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5년 한민족의 독립 자격은?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에서 조선왕조의 멸망은 일본의 야욕 없이도 진행되어 온 일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일본의 항복도 한민족 독립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뒤를 잇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 일본 지배 때문에 막혀 있던 상황이 끝나 국가 건설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지만, 민족국가 건설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1945년 세계의 진로는 연합국이 쥐고 있었다. 주요 연합국(미국, 영국, 중국) 정상회담에서 전쟁 후 조선 독립을 약속한 194311월의 카이로선언이 있었다. 소련도 이 선언을 추인했다. 그러나 막상 일본이 항복한 후 연합국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국과 소련이 대립의 길로 가면서 조선은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되고 말았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 몇 주일 전에 연합국 외상회담(미국, 영국, 소련)에서 오스트리아의 전쟁 후 독립을 약속한 모스크바선언이 있었다.

 

영국, 소련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 야욕의 첫 희생자인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에 합의한다. 3국 정부는 1938315일 독일이 강행한 오스트리아 합방을 무효로 간주한다. 그 날자 이후 오스트리아에 일어난 변화를 3국 정부는 무시한다.

3국 정부는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선언한다. 오스트리아인 자신, 그리고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주변 나라들은 이 부활을 통해 항구적 평화의 유일한 조건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약속과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마지막 문장에 유의할 점이 있다. “오스트리아인 스스로의 노력이 독립의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연합군이 오랜 수세로부터 공세로 전환하려 애쓰고 있던 이 시점에서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독립 약속은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의 균열을 노리는 책략을 담은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에 10, 조선에 5년의 신탁통치 방침을 연합국이 결정한 데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한 데 대한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가 아니라 강대국의 세력 개편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배제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위축되는 한편에서 미국과 소련이 득세했다. 폴란드는 독일에 대한 항전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지만 소련에게 걸리적거리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국토를 빼앗기고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환원시키려는 압력에 저항해서 처절한 독립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것이 해방당시 세계의 현실이었다. 많은 조선인이 항일운동에 피와 땀을 쏟았지만 연합국이 인정할 만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일본 항복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환호 대신 탄식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광복군을 국내에 투입하려는 계획이 미수에 그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국내의 항일운동은 전쟁 중의 극렬한 탄압으로 붕괴되거나 마비되어 있었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도 전향한 사람이 많았고 전향을 거부한 사람들은 투옥이나 은신 상태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있었다고 하지만 연합국에게 인정받을 만큼 확실한 실체를 보여주지 못했다.

 

 

2. 미국과 소련의 조선 점령 의도

 

2차 대전 연합국에게 가장 큰 전리품은 독일과 일본이었다. 전쟁의 주역으로 나설 만큼 생산력을 비롯한 국력이 큰 나라들이고, 전범국이기 때문에 점령자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항복(19455)을 앞두고 연합국 정상이 모인 얄타회담에서(19452) 독일 처리의 기본 방침이 합의되었고 항복 후 포츠담회담에서(19457) 구체적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독일은 미---4개국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나중에 미--불 점령지역은 서독이 되고 소련 점령지역은 동독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원자폭탄의 출현으로 예상보다 몇 달 빨리 항복했고, 때문에 독일 항복 때처럼 연합국 간의 합의가 이뤄져 있지 않았다. 소련의 지분이 문제의 초점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의 최대 피해국이었는데, 독일과의 항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었고, 독일 항복 후 3개월이 지난 뒤에 일본 공격에 합류하기로 얄타회담에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소련은 이 약속대로 8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바로 이 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1주일 후에 일본이 항복했다.

일본과의 전쟁만 놓고 본다면 소련 역할이 미미했지만 2차 대전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일본 점령에도 소련이 상당한 지분을 가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소련이 지분 주장에 강력하게 나서지 못한 것은 원자폭탄 때문이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 목적이 일본 항복을 앞당기는 데보다 소련을 위협하는 데 있었다는 해석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전쟁이 몇 달 더 계속될 때 늘어날 희생보다 원자폭탄에 의한 희생이 더 컸다는 주장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소련 참전 전의 연합군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Allied Powers) 이름으로 미국이 사실상 일본을 독식하게 되었다. 소련은 만주국 영토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종전 시점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뒤지는 데다 원자폭탄 때문에 군사력도 뒤져 있어서 미국이 강요하는 양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은 모든 협상력을 동유럽 공산화에 집중했다. 서쪽으로부터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공격을 받았던 러시아에게는 동유럽에 방패를 장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얄타회담 때까지 미국을 이끌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합국 간의 협력을 중시하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노선에 따라 소련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후 트루먼 정부는 차츰 국가주의(nationalism) 노선으로 기울어져 갔다. 다른 모든 산업국이 큰 파괴를 입은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력이 이후 20년간 세계를 압도하게 되는데, 그 위에 핵무기까지 독점한(소련은 1949년 가을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전략적 우위를 갖고 유일 패권을 추구한 것이었다.

미국의 전 세계적 패권 추구에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은 방어적 대외정책을 취했다. 동유럽 공산화에 모든 힘을 쏟으면서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세력에게도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점령했던 만주도 고스란히 국민당정부의 중화민국에 넘겨주었다. 한반도의 북반부 점령도 자기네에게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는 소극적 목적에 그쳤다.

한편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발판으로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매진했다. 일본에서는 자본 세력과 천황 이하 지배세력을 전범재판에서 최대한 보호하고 친미국가를 만들어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체제 거점으로 만들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소련과의 타협을 꾀하는 국무부 중심의 국제주의 노선과 소련과의 갈등을 키우려는 군부 중심의 국가주의 노선이 처음에는 엇갈리고 있다가 1947년 중국의 공산세력 확장에 영향을 받아 점령 지역을 위성국가로 만드는 분단건국을 지향하게 된다. 1946년 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두 나라의 현실적 이득을 위한 버티기로 교착되었는데, 1947년 여름의 제2차 위원회에서는 파탄을 위한 미국의 고의적 노력이 분명해졌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조선 건국 문제에 자국 이익을 앞세운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반면 소련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소련은 거리도 가깝고 경제 개발 수준도 자본주의에 적합지 않은 조선에 무리한 압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자기네에게 불리하지 않은 정권이 형성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먼 곳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3. 분단의 내인론과 외인론

 

한반도 분단건국의 근본 원인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었느냐 외부에 있었느냐 하는 외인론과 내인론이 엇갈려 왔다. 근본적 원인이 내부에 있더라도 바로 외부의 문제들을 촉발하게 되어 있고 외부에 있더라도 바로 내부 문제들을 유발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좁게 들여다봐서는 판별이 어렵다. 그러나 한민족의 긴 역사에 비추어볼 때 외인론이 타당하게 보인다.

10세기의 고려 건국 이래 한민족은 1천 년간 민족국가를 유지해 왔다.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할 때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할 때도 민족국가는 유지되었다. 심지어 고려 왕국을 없애고 원나라 직할로 해달라는 고려 일부 세력의 청원을 받은 원나라 조정에서 그 청원을 기각할 만큼 반도의 민족국가는 자연스러운 존재로 인정받아 왔다. 20세기 초의 식민지화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였고, 일본의 압력만 해소되면 민족국가의 복원이 당연한 일이었다.

내인론에서는 좌우익 대립을 원인으로 들지만, 정치적 대립이 없던 시절이 언제 있었던가. 당쟁이 아무리 격렬하던 때라도 모든 대립은 국가 내의 대립이었다.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반역은 극히 드물었고, 그나마 민족국가의 해소가 아니라 권력체제의 전복만이 목표였다.

물론 식민지 상태를 겪어본 20세기 중엽에는 왕조가 유지되던 시대와 다른 생각도 얼마간 떠돌고 있었다. 일본 통치에 협조하며 특권을 누려본 사람들은 일본 아니라도 다른 외국을 위한 매판 역할을 찾을 수 있었고, 공산혁명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은 유산계급의 착취기구인 국가를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친일이 지탄받던 도덕적 기준이 해방 전에도 사회에 유지되고 있었고, 공산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먼 장래의 혁명을 위해 당장 민족국가를 도외시할 마음이 없었다.

해방공간의 현실에서는 좌우익의 주도권을 모두 민족국가에 대한 애착이 없는 극단파가 장악했다. 양쪽 극단파 모두 민심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을 수 없었으므로, 정상적 상황에서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주변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점령군의 힘에 기대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좌우익 극단파의 득세 과정을 반민자’(반민족행위자) 처리 과정에 비쳐볼 수 있다. 극우파는 반민자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극좌파는 반민자 집단에 대한 단호한 처단 주장을 통해 형성되었다.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반민자의 신속한 처단을 주장하되 절제 있는 처단을 통해 무차별적 옥석구분을 피하고자 했다.

이북에서는 극좌파의 주장에 따라 가차 없는 처단이 이뤄졌다. 친일파 처단이 미흡했던 이남에서 이것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온 조치가 아니었다. 이북의 반민자 집단이 처단을 피하기 위해 이남으로 건너와 극우파의 자원을 보태준 문제도 있거니와, 이북에서 그 후 전쟁이나 천리마운동 같은 모험적 정책을 견제할 보수파가 사라짐으로써 인민의 고통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맞았다.

한편 이남에서는 친일파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처단은커녕 일제시대보다 더 큰 권력과 재력을 차지했다. 매판세력의 역할을 미군정이 일본 통치자들보다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않은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항복 후에 엄청난 양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항복 시점 통화량이 약 50억 원이었는데 몇 주일 동안 약 36억 원을 더 찍었다. 화폐 발행은 미군 진주(98) 후까지 계속되었고, 이 때 찍은 화폐 중에 불량품이 많아 상인들이 잘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을 미군정에서 보장해 주기까지 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몇 주일 사이에 통화량의 70% 증가는 끔찍한 결과를 몰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늘어난 돈은 친일파의 손에 뭉칫돈으로 남아 있었다. 박흥식이 어떤 사건으로 조사받을 때 일본 항복 직후 그가 총독부 측에서 1천만 원의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빙산의 일각이다.

1123일 임정이 귀환한 후 부호들이 제공하는 7백만 원을 받느니 못 받느니 옥신각신한 일이 있다. 역시 빙산의 일각이다. 김구가 귀국 이튿날 친일파 처단 문제를 묻는 기자들에게 위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고 답했다. 산술에서는 A+BB+A가 같은 것일 수 있어도 인간사회의 경로의존성은 어쩐단 말인가. 당시의 민족주의자들을 실망시킨 이 엉뚱한 대답이 나온 데도 친일파의 자금력이 한 몫 했을 것 같다.

친일파는 자금력과 경찰력을 미군정에게 보장받았다. 그 자금력으로 룸펜화된 대중을 정치폭력에 동원할 수 있었다. 건전한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다. 민족사회 외부의 힘이 군정의 형태로 작용한 결과였다.

 

 

4. 한반도의 냉전은 언제 끝나나?

 

남북한의 분단건국은 미-소 간 냉전 때문이었다. 두 나라가 각자의 점령지역을 자기 영향권으로 만들기 위해 극단적 공산주의자와 친일파 집단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으니, 민족사회 내의 좌우대립이란 것이 두 나라의 대리전이었던 셈이다.

-소 냉전은 1990년대 초에 끝났다. 그러면 외인(外因)이 해소된 것 아닌가? 외인이 사라진 후에도 분단 상태가 20여 년간 계속될 뿐 아니라 평화 정착 노력조차 성과를 잘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냉전구조가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냉전구조라 함은 자본주의체제의 심화와 확장을 향한 압력과 그에 대한 저항 사이의 교착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도 자본주의체제 도입을 향한 것이었지만, 민족사회 내부에 뿌리를 굳건히 내리지는 못했다. 조선인 유산계층은 거의 지주로만 구성되었고 기업 활동은 미약했다. 그래서 해방 당시 안재홍은 전 민족이 동일 예속동일 해방을 겪었기 때문에 민족사회 내의 계급 갈등이 최소화된 상태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의존체제는 일본의 통치체제에 비해 한국 내의 자본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그래서 군사독재 하에서 자본권력이 형성되어 군사권력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체제 운영에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1세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식이 이 상황을 보여주었다. 자본권력이 개혁적 성향을 보인 면도 일부 있지만 전체적으로 수구세력의 온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재벌체제가 국가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1991년까지 세계적 냉전의 주체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소련은 사라지고 그 뒤를 이은 러시아는 냉전 주역으로서 면모를 모두 잃었다. 미국은 아직도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세계 각지의 갈등과 긴장을 일으키고 키우는 역할을 수시로 맡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의 절반을 자유진영으로 묶어놓고 통제하던 힘은 잃었다. 세계 차원의 냉전은 분명히 끝났다.

지금 한반도 긴장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에 놓여 있고 남한의 역할은 주변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피상적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은 냉전기 반공주의 같은 구조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중국 견제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위한 부수적 수단으로 흔히 해석된다.

나는 <냉전 이후>(2016)에서 1990년대 남북관계를 돌아보며 남한의 수구세력이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가로막는 장면을 거듭해서 살펴보았다. 미국에게는 199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계속할 동기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할 동기가 엇갈려 왔다. 그에 비해 북한의 개방을 가로막으려는 남한의 정책에서 더 강한 동기와 뚜렷한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미국의 어느 극우파보다도 한반도 긴장 완화를 꺼리는 마음이 강하다. 이해관계가 크게, 그리고 직접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구세력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24% 지지에 그쳤는데도 국회에서 38%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정책분야에서 우습지 않은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

남한의 수구세력은 국회만이 아니라 언론, 관계,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과잉대표되는 체제를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해 놓았다. 비교적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수구세력의 과잉대표 상황을 부분적으로 완화하는 데 그친다. 그래서 지난 20여 년간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가로막는 데 미국보다도 남한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 하는 탄식이 한 동안 서울 거리에 메아리쳤다. 민족 통일은커녕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70년 전 조선 인민이 원치 않는 분단의 길을 걸은 것은 남 탓때문이었다고 나는 확언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역량이 자라나고 외세의 압력이 이만큼 줄어든 지금에 와서도 민족의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 탓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평화, 나아가 민족 통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고 이 사회를 사회다운 사회로 만드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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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Scholarship is not sitting at the table, reading texts and underlining points to memorize.

It is standing on it, trying to look beyond the texts and think more widely.

The table is only a platform for the scholarship.

 

The table is a device for injecting the currently prevailing ideology into your mind.

"Independence of mind" is achieved by stepping on it.

Then you can start anew. Change and resistance will become possible.

"Resistance is none other than creation, and creation none other than resistance".

 

[Shen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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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아버지 일기의 1950년 9월 14일자에는 인민군 점령 상태의 동네 의료서비스 상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의사들에 대한 인상부터 적어놓았다.

 

전쟁이 나고 또 한가지 곤란한 문제는 의사이다. 이 몇해 동안 대어놓고 우리 가족의 병을 보아주시던 숭인병원 의사 김성식 씨는 진즉 가족을 데리고 어디론지 가버리셨다. 온후한 성격에 독실한 크리스천이시어서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그 풍모가 환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아늑한 안도감을 갖게 하던 선생은 전쟁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우리 마을에서 진즉 가족을 데라고 남하한 분은 아마 김의사 한분뿐일 것이다. 들리는 말에 한민당은 서울이 점령되기 전에 일찍 손을 써서 당원들을 모두 피란케 하였다더니, 그럼 김선생은 한민당원이었다는 풍문이 사실이었을까? 5-30선거 때 조병옥 박사의 편을 들어서 맹활약한 사실은 알고 있지만, 평소에 보면 그 책상머리에 항상 김구 선생의 사진을 꽂아두었기에 기연가미연가했더니.

 

그 시절 병의원 이름에 지역명을 붙이거나 뜻 좋은 글자로 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의사 성명을 내거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가 김 의사 책상머리에 누구 사진이 붙어 있는지 눈여겨 본 것처럼, 동네 의사는 지역 유지로서 공동체의 관심을 모으는 인물이었다. 같은 내과의사를 찾더라도 감기 같은 잔병에는 친절하다는 평판을 가진 의사에게 가고, 문제가 심각하다 싶으면 의사 성질은 고약해도 시설이 좋거나 "실력"이 좋다는 병원으로 가는 게 어릴 적 풍속이었다.

 

그 풍속이 많이 바뀌었다. 크고 시설 좋은 병원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해진 만큼 의사의 성품을 살피는 추세는 줄어들었다. 의료의 기술적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다. 멋진 영어단어가 의사 성명보다 병의원 간판에 더 많이 오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의료의 기술보다 의사-환자 간의 신뢰관계를 더 중시하게 되는 것은 노티의 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과학사 중심으로 문명사를 공부하면서 현대세계의 기술제일주의에 불안감을 느끼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법적 책임을 넘어 환자인 나를 아껴주는 마음으로 치료의 효과를 추구하는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고 싶다.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눌 의사가 애써준 것이라면 그 결과를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 때부터 "형님"으로 모시던 박승우 선생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난 후로 치과 가기가 싫어졌다. 치과 가기를 싫어하게 되는 바람에 입 안에 문제를 많이 키우게 되었고, 몇 해 전부터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빨을 마음놓고 맡길 수 있는 데가 있었으면 하던 참에 눈치를 보니 가까이 지내는 홍세화 선생이(박승우 선생과 동기동창인 "형님"이다.) 치과 신세를 꽤 지는 것 같기에 물어보니 자신있게 성산동(연남동인지도?)의 현 선생을 추천해 준다. 1년 남짓 다니면서 공사도 좀 했는데 썩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현 선생이 먼 곳으로 떠나게 되어 치과를 새로 찾게 되었는데, 현 선생이 한 곳을 강력하게 추천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덕동의 아크로치과를 찾아갔는데,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 기술을 너무 앞세우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약한 것이, 첫 진찰비가 10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몇 곳 치과에서 사진 찍고 진찰하고 본인부담이 2-3만원 정도였는데, 추천한 현 선생 낯을 보지 않았다면 진찰비 갖고 시비를 걸었을 거다. 더 고약한 것은, 그곳에서 권하는 시술을 받을 경우 진찰비 냈던 것은 빼준다는 말이었다. 이 양반, 손쉬운 다단계를 하지, 왜 힘든 치과의사를 하나?

 

그런 참에 고교 동창 김병준 군이 제법 가까운 곳에서(봉일천) 개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년에 여의도에 개업해서 잘 나가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10년 전부터 옮겨와 있었던 것을 강철구 교수에게 들었다. (내가 동창들과 너무 교류 없이 지낸다. 연전에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문상 온 동기동창이 강 교수 하나뿐이었다. 강 교수는 동창이라서가 아니라 동업자로서 소식을 들은 것이었고.)

 

김병준 군, 찾아가 보니, 근 30년 만에 보는데도 그대로다. 소시쩍부터 절제력이 뛰어난 데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꾸준히 해온 친구니까. 골프와 테니스를 계속 친다는데, 골프는 초년에 싱글 핸디 경지에 올라 골프 치는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학교 시절에는 나도 그의 바둑 수준을 부러워했다. 중학생 때 입단대회 본선에 올랐으니 당시의 아마추어 정상급이었다.

 

특별히 가까이 어울렸던 친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꽤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꽤 아는 사이다. 견적도 받아보지 않은 채로 그 친구에게 이빨을 맡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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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