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8. 10:18
 

어제 저녁, 공항으로 나가기 전에 병원에 들렀다. 여사님들께 오늘은 형이 와서 좀 늦게까지 앉아 있을 거라고 양해를 청하고 (아무래도 8시 넘어까지 있으려면 여사님들 휴식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좀 미안하다.) 식사 후에 가급적 간식을 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우리가 와서 뇌물을 쓸 여지를 남겨두도록.

나가기 전에 어머니께 "어머니, 기봉이 보고 싶으시죠? 제가 가서 데려올께요." 하니 "눈이 뗑구래지셔서 "기봉이? 기봉이 미국 있는데?" "어디 있은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는데 제가 안 데려올 수 있나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가는 나를 붙잡지는 않으신다.

8시 10분에 형을 끌고 병실에 들어섰다. 형 얼굴을 보자 입꼬리가 척 귓가에 가 걸리신다. 한 시간 내내 너무 아까워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기도 힘드신다. 이따금 내게 눈길을 던지실 때는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데려올 줄 알다니, 저 녀석도 쓸모가 아주 없진 않군.' 하는 표정이 읽힌다.

그런데 간간이 형을 쩔쩔매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 기봉아..." 하며 잘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손을 뻗쳐 얼굴까지 만져보고 하시다가, 느닷없이 형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며 "우리 봉아 하고 참 똑같이 생기셨수... 어쩜...", 나를 돌아보시며 "그렇지? 참 잘 생기셨지?", 다시 형을 보며 "정말 우리 기봉이를 보는 거 같아요." 정색으로 말씀하신다. 형은 처음엔 "어머니, 저 기봉이 맞아요." 하고 정체성 확인에 급급했다. "에이, 우리 기봉이는 미국에 있다구요." 하시면 "미국에서 이제 막 비행기 타고 왔다니까요." 그러면 특별한 검증 과정도 없이 또 아들로 대하신다. 그러다가 한 5분 후에 또 "정말 기봉이 하고 똑같으시네. 생긴 것만이 아니라..." 거듭되니까 반응을 형도 조금씩 바꿔가며 어머니의 반응을 관찰한다. 처음엔 한 5분마다 한 번씩 의혹을 제기하시던 것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는 좀 뜸해졌다.

요샌 하도 능청스럽게 농담도 잘 하시니까 나도 판단하기가 힘들다. 이 사람이 기봉이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어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모처럼 보는 기봉이 맛을 더 알뜰하게 누리시느라고 장난을 치시는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돈을 꼭 걸 일이라면 뒷쪽에 끌린다.

완전히 잔치집 분위기가 됐다. 여사님 세 분 중 한 분은 새벽근무를 위해 휴식에 들어가 있을 시간인데, 모두 모자 상봉 장면을 구경하며 축하해 주기 바쁘다. 매주 두어 번씩 전화를 바꿔주던 그 주인공, 사진만 보여도, 목소리만 들어도, 얘기만 나와도 어머니 표정이 흐뭇해지시던 그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드디어 나타났으니. 맨날 호통만 듣는 천덕꾸러기 셋째 녀석과 뭐가 어떻게 다를까? 어머니 자리에서 비스듬히 건너편 자리에 새로 들어오신 할머니 한 분도 (이 방에선 모처럼 대화 능력이 있는 분) 기분좋게 한 마디씩 거들어주신다.

아홉 시 가까이 되어 내가 먼저 나와 밖에서 기다렸다. 20분쯤 지나 형이 나왔고, 나오면서 방 안을 보니 어머니는 여사님들에게 둘러싸여 아직도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형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여사님들이 육탄작전에 나선 것을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다.

형을 태우고 병원을 떠나면서 물었다. "어때? 내 보고가 꽤 정확했지?" 끄덕이며 고맙다고 한다. 그 보고 아니었으면 엄청 놀랐을 게다. 전번 다녀간 것이 작년 4월 초였나? 그래도 아직 기력이 있으실 때였고 튜브피딩으로 들어가시기 전이었지만, 지금의 명민하고 활달하신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그 사이에 힘든 고비를 넘기시고 오히려 더 쌩쌩한 모습을 보이고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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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