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5. 22:57
무척 바쁠 것 같네요. LA 떠나기 전에 할 일, 비엣남 계획, 게다가 학위논문 심사도 진행 중이죠? 그것도 모잘라 동아시아방송 구상까지... 나 같은 모노타스크 모델로는 상상하기만도 숨이 가쁩니다.
오늘 편지는 편안히 훑어보세요. <해방일기> 이후의 일과 생활에 대한 생각이 자꾸 퍼져나가서 한 차례 정리하고 싶은데, 병한님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만 빌립니다. 병한님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접어놓고, 내 얘기만 할 겁니다.
제일 큰 결정은 한국현대사에 말뚝 박기로 한 겁니다. '중국사 전공'은 이제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그거 내걸어 어디 취직할 일도 없고... 사마천도 현대사 연구자였잖아?! 하는 1월 23일 포스팅이 있었죠. 동아시아의 전통사학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표준이었다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어요. 근대적 제도에서 벗어난 내 위치를 활용해서 전통사학의 자세에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나고요. 다른 사회, 다른 시대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활용하더라도 한국현대사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일을 한국현대사에 말뚝 박는다면 거처는 한국에 말뚝 박게 되겠죠. 아내도 국적까지 취득하고 보니 그냥 한국사람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눈치고요.
할 일에 대해서도 매듭 지을 생각이 줄어들었고요. <해방일기> 끝내면 해방되어 원래 동네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구상을 시작했는데, 이제 "실록"이고 "사론"이고 얼마 시간 들여서 얼마 분량 일을 하겠다는 한계선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일 자체의 성질에 따라 적합한 크기로 쪼개 적당한 방법으로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방법상의 '해방'을 맞은 셈입니다.
"사론" 구상은 지키고 있는데, 40년이나 60년 기간을 단일한 포맷으로 처리한다는 생각은 바뀌고 있어요. 몇 개의 시기로 나눠 독립적인 책으로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대기적 서술 구조는 지키려고 합니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려면 연대기적 서술이 역시 좋을 것 같아요. 서론과 결론의 개관 외에는 사건과 현상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거죠.
앞으로 몇 달 동안 노력할 일은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접촉방법을 찾는 겁니다. 혼자 공부하는 버릇이 오래되었는데, 바꿔야겠어요. 아무 책임감 없이 재미로만 공부하던 시절의 버릇인데, 이제 내 공부의 쓸모를 찾는 단계에서는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연대' 얘기하니 유시민 선생 생각이 나네요. 이번 낸 책에서 일, 놀이, 사랑과 함께 연대를 인생의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그렇죠. 그 친구랑도 연대를 해야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친구도 역시 한국현대사 다루는 책을 계획하고 있더군요. 우선 한 권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한 권 만들고 나서 현대사에 관심 끌 것 같지가 않아요. 그 친구랑은 작업 얘기를 많이든 적게든 계속하게 되겠죠.
현대사 전공자들 세미나에라도 들이밀 데 없을까 해서 정병준, 서중석 두 분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네요. 서 선생님은 "요즘 젊은 친구들 나랑도 잘 안 놀아줘요." 하며 좀 서운한 기색까지.
후지이 선생에게 전화해서 오는 수요일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 양반 같으면 아웃사이더 내지 주변인의 입장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학술-교육 제도에 덜 매인 편이기 때문에 그런 '연대'의 필요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봅니다. 끼어들 만한 세미나가 없으면 함께 하나 만들어보자고 청할지...
서중석 선생님은 대학원 강의를 맡아보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말씀도 해주시는데, 얼핏 그럴싸하게 생각되는 점도 있었지만 차분히 생각하니 내게 적당치 않은 길 같아요.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동료지, 제자가 아니잖아요. 병한님도 혹시 내게서 취하는 게 좀 있다 해서 행여 날 꼰대 취급하지 말아요. 당신은 모처럼 얻은 내 동료니까.
<해방일기> 뒤의 일은 가급적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궤도에 접근하려 합니다. 해 바뀌면서 원고 생산 시작하는 정도로 내다보고 있어요. 지금 생각에는 (1)'해방공간'을 첫 작업단위로 삼아 시동을 건 후 (2) '건국-전쟁기', (3) '자유당-민주당 체제', (4) '군사정권기'로 찍어 나가게 되지 않을까... 각 단위의 분량과 체제는 그 단위에 적합하게 각각 정하는 것으로 하고요.
있는 생각 가볍게 털어놓는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가 생각이 자꾸 퍼져나가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네요. 아직 갈피가 덜 잡힌 걸 확인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잘 지내세요~
김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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