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에서 살게 되고도 집밖에서의 내 존재양식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입성은 "네모 안의 네모" 수준을 지켰고, 돈은 명절 때나 만져보는 것이었다. 아, 돈! 학교 앞 가게나 노점에서 군것질 사먹는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학교에서 나와 그 구역을 지나가는 동안에는 마음의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5학년이 된 후 학교 성적이 분단장급까지 올라섰다. 100명 반에서 10등 안에 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분단장은 대개 성적 순으로 나눠주는 건데, 나는 그 범위에 겨우 들게 되었지만, 성격이 소심하고 붙임성이 없는 데다가 지난 4년 동안 해먹어 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잘난 애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하고 교실 한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하면서 존재감 없이 지낼 뿐이었다.

잘난 넘들 보면서 주눅드는 인생을 5년째 지내 왔지만 5학년 때 반장넘은 해도 너무했다. 1300명 가운데 1등을 자기 전유물로 여기는 넘이었으니...  우리 집 저 아래쪽에 명륜동1가 시절 우리 단칸셋방 비슷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던 넘이니 치마바람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넘 이름이 이준구인데, 지금 서울대 경제학 교수 노릇 하고 있다. 초년의 가난이 정운찬 못지 않았던 넘인데, 그걸 코에 걸고 살지 않는 게 신통하다.

드디어 6학년이 되고 석차가 반에서 5등 안에 들게 되니 경기중학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큰형은 경기중에서 경기고로 올라가 있었고 작은형은 경기중에 떨어져 동성중에 다니고 있었다. 동성중학 출신으로 동성중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고종 기돈 형님의 후광까지 겹쳐 그 학교에서는 스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시 2차 남학교로는 동성과 대광의 끝발이 제일 좋았다.) 아무튼, 집안의 실적으로 보면 경기 합격 확률이 반반이었다.

그런데 쿠데타가 일어났다. 내가 군사정권 미워하는 데는 내 진학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적인 원한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는 각 학교가 각자 시험문제 내고 알아서 채점해 뽑았다. 그런데 군사정부는 전국 모든 중학교에 공동출제를 실시했다. 이것까지는 큰 불만 없다. 체력 실기를 넣어 엄청나게 큰 비중을 두게 한 게 문제다. 학과가 150점에 체력장이 25점. 나처럼 몸이 약하고 굼뜬 놈에게는 재앙이었다. 학과도 공동출제를 하니까 경기 같은 학교에선 변별력이 크게 줄어드는데, 체력장에서 혼자 20점이나 까먹고 어떻게 경쟁에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얘기를 하다가 적은 적이 있지만, 이 체력장 쓰나미에 몰려 경기중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집 가까운 보성중학으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성적이 반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참에 체력장 완화 소식이 날아들었다. 25점 중 5점을 참가만 하면 기본점수로 준다는 것이었다. 체력장의 손해가 4점 가량 줄어든다는 얘기였다. 이 4점이 결국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기중 커틀라인이 149점이었는데, 내 득점은 153점이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에 결심을 하고(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경기중학에 원서를 넣어 요행히 합격했다. 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냥 보성으로 갔다면, 또는 경기에 떨어져 동성으로 갔다면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전국의 열두 살 어린이들에게 이런 끔찍한 고비를 만들어주던 야만스러운 풍토... 지금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학과 150점 가운데 9점을 깎였고 체력장 25점 가운데 13점을 깎였다. 당시 체력장에서 5점 이상 깎일 학생은 경기중학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동기 입학생 420명 가운데 지체장애자가 하나도 없었다. 정말 군사정권의 야만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정책의 하나였다.

그런데 학과만으로는 내 점수가 합격자 중에서도 몇 등 안에 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 내내, 그리고 고딩 초년까지도 나는 커틀라인을 살짝 넘어 요행으로 마름모 명찰을 달게 된 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낙제 위험 안 느끼고 지내는 것만 그저 다행이었다. 고3 때 난 데 없이 전교 1등을 밥먹듯이 하게 되어 "내가 왜 이럴까?" 어리둥절해 할 때 한 친구가 말해줬다. "넌 중학교 들어올 때부터 베스트 텐(전교 10등 안쪽)이었잖아?"

중학교 입학시험이란 것이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나친 압박이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입시 준비는 훗날처럼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6학년에게도, 재수생에게도 "Life goes on."이었다. 경기 가면 더 좋은 일이지만 보성이나 동성 간다고 해서 아주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나도 어머니도 하지 않았고 일반인들도 대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 진학은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기쁨이지만, 그 실패를 인생의 좌절로 여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명륜동으로 이사한 후 집에 피아노를 들이고 레슨도 받았다. 어머니가 좋은 옷은 안 사주셔도 애들 영양공급에는 사정이 힘들 때도 기준을 엄격히 지키셨는데, 돈 걱정 않게 되니까 마음의 영양도 생각하시게 된 결과였겠다. 형들은 시작하기에 너무 늦어서 제쳐놓고 영아와 나를 위해 피아노를 장만하신 건데, 피아니스트로 키울 꿈도 혹 영아에게는 꾸셨을까? 내게 대해서는 척박한 정서를 걱정하셨던 게 분명하다. 한 번 어떤 색깔이 제일 좋으냐고 물으시는데 "회색이요." 내가 대답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을 나중에 하시곤 했다. 그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세계문학전집을 섭렵한 뒤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였으니까.

명륜1가, 전에 살던 집 근처의 선생님 댁에 레슨 받으러 다녔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세상 모든 선생님이 이 분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선생님만 좋다고 레슨 성과가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몸치란 사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확인되어 있던 사실이지만, 이 레슨을 통해 음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몸치 겸 음치. 대학 이후로는 둘 다 벗어났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애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성장과정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 그 문제가 표현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글을 제법 쓰게 되고도 말하기는 그보다 영 힘들어하는 문제. 음악을 많이 즐기지 못하는 아쉬움. 36세 때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유럽의 동료 연구자들과 좋은 친구관계를 맺고 지내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지적해 준 일도 있었다. 자네만큼 교양을 갖춘 사람이 왜 음악을 그렇게도 즐기지 못하냐고. 음악을 교양의 기본으로 여기는 유럽 친구들에게 기형적인 문제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크게 만회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결함이 내게 어떤 문제를 파생시킬 수 있는지는 늘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이 집은 대단한 집이었다. 오늘은 생활 얘긴 접어두고 집 얘기만 적겠다.

명륜동 3가 33번지. 이 집에 사는 동안 결혼해서 분가했기 때문에 내 본적이 번지수도 멋진 이 주소로 되어 있었다.

명륜동 입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성대 정문 앞을 지나 3백 미터 가량 지점에서 왼쪽 비스듬한 골목으로 150 미터 가량 들어가 왼 쪽 작은 골목의 끝집. 성대와 담이 붙어 있는 이 집에 이사를 들어가면서 나는 내 눈을 믿기 어려웠다. 180여 평의 대지 중 허름한 별채가 들어앉은 남쪽 끝 40평 가량은 울타리로 막혀 있었는데도, 나머지 땅만 해도 너무나 광활했다. 북쪽 모퉁이의 대문과 건물 사이의 정원만 해도 흔치 않은 규모인데, 건물 앞쪽으로는 완전히 운동장이었다. 혜화동 집에서 우리 자랑거리였던 은행나무보다도 더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정원 모퉁이와 운동장 모퉁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일본식 목조건물 안에 들어가면 더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응접실, 그리고 앞을 가로지르는 복도 남쪽으로 건너방, 대청, 안방, 널찍널찍한 방들이 늘어앉아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왼쪽 복도와 나란히 2층의 조그마한 두 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오른쪽 복도는 북쪽의 조그만 '식모방' 앞을 지나 서쪽 끝의 부엌과 욕실로 이어졌다. 42평의 건평이 요새야 별 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대궐이었다. 이만한 크기의 집은 당시 서울 시내에 아마 몇백 호 안 되었을 것이다.

50년대 후반 서울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로 도시화된 지역의 하나가 정릉리였고, 값이 오른 밭을 팔아 이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참 지낸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어머니는 형편이 되자 아이들이 자라날 안정된 장소를 구한 것이었다. 이사 당시 큰형이 고1, 작은형이 중1, 내가 초5, 영아가 초3이었다. 어머니는 86년 정년퇴직 하신 후 이듬해에 이 집을 성대에 팔았다. 2000년경 동숭동에서 지낼 때 산보삼아 그쪽을 지나다 보면 건물을 그대로 두고 성대에서 고시생 합숙소로 쓰고 있었고, 연전에 성대 강연하러 갔을 때 지나며 보니 건물이 철거되어 있었다.

골목에 나가 애들이랑 뛰어놀 나이가 지나기도 했지만, 나가 놀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애들을 끌어들여 놀 때가 많았다. 이사 후 얼마 지나 북쪽의 정원을 치우고 탁구대를 놓았다. 아직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대단한 호강이었다. 정릉리 땅값이 오른 덕분에 우리 집은 돈 걱정이 필요 없는 극소수의 범위에 들게 된 것이었다. 피아노, 냉장고, 텔레비전 등 당시에는 흔치 않던 물건들이 우리 집을 채워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들이 돈을 만지게 하지 않았고 지나친 사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다. 학교에 가면 언제나와 같이 우리는 없는 집 아이들이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고갯길을 넘어오다가 한 아이가 너희 집이 어디냐고 묻기에 마침 건너다보이는 집을 가리키며 "저기, 성대 모퉁이에 있는 2층집이야. 은행나무 두 개 사이에." 했더니, 이 아이 눈이 둥그래져서 다른 애들한테 "야, 이 자식 얌전한 놈인 줄 알았더니 뻥이 되게 심한 놈이었구나." 하고 분개해 마지 않은 일도 있었다. 이렇게 돈을 모르고 자라난 것이 훗날 가난뱅이가 될 조건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가난뱅이 신세도 과히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밑천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널찍한 집으로 옮김에 따라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책이 늘어난 것이었다. 전쟁 중에 책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남은 책이 정릉 집의 골방 하나를 채우고 있었는데, 이것이 모두 넘어왔다. 책이란 것은 모두 읽을 수 있는 것이라던 생각을 나는 바꿔야 했다.  그러나 읽을 만한 것도 있었다. 가장 심대한 영향을 내게 끼친 책은 <임꺽정전>. 의형제편과 화적편 세 책씩 여섯 책이 있었다. 몇 번을 거듭 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와 내 문체에 통하는 점이 있다는 평을 더러 듣는데, 부자가 함께 벽초 문체에 영향받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책 얘기 나온 김에 명륜동 초기의 독서 얘기를 조금 붙인다. <임꺽정전>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을 들인 대상이 <삼국지>였다. 집안에만 몇 가지 판본이 있어서 이 판본 저 판본을 보다가 나중에는 영창서관 판 <현토 삼국지>까지 읽어냈다. 한문에 토씨만 붙인, 당시의 초딩이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의 책이었지만, 내용을 바싹하게 익혀 놓은 책이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기분으로. 내 한문 읽기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영어 만화책. 미군부대에서 암시장으로 흘러나오는 품목의 하나가 책이었는데, 책이 많지 않던 당시에는 지식시장에서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 큰형이 영어 공부를 위해 만화책 중 점잖은 편의 것을 사다놓곤 했는데, 만화가게에서 보던 애들 만화와는 수준이 다른 물건이었다.(Jughead와 Archie, 그리고 Dennis the Menace 시리즈, 월트 디즈니 만화들이 제일 분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ABC를 배우기 시작한 중1 때부터 그림을 보고 스토리를 상상해 가며 이것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가운데 영어 어휘력과 독해력이 저도 모르게 늘어나, 아직까지도 밥벌이의 보루로 버티고 있다. 한글이든, 한문이든, 영문이든 닥치는 대로 부딪쳐 가며 익힌 것이 언어능력을 확보하는 데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큰형의 영어 수준이 높아지면서 만화책이 잡지책으로 바뀌게 된다. National Geographic, Popular Science, Popular Mechanics 등. 나도 큰형 수준을 바짝 뒤따라다니며 이 잡지책들을 소화해 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영어 공부의 표가 별로 나지 않았다. 고딩이 되고 보니 그 날고 긴다는 경기 애들 틈에서도 독보적인 차원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잡지에서 접한 내용을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도 넓혀졌다. 세계문학전집에 묶여 있던 혜화동 시절을 벗어나 세속적 글읽기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형들이 있다는 것이 바지를 물려입을 때는 행복한 일이 아니었지만, 길을 헤쳐준다는 점에선 좋은 면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
 

혜화동 로타리에서 백 미터쯤 올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두 집째, 골목들이 마주친 모퉁이의 자그마한 왜식 집으로 이사한 것이 초등 3학년 올라갔을 때였던 것 같다. 부산 피난 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우리 집' 살림을 시작한 곳이다. 대지 30평 남짓에 건물 열댓 평의 조그만 집이었지만 단칸방 셋방살이에서 풀려난 우리들에겐 대궐 같은 곳이었다. 대문 안으로 조그만 마당이 있었고, 현관을 들어서면 복도 끝이 부엌, 그 오른편에 조그만 욕실까지 있었다. 복도 양쪽이 방인데, 오른쪽은 6조 다다미방이었고, 왼쪽에는 조그만 방 둘이 미닫이를 격하고 있었다. 오른쪽 방이 사내아이들 방이었고 왼쪽 깊은 방이 여자들 방이었으며, 왼쪽 바깥방은 거실이었던 셈이다. 마당에서 집 왼쪽으로 들어간 곳에는 집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근처에서 '은행나무집'이라 불리기도 했다.

 

혜화동 집의 제일 큰 가구가 정릉 집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책장 하나를 가져온 것이었다. 6자 정도 폭에 밑은 한 자 남짓 깊이에 두 자 남짓 높이의 장 모양이고(꼭대기엔 서랍도 한 층 있었다.) 그 위에 세 자 가량 높이의 책장이 얹혀져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전공서적도 그 안에 들어 있었지만,(아래쪽 장 속에) 내게 중요한 것은 세 뭉치의 책들이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그 책들이 내 혜화동 생활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었다.

책을 어떻게 읽으라는 가르침을 누구에게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냥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읽을 뿐이었다. 대학생도 힘들어할 책들을 초딩이가 다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에 발랐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어려워 못 읽어낸 책이 딱 한 권 있었다는 사실이 반증해 준다. <20세기의 지적 모험>이란 제목이었는데,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생각을 하고 펼쳤다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니체 해설서 읽으면서 뻑뻑함을 느낄 때 그 기억이 떠오르며, 내가 원래 철학적 사고에 약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게걸스런 책읽기에 스스로 혀를 차는 것은 무엇보다 백과사전까지 읽을거리로 활용했던 기억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와 인구, 산의 높이와 강의 길이 등등 온갖 쓰잘 데 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쟁여넣는 것이 뭐 그리 재미있었는지. 당시에 골든벨 같은 퀴즈대회가 있었으면 한 주름 잡았을 것 같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 찍어놓은 거라면 뭐든지 환영이었다. 우리 집에선 한국일보를 구독했는데, 네 면밖에 없던 게 다행이다. 요즘처럼 몇십 면 찍어 보내면 학교 갈 틈도 없지 않았을지...

어린이 잡지로 <새벗>과 <학원>을 대놓고 봤다. <학원>은 중고딩 용이었지만 세계문학전집을 머리에 담아놓은 초딩에겐 부담없는 읽을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만화가게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세계문학전집보다 훨~ 재미있었다. 이 취향은 고딩 때 무협소설로 발전하게 된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뛰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작이 굼떠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팽이도 못 돌리고, 제기도 못 차고, 달리기도 늦고, 힘도 약하고... 몸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다. 게걸스런 책읽기는 그 반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형들이 골목에서 놀 때는 덕분에 끼어 놀 수 있었지만, 노는 재간이 없으니 늘 놀아봤자였다. 골목의 놀이친구들보다 더 요긴한 놀이 상대는 우리 집에서 2백 미터 가량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박 선생님 댁 아이들이었다. 우리 집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박 선생님"이라 불렀던 박종홍 선생님은 어머니의 이화여전 때 은사였고, 아버지께는 대구고보 때 은사였으며, 아버지와 문리대 동료 교수였던 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 가까워지는 데도 어떤 식으로든 매개 역할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그 댁의 5남2녀 중 4남인 윤창 형이 큰형과 동갑이고 막내 순창 형과 예경이가 나보다 한 해 위, 한 해 아래였다. 그들이 우리 남매들과 뛰어 노는 데도 좋은 상대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노는 데는 골목의 다른 아이들이 해줄 수 없는 상대역을 맡아줬다.

박 선생님 댁 아이들과 함께 우리 남매들의 특별한 친구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네 아이들이었다. <역사 앞에서>에 아버지 친구 이철 씨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의 결혼을 권한 얘기가 나온다. 이철 씨가 전쟁 중 월북한 뒤 고 선생님은 숙대 교편을 잡으며 남매를 키웠는데, 은경 누나는 내 한 해 위였고 경이는 한 해 아래였다. 경이네는 우리 집과 5백 미터 가량 거리였다. 이 특별한 친구들과의 놀이는 어머니가 권장하며 거의 아무 제약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하던 놀이를 새로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이들과 함께였다.

 

혜화동 살 때부터 생겨난 풍속 한 가지가 설 때 아버지 동료였던 세 분 선생님께 세배 가는 일이었다. 박 선생님 댁에는 어머니도 영아도 다 같이 가는 일이 많았는데, 동숭동의 서울대 관사에 살고 계시던 이희승 선생님과 김상기 선생님께는 대개 3형제가 다녔다. 이 선생님은 이화여전 이래 어머니의 직계 스승이셨는데, 어머니는 다른 제자분들과 함께 세배하느라고 우리를 따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앞집의 김상기 선생님을 피하려는 뜻이 있으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다. 김 선생님 역시 어머니의 이화여전 스승이시고 문리대에서 아버지와 제일 가까운 동료로 계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인세 문제 등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됐다.

박 선생님 댁은 우리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내외분의 성품 덕분인지 늘 화기가 넘치는 집이었고, 이 선생님 댁은 대체로 편안한 분위기지만 너무 점잖아서 주눅이 드는 편이었다. 김 선생님 댁은 썰렁~한 분위기여서 벌 서는 기분이었다. 표현력이 뛰어난 작은형은 머지 않아 이 선생님을 "땅꼬마 할아버지", 김 선생님을 "네모돌이 할아버지"로 지칭하게 된다. 그 무렵 세배 풍속이 만들어진 것은 큰형이 경기중학생이 되니까 아버지의 옛 동료들께 인사 드릴 자격이 되었다고 어머니가 판단하신 때문일 것이다.

세 분 선생님께 세배 오는 분들은 대개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와 마주치는 분이 있으면 그 댁 선생님께 누구 자제들이란 말씀을 듣고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곤 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다고 하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 그런가보다 하고 듣던 것과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기 시작한 데는 이런 자극도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지.

 

학교 얘기가 이제야 나온다. 깨어 있는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낸 곳이 학교였다. 그런데 학교생활의 기억에서 짚어낼 것이 많지 않은 것은 학교가 재미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분단장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6학년 끝나갈 때 특수한 상황에서 명목상 분단장 잠깐 해본 걸 제외하면) 참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쓰거든 떫지나 말라고, 공부를 못하면 놀기라도 잘해야 할 것을,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성격까지 뚱했으니.

훗날의 나를 보고는 초딩 때 공부가 시원찮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이다. 100명 반에서 20등 30등 사이가 늘 내 자리였다가 5학년 이후에야 10등 안으로 들어와 그래도 괜찮은 중학교 바라볼 주제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치마바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머니는 입학식 때도 안 오셨고, 나 때문에 우리 학교 오신 게 졸업식 때뿐이었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야 내 석차가 올라간 것은 중고등 때도 반복된 일인데, 입학시험을 앞두고는 성적 구성에 있어서 치마바람의 비중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치마바람 없는 아이가 선생님께 무시받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감수하고 지냈는데, 더러 예외가 있었던 것 같다. 제일 뚜렷한 기억은 3학년 때의 여선생님. 가정방문이라 하면 같은 방향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한 집씩 우루루 몰고 가면 방문받은 집 문앞에서 놀며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 잘 사는 집에는 다들 들어가 다과를 대접받기도 한다. 가까운 순서대로 하면 우리 집 들를 때가 되었는데 선생님은 내게 "너희 집은 나중에." 해서 저쪽 끝집까지 다 쫓아다녀야 했다. 내가 미워서 괄시하시는 건가, 속으로 억울한 생각도 드는데, 결국 애들 다 떨궈놓고 나서야 단둘이 우리 집으로 갔다.

어머니와 선생님이 마주 앉은 것을 보고, 나가 있으라 해서 멀리도 못 가고 마당에서 놀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가! 현관 모서리에서 살그머니 들여다보니 두 분이 손을 붙잡고 방성대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상하고 두려운 생각에 몰려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선생님도 전쟁 때 혼자 된 분이었고, 우리 집 사정을 보니 신세 비슷한 분 마주치게 될 것인지라, 다른 애들 데려오지 않기 위해 맨 뒤로 돌린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름대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어머니 만난 길에 고무적으로 들릴 만한 얘기를 애써 해주셨던 모양이다. 후에 두고두고 나를 쪽팔리게 했던 인사성 밝다는 얘기도 그 때 나온 것인 듯. 운동장에서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지나가는 데 마주쳐서는 선 자리에서 머릿수대로 세 번 꾸벅댔다는 얘기.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인사 하나만은 확실히 하는 아이라는 얘기가 왜 그리도 쪽팔렸는지...

 

일요일에 외갓집 가는 행사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친가 친척들은 차례, 제사 때 열심히들 찾아 줬다. 동성학교 교사로 있던 기돈 형님과 농협 근무하던 대규 형님은 그밖에도 자주 들렀는데, 교육 문제와 돈 문제 의논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남매들 사이에 오래갈 위계질서가 세워졌다. 큰형의 가부장적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된 큰형의 역할이 분명하기를 어머니가 원하신 결과인데, 그 때 나는 큰형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것이 큰형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 깨닫고 미안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작은형은 이 권위에 반항적이었고 나는 순종적이었지만, 둘에게는 큰 폐해가 없었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한 여자아이인 영아가 전면적으로 불편한 압박을 받았고, 공주할머니가 그 수호천사 역할을 맡으셨지만, 오빠들보다 큰 상처를 남겼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 어머니 친구분들도 많이 찾아오시게 되었다. 제일 익숙한 그룹은 전쟁 때 혼자 되신 지식여성들의 자칭 '과부클럽' 신신회였다. 앞서 말한 경이 어머니 고 선생님을 비롯해 열 분 가량 되었던 것 같은데, 모두 우리 남매에겐 이모님들처럼 친숙하게 되었다.

특별히 칼러풀한 분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어머니의 고종사촌 병희 아주머니였는데, 어머니보다 한 참 연하에 직업도 성우이신지라 그 화려함이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이화여전 동창인 초열 아주머니는 참 놀라운 분이셨다. 검소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어머니와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그 아주머니가 어찌 그렇게 단짝으로 지내셨는지는 근년 어머니에 대한 내 이해가 넓고 깊어지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 문제다. 해군 장교와 재혼한 초열 아주머니는 어머니께도 재혼을 권하셨던 모양이고, 그분 말씀만은 어머니도 귀담아 듣기는 하셨던 모양이니 우리 남매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을 가진 분이셨던 셈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