개념이다. 막 끝난 짧은 20세기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내면서 그 요점을 딱 짚어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20세기라는 시기의 성격이 구체적 키워드보다 극단이라는 경향성으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도 든다.

 

유시민 선생을 생각하다가 홉스봄이 떠오른 것은 합리주의자로서 그의 자세를 극단의 경향성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세계대전과 냉전에 묶여있던 20세기에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민족주의도 성공보다 승리를 앞세우는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극단성이 21세기에는 소멸하기 바란 홉스봄의 희망이 30년이 지난 지금 보면 상당히 이뤄져 온 것 같다.

 

세계적 차원의 진영 논리가 퇴화하는 상황 앞에 국부적 대결 자세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집권 세력의 중도 확장 노선이 과거와 같은 정략적 효과를 넘어 불가역적 성과를 바라볼 수 있다고 보는 배경이다. 유 선생을 만나면 30여 년 전 홉스봄이 내놓은 전망을 놓고 토론하고 싶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