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

기사입력 2002-06-18 오전 10:15:14


  힌두스탄 타임스에 칼럼을 싣는 비르 상비(Vir Sanghvi) 씨는 인도 현 정부를 비판하는 대표적 언론인이다. 현 정부의 강경 힌두주의에 반대하며 국내의 종교 갈등 해소를 주창하는 그는 대 파키스탄 정책에서도 대립 완화를 촉구해 온 평화주의자다.
  
  그런 상비 씨가 지난 6월 2일자 칼럼에서는 뜻밖에 파키스탄과 핵전쟁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인도를 혼란에 몰아넣고 있는 파키스탄의 테러 지원을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방관하고 있는 이상 인도로서는 어떠한 자위수단이라도 가리지 않고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의 인도-파키스탄 사태가 미국의 아프간전쟁 실패에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명분 없는 전쟁에서 체면 없는 결과를 얻은 미국은 승리와 성공을 거짓으로 꾸미고 있으며, 이 거짓이 탄로나지 않도록 가려주는 것이 파키스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할 때문에 인도에 대한 파키스탄의 테러리즘을 미국이 또한 감싸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전쟁에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권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60년대에 건설한 새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이름에서 보듯 파키스탄은 이슬람권에서도 두드러지게 신앙을 국가의 기본원리로 내세우는 나라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웃 이슬람국가의 우호적 정권을 토벌하는 전쟁에 비이슬람국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으로 많은 국민의 눈에 비쳐질 수밖에 없었고, 파키스탄 정부는 선명성을 강조, 국민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도 방면의 긴장을 높일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인도인들은 파키스탄의 테러 지원이 현 사태의 직접 원인이라고 믿으며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를 비난한다. 테러세력을 보호하는 국가에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원리를 들먹이며 인도 정부는 ‘전쟁 불사’ 선언을 했다. 정부의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을 비판해 온 온건파도 이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최악의 위기상황을 넘긴 한 주일 뒤(6월 9일자)의 칼럼에서 상비 씨는 파키스탄의 테러 지원에 대해 미국이 엄격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목전의 위기가 완화된 것을 반가워했다. 그러면서도 세 가지 점에서 인도 스스로의 반성을 촉구했다.
  
  첫째, 전쟁의 위협을 통해 평화를 얻는 것은 바로 테러리스트들이 바라는 바, 전쟁의 위험을 늘리는 길이므로 다시 거듭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파키스탄의 직접 지원 없이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인도 내부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 셋째, 평화를 위한 파키스탄의 양보에 상응하는 조치를 인도가 취함으로써 세계인들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의 완화에 파키스탄 측의 노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상황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던 인도 측의 평화노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상황에 따라 의연한 대응을 주장하면서도 자기반성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상비 씨와 같은 논객의 존재가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의 위협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그의 지적을 미국인만이 아니라 온 세계인이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갈등은 1947년 두 나라가 독립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 분쟁의 초점이 되어 있는 카슈미르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것인지 국외자가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얽혀 있다. 분명한 것은 이로 인해 두 나라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적지 않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번 사태가 그 정도로 극한상황을 벗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두 나라가 전면전을 벌일 경우 그 피해는 두 나라에 국한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번 사태의 전개에 아프간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이 작용한 측면을 조심스럽게 살필 필요가 있다.
  
  1945년 이래 인류 최대의 악몽은 핵전쟁이었다. 반세기 냉전은 핵전쟁의 위험을 중심축으로 펼쳐졌다. 냉전은 핵전쟁의 위험을 한편으로는 키워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그 위험을 억제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냉전의 해소로 이 억제시스템의 상당부분이 마비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미국에 대한 억지력을 가진 나라가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ABM조약을 파기하고 억지력에서 완전히 초연한 위치를 굳히기 위해 미사일방어 시스템 구축을 시작했다. 소련이 사라진 이제 여기에 정면으로 맞설 상대는 없다. 그러면 이제 모든 나라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게 되고, 미국이 규정하는 식의 평화라도 지구 위에 자리잡게 되는 것일까?
  
  9.11 테러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한계를 일부 드러냈다. 어떤 체제 아래서도 불만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체제의 운용자가 어리석고 불공정할수록 불만세력의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체제운용자로서 미국의 자격과 능력에 부정적 시각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근본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인도 지식인들까지도 대 파키스탄 강경책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당장의 위기는 완화되었지만 해소된 것이 아니다. 인도도, 파키스탄도, 내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내부 문제를 호도하기 위해 이웃과의 오랜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정치인들에게 손쉬운 유혹이다. 미국이 핵무기의 확장과 사용에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으려는 나쁜 모범을 보이는 이상, 남아시아 지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핵전쟁의 잠재적 위험은 자라나기만 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작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마무리할 때부터 바라보고 있던 <조선망국사> 작업, 1년 넘게 쳐다보고만 있던 것을 이제 시작해야겠다. 한 가지 작업에 이만큼 공을 들여 보는 것은 <밖에서 본 한국사> 이후 처음인데, 시간이 갈수록 벅차게만 느껴진다.
지난 봄까지는 빡빡한 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1860년에서 1910년까지, 10년 단위로 하나씩 장을 만들고 하나하나의 장을 연표 형태로 풀어내는 틀을. 그런데 여름 동안 현실정치에 열을 올리는 동안 관련된 생각의 범위가 너무 넓어졌다. 이 생각을 치밀한 틀에 담아낸다는 것은 몇 달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몇 년이라도 자신없다.
지난 주 김 선생님께 이 작업 구상을 말씀드렸을 때 생각 외로 깊은 흥미를 보여주시며 몇 가지 지표를 짚어주신 끝에 딱 한 가지 주의를 주신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자네, 똑똑한 체하지 마."
똑똑한 체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지 않아도 절감하고 있는데 아주 오금을 박아주신 말씀이다. 세상 어느 일에나 그렇듯 이 일에 지성도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앞서서 밝혀줄 성질의 일이 아니다. 백여 년 전에도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 많았다. 나라 지키는 일을 지금 내가 소중히 여기는 어떤 일보다 소중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라는 무너졌다.
지성보다 중요한 것은 소속감이고, 거기서 번져나오는 고통이다. 백년 전에 있었던 일, 그럴싸한 설명 한 가닥 뽑아내면 크게 탓할 사람도 없고, 더러 탄복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밖에서 본 한국사>를 그런 가닥으로 썼고, 선생님이 아무리 노여워하시든, 나는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사 전체를 놓고 보는 데 더 절실한 자세를 취했다가는 읽는 이들이 숨넘어 갈 염려가 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다르다.
'망국'을 '국치'로 보는 관점은 넘어서야 한다. "나라의 부끄러움"이라니? 그 와중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주체로 "나라"라는 게 있었나? 고작 느끼는 게 "부끄러움" 정도인가?
비극이었다. 그것도 비장한 비극이 아니라 비참한 비극이었다. 백년 전의 조상들이 겪고 지나간 비극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해방, 4-19, 6월항쟁, 어떤 승리도 망국의 참혹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백년 전 이 사회를 덮친 참혹함은 그 자리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형태만 바꿔서.
그 참혹함이 어떤 것인지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다. 똑똑하다고 해서 잘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참혹함으로 받아들이고 괴로워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괴로움을 통해 그 참혹함이 어떤 것인지 힘껏 밝혀내면,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찾으러 나설 이들이 있겠지.

Posted by 문천
2009. 12. 19. 09:45

기훈이 다녀갈 때 안마에 중독되실까 걱정했는데 별 탈이 없으시다. 그 녀석이 주물러드리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내게도 같은 걸 요구하실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기훈이가 주물러드리는 걸 옆에서 보고 있던 내게 "야, 넌 이렇게 좀 사람이 부드러울 수 없냐?" 주문까지 하셨었다. 진짜로 그 맛을 잊지 않고 내게 계속 요구하셨다면 사흘 연속 출근이 어려웠을 거다. 내가 몸살이 날 테니까.

그래도 틈만 나면 양손을 마주잡고 주무르시는 건 기훈이가 가르쳐드린 것을 잊지 않으신 것 같다. 뻣뻣하시던 손가락이 며칠 사이에 부쩍 풀리셨다. 좀 있으면 숟가락질은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마비가 더 심하신 왼손 두 군데 맥점에 기훈이가 고약을 바르고 반창고로 덮어놓았는데, 하루 지난 뒤 내가 가리키며 누가 붙여드린 거냐고 물었더니 "스님이 붙여주셨어." 하시곤 덧붙이신다. "참 좋은 스님이야. 꼭 너 같은 스님." 맞다. 기훈이가 아직 총각일 때도 어머니는 훌륭한 스님깜이다, 도인이다, 하며 무척 좋아하셨다. 바로 전날 다녀간 기훈이를 조카로, 그리고 수양사위로 분명히 인식하셨지만, 하루 지난 기억에는 "좋은 스님"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도 괜찮은 스님깜으로 지목하셨었다. 두 번째 파경 보고를 들으시곤 거의 희희낙락하시며 "네 팔자가 아무래도 스님 팔잔가보다. 좀 늙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머리 깎지 않으련?" 하시던 것이 어제 일 같다.)

음식을 절제하시는 능력이 확고해지셨다. 죽을 딱 한두 숟갈 남기시는 일이 몇 번 있었고, 깨끗이 비우실 때도 더 내놓으라고 조르시는 일이 없다. 빈 식판을 치우려면 더 먹게 놔두라고 하실 때가 이따금 있지만 농담이 분명하시다. 과자도 과일도 지나치게 드실까봐 조심스러운 일이 이제 없어졌다. 요즘은 딸기를 많이 즐기시는데, 얼마 전까지는 다 없어질 때까지 일로 용맹정진이시다가, 어느 날 한두 쪽 남았을 때 "너도 먹어라." 하고 넘겨주시더니, 요 일간에는 몇 쪽 드실 때마다 나도 한 쪽씩 먹어야 하게 되었다.

긴 방의 짧은 끝벽을 등지고 어머니와 또 한 분 할머니가 나란히 누워계신다. 어머니와 동연배이신데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대범하신 인상이다. 그 자제들이 간식 공급에 아주 열심인데, 어머니가 딸기 좋아하시는 것을 그분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분이 식후에 늘 딸기를 드시는데, 여사님들이 조금씩 나눠서 어머니께 권하니까 오물오물 잘 받아 드시더라고. 틀니는 며칠 전에 넣어드리려다가 실패했는데, 틀니 없이 과일을 못 드시리라 생각하고 즙만 갈아드렸던 것이, 알고 보니 딸기, 바나나 같이 육질이 부드러운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께 고마운 마음이 있어 드나들 때도 인사를 깍듯이 드리는데 대범하게 잘 받아주신다. 엊그제 점심 후 딸기 대접이 없기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내가 가져온 딸기만 있었다. 어쩌다 그 댁 공급이 잘 안 된 모양이라 보은을 위한 물실호기! 딸기를 씻어 어머니보다 먼저 그분께 갖다드렸더니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씨익 웃으신다. 어머니를 돌아보니 끄덕끄덕하신다. 그러고 보니 그날부터였나? 딸기 잡술 때 "너도 먹어라." 말씀이 잦아지신 것이.

식사 후엔 과자를 두어 쪽 드린 다음 딸기나 과일즙을 올리는 것이 후식의 규범이 되었는데, 오늘 저녁 마침 큰형이 두고 간 강정과 내가 사둔 웨하스가 다 떨어져 있었다. 식사 후에 딸기를 먹여 드린 다음 앉았으려니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어머니, 저 밑에 다녀오는 동안 쉬고 계세요."

"밑에? 뭐하러?"

"어머니 과자 구하러요."

"과자? 안 먹어도 된다."

"어머니가 식후에 과자 한 쪽 못 드시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하! 그런 호강 나 필요 없다."

"어머니 호강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들 체면을 생각해 주세요. 아들이 셋이나 있으면서 어머니 과자도 챙겨드리지 못한다면 남들이 저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구나. 그럼 다녀오너라."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과자 진열대를 훑어보는데 웨하스보다 먼저 '홈런볼'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먹어본 건데, 요것도 우물우물 괜찮을 것 같다. 웨하스와 함께 사서 올라와 새 품목을 먼저 맛보여 드렸는데, 우물우물 꿀떡은 하셨지만 별로 감동의 기색이 없으시다. 이어 웨하스를 까 드리니 이건 반갑게 받아 무신다. 그런데 웨하스 두 쪽을 드신 뒤 홈런볼 봉지에 눈길을 꽂으시며 "저건 뭐냐?" "조금 전 한 알 드신 건데 더 드셔 보시겠어요?" "그러자꾸나." 그런데 이번엔 초콜렛 맛을 음미하는 기색이 역력하시더니 꿀떡 하신 다음 "더!" 하신다. 여러 날 만에 듣는 "더!" 소리가 반갑기까지 하다. 요즘은 식사 중 숟갈이 좀 늦어져도 전혀 재촉을 않으시는데. 홈런볼 세 알에 저렇게 행복해 하실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효자의 길은 참 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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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