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권 발행고는 경이적 수자를 보이고 있는데 이를 일본이 항복한 8月 15日과 미군이 경성에 진주한 날과 현재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8月 15日 4,975,148,877圓

9月 8日 8,463,890,631圓

9月 26日 現在 8,631,185,160圓

 

이를 보면 일본항복 당시로부터 9月 8日의 미군진주의 二旬 餘 사이에 거의 倍額인 23億萬圓이나 되는 엄청난 거액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조선 경제 질서의 교란 단말마적인 발악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인플레의 경향은 날로 심하여 그에 대한 적당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28일


이 기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1944년 말의 발행고는 31억4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조선은행” 조) 8월 15일까지는 60% 미만의 증가인데, 큰 전쟁의 막바지로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다. 화폐경제의 틀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종전 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70% 증가는 보통 일이 아니다. 새로 찍어낸 35억 원의 돈이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시중에 풀릴 시간이 안 된다. 그 대부분이 여기저기 뭉칫돈으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돈은 도는 것”이란 말이 있다. 경제학원론의 첫 명제도 경제적 가치를 덩어리(stock) 아닌 흐름(flow)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상태(normal state)에서의 관념이다. 시장실패(market failure) 상황에서 돈은 돌지 않고 덩어리로 뭉칠 수 있고, 그럴 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실체가 된다. 물의 순환이 순조롭지 못할 때 ‘물벼락’도 되고 ‘물폭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상황에 관해 명분과 이념 이야기를 늘 읽고 들어 왔다. 그런데 인간이 명분과 이념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65년 전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명분과 이념을 더 많이 생각했겠지만, 현실적 조건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았으리라는 말이다. 당시 상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현실적 조건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돈 문제를 밝히는 데 들인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50쪽 분량의 13장 “1945~47년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에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져 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짜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돈 문제를 파고들기 어려운 문제의 한 측면을 정병준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치자금의 규모를 대략 파악해 놓은 다음 그 크기를 최대한 실감나게 설명하려고 애쓰는데, 실감이 그리 잘 나지 않는 것이다.


GNP 대비로 계산해보면 1947년 1인당 GNP 35달러와 1997년 1인당 GNP 9,511달러는 무려 272배 정도 차이가 있다. 이승만이 당시 거둬들인 정치자금을 최소 금액으로 상정해 1인당 GNP 대비에 단순 비교하면 현시가로는 73억 원에 해당한다. 또한 이승만이 거둬들인 정치자금은 1945년 GNP의 0.3857%에 해당한다.(위 책 608쪽)


2년간에 73억 원? 빙산의 일각이 차떼기로 드러나는 지금 세상에선 너무 귀여운 액수다. 그런데 GNP의 0.3857%?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2~3조 원은 될 것 같은데? 정치자금으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틀이 다른 경제 상황 속에서 일정한 금액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정확히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름대로 정상상태에서의 교환가치는 쌀 등 생필품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지만, 화폐의 분포가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뭉칫돈이 가지는 힘의 크기는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해방 직후 조선은행권의 대량 발행이 “일본인의 귀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을 몇몇 자료에서 봤지만, 그 수요가 어떻게 파악되고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는 설명을 찾아보지 못했다. 추측컨대 ‘귀환 자금’이란 것은 신권 수요의 일부일 뿐이었는데 내놓고 얘기하기 좋은 것이라서 핑계 삼은 것이 아닐까 싶다.


총독부가 일종의 ‘정치자금’을 필요로 했을 것은 당연히 추측된다. 여운형이 치안 유지를 부탁받으면서 1천만 원 내외의 돈을 함께 받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사실 여부를 확실히 판단할 근거는 찾지 못했다. 단, 얼마 액수건 돈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받고 싶은 마음’은 어쨌건, 총독부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총독부가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진 대상은 여운형과 건준 외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10월 중순 이승만의 귀국 때, 그리고 11월 말 임정 인사들의 환국 때, 한민당 주류 인사들이 상당액의 자금을 제공한다. 그 사람들이 먹고 싶은 것 참으면서 꼭꼭 아껴뒀다가 제공한 돈이 아닐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 외에도 자기네 세력 확장에 필요한 데는 두루두루 썼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현금 뭉칫돈은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자원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권력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8~9월간 발행된 35억 원의 행방을 윤곽이라도 파악한 연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일부에 대해서라도 내 멋대로 한 번 짐작을 해본다. 한민당 주류 인사들은 일본과 만주에 상당 규모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 그것을 사들이거나 보상한다는 명분으로 돈다발을 그들에게 쥐어주지는 않았을까?


내가 총독이라면 그렇게 했다. 막강하던 권력이 해소되고 있는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해관계를 최대한 공유하는 집단에게 지금 내가 실어줄 수 있는 힘을 최대한 실어줘야 한다. 김성수 집안이 가지고 있는 만주의 재산을 총독부가 사들이는 형식으로 새로 찍은 지폐를 차떼기로 넘겨준다면, 나중에 혹시 감사(監査)를 받더라도 할 말은 있다.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1945년 9월 말 시점에서 조선 내 통화량의 40%가 최근 한 달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 대부분이 권력의 성격을 가진 뭉칫돈으로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분명한 추측이다. 그리고 당시 한민당 주류 세력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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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조선내의 토지소유권(북위 38도 이남)에 대하여 22日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내의 토지소유권은 미군점령지내에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세금은 종전과 같이 군정당국의 명령대로 이를 바칠 것이다. 그리고 지주는 소작인의 소작료를 수확물로 받거나 현금으로 받거나 하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소작인은 이 지시에 따라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22일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193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환영받은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소민(小民) 보호 기능이 사라진 상태가 오래되면서 토호 세력이 자라났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제국의 쌀 생산기지로 이용하는 정책에 의해 농지 소유의 집중이 심화되고 소작요율이 살인적 수준까지 올라갔다.


유럽의 공산주의가 산업자본가와 산업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산업화가 발전해 있기 때문이었다. 동아시아의 농업사회에서는 아직 산업화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모순이라는 근대적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농업사회이기 때문에 농업자본가와 농업노동자 사이에 집중되었을 뿐이다.


해방 당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토지개혁이었다. 이승만의 극우정권조차 이 과제를 외면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서두름으로써 정치사회적 안정을 먼저 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월 22일 미군정의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이 현실을 인식하기는커녕 그에 역행하는 방침을 명언한 것이다.


미군정이 왜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가 있어 왔다. “바보라서.” 하는 간단한 대답에 나는 제일 끌린다. 그런데 이 문제보다 피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이 내게는 떠오른다. 왜 이 시점에서 토지개혁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발표했을까? 무엇을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물론 발표해야겠지만 무엇을 안 하겠다는 방침이라면 그냥 안 하고 가만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인식하지 못해도 토지개혁의 요구가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좌익 정당들은 말할 것도 없고, 16일 한민당 결당식에서 선포한 정책 8개 항 중에도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 있었다. 이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를 군정청이 느꼈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식적 의안 제기도 없는 상태에서(그런 통로도 없는 상태에서), 기자회견에서 답변을 요구받은 것도 아니면서, 군정청이 자발적으로 이 방침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어떤 동기와 계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정당이 최소한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정도는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정치 감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 안 한다.”는, 스스로 인기 떨어뜨리는 발표를 할 필요가 없다. 부득이하게 답변이 필요하더라도 “이제부터 검토해 보겠다.”는 정도로 얼버무리는 것이 상식 아닌가?


거의 한민당 인사만으로 구성된 고문단을 군정청이 위촉하는 것은 10월 5일의 일이다. 그러나 한민당 인사들과의 집중적 접촉은 진주 시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확인된 근거가 없더라도 9월 22일 군정청의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발표는 한민당 인사들의 로비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토지 소유에 힘의 큰 근거를 두고 있었던 만큼, 겉으로는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표방하면서도 변동이 없기를 속으로는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토지소유권 무 변동” 방침을 군정청이 세우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정식으로 발표하게 했다는 사실에 더욱 음미할 점이 있다. 미군정에 대한 자파 세력의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는 위축되어 있었다. 경찰관 대다수가 잠적해 버려서 군정청에서는 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굳이 드러난 친일파가 아니더라도 일제 치하의 특권계층은 처신을 조심스러워하고 있을 상황이었다. 그 사람들은 이 날 군정청의 발표에서 한민당의 메시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떨 것 없어요. 한민당에 오면 돼요.”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이치, 이승만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던 생존의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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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나는 참 반성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청년이었다. 나 자신을 "착한 사람"으로 굳건히 믿고,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뭐든 외적 조건에서 핑계를 찾는 재간을 열심히 익혔다. 그래서 교수직에 있던 30대에는 가까운 이들에게 "합리화의 대가"란 평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평인데,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이제 늘그막에 들어서까지 한국근현대사의 치욕과 고통을 "남 탓"으로 돌리는 외인론에 치중하는 것도 그 여파일지.

 

그러다 며칠 전 이야기처럼, 1985년 영국 체류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눈을 새로 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존재를 통째로 되돌아보게 하는 충격을 받는 일이 있었다. 1987년 말 어느 날 아버지 일기를 어머니께 넘겨받은 것이다.

 

넘겨받을 때는 개인적 유품이라고만 여겼다. 일찍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어머니가 지켜온 하나의 짐일 뿐이고, 이제 내가 넘겨받을 때가 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인생을 바꿔놓을 가르침을 (또는 충격을) 거기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5년 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일으켜준 그 글에서 필자의 아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불초함을 절실하게 느꼈을지는 읽는 분들 상상에 맡긴다. 내 인생이 갑자기 끝났을 때 내 삶의 누추한 단면들이 드러나는 광경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악몽에 여러 해 시달린 일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일기를 넘겨받은 일과 3년 후 교수직을 떠난 일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배경조건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학교를 떠난 후 혼자 지내면서 일기 내용을 틈틈이 입력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자료로 제공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력 작업을 진행하면서 단순한 자료를 넘어 그 글이 가진 가치를 점점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도 자료 형태의 발표를 넘어 일반 독자를 위한 출판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료 형태로라도 발표만 되면 자료 이상의 가치를 찾을 사람들도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입력이 끝난 후 서중석 선생에게 보였다. 나는 학술지에 몇 차례 나눠서 붙여 낼 길을 생각해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서 선생이 일반 출판도 고려하라고 권했다. 그 좋은 글이 자기 눈에 들어오게 해준 데 감사하면서.

 

그래서 창비사에 역할을 가진 백영서 선생에게 검토를 부탁했고, 그 결과 1993년 초에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 일에 관계된 여러 분이 감동의 마음으로 보여준 열성적 태도에 내가 오히려 감동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정해렴 선생과 한기호 선생의 열성을 잊을 수 없다.

 

<역사 앞에서> 출간은 내가 불초자로서 자격지심을 극복하려는 긴 과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점을 되새길 때마다 내게 그 일기를 넘겨줄 당시의 어머니 마음을 떠올려 본다. 당시의 한심한 내 꼴을 보며 하나의 충격을 던져줄 필요를 느끼셨을 것 같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아들놈을 사람 비슷하게 만드실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잊혀졌던 지아비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으니, 양수겹장이랄까? 아버지의 '유족'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은 만점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또 한 분 지식인의 뒷일을 생각하며 아버지 일기를 둘러싼 일이 생각난다. 류연산(1957-2011). 6년 전 그가 불시에 세상을 떠났을 때 블로그에 그 이름으로 카테고리 하나를 만들었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한 지식인으로서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꺼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직까지 제일 내용이 빈약한 카테고리로 남아있지만 닫고 싶지 않다. 그분에게 마음을 닫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분 이야기가 많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류연산" 카테고리의 마지막 포스팅은 그가 세상 떠난 지 1년 반 지났을 때의 글인데, 이런 말로 맺어져 있다.

 

아내에게 책 구해 달라는 전화를 하면서 가능하면 류 선생 부인을 한 번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류 선생이 만든 자료가 어디 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근년 현대사 작업을 하다 보니 그의 자료 범위를 파악해 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지금이라도 그 자료에 접할 수 있으면 남은 <해방일기> 작업에 보탬이 될 것 같고, 현대사 연구자들에게도 활용을 권하고 싶다.

 

류 선생이 4백여 개의 녹취테이프를 남긴 사실을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언젠가 정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레이벌만 붙인 채로 그냥 쌓아놓은 모양이다. 자기 손으로 정리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문병 온 김병민 당시 연변대 교장에게 그 자료를 학교에서 넘겨받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다.  김병민 씨는 류 선생에게 조선어문학계의 선배 같은 스승이었다.

 

김병민 교장에게의 부탁이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아직도 나는 확실히 모른다. 오늘 점심 함께 할 력사학계 김성호 교수에게 좀 들을 수 있을지. 김 교수는 김 교장과도 류 선생과도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 일에 간접적으로라도 관여했을 것 같다.

 

'류연산 자료'가 연변대로 넘어가지 못한 것을 알고 나는 그 자료의 활용에 한국 쪽에서 나설 여지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광 선생을 근 20년 만에 만나 그 얘기를 꺼냈다. 그 자료의 가치를 쉽게 이해할 만한 분이면서 또 한국사학계에서 그런 일에 나설 길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조 선생이 국편의 당시 자료실장 이아무개 선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서 내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류 선생의 아들 광엽 군과 연락을 붙여주었다. 그 후로 어느 쪽에서도 더 연락이 없기에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조 선생이 국편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이번에 연길 오면서 그 일을 환기시켜 드렸다. '류연산 자료'의 가치에 대한 그분의 기대감은 변함 없었다. 그래서 이 달 하순 연변대와 국편 공동주최의 학술회의 참석차 연길 오는 길에 유족을 만나기로 했다.

 

짐작이지만, 국정교과서 따위에나 매달려 있던 시절의 국편에서 자료 발굴사업 같은 일에 아무리 실무자들이 성의껏 임한다 해도 여건이 충분치 못했기 쉽다. 이제 국편이 제 모습을 되찾고 있는 장면에서 마침 이 자료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기관장이 앉아 있으니 '류연산 자료'가 빛을 보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다.

 

아끼고 존경하던 친구의 유족들 입장을 바라보며 내 아버지의 유족으로서 내가 맡았던 역할이 겹쳐져 생각난다. '류연산 자료'가 잘 활용되어 그분의 업적이 제대로 드러나는 모습을 유족들이 곧 보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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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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